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봐..
언제쯤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이 고통에 끝이 있긴 있는 건지..
1막> 사탕등장 ==================
공부.. 공부.. 공부.. 나의 일상은 오직 공부다. 대한민국 공무원의 벽이 이토록 높았단 말이냐. 몇 년의 공부와 수 차례의 낙방.. 난 이미 온 몸의 기가 다 빠져버린 상태다. 오늘따라 유난히 눈부신 햇살.. 그 투명한 그물 속을 무심히 헤치고 철컥. 한 순간 독서실 문에 갇혀버린다. 무글무글 좀비걸음으로 52번 내 자리를 찾아간다. 스탠드를 틱 켜면 오늘도 똑같은 일상이 시작된다. 두꺼운 행정학책을 힘겹게 펼쳤다. 징그럽게 빽빽한 글씨들..
하루 종일 공부를 한다지만 내가 읽고 있는 이 수천, 수만 개의 글자들이 내 머리 속에 들어가 정리가 되고 있는 건지.. 아님, 그저 내 동공에 반사가 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읽고 있다. 읽고 또 읽는다. 계속 읽다 보면 머리에 스며들겠지. 저절로 스며들겠지.
책장이 넘어간다. 읽는걸 적어보기도 한다. 적다 보면 이 글자들이 손가락에서 팔로 전달, 근육에 스며들어 결국 몸에 체화된다. 그럼 내 몸 전체가 알게 될 거야.. 외우려는 노력도 귀찮다. 몇 년간의 캄캄한 독서실 생활은 나에게 무기력증과 귀차니즘 매너리즘.. 우울증이란 합병증을 가져왔다. 나는 환자다. 공부가 끝나는 날에야 회복이 가능할까? 잠시 고개를 돌려 창문께를 바라본다. 햇살이 힘겹게 스며들고 있다. 그 하얀 빛 줄기 속에 은가루가 곱게 흩뿌려져 있다. 아름답다. 온몸의 뼈가 근질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펜을 던져버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작이 시작된 모양이다. 저벅저벅 조금은 힘찬 발걸음으로 독서실을 나선다. 철컥! 두꺼운 문이 끼익하고 둔탁하게 열린다. 촤르르.. 내 몸이 하얀 햇살 속에 온통 노출되었다. 온 몸이 짱하게 아리다. 에너지가 충전된 느낌..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한적한 오후.. 저벅저벅저벅.. 결국 내 발걸음이 멈춘 곳은.. 역시 DVD방이다. 나는 독서실보다 더 어두운 DVD방의 까만 공기에 폭빠져든다. 쇼파에 녹녹하게 녹아드는 느낌.. 이 느낌이 좋아.. 이제 영화가 시작되련다.
끼익~갑자기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내 옆에 풀썩 자리를 잡는다. 솨악~ 향긋한 내음이 내 몸을 덮친다.
"뭐.. 뭐예요!"
너무 놀라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다. 화면에서 발사되는 초록빛에 이 남자의 옆 모습이 푸르게 드러난다. 부드러운 얼굴선.. 아름다운 눈매가 슬퍼 보인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내가 이 방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이 영화를 보고 있었던 것처럼 온통 영화에 빠져 버린 이 사람.. 내가 아무리 흔들고 소리쳐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할 것만 같은 희한한 느낌의 이 사람을.. 나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지금 이건 분명 환상일거야.. 나는 분명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영상과 아름다운 음악 속에서 이 남자와 난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야.
2시간 남짓한 꿈은 천천히 올라가는 자막과 함께 정지된다. 꿈이 끝나고 불이 켜지는 순간 더 이상 이 남자는 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2시간 동안 익숙해 져버린 이 사람에게 묘한 친근감마저 느껴진다. 우린 아무 말없이 조용히 방을 나섰다. 볼수록 애띤 얼굴의 남자.. 아니 소년이란 말이 어울리겠다.
"자.."
꿈처럼 생긴 남자가 호주머니를 뒤적이더니 5000원짜리 한 장을 쭉 내민다.
"네?"
이 남자.. 말도 하는구나. 나는 깜짝 놀라고 만다.
"아까.. 내가 이거 볼려구 했는데 니가 먼저 선수치는 거야..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 그러니까.. 더치페이 하자구.."
나는 아무 말 없이 5000원을 받아 들었다. 같은 방에서 나와서 그런 걸까? 마치 불건전한 일이라도 벌어진 모양으로 얼굴이 새빨개져 버린다.
"이제 어디가?"
소년이 묻는다. 아주 자연스런 반말이다.
"어.. 독..서실요.."
"독서실엔 왜?"
난 할말을 잃는다. 독서실에 왜 가냐니! 공부하러 가지..
"난 정말 모르겠어.. 왜 독서실이란델 가는 건지.."
"공부하러 가는 거죠!"
나는 답답한 맘에 결국 빼쭉이 답을 한다.
"공부는 왜? 공부 좋아해?"
공부가.. 좋긴 왜 좋겠냐.. 왜 좋겠냐구..
"난 공부 같은 거 해본 적 없는데.. 재밌어?"
나는 조금은 질린 표정으로 한마디 톡 던진다.
"학교에서 공부 안 해봤어요?"
"나.. 학교도 다녀본 적 없는데?"
"네?"
"정말이야. 엄마가 가기 싫음 안 가두 된댔거든.."
"그래서 정말 안갔다구요?"
"첨엔 갈까 했는데.. 학교 다니는 애들이 다 학교 가는 걸 싫어하더라구.. 그래서 안간다구 했지.."
"그럼.. 뭐했는데요?"
"음..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거 했지.. 난 하고 싶은 거 아님 안하거든."
기가 막힌다. 하지만 보골보골 호기심이 인다.
"그래서.. 그 동안 뭘 했냐구요."
"뭐.. 그래도 남보다 못한 건 없어. 글은 만화책보다 다 배웠구.. 거의 모든 게임에서 신의 경지에 이르렀지. 여행다니면서 하두 사진을 찍다보니 왠만한 사진작가 부럽지 않고.. 이쁜것만 보면 그림으로 그리다 보니 요즘은 부업으로 삽화작업도 좀 하고 있지. 좋은 음악은 내가 직접 연주하고 싶어서 피아노를 배웠구.. 가끔 작곡도 해.. 춤추는 걸 좋아해서 하도 따라추다보니 프리랜서 댄스강사로도 활동하고 있고.. 외국에 자주 다니다보니 영어, 일어 정도는 그냥 하지.. 물을 너무 좋아하다보니 수영선수활동도 했었구.. 검도, 태권도가 멋있어 보이길래 하다보니 합이 6단이야. 빵도 무지하게 좋아해서 제빵사 자격증도 있구. 지금은 울엄마 머리 해주려고 미용기술을 배우는 중이야. 아, 나 옷 만드는 것도 잘해. 이거 내가 만든 옷인데 괜찮지?"
