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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관람 후기(네타 有,스압)

김준환 |2009.05.05 02:16
조회 378 |추천 0

 

영화의 제목은 '박쥐'지만 시작부분에서 성격이 조금 다른 부제목을 제목으로 삼아 영화는 시작된다.

그런 부제목이지만 그 부제 자체가 박찬욱 감독이 이야기 하고 싶은 방향을 가장 짧고 굵게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thirst -갈증

 

 

 

 

1. 순교? 자살?

영화초기에서 울분에 넘쳐 상현은 이야기 한다. 단지 좋은일을 하기 위해 연구소를 찾아 갔을 뿐인데
이러한 몸이 되었다. 대체 내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 조금 희귀한 병에 걸린 것 으로 치면 안되겠는가?

과연 그가 잘못이 없는가? 작품 초기에 상현은 순교를 위해 노 신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브바이러스의 해결책을 위해 임상연구를
하는 엠마누엘 연구소(맞나?)를 찾는다. 그때 원장은 이야기 한다. "자신은 자살과 순교의 차이를 구분하기 힘들다고, 많은 사람들이    순교라고 쓰고선 자살을 생각한다, 당신은 어떤 마음가짐인가?" 라고 묻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허락하소서.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처럼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
사지가 절단된 환자와 같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하시고,
두뺨을 떼어내어 그 위로 눈물이 흐를 수 없도록 하시고,
어깨와 등뼈가 굽어져 어떤 짐도 질 수 없게 하소서.
머리에 종양이 든 환자처럼 올바른 지력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영원히 순결에 바쳐진 부분을 능욕하여 어떤 자부심도 갖지 못하게 하시며,
저를 치욕 속에 있게 하소서.
아무로 저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게 하시고,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만이 저를 불쌍히 여기도록 하소서.

 

극한의 자아포기, 이것이 그를 붙들고 있는 간절한 바람이다. 수 많은 번뇌와 이것은 죽음이자 초연의 안식이다.                               온전하기 위해 모든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 창조와 존재의 근원성마저 흔들어놓는 그의 기도이다.                                                  이러한 기도문이 실제로 카톨릭에 존재하는지는 의문일 따름이다.(그렇지 않겠지만)

진정한 순교란, 자신의 행동에서 새로운 가치 부여가 가능한 행동
참으로 모순적이지 않은가? 창세초의 이브도 존재하지 않을 적, 원죄가 생기기 이전의 아담을 꿈꾸던 상현이 뱀의 힘으로 새 생명을    얻는다. 무언가의 극단에 임한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억누른다는 것이고 이러한 행동들이 자기부정에까지 이르게 된 사람을 과연 성자라 칭할 수 있는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치도 않을 뿐더러 스스로에 대한,존재에 대한 거짓말을 하고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상현은 애초부터 진실하게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완벽주의, 절대적인 신실은 반대로 이야기 하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행위마저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가장 큰 실수

그가 태주를 살린것 또한 자신내면의 생에 대한 애착과 쾌락의 대변에 지나지 않는다.
태주의 여러가지 행동들은 그의 억눌린 자아를 대변한 것.. 후에 그가 광기에 넘치는 태주를 훈계하면서 이야기 하는                        '너는 내게 남은 마지막'이라는 말은 그 이야기를 대신한다.

만약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살리지 말았어야 했다. '당신을 이 지옥에서 구해줄께요'라고 했지만
그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내리는 구원은 더 큰 지옥속에서 살 수 밖에 없게끔 만든 다는 것을
그가 초기에 원했던 '구원'은 모든 것에 대한 부정으로써 순수의 근원에 가까히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은 언제나 피드백을 요구한다. 피를 얻지 못하면 허물어져내리는 몸, 완벽한 신체속에
치명적인 한계를 가진 영원은 그가 원했던 구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어둠속으로 '부활'시켰다.

한 순간이라도 바다를 보기 위한 노 신부....욕망은 인간을 얼마나 처절하게 하는가..
그러한 노 신부의 가슴에 나이프를 꽂아 안식으로 인도한다. 이러한 행동은 상현의 그나마 남은
자아, 신부님에게의 고마움의 대변이다. 해방에 대한 댓가는 죄를 반복하며 합리화속에 살아가거나
자신을 포기 하는 방법-그가 작품초기에 가장 큰 죄라고 이야기 하였던 '자살'이라는 방법 밖에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은 날 죽여도 후회, 살려도 후회했을걸?"

