
하늘의 사냥개
프랜시스 톰슨, 1893년
나는 그분에게서 도망쳤다. 밤과 낮의 그늘 속으로,
나는 그분에게서 도망쳤다. 세월의 아치 저 아래로,
나는 그분에게서 도망쳤다. 내 마음의 미로 속으로.
그리고 눈물과 흘러가는 웃음 속에서
그를 피해 숨어있었다.
온갖 가능성이 활짝 열려진 희망의 나래를 품고
힘차게 달려와, 나래를 펴고, 뛰어들었다.
그러다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공포의 심연 속으로 떨어지고,
거기에서는 문득 힘찬 발자국 소리가 나를 끊임없이 뒤쫓아오는 것을 들었다.
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를 유지한 채,
그 발자국 소리는 의도적으로 내게 다가와 절박한 궁지로 나를 몰아세웠다.
그때 그 발자국 소리보다 더욱 나를 꼼짝못하게 만드는 음성이 울려났다.
‘나를 떠나가는 자는 피하여 숨을 곳을 찾을 수 없으리라.’
나는 법을 어기고서도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는 현명한 사람답게,
빠알간 커튼이 드리워지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자선으로 수놓아졌으며
수많은 격자로 나누어진 마음의 창가에 기대어,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변론을 펼쳤다.
(왜냐하면, 나를 뒤쫓아오는 그분의 사랑을 알았지만,
그분를 모시고 나면
그분 이외의 다른 것은 아무 것도 가질 수 없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조그마한 창 하나라도 열리기만 하면,
그분은 질풍처럼 내 마음의 창문을 몰아칠 것이다.
두려움을 비켜지나갈 줄 모르고, 사랑은 끝까지 나를 추적한다.
이 세상의 경계를 벗어난 곳에 나는 몸을 숨겼다.
별들이 지나다니는 황금길에 혹시나 숨을 곳이 있나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피난처를 찾아다녔지만,
감미로운 별천지와 어스름한 은빛의 월궁(月宮)으로
나의 마음은 오히려 벌레에게 먹힌 듯 했다.
여명이여! 발걸음을 멈추라, 어두운 밤이여! 속히 서둘러 와서
이 두려운 사랑으로부터
너의 갓 피어난 밤하늘의 꽃망울로 나를 숨겨다오!
그분이 나를 알아채지 못하도록 너의 희미한 밤의 베일로 나를 감싸 다오!
그분을 받들어 섬기는 종들에게 나를 숨겨달라 유혹했지만,
그들의 충성심은 나를 배반하였도다.
그분을 신뢰하는 마음은 나에 대한 변덕스러움으로 나타나고,
그들의 진실됨은 나에게 배신감을, 그들의 허물은 그분께 충성심을 보이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을 붙들고 빨리 도망가자고 부탁해 보기도 하였고,
흩날리는 바람 갈귀에 매달려 달아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하여도
맑은 하늘의 길고도 드넓은 공간을 따라잡지는 못하였고,
마치 천둥이 내리치듯이
그분의 하늘전차를 쫓아가보려 하였지만
그들의 발길질이 닿는 곳마다 허둥대는 땀방울만 맺힐 뿐이었다.
두려움을 비켜지나갈 줄 모르고, 사랑은 끝까지 나를 추적한다.
여전히 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를 유지한 채,
발자국 소리가 나를 따라와서는
의도적으로 내게 접근하여 절박한 궁지로 나를 몰아세웠다.
‘나를 피난처로 삼지 않는 자에게 마련된 안식처가 이 세상에 없도다.’
선남선녀의 얼굴 속에서
더 이상은 내가 얻고자 하는 바를 찾지 못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앙증맞은 어린아이의 눈빛 속에는
내가 찾고자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 것만 같았다.
최소한, 어린 아이들은 참으로 나의 편인 듯 싶었다!
어린 아이들에게서 무엇인가를 찾아보고자 간절한 마음으로 살펴보려는 순간,
아이들의 해맑은 눈빛이 갑자기 공평무사하게 자라나면서
사리가 분명한 말을 하고서는
아이들의 천사가 그들의 머리카락을 붙들어 나로부터 낚아채어갔다.