머릿속이 멍해진다.
"넌?"
소년이 묻는다.
"네?"
"넌 뭘 잘 하냐구."
말이.. 나오지 않는다. 난.. 난 지금껏 뭘 하며 살아온 걸까..
"참! 그러고 보니 아직 인사도 안하고 있었네.. 반가워.. 내 이름은 사탕이야. 이사탕."
"사탕? 이름이 사탕이라구요?"
나는 장난하냔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본다. 그래 지금까지 한 얘기들도 황당하잖아.. 게다가 이름까지 사탕이란 건 너무하단 말이지.
"응, 엄마가 내 이름은 내가 지으랬거든.. 원래는 현우라고 대충 부르다가.. 나한테 선택권이 주어진 거
야.. 그때 내가 젤 좋아하는 게 사탕이었거든.. 그래서 두 번 생각 않고 결정했지. 사탕이라구..뭐.. 나중에서야 초콜렛이 더 맛있다는 걸 알았지만.. 상관없어.. 어쨌든 난 사탕이 좋아."
나는 알게 뭐냐는 표정으로 눈알을 한 바퀴 뺑그르 굴린다.
"신기하지?"
소년은 내 표정을 살피며 재밌다는 듯 큭 하고 웃어버린다. 나는 당황스레 소년의 시선을 피하며 걸음을 옮기기로 결심한다.
"정말이야!"
소년은 내 발길을 잡으려는 듯 다급히 말을 잇는다. 내 발걸음이 놀란 듯 잠시 멈추었다.
"우리엄만 그래.. 우리 형한테 무슨 죄를 졌는지 몰라도 내가 하고 싶어하는 건 절대 막아서는 법이 없거든.."
"형이요?"
"어.. 형이 있었데.. 내가 애기 때 죽었지만.."
나는 말문이 막힌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이젠 맘대로 발걸음도 못 옮긴 채 어정쩡한 폼으로 소년을 마주하고 있다.
"가자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독서실까지 바래다 줄게."
나는 말없이 독서실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공부라는 놈이 핑계 아닌 핑계가 되어 남자한번 사겨본적 없었던 나다. 그런 고로 옆에서 나와 같은 방향으로 발걸음을 놀리고 있는 이 존재가 여간 부담스럽고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저기요."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어? 근데 너 왜 자꾸 높임말 써? 나 어른 아닌데? 내가 아저씨로 보여?"
소년은 자기가 한 말이 꽤나 우습다는 듯 또 큭 하며 웃어버린다.
"저 혼자 갈게요. 가세요."
맥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해버렸다.
"내가 아저씨로 보이냐구!"
엉뚱한 소리를 한다. 말이 안 먹힐 것 같은 녀석이다. 갈색머리가 햇빛에 빛난다. 소년은 아저씨가 아
니라며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장난스럽지만 슬픈 갈색 눈이 내 눈을 응시하고 있다. 잠시 현기증이 인다. 나는 그 틈을 들킬 새라 다시 고개를 돌려 걸음을 빨리 한다. 소년이 당황한 듯 잠시 내 뒤를 좇다 걸음을 멈추고 만다. 잘 가.. 하는 작은 목소리가 언뜻 들린 것도 같다. 그 목소리는 무척 슬프게 느껴졌다. 슬픈 갈색 눈이 생각난다.
2막> 고시생임을 잊지마라================
"으.."
침울한 독서실의 52번 책상. 책을 보다 말고 머리를 세차게 흔든다. '잘 가'하는 작은 목소리가 자꾸 귀에 맴돌고, 그 갈색 머리칼과 갈색 눈이 자꾸 생각난다. 그리고 또 언제나처럼 역시 공부는 오래할게 못 된다는 생각이 찾아든다. 이런 사소한 일에 또 온통 맘이 흔들려버렸으니. 나는 잠시 책에 이마를 묻어버린다. 막막함과 답답함이 다시 한번 엄습한다. 혼자만의 싸움.. 고독하고 힘든 여정.. 떨쳐낼 수 없는 불안감과 두려움.. 공부를 시작한 후로 내 맘은 항상 병들어 있다. 이럴 때면 나는 나만의 도피처
로 파고든다. 나만 아는 세계.. 어느덧 나는 혼자만의 상상 속에 빠져든다. 사탕이라는 그 소년과 내가 손을 잡고 팔짝팔짝 영화를 보러 간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깔깔 거리며 팝콘도 하나 샀다. 팔걸이를 제쳐 버리고 둘이 꼭 붙어 앉았다. 나는 사탕이의 가슴에 기대어 두근두근 심장소리를 듣는다. 사탕이는 사랑스레 내 어깨를 감싼다. 영화는 즐겁고 사탕이는 따뜻하다. 달콤한 행복감이 온몸을 감싼다.
눈을 떴다. 눈 앞엔 깨알 같은 글씨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핑 눈물이 난다. 오늘도 혼자 이렇게 울어버린다. 미쳐버리지는 말자. 나는 휴지로 눈을 꾹 눌러버린다. 휴지가 말랑하게 젖어간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이런 날도 과거가 되어버리겠지.. 참자.. 조금만 더 참자.
"왜 울어?"
익숙한 목소리가 독서실의 공기를 살짝 흔들어놓는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든다. 눈앞엔 거짓말처럼 나와 영화를 보던 사탕의 얼굴이 보인다. 입에는 막대사탕하나를 우물거리며 그렇게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여긴.."
나는 너무 놀라 말을 잇기도 버겁다.
"왜 우냐구.. 무슨 일 있어?"
사탕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붉게 충혈된 내 눈을 열심히 들여다 본다. 기억 속을 떠나지 않던 바로 그
갈색 눈이 눈앞에 있다. 나는 민망함도 잊은 채 잠시 그렇게 사탕의 눈을 바라보고 있다가 흠 짓 고개
를 숙여버린다. 책장 위에도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져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미칠 듯이 두근거린다. 내 상상을 모두 들킨 듯 너무 부끄러워 얼굴도 화끈화끈 새빨개져 버렸다.