"난 이제 당신밖에 없어..."

물론 이해는 한다. 모든 것을 잃은 그로써는 그녀마저 잃는 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때문이다. 간절한 생에 대한 갈증, 이러한 이기심과 그녀의 행복(?)은 교환되었다. 이러한 비극은 관객으로 하여금 깊은 카타르시스에 젖게 만든다. 오래된 이야기도 이와 다르지 않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도 자살의 무의미함을 아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로 이어질 수 없다는 절망은 절대적인 포기로 그들을 인도한다. 대리만족을 얻는다.


태주에 대해서.... 과연 그녀를 욕할 수 있는가? 팜므파탈의 역활을 수행했지만.. 분명 거짓말을 했지만 억눌림 받은 그녀.. 여기서 또 한가지를 생각 할 수 있게 한다. 상현이 준 자유는 대답이 안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상현을 거부할때 외친.. 당신이 이 집에 와서 우리의 행복이 모두 무너졌다 그 말은 거짓이다. 그리고 현재 태주와 같은 사람들이 수십 수백만에 이른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할수 없는
기껏해야 몽유병을 핑계로 거리를 달리는 일 밖에 할 수 없는 그들, 그들을 가엽게 여기고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박찬욱 감독은 그 모든 갈증들을 동일선상에 두자고 이야기 한다. 그러한 가정하에서 선행이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 것인가?

갈증... 절대적인 거부를 할 수도 없고....채우려고 해도 채워지지 않는 것..
태초의 원죄- 신의 지혜라 불렀던 자유의지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여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흡혈이라는 행위... 어쩌면 인간과도 다르지 않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서로에게 피해를 주고 서로의 것을 뺏고 살지 않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 이를 그나마 벗어나고자 하기 위해서는 상현의 기도문의 해답밖에 다다를 수 밖에 없다. 그 방법이 아니라 자신이 얻은 것으로써 더 좋은 가치를 낳는 삶을 살면 되지 않겠는가라는 해답을 제시 할 수도 있는데 이 해답에도 결국은 중요한 문제에 다다르게 된다.
'어느 것이 더 가치있는가?'라는 문제제시이다. 가치라는 것은 매우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세계적인 큰 대회에서 상을 받는 기쁨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쓴 편지의 답장을 받을때 느끼는떨림이 더 큰 기쁨일 수 있다.

구두...생의 집착의 끝
작 중 상현이라는 인물은 언듯보면 선의 인물같이 보이지만 인물중에 가장 진정한 '악'에 가깝다.
매 순간 쾌락과 자기부정이라는 양극단을 갈구했고, 죄책감에 부끄런 맘으로 합리화하는 인간적 모습 보단 ..어쩌면 해방과 쾌락만을   갈구한 태주보다도 더 질이 나쁘다. 타락천사 루시페르가 저지른 죄악이 저런 것 아니었을까?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세상속에서 천천히 걷는것. 그것이 창조물이 넘어서는 안될 한계점이다.

인간의 불완전함. 선과 악의 균형점.

 

* 약간 주제에서 동떨어진 이야기


생애 처음으로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에 빠졌던것 같다. 하지만 미성숙했고 짝사랑에서 사랑으로
움트기도 전에 끝났다. 하지만 아직도 난 그녀를 잊지 못했다. 아마 평생동안 못 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미칠것만 같다. 그녀는 연애 자체에 대해 반감 그자체고 힘들어한다. 그래서 난 포기하기로 했지만
잊을 수 없기에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끊임 없이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이후로 부터
확실하게 그녀를 보내주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현재의 나는 많이 부족하고 그녀의 꿈을 이뤄줄 힘도, 능력도,재력도
심지어는 제대로된 신앙도... 아무것도 없거든.. 오직 좋아하는 감정 하나뿐. 물론 그녀가 나를 곁눈으로나마 바라봐 준다면
이런 결심따윈 언제 했었냐듯 그녀에게 바로 달려가겠지......본문에서 실컷 상현에 대한 대립감정을
써내려갔지만 상현의 모습과 하나도 다를것 없군...

* 박쥐 이 영화는 붉은 피의 속성을 가진 뱀파이어를 이야기 하지만 보는 사람에게 주는 이미지는 매우 'Blue'하다.

