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정체성의 위기는 현대인에게 항상 붙어다니는 불가피한 질문, 곧 '나는 누구인가?' 라는 전기(傳記)의 문제로 요약될 수 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대답으로 세뇌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 대답들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어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동경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무엇인지를 설명 해 주지 못한다. 즉 우리 개개인이 독특하며, 전적으로 개별적인 존재이며 따라서 인간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계급이라는 카테고리로, 프로이트 추종자들은 어린 시절의 노이로제로, 여성 해방론자들은 성(gender)으로, 각종 시사 해설자들은 세대를 상징하는 어휘로 - '침묵의 세대, '베이비 부머', X세대' 등- 우리를 해석한다. 모두가 이런 식이다.
각각의 경우 그 관점이 상대적으로 옳거나 틀릴 수 있으며, 도움이 되거나 되지 않을 수도 있으나, 가장 깊은 차원의 질문 -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살아 있는가? - 은 다루지 못한다. 그저 일반론적인 카테고리들은 우리를 개별적인 인간으로 다룰 수 없다. 기껏해야 우리의 개별성은 일반성 속에서 상실되어 버릴 뿐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개별성이 부정되어 버린다. 그런 카테고리들은 우리를 프로크루스테스 침대(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는 사람을 쇠 침대에 눕혀 그보다 긴 사람은 다리를 자르고 짧은 사람은 잡아늘여 죽였다-역주)에 강제로 눕힌 채 맞지 않는 부분은 가차없이 잘라 버린다. 우리의 개성을 깎아 내어 대량 생산된 틀에 끼워 맞추는 것이다.
인간의 개별성을 일반적인 용어로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인간을 다양한 형태의 '속박된 존재'로 전락시킨다.
이런 시도들은 명백하게 잘못되었다. 우리는 결국 카테고리의 '죄소'가 되는데, 그것이 성이든, 계급이든, 인종이든, 세대이든, 조상이든 상관없다. 우리의 개별성은 무시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정반대되는 입장이 있는데 그것도 마찬가지로 분명한 약점을 안고 있다. 그것은 인간을 다양한 형태의 '용기 있는 존재'로 설명 하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자유- 어떤 이들은 끔찍한 자유라고 여기는- 를 갖고 있다. 우리는 용기와 의지력만 있다면 우리가 원하는 무엇이든지 도리 수 있다. 우리는 사실상 "우리 자신을 발명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론의 여지 없이, '용기 내기'의 가장 위험하고도 매력적인 모습은 프리드리히 니체와 그의 제자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신은 죽었다." 따라서 의미는 발견될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또한 자연법의 '허구성'을 신봉하는 자들이 주장하듯, 우리는 우주에서 의미를 읽어 낼수 없다는 것이다. 그대신 우리는 의미없이 세게의 심연(abyss)에서 출발하여 오직 의지의 힘으로 무(無)에서 우리 자신의 의미를 창조해 낸다. 그것이 超人)의 용기이다.
서구의 중산층 사회에서는 '정체성'이 가장 중요한 개인적 관심사가 되었다. '정체성 확립'을 헌신적으로 추구하는 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몸에 신경을 쓴다. 그래서 요리책, 몸매 가꾸기, 식이요법, 건강 식품, 약물 복용, 성형 수술, 피부 손질, 운동 기구, 온갖 유의 교본들에 정신이 팔려 있다.
이러한 자기 건설은 끝이 없으며 값비싼 대가를 요구한다. 공중 보건 및 공공 안전에 대한 열정과 금연 운동이 보여 주듯이 정치마저도 다른 수단에 의한 일종의 몸매 가꾸기가 되어 버린다.
결국 세속적인 견해로 보면 몸은 우리가 가진 전부이고 우리 존재의 총체인 셈이다.
현실은 세상에 있는 모든 의지들을 동원하더라도 우리가 되고자 싶어하는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의지력의 문제와 관련시키자면, 의지는 흔하지만 능력은 드물다고 말할 수 있다. 진정한 정체성은 스스로 건설하는 것이기보다는 항상 사회적으로 부여받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방법을 고안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용기 내기'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속박된 존재'가 되는 것이 우리의 개별성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개별성은 모두 '용기 있는 존재'가 되는 것에 달려 있다는 주장 역시 비현실적인 것이다.
이제 세 번째 관점은, 개별성을 '체질화된 존재'의 문제로 보는 입장이다. 우리는 출생하는 순간부터 최종적인 성품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자신의 인생 이야기가 쓰인 대본을 갖고 시작한다. 이 견해는 종종 '도토리 이론' (acorn theory, 도토리는 상수리 나무라는 본질을 이미 품고 있는 씨앗이다)이라 불리는데, 이는 뉴 에이지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우리 각자는 영혼뿐 아니라 영혼의 동반자도 함께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삶의 비밀은 우리의 인생 이야기를 '읽어 내는' 것이고, 그 보호의 영이 활동하는 것을 감지하여 그 영을 자유롭게 풀어 주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만 도토리는 나무가 되고, 우리 각자는 우리의 개인적인 운명에 따라 성장하게 된다.
이 입장은 우리가 개별적으로 누구인가 하는 점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적어도 개별성만은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운명이나 사전에 결정되어 있다는 말들은 이 관점 역시 부적함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입자은 각각 어느 저도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모두 '속박되어' 있다. 수많은 세력들이 우리를 형성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바로 그만큼 우리는 '용기 있는 존재' 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과거의 노예나 환경의 희생자가 되지 않고 진정한 자아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용기내기'는 어느 정도까지는 '체질화된 존재'의 궤도에 합류하여 함께 진행될 것이다.
이 세 가지 접근의 중요성과 약점들으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은 누구나 - 특히 자신의 독특성의 힘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 소명에 담긴 놀라운 진리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들이 약점을 드러내고 잘못된 방향으로 치닫는 곳에서 소명은 그 나름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체질화된 존재' 이기보다는 '부름받은' 자들이다. 우리를 부르시는 분은 우리를 개개인으로 보고 우리에게 개별적으로 말한다. 즉 우리를 독특하고, 특별하며, 고귀하고, 중요한, 아울러 자유로이 반응하는 존재로 대한다.
우리를 부르시는 분은 무한하고 인격적딘 존재로서,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올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인격인 존재다. 그러므로 부름받은 우리는 개개인으로서 거명되었고, 그분과의 관계로 초대받은 것이다.
인생을 업(業,Karma)으로 보는 것이나, 당신의 장래는 바꿀 수 없게끔 이미 '쓰여져 있다'는 믿음은 소명의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 인생을 숙명론적으로 보고 사전에 결정된 것으로 여기는 '체질화된 존재'의 개념과는 대조적으로 '부름받은 존재'는 자유와 미래를 강조한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단지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되돌아가서' 거기에 훗날 나의 운명이 어덯게 암시되고 나타나는지를 살피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그분의 부르심에 반응할 때 하나님은 루리를 앞으로 인도해 가신다. 우리는 그분의 소명을 좇음으로써 창조 때 계획되어 있었던 체질화된 존재가 된다. 또한 우리는 앞으로 우리가 딜 존재, 그것도 부름받은 백성으로서 재창조될 때에만 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정체성은 앉을 자리나 쉴 베개처럼 이생에서 고정되어 있거나 최종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불환전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응답하고 그분의 부르심을 좇을 때에만 진정한 자아가 되고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은 정체성 문제에 관해 완전히 거꾸로 생각하고 있는 셈이다.
즉 하나님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않으면서 자신에 대해서는 확신하는 체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이와 정반대이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