"말해봐."
사탕이 다시 한번 내 대답을 재촉한다. 독서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기웃기웃 내 자리를 노려본다.
나는 벌떡 일어나 사탕을 독서실 밖으로 다급히 몰아낸다. 살짝 밀어낸 사탕이의 팔은 내 상상 속 체온만큼이나 따뜻하다.
"뭐..뭐에요!"
떨림과 놀라움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쉰 소리가 간신히 새어 나온다.
"왜 울었냐구!"
이 녀석 또 딴소리다. 나는 대답을 못한 채 그냥 짧은 침묵의 쉼표를 찍는다.
"가자."
갑자기 사탕이 내 손을 잡아 끈다. 나는 눈이 똥그래져서는 이 녀석에게 훅 끌려가고 만다. 반항이야
할 수 있겠지만 무턱댄 반항은 싫다. 그냥 이대로 끌려가련다.
버스를 타고 몇 구간을 지나 내렸다. 몇 번 버스를 탔는지도 모르겠다. 지하철도 탔다. 어디서 타고 어디서 내렸는지도 모르겠다. 난 사탕이 이끄는 대로 그냥 발걸음을 옮긴다. 사탕이 멈추면 멈추고 움직이면 같이 움직이고 그러는 동안 사탕인 내 손을 한번도 놓지 않았다. 서로가 놓칠 새라 꼭 맞잡은 느낌. 햇빛이 사탕이를 비춘다. 살짝 찡그리며 햇빛을 가리는 사탕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사탕이가 나를 바라본다. 내 눈동자가 파르르 방황한다. 사탕인 다시 앞을 바라본다. 사탕이의 손은 따뜻하다. 한 순간 이 느낌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든다.
"뭐 볼래?"
긴 침묵의 끝을 탁 자르는 사탕의 짧은 물음에 번쩍 정신을 정렬시킨다.
"자다 일어났냐? 큭!"
사탕의 고유한 웃음. 귀엽다. 그제서야 사탕과 내 앞에 서 있는 큰 건물을 바라본다. 순간 동그란 내 눈이 더욱 똥그래진다. 이 녀석 뭐야.. 내 생각을 읽고 있었던 걸까? 건물을 들어서자 살가운 영화입자가 우리의 몸을 잔뜩 감싼다. 그리웠던 영화관의 공기.. 꿈속의 그 공기다.
사탕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영화표 두 장을 사고 팝콘도 하나 산다. 그러는 동안에도 손을 놓지 않는다. 손을 놓지 않기 위해 자기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달라는 부탁까지 한다. 그 순간 감동하는 내가 우습지만 사탕인 계속 나를 감동시키고 있다.
어둠 속에서 자리를 잡았다. 사탕인 그제서야 손을 놓는다. 하지만 그 손은 다시 내 어깨를 감쌌다. 사탕이의 단단한 가슴이 느껴진다. 손보다 더 뜨거운 체온. 갑자기 이건 꿈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지금은 가장 리얼리티한 이 꿈을 즐기자. 눈을 뜨면 어두운 독서실자리에 있을지라도 지금은 사탕이의 심장소리만 들으리라.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영화이건만 상영시간 내내 나는 사탕이의 체온 속에서 3D영상보다 더욱 스팩터클한 동요를 느끼고 있었다. 영원할 것 같지만 끝이 있으리란 불안감과 그에 상반된 행복감. 이런 격정적 동요는 내 생전 처음이다.
영화관을 나설 무렵 해는 뉘엇뉘엇.. 붉은 공기들이 반딧불처럼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사탕이의 손이 다시 내 손을 붙들었다. 다시 독서실 앞에 다다를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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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앞.. 사탕이 걸음을 멈추었다. 나도 멈추었다.
“들어 갈 거야?”
사탕이 묻는다. 사탕의 목소리에 밝음이 한 알 빠져있다.
“어..”
망설임이 두 알 보태진 목소리.
“가고 싶어?”
사탕이 다시 묻는다.
“가야지.”
나는 눈동자를 천천히 떨군다.
“야.. 너 뭐하냐? 하루 종일 어디 갔었어?”
빠사삭 메마른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정아.. 날이 갈수록 조여드는 내 숨통을 더더욱 졸라매는 공부
쟁이 정아다. 정아의 손에 분신처럼 붙어있는, 닳고닳은 초록색 메모장.. 순간 머리를 한 대 텅 맞은 듯 번쩍 정신이 든다. 오늘 계획했던 진도들.. 각각의 챕터들이 내 머리 속을 꽈악 메운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사탕이의 환각은 저만치 물러난다.
“누구..”
사탕이를 흘긋 훔쳐보는 정아의 눈가에 호기심이 이글거리는가 싶더니 사탕이가 붙들고 있는 내 손을 보고는 못 본척 입술을 삐쭉 내밀며 휭 가버린다.
“나 들어갈게 잘 가.”
난 사탕이를 밀어내듯 뒤로 하고 독서실로 후다닥 들어가 버린다. 꿈은 끝났다.
후미진 구석, 52번 내 자리.. 불을 틱 켜고 주저앉듯 자리에 앉았지만 다시 몽롱해진 내 정신은 눈인사도 못한 채 남겨진 사탕이에게 온전히 빠져있다.
"사탕아.. 사탕아.."
나도 모르게 사탕이 이름만 주문처럼 되내이고 있다.
"왜?"
번쩍 고개를 들자 눈앞에 사탕이의 맑은 눈동자가 보인다. 어이없는 황당함과 민망함.. 그래 이게 사탕
이지.
"왜 불렀냐구."
마법소년 사탕이. 내가 부르면 눈앞에 나타나는 마법소년.
나는 사탕이의 거침없는 목소리를 자제시키며 사탕일 독서실 밖으로 끌어냈다.
"또 왜왔어?"
"나 부르고 있었잖아."
할말을 잃는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들고 똑똑히 말한다.
"나 지금 봐야 할게 너무 많거든?"
사탕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나 이제 들어가서 공부해야 한다구."
사탕이 다시한번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잘가!"
난 짧은 인삿말을 하고 돌아선다.
"무슨공부하는데?"
사탕이 뒤에서 묻는다. 나는 살짝 고개를 돌린다.
"뭐가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분데?"