‘이리로 오라, 너 자연의 아들 딸들이여! (내가 말하였다)
너의 자상한 우정을 내게 베풀어다오.
자연의 품 속에 입맞추고 싶구나.
어머니 大地의 흩날리는 머리채를
희롱하며
바람으로 둘러싸인 대지의 품 속에서
잔치를 베풀어
마음껏 너를 끌어안고 싶다.
대지의 검푸른 창궁(蒼穹) 아래에서
아침햇살에 찬란하게 빛나는
너의 그 순결한 꽃잔을 들어
기쁜 마음으로 취하고 싶구나.’
그리고 그 소원은 이루어졌다.
자연의 자녀들과 감미로운 교제를 즐기는 한 나는
자연의 신비(神秘)를 열어제친 사람이었다.
제멋대로만 하려드는 하늘의 얼굴 속에서 나는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는 갖가지 의미를 알게 되었고,
어떻게 구름이 일어나
거친 바다 물결을 철렁이게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만상(萬象)의 생멸(生滅)과
차고(盈) 이지러지는(衰) 이치를 깨닫게 되자,
나의 희노애락에 맞추어 만상을 이끌어내게 되고,
삶의 즐거움과 고독을 깨닫게 되었다.
밤이 되어 내 몸이 피곤해지면
희미한 불빛을 켜서
한 낮의 죽은 성물들 주위를 비추었다.
여명의 눈동자가 밝아올 때가 되면 입가에는 웃음이 스쳐갔다.
천지가 변화하는 것과 보조를 맞추어 살아가니,
하늘과 내가 함께 슬픔을 나눌 수 있었다.
그 감미로운 눈물은 지긋지긋한 인생살이에서 소금과도 같았고,
서녘 하늘에 고동치는 저무는 해의 심장 소리에 맞춰
나의 가슴도 함께 맥박치고,
서로가 따뜻한 열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내 인생의 고뇌가 다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우중충한 잿빛 하늘 위로 내 눈물을 흘려보냈지만 헛된 일이었다.
그렇다! 왜냐하면, 자연과 나는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사물과 나는 제 각각의 언어로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소리를 내어 말을 건네어도
자연은 침묵과 몸짓을 통해 내게 손짓을 건넬 뿐이었다.
가련한 계모와 같은 자연은 내 갈증을 시원스럽게 풀어주지 못하였다.
자연이 나를 낳았노라고 주장을 할라치면
저 하늘의 가슴을 두른 푸른 베일을 벗고
부드러운 젖가슴을 내게 보여 달라.
나의 목마른 입술 위에
한번이라도 너의 젖을 덜어뜨려 이 갈증을 가시게 하라.
추적의 발걸음이 더욱 가까이 다가오는구나.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를 유지한 채,
의도적으로 내게 접근하여 절박한 궁지로 나를 몰아세웠다.
요란한 발자국 소리 저 너머로부터
날카로운 음성이 또렷이 들리누나.
‘보라! 나로 인하여 만족을 얻지 못하는 자가 누릴 만족은 없도다.’
당신의 사랑의 손길로 나를 힘껏 치시기를 벌거벗은 몸으로 기다리나이다!
내가 추구하던 것을 당신은 갈기갈기 찍어놓으셨나이다.
나로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게 하시오니,
이제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나이다.
마치 한바탕 꿈을 꾸다 제정신이 든 것 같나이다.
찬찬히 주위를 살피니, 잠자던 중에 그만 머리가 잘리운 사람을 보았도다.
젊은 혈기가 넘친 나머지 경솔하게도
시간의 기둥을 흔들어,
내 생명을 허비하여, 누더기처럼 만들었구나.
세월은 흘러가고, 남겨진 쓰레기더미 가운데 나 홀로 서 있노라.
난도질당한 내 청춘은 그 속에서 죽어 있구나.
내 인생의 나날은 쩍쩍 금이 간 채 연기 속에 사라져버리고,
마치 아침 햇살에 시냇물이 반짝거리는 것처럼 일순간에 사라졌도다.