 

영화 내내 물과 함께 한다. 갈증의 여러방향성을 보여주는 단체인 '오아시스', 태주남편의 물침대, 그가 죽는과정, 노신부가 보고 싶어했던 바다, 마지막 엔딩에도 바다가 그려진다(이 바다는 피 그자체이며 두마리의 고래가 의미하는 바도 조금 다르지만)

 

* 해결되지 못한 죄 의식

 

강우를 죽이고 그와 그녀는 한동안 끊임 없이 그에 대한 환상에 시달린다. 그 환상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윤여사의 그 눈 빛은 그들의 마지막 순간까지 쫒아다닌다.

죄는 마음과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게 되는 것이다. 그 죄의식으로 인해 서로를 원망하고 미워하다가 한 차례의 끝을 본다. 그러나 그 끝이 지나간 뒤 계속된 죄는 '상현'과 '태주'를 진정한 끝으로 몰고간다.

 

* 구두와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

 

신발과 그 둘의 관계 - 과연 이런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가?

저를 치욕속에 있게 하소서. 아무도 저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게 하시고, 오직 주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만이 저를 불쌍히 여기게 하소서.

 

실제로 예수는 아버지여 어디 계시나이까. 하셨는데 송강호는 신께 매달리지 않는다.
송강호의 최후를 지켜보는 건 신의 자비는 커녕 뒤에서 고소해하며 웃고 있는 나여사 뿐일따름이다.

둘 다에겐 원래 사랑이 없었고 욕망과 죄의식에서 공범자적 관계, 확장된 자아만 있을 뿐아닌가 싶다.                                             처음부터 사람들을 구원해주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가,여자하나만이라도 구하자 했다가 피 빨면서도 자살자를 돕는다.
사실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것 뿐인데 남을 구원해주고 돕겠다는 그 가식을 내려놓지 못하는 상현.

그리고 스스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 했지만 죄의식의 틀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고 항상 구원에 목말라했던 여자 태주.

하지만, 구원해줄수도 구원받을 수도 없는 관계이다, 둘은.지옥에서 만나자 했지만 아마 못만났을 걸?
그가 준 신발이 그녀가 타면서 떨어져 버리는 것은 그러한 것을 대변하지 않는가 싶다.

 

* 박쥐 라는 원제목과 상현을 비추어 볼 때


마지막 그가 자살을 하러 떠나기 전에 자신을 성자로 믿고 따르던 천막촌에 가서 자신을 따르던 여신도 하나를 강간하는 장면에서 이런 것을 생각해 보았다. 자신을 박쥐처럼- 신부와 뱀파이어와, 천사같은 존재와 악마같은 존재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게 만들던. 자신의 의지는 이미 허물어져서 악마로서의 자신밖에 남아있지 않음에도.. 그들에게 '보여지는' 신부로서의 이미지에 자꾸 천착하는 자신을 그 행동을 통해, 그들에게서 '착한성자' 상현의 이미지를 다 벗겨낸 후에, 더는 '그러지않아도된다'라고- 해방감과 안도감을 느끼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더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훌훌 다 털어버려도 되는것이기 때문에-                                                                  - 자살을 앞둔. 다 버려버리는 '작업'을 앞둔 자에게 있어- 해방감을 느끼는건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그러한 일을 행한것이라 생각된다. 아마도 그때문에, 그다지 웃는 표정이 아니었는데도 살짝 웃었다고 느껴진다.

ps. 영화 내내 나오던 꿀꺽거림의 사운드..(피를 마시는 장면 뿐만 아니라, 애무,성애,심지어 보드카를 마시는 장면에서조차)가 꽤나 깊게 뇌리속에 박혀 버렸다. 뭔가 마실때마다 자꾸 생각날거 같다....아씨 ㅠㅠ

ps2.글 정리가 하나도 안된다....-_-

역시 박찬욱 감독 답네요... 생각할 거리를 많이 줍니다....

다만 제대하고 오니 글솜씨가 어디로 사라진건지.... 두서도 없고 정리도 안되고 이거 원....

결국 필자는 이런 짧은 글마저 제대로 마무리 하지 못하고 도망가려한다 =_= 더 좋은 생각과 글을 남기고 싶은 분이 있다면 같이 이 영화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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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 영화에서 내내 배경음으로 쓰이는 '바흐의 칸타타 (Ich habe genug)'

영화에서처럼 무겁고 구슬프게 피아노음으로만 들리는 버전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아직 개봉한지 오래된 영화가 아니라 그런지 그런 배경음을 포스트에 담아둔 곳을 찾지 못했다. 아니면.. 올드보이의 배경음이었던 라스트 카니발 처럼 유명하지 않은 때문인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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