사탕이 다시 한번 묻는다. 나는 돌아서서 말한다.
"나 지금 굉장히 중요한 시기야. 바쁘다구."
아주 똑똑히 말한다. 나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뭔데 그렇게 촉박하게 하냐구."
"한달있음 공무원 시험있어."
사탕인 한 박자의 여유를 갖고 다시 묻는다.
"공무원.. 그거 그렇게 하고 싶어?"
나는 "어" 한마디를 분명히 하고 돌아선다. 죽도록 하고 싶다. 죽도록.
"왜?"
끝없는 물음..
지금까지 쏟은 노력과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부모님 뵐 면목이 없으니까.. 친구들 보기 민망하니까.. 빨리 뭐라도 되고 싶으니까..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으니까.
나는 가슴속에 꽉찬 대답을 꾹 삼키며 돌아서버렸다.
'왜.. 왜.."
다시 한번 나에게 질문을 하면서..
오늘은 영 꽝이다. 공부에 거의 손도 못댔다는 죄책감에 괴롭다. 사탕이가 원망스럽다. 하지만 단 몇 시간도 맘 편히 놀 수 없는 내 신세가 더욱 원망스럽다. 난 대충 가방을 챙겨 메모장을 들고 독서실 문을 나선다. 고시원까지 5분거리.. 걸으면서 메모장이라도 보자. 나는 메모장을 들여다보며 발걸음을 옮긴다. 순간 누군가 내 옆을 스치며 툭 부딪힌다. 향긋한 내음...
"엄마야!"
메모장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따뜻한 손이 나 대신 메모장을 주웠다.
"야, 넘어지겠다."
사탕이 웃으며 메모장을 건낸다. 난 멋적게 메모장을 받아들었다. 역시 마법소년은 내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다. 사탕이가 아직 가지 않기를.. 50% 아니..99% 원하고 있었으니까.
"집에가?"
"고시원"
짧게 답한다.
"가자 데려다 줄게."
사탕이 내 손을 잡는다. 나는 그냥 걸음을 옮긴다. 레몬색 메모장을 반대쪽 손에 꼭 쥐고서..
"근데 말이야."
사탕이 말을 꺼낸다.
"어."
"너 영화내용 기억나? 나 이상하게 하나도 기억안나."
나는 입이 굳는다.
"너두.. 기억안나?"
대답대신 얼굴만 빨개져 버린다. 밤이라 다행이라 생각한다. 얼마간 말없이 걸었다. 고시원이 보인다. 고시원까지의 길이 이토록 짧은 거리라는 것이 처음으로 원망스럽다.
"다 왔어."
내가 먼저 아쉬운 침묵을 깬다.
"뭐 벌써?"
사탕이의 목소리에도 아쉬움이 잔뜩 묻어있다.
"여기야."
딱딱하게 생긴 고시원 건물앞. 사탕인 순간 내 손을 잡아끌어 어두운 그늘 속에 옮겨놓는다.
사탕이의 뜻밖의 행동에 심장이 멎어버리는 줄 알았다. 사탕이가 내 눈을 들여다 보며 작게 속삭인다.
"너.. 키스 해봤어?"
내 심장은 폭발직전을 알리며 요동치고 있다. 하지만 뭐든 못하는 게 없는 사탕이 앞에서 더 이상 키스도 못해 본 쑥맥으로 보이고 싶진 않다. 나는 잔뜩 언 고개를 힘겹게 끄덕인다. 이 까짓 키스 아무것도 아닐거야. 오늘따라 믿기지 않을 만치 대담한 내가 대견스러울 정도다. 오늘은 내가 내가 아니다. 왠지 한결 자유로워진 느낌. 그냥 흘러가는대로 가보고 싶은 기분..
사탕이는 그 따뜻한 손으로 내 얼굴과 목덜미를 조심히 감싼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꽉 감아버린다. 사탕이의 숨결이 뜨거울 정도로 가까이 느껴진다. 오늘은 나도 키스라는 걸 하는 것이다. 나의 사탕이랑 키스를 하는 것이다. 내 심장은 정말 폭발해 버릴 지도 모를 것 같다.
"큭"
순간 사탕이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온다. 나는 꼭 감은 눈을 뜬다.
"너.. 안해봤지?"
사탕이가 나를 보며 웃고 있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눈물이 울컥 솟아오른다. 나는 사탕이를 거칠게 밀쳐내고 고시원으로 뛰어들었다. 눈물이 줄줄 흐른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내 감정이 빨리 낫지 않을까봐 두렵다. 조금만 건드려도 미친듯이 반응하는 내 심장을 건드려 버린 사탕이를 증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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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방안을 가득 비춘 지 오래... 얼마나 더 잤을까.. 한 근이나 되는 눈꺼풀을 힘겹게 움직여본다. 껌뻑껌뻑 탱탱 부푼 눈꺼풀이 부담스럽다. 습관적으로 벽시계를 바라본다. 11시라니.. 한숨이 푹 나온다. 고작 일주일전 계획했던 진도들이 쌓여만 간다. 정아는 지금쯤 책장을 뒤적이며 열공모드일게다. 언제나 나를 숨막히게 하는 43번 자리.. study machin 정아의 뒷모습.. 나는 뿌드득 뿌드득 몸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솨악~ 샤워기에서 내 정수리로 물방울들이 줄지어 쏟아져 내린다. 물을 흠쁙 적시며 눈을 감는다. 사탕의 뜨거운 숨결...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터벅터벅 독서실을 향한다. 햇살이 눈부시다. 오늘따라 온몸이 무겁다. 어딘가 그냥 쓰러져버리고 싶다. 끽 문을 열자마자 특유의 독서실 냄새가 폐 속을 가득 메운다 . 국사책을 펼쳤다. 고작 하루를 쉬었을 뿐인데 절반은 까먹은 느낌이다. 내 머릿속 세포는 휘발성이 강하다.
끄적끄적.. 나에게는 작은 노트가 있다. 기분이 나쁜 날은 글을 적는다. 우울한 기분, 외로운 심정, 현재의 내 마음을.. 나만의 이야기를 적는다. 나만 아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 하지만 적다보면 계속 그 세계에 빠져들고 마니까.. 어느 순간 현실세계의 끈을 놓칠까 두려워 얼른 노트를 덮어버리기 일쑤다. 집중이 필요하다. 지금은 오로지 공부에 집중해야 할 때다. 하지만 오늘은 노트를 덮는 순간을 놓쳤나 보다. 내 글 속엔 어느새 사탕이가 등장하고 있다. 그걸 깨닫는 순간 노트를 덮어버렸다. 다시 국사책으로 눈을 돌린다.