아아, 꿈꾸는 자에게 이제는 꿈도 쓸모없이 되었고,
루트를 켜는 자도 줄 끊어진 루트 앞에 맥없이 앉아있구나.
감미로운 선율 속에 상상의 나래를 펴고,
온 땅을 마치 손목에 걸린 장신구처럼 이리저리 뒤흔들었던 공상도
아무 쓸모없구나. 온 땅을 아우르기에 네 현(絃)은 너무나도 미약하니
내게 남은 것이라고는 심연을 알 수 없는 슬픔 뿐이구나.
아, 당신의 사랑은 정녕 잡초,
다른 꽃들이 자라나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는,
하지만 시들지 아니하는 잡초이옵니까?
오오! 진정 그러하옵니까,
영원하신 창조주시여!
오! 당신은 나무를 태워 숯으로 만든 후에야 그것으로 그림을 그리시는 분이십니까?
나의 발랄함은 먼저 속에 파묻혀 버리고 말았나이다.
이제 제 마음은 폐천(廢泉)과 같아서,
똠방똠방 떨어지는 눈물로 썩은 냄새가 나며,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음울한 생각만 떠올라
스스로 한숨을 지을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나이다.
지금 이 꼬락서니로 무슨 일을 도모하리이까?
속알갱이가 이토록 쓰니 껍질이야 오죽하리이까?
시간이라는 희미한 안개 가운데에서 흐트러진 것을 헤아려 본다.
하지만 숨겨진 영원의 성채(城砦)로부터 들려오는
나팔소리가 가끔씩 들려오도다.
그 소리 저 혼돈의 안개를 흔들고,
얼핏 보이는 성채의 꼭대기 주변에서 다시 천천히 들려오는구나.
하지만 이는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불러들이는 소리가 아니다.
처음에는 어둑어둑한 자색(紫色)의 겉옷을 걸치고
사이프레스 나무로 왕관을 쓰신 분을 보았노라.
그분의 이름과 나팔소리가 뜻하는 바를 알도다.
당신께서 거두어들일 곡식을 위해,
사람의 마음이든 생명이든 가리지 않고,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죽음의 거름으로
당신의 벌판을 시비(施肥)하여야만 하는 것입니까?
이제 저 끈질긴 추적의 발자국 소리가
바로 코 앞에서 들리는구나.
터질 것 같은 바다의 용솟음처럼 내 주변에서 그 목소리 들리누나.
‘네 땅이 그토록 망가졌느냐?
그렇게 산산조각 부서졌단 말이냐 ?
보라, 네가 나로부터 도망치니, 만물이 네게서 도망치느니라!
알지도 못하면서, 헛된 일로 애를 쓰는 가련한 인생아,
왜 네게 사랑을 베풀 존재를 찾아 헤매는 것인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를 소중히 여기는 이 나 외에 없느니라.’(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인간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한 공적을 쌓아야 하는 법,
네가 사랑을 받을만한 일을 한 적이 있느냐?
흙으로 빚은 사람 중에서도 가장 거무칙칙한 흙덩이인 네가?
가엾도다, 너는 모르고 있노라,
네가 아무런 사랑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비천하기 짝이 없는 너를 사랑할 이 누구랴,
나 외에, 오직 나 외에 누가 있단 말이냐?
내가 네게서 취하였던 것은, (빼앗았던 것이 아니라)
너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네가 내 품에서 그것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였노라.
다만 네 어린애 같은 착각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으로 여겼던 모든 것을 너를 위해 내 집에 간수해 두었노라.
이제 일어나 내 손을 꼭 잡고 가자꾸나.‘
난폭한 발자국 소리 이제 더 이상 들리지 않는구나.
결국, 나를 감싸던 우울한 그림자는
손을 내밀어 나를 어루만지던 그분 손길의 투영이었던가?
‘오, 눈이 먼채 분별없이 날뛰는 연약한 자여,
네가 그토록 바라고 찾던 이 바로 나로다!
사랑이 네게서 쫓겨날 때, 나를 쫓아낸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