"바보.."
흠짓 고개를 들었다. 내 눈을 바라보는 사탕의 얼굴이 보인다. 나는 모른 척 고개를 숙여버린다. 완벽히 무시하리라.
"글 잘 적네? 재밌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나만의 글을.. 내 세계를 들켜버렸다.
"이렇게 잘 적는데 왜 딴 공부를 하고 있어? 바보같이.."
"나가."
난 고개도 들지 않고 낮게 말한다.
"싫어. 그럼 너두 나와."
나는 사탕이를 데리고 독서실을 나선다.
"이제 오지마. 왜 자꾸 오는거야?"
"너두 보고 싶었잖아. 내 글도 썼으면서."
내 마음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는 녀석, 짜증이 난다.
"이제 오지마."
나는 돌아선다.
"돌아서지마. 보고 싶으니까."
제멋대로 녀석. 하지만 그 말이 내 마음을 또 흔든다.
"보고싶어서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아침부터 기다렸는데.."
가던 걸음을 멈춘다.
"어제 웃었던 거 밤새 후회했다구."
후회라는 것도 하는 녀석이군.
"그래도 어떡해. 너무 귀여운 걸.."
작은 여운이 흘렀다. 그리고 한 순간 사탕이 내 허리를 살짝 감싸고 사탕이의 체온이 내 등을 가득
덮는다. 사탕의 입술이 내 귀에 닿았다. 사탕같은 목소리가 내 귀에 달콤하게 스며든다.
"니가 좋아. 너무 너무.."
몸이 휘청하는 느낌.
"근데.. 너 이름이 뭐야?"
뜬금없는 사탕의 물음.. 깬다. 하긴 가르쳐 준 적도 없지만..
"난주.. 강난주."
대충 대답한다.
"어제 말야.. 니가 혼자 내 이름 막 불렀잖아.. 왜 그랬는지 알겠어"
말없이 서서 사탕의 말을 듣는다. 사탕같은 목소리. 사탕의 목소리는 참으로 달콤하다.
"어제 밤새 부르고 싶었는데 부를 이름이 없잖아.. 그리우면 이름을 부르게 되나봐? 그치?"
말을 않는다.
"이제는 부를 수 있겠다. 난주야 난주야.. 큭!"
이상하다. 가슴속이 이상하다. 사탕에게서 처음으로 불리워지는 내 이름이 낯설다. 근데.. 이 낯설음이 좋다. 너무 너무..
곧 독서실을 나선다. 햇살의 옅은 베일 속에서 사탕이 기웃기웃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를 발견한 사탕은 곧 사탕처럼 달콤한 표정으로 포닥포닥 달려와 손을 내민다. 나는 그 손을 잡는다. 솜사탕마냥 따스한 사탕의 손.. 아직 한끼도 먹지 못한 나를 위해.. 그리고 어젯 밤의 일을 사과하기 위해 점심을 사겠다는 사탕이.. 나는 처음 사탕을 만났던 날처럼 말없이 사탕의 이끌림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이유없는 침묵이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한 이 아이.. 사탕이는 특별하다
둘이서 설렁탕 한 그릇씩을 뚝딱하곤 거리로 나선다. 화려한 젊음이 가득한 이 거리에서 나는 홀로 고시생 냄새를 푹푹 풍기고 있다. 간단한 티를 레이어드하고 청바지를 입었을 뿐인데도 멋스럽기 그지없는 사탕이와는 달리 오직 공부모드에 맞추어진 추리닝을 걸친 나는 이 길을 걷는 한걸음 한걸음이 부담스러울 뿐이다. 나와 무관한 세계에서 이방인처럼 떠돌아 다니고 싶지 않다. 하지만 독서실에선 한없이 두드러져 보이던 사탕인 꼭 이 세계사람이었나보다. 이 거리와 완벽히 어우러진 사탕의 존재는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빨리 내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
"나 이제 그만 갈게."
나의 우울한 표정에 사탕이 즉시 발걸음을 옮긴다. 언젠가 시험만 끝나라.. 화려하게 변신해서 이거리 구석구석까지 누비고 다니리라..
"있잖아.. 담에 있잖아.."
사탕이 입을 연다.
"어.."
천하의 사탕이 뭘 저렇게 망설인담..
"니 글 보여 줄 수 있어?"
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고개만 살짝 끄덕한다. 언젠간.. 보여줄 수도 있지 뭐.
"약속했다."
사탕인 다시 한번 확답을 받으며 싱긋 웃는다.
"난주 난주 강난주.. 난주 난주 강난주.."
사탕인 내 이름으로 박자까지 맞추어 노래를 부른다. 따스한 햇볓아래 우리는 손을 잡고 내 이름의 멜로디를 따라 따뜻한 길을 걸었다.
3막> 사탕에게 빠지다==========================
"니 글 보여 줄 수 있어?"
사탕이 내게 한 유일한 부탁..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왜 그랬어 사탕아..
나는 어느 새 공부보다 내 글에 열중하고 있다. 내 글은 사탕에게 보여줄 글이 되어 나의 글쓰는 욕구를 더욱 더 자극하고 있다. 사탕이가 내 글을 읽으며 큭큭 웃는 모습.. 심각해 지는 모습.. 감동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그러다 달력을 바라본다. 어느 새 시험이 코앞이다. 안 된다. 안 될 말이다. 여기서 주저 앉을 수 없다. 조금만.. 조금만 더 조이면 할 수 있는데 왜 자꾸 주저 앉을 려고 하니.. 정신을 차려라. 정신을..
난 고개를 쭉 빼고 43번 자리를 바라본다. 정아의 열정적인 뒷모습.. 다시 한번 숨막히는 공기가 나를 짓누른다. 난 고개를 흔들며 내 이야기 노트를 저만치 밀쳐내 버린다. 그리고 몇 시간을 집중했다. 그 동안 미루었던 진도들을 차근차근 정리해 나간다. 하지만 미루어진 진도들에 치이고 치일수록 스트레스가 극도로 치밀어 오른다. 그렇게 얼굴이 빨개지고 숨이 가빠질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다 엎드려 버린다. 눈물이 난다. 그냥 주저앉고만 싶은 느낌.. 괴롭다. 힘들다. 숨이 막혀..
쿡쿡.. 누군가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찌른다. 나는 고개를 든다. 역시나 밝고 밝은 사탕의 얼굴이 보인다.
"많이 힘들어?"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사탕인 내 책을 챙겨들고 내 손을 잡아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사탕이에게 이끌려간다. 어떤 경우에도 사탕의 손은 뿌리칠 수가 없을 것만 같다.
"하기 싫은 걸 하니까 그렇게 힘든 거야.. 그래도 니가 꼭 해야 한다면 말이야. 정말 하고 싶은 걸로 만들면 되는 거야."
사탕인 그런 말을 하면서 아담한 커피숖으로 들어섰다.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은 사탕은 나를 앉히고 내 옆에 꼭 붙어 앉는다.
"자 니가 공부한 거 나한테 가르쳐 줘.. 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쉽고 재밌게 말이야.."
뭐하는 거지? 이 녀석?
"빨리.. 나 열심히 배울 테니까 대신 내가 잘하면 뽀뽀해 주기다."
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탕일 바라본다. 왜 이러는 거지? 난 이럴 시간이 없다. 시간이 금쪽 같은 나에게 너 이래서는 안된다.
"난 학교 안 다녀서 국사 이런 거 잘 몰라. 가르쳐 줘 궁금해.."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설명을 시작했다.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들과 그 사이에 일어났던 전쟁들.. 그리고 수많은 정책들에 대해서..
첨엔 그냥 에라 모르겠단 식으로 담담히 시작했는데 눈동자를 반짝이며 진지하고 즐겁게 경청하고 있는 사탕이를 보자 흥이라는 것이 솟았다. 그리고 중간중간 습관적으로 외우고 있던 것들이 실타래 처럼 자연스레 풀리면서 더욱 차근차근 정리가 되어가는 느낌이 신기했다. 국사가 이렇게 재밌게 설명할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다름이었다. 그리고 내 설명은 국사와 국어, 행정학을 넘나들기에 이르렀다.
고시원으로 돌아가는 짧은 길에서도 설명은 계속 되었고, 밤에는 자는 시간을 쪼개가며 사탕에게 더욱 재밌게 설명해 줄 방법을 연구하며 공부에 열중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를 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엔 온통 국사와 국어이야기가 가득했고 고시원을 나서면 사탕이가 팔을 벌리고 인사를 하고 있다. 나는 그런 사탕에게 달려가 갈고 닦은 장대한 이야기를 선사한다.
"역시 니가 글을 잘 쓰니까 이렇게 재밌게 설명할 수 있는가보다."
사탕인 웃으며 내 설명을 한 음절도 놓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열심히 들어준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책을 뒤적거리고 다시 정리까지 해 가며 그야말로 열정적인 모습이 되었다. 이렇게 열정적이었던 적이 또 있었던가? 내 피가 처음으로 무한히 뜨거워짐을 느낀다. 매너리즘도 귀차니즘도 우울증도.. 저만치 물러가 버린 느낌이다. 그 딴것들은 사탕이가 모두 던져버렸다. 난 더 이상 독서실에서 공부하지 않았다. 내 공부장소는 오직 한 자리.. 사탕의 옆이면 족했다. 가끔 들르는 독서실의 내 책상위엔 한심하다고.. 정신 좀 차리라는 정아의 쪽지가 놓여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한 달이 그렇게 짧다는 것에 경악할 정도로 놀랐더랬다. 고사장까지 향하는 동안 사탕이는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이 손이 없어도 시험을 무사히 볼 수 있을까? 불안할 정도로 나를 안심시키는 이 따뜻한 손.. 나는 어쩜 사탕의 손에 중독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험시간동안 단 1초도 정신을 놓지 않고 집중했다. 사탕의 따뜻한 손도.. 해맑은 미소도 잠시 기억속에서 지운 채 오로지 한 문제 한 문제에 집중해 나갔다. 그 어느 때 보다 충만한 느낌으로 자신만만하게 답안지를 채워넣으며 가슴이 뿌듯함으로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절대 후회라는 건 없을 시험이었다.
시험이 끝난 후 고사장을 나서자 저기서 눈부시게 하얀 티셔츠를 걸친 사탕이 햇볕을 함박 담아 나에게 달려온다. 언제나 내 앞에 저렇게 나타나는 사탕이.. 사탕인 혼자서 뭘 하고 있었을까? 수험생들이 신기한 듯 나를 흘긋 거린다. 사탕인 손을 내밀고 난 그 손을 잡는다. 이렇게 마음이 편했던 적이 언제 였던가. 늘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그 불안감이 사라져버렸다.
"오늘은 우리 변신하고 신나게 놀아볼까?"
사탕이 묘한 제안을 하며 내 손을 잡아끈다. 나는 역시나 무덤히 사탕을 따른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발걸음이 가볍다. 날아갈 듯 가볍다.
사탕은 어디선가 한꾸러미의 종이가방을 들고와선 내 고시원 방에 잠시 가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탕을 쳐다본다. 이 녀석 무슨 생각으로 하는 말일까? 하지만 사탕인 내 반응은 신경도 쓰지않고 무작정 내 손을 끌고 고시원으로 향한다. 나는 맥없이 사탕을 따른다.
다행히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고시원에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나는 바닥에 널린 빨랫감들을 얼른 치우고 초라한 방에 사탕을 초대했다.
"자 눈 감아봐.."
자리를 잡고 앉은 사탕이 나를 자기 앞에다 앉혀놓더니 갑작스런 요구를 한다. 왜 이러지? 다시 한번 처음 만났던 날의 키스사건이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눈을 부릅뜬다.
"얼른!"
사탕이 조른다. 귀여운 표정.. 이런 사탕을 당해 낼 재간도.. 이유도 없다. 나는 그냥 모른 척 눈을 감아버린다. 곧 사탕의 부드러운 손이 내 얼굴을 감싼다. 난 나도 모르게 더욱 더 꼭 눈을 감아 버린다. 곧 내 얼굴에 향기로운 무언가를 쓱쓱 바르고 있는 사탕의 손이 느껴져 나는 눈을 번쩍 뜬다.
"응, 나 예전에 메이컵하는 거 배운 적 있거든.. 너한테 꼭 해 주고 싶었어! 더 이쁘게 해 줄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
사탕이 상큼 웃으며 내 얼굴에 집중하고 있다. 나는 민망하기도 하고 뜬금없기도 한 이 상황에 다시 눈을 감는다.
"프라이머 발랐구.. 베이스 깔구.. 파운데이션도 했으니 이제 눈화장 해야지?"
한창 신이난 목소리로 내 얼굴을 만지작 거리던 사탕의 손놀림이 어느 순간 멈추고 정적이 흐른다. 그 정적을 이기지 못한 내가 눈을 뜬다. 내 눈앞에 사탕의 눈이 보인다. 사탕은 내 머리를 감싸더니 자신의 오른쪽 어깨에 내 얼굴을 꼭 묻어버린다.
"너무 예뻐.. 너무 예뻐서.. 더 이상은 손 못 대겠다."
나는 눈을 꼭 감는다. 가슴이 쩌릿쩌릿해 진다. 공부에 찌들린 나에게 이런 달콤한 말을 해 준건 사탕이 뿐이니까.. 사탕인 살짝 감겨진 내 눈에 입을 맞추었고.. 곧 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맛 본 사탕의 입술은 그 어떤 사탕보다도 달콤하고..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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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사탕이를 졸라 결국 메이컵을 받았다. 겨우 붓이 몇 번 스쳤을 뿐인데.. 반짝반짝 빛나는 보랏빛 눈과 복숭아 및 뺨을 가진 나는 마치 동화 속 작은 공주님같다. 마법의 손을 가진 사탕이.. 사탕인 정말 못하는 게 없다. 나는 마치 연예인이라도 된 듯 들떠서는 평소 입지 않던 분홍빛 가디건을 입고 무지개빛 플레어 스커트를 팔랑거리며 사탕이 손을 꼭 잡고 온 거리를 누빈다. 폴짝 폴짝 뛰어 다니고 싶은 기분으로..
영화도 보고 좌판에서 예쁜 분홍 머리띠도 하나 사서 꼈다.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도 먹고 아이스크림을 빨며 거리를 걷는다. 그러다 눈에 띈 한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사탕이가 내 무릎에 살며시 머리를 대고 눕는다. 사탕이 얼굴은 햇볕을 담아 한없이 눈부시다. 사랑스런 사탕이..
“너.. 이렇게 내 옆에만 있어두 돼?”
차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한입 머금고는 사탕에게 묻는다. 늘 품어왔던 질문이다. 하지만 선뜻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순간 꿈이 사라질 것만 같아서…
“난 하나에 미치면 그것밖에 안 봐. 딴 건 아무것도 못 해.”
사탕이 하얀 아이스크림을 빨며 말한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고 싱긋 웃는다. 그런 사탕의 웃음이 전염된 나도 싱긋 웃어 보인다. 그래.. 사탕이는 지금 나에게 미쳐있다. 하지만.. 언젠가 사탕이가 다른 무언가에 미치는 날.. 사탕인 날 떠날 것이다. 문득 슬퍼진다. 하지만 다 잊겠다는 듯 함박 미소를 지으며 사탕의 따뜻한 손을 더욱 꼭 잡아본다. 사탕이도 덩달아 내 손을 꼭 잡는다. 파란 하늘이 붉게 물들고 다시 짙은 보랏빛으로 어두워질 때까지 우린 그렇게 함께 있었다. 손을 꼭 잡고.. 하염없이 걸으며..
4막> 이러다 미친다==============================
다음날 오후가 다 되어서야 눈을 떴다. 어제의 자유.. 어제의 그 심장이 아직까지 똑 같은 느낌으로 뛰고 있다. 그래! 오늘 하루쯤은 더 놀아도 된다. 오늘은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낼까? 나는 사탕이를 떠올리며 행복감에 흠뻑 빠지고 만다. 시계를 본다. 1시라니!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다. 매일 아침 8시 반에도 문을 열면 서 있던 사탕이.. 지금쯤 얼마나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급한 마음에 씻는 둥 마는 둥 세수만 어푸어푸하고 고시원 밖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본다. 그런데.. 이상하다. 사탕이 없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서 있던 사탕이 없다. 내가 너무 늦게 일어나서 그럴 것이다. 이제 내가 일어났다고 알려야 한다. 하지만 난 사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폰이 있는지도 모르고 집이 어디인지도 모른다. 늘 내 앞에 있던 아이니까 그런 건 물어볼 필요도 느끼지 않았더랬다. 하긴 나도 폰이 없다. 독하게 마음먹고 폰 까지 없애버린 지 1년이다. 사탕이가 나에게 연락할 방법도 없다. 사탕아.. 사탕아.. 다시 한번 사탕이를 불러본다. 마음속으로 수십 번을 불러본다. 하지만.. 사탕이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한달 뒤 또 시험이 있다. 나는 공부를 해야 한다. 하지만 사탕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공기처럼 늘 내 옆에 있던 사탕이.. 사탕인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날 이렇게 숨도 못 쉬는 바보로 만들어 놓고 도대체 어디로 가 버린 거야.
어쩜 사고가 났을지도 모른다.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죽지만 않았다면.. 죽지만 않았기를.. 울며 기도하고 한편으로는 원망도 해 본다. 또 다른 흥미거리를 찾았을지도 모르지. 예전 놀잇감이 귀찮게 할까 봐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거야. 그저 혼자서 자유롭고 싶어서.. 구속을 무지하게 싫어하는 녀석이니까..
나타나기만 해 봐라 뺨이라도 때려주리라..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나쁜 말을 잔뜩 해 주리라. 평생 아파할 말만 해주리라.
1주일간 그렇게 아팠고 사탕이를 원망했다. 하지만 1주일이 지나자 그 그리움이 너무 사무쳐 원망도 저주의 마음도 사라진 채 사탕이가 나타나면 아무말 없이 꼭 안아주리라. 사랑한다고 말해 줄 거라고 다짐해본다.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저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나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펜을 잡으면 사탕이의 이름으로 도배되는 책을 잡고 무슨 공부를 할 수가 있겠는가. 사탕에게 완벽히 미쳐버린 내가..
나는 결국 이야기 노트를 펼쳤다. 사탕이가 있는 세계를 나 혼자 만들어 보리라. 언젠가 사탕에게 보여줄 이야기.. 사탕이와 나의 이야기..
꼬박 한달간 난 현실의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오직 내 상상속에서만 살고 있었다. 내 상상속에서 만 잠을 자고.. 일어나고.. 밥을 먹었다. 끝없는 사각거림.. 사각사각 규칙적인 연필의 선율을 들어야만 안정이 되었다. 가끔은 밥을 먹는 것도 잊곤 했다. 나는 점점 말라간다. 하지만 미치는 쪽보단 이쪽이 나으리라.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면 나는 잠시도 어쩔 줄 몰랐으리라.. 어쩔 줄 몰라 미쳐버렸으리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나중에.. 사탕이가 날 찾아왔을 때 미쳐있는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으니..
그리고..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사탕이가 보고싶어 했던 내 글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사탕이가 없다. 나는 내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많은 곳에 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그 많은 사람들 속에 부디 사탕이가 있기를 희망하며..
그 즈음 나는 내 합격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주위로부터 쏟아져 오는 축하말들.. 가족들의 충족된 기쁨에 잠시 착란상태를 벗어난 듯 하다. 그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나를 더욱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이리라. 이제 나는 모든 것을 벗어나 일상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이제 난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정상적인 생각을 하며 사람들과 어울려 잘 살아갈 수 있으리라.
하지만 여전히 컴퓨터 앞에 앉으면 하염없이 메일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게 된다. 몇몇 독자들의 힘내라는 메일을 받아본다. 사탕일 꼭 만나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사탕이의 메일은 확인할 수 없다. 어쩜 영원히 오지 않을 지도 모를 것을 기다리는 이 막막함.. 난 여전히 사탕이만 생각하면 온 몸의 힘이 쭉 빠지고 끝없는 망상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그 때 내가 잠시 미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쩜 사탕은 내가 만들어낸 환영일지도 모른다. 실존하지 않는 환영.. 잠시 내 공상이 만들어낸 내 영혼의 오아시스 였을지도 모른다고.. 그렇다. 사탕은..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5막> 기다려===============================
나는 한 껏 해방된 기분으로 친구들과 쇼핑을 즐기고 영화를 보고 예쁜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식사를 한다. 오랫동안 미루어 오던 운동도 열심히 하고 책도 읽고 TV도 본다. 고시생시절엔 자유롭게 할 수 없었던 아주 일상적인 생활들.. 이젠 나도 할 수 있다는 이 평범한 기쁨에 푹 빠져든다. 혹시나 하며 메일앞에 매달려 있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 더 이상은 환상에 매달려 미치지는 않으리라. 그래.. 이렇게 살면 되는 것이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평생을 이렇게 안주하리라.
그러다 어느 날 컴퓨터 앞에 앉은 난, 무심코 메일을 확인한다. 정말 무심코라고.. 절대로 사탕이 따위는 염두해 두지 않을거라 그러고도 두근거리는 심장에 깜짝 놀라고 만다. 그리고 난 특별한 메일을 하나 받는다.
"뭐지?"
메일은 어느 출판사로부터 온 것이다. 내 글에 대한 출판을 상의하고 싶다는 메일.. 나는 메일에 적힌 전화번호를 조심스레 누른다.. 내가 쓴 책을 갖는다는 건 어렸을 적부터 꿈꿔왔던 내 막연한 꿈이었다. 평안하기만 하던 내 심장이 생소한 느낌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 느낌은 기분좋은 흥분을 수반하고 있다.
"내 메일보고 전화드렸는데요.. 강난주라고 합니다."
약속은 잡혔다. 나는 출판사로 향한다.
"아 난주씨. 반갑습니다. 러버출판사에 이하원이라고 합니다."
깔끔하게 생긴 출판사 직원이 나에게 악수를 청한다.
"네, 반갑습니다."
난 엉거주춤 이 남자의 손을 잡는다.
"난주씨의 경우는 아주 특별한 케이스죠.. 이런 일은 저도 처음입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본다.
"우선 이 삽화 좀 보시겠어요?"
나는 여러장의 종이를 받아든다. 아름다운 컬러의 그림들.. 하지만 그 삽화들을 한장한장 넘겨보며 잠시 아찔해지는 정신을 감당하지 못하고 의자로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아 .. 난주씨 괜찮아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대답을 할 수 없다.
"누군가 이 삽화를 우편으로 보내왔는데요.. 인터넷에 어떤 글을 이 삽화와 함께 출판해 달라고 적혀
있더라구요.. 그림이 하도 괜찮아서 난주씨 글을 찾아봤더니.. 이거 대박감이더라구요. 허허.."
이건 분명.. 나와 사탕이다..
레몬빛 메모장을 왼손에 든 나와.. 내 오른손을 꼭 잡은 사탕이..
독서실에서 울고 있는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고 선 사탕이..
분홍색 가디건에 무지개빛 스커트를 입은 나와 내 무릎위에 머리를 기댄 사탕이..
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사탕이 뿐이다. 나의 사탕이..
그림을 한장 한장 넘겨보던 내 손이 한 순간 멈췄다. 10장의 그림 중 마지막 한 장의 그림이 내 눈을 사로잡는다. 내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는 마지막 이 한 장의 그림.
언젠가 사탕과 함께 독서실 옆 벤치에 앉아 있던 날..
나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늘을 보고 있자니 바다가 생각났다. 넓고 넓은 바다.. 끝없는 푸르름이 넘실대는 바다가 그리웠다. 너무나 그리워서 문득 눈물이 솟았다. 사탕은 그런 나를 보며 하늘을 닮은 바다를 안다고 했다. 그 바다속은 하늘보다도 아름다우며 살아있는 보석들로 가득하다고..
그리고 언젠가.. 나에게 그 눈부신 보석들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함께 그 보석들속에서 재미나게 놀아보자 그랬다.
마지막 한 장의 그림은 그 날 사탕의 약속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다. 나와 사탕이 하늘을 닮은 바다속에 있다. 내가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아름다운 풍경속에서 사탕과 내가 손을 잡고 있다. 녹을 듯이 여유로운 푸르름과 무한한 자유를 가득 담은 마지막 그림을 보며 나는 터질 듯한 심장을 움켜쥐었다. 난.. 사탕을 만날 것이다.
집에 돌아온 난 책장 한 구석에 꽃혀있는 이야기 노트를 펼쳤다. 아직 미완성인 내 글을 완성시켜야 한다. 사탕이 내 글의 엔딩을 알려주었다. 비극은 없다. 내 글은 해피엔딩이다.
<Ending>
2006년 9월 15일.. 나는 몰디브행 비행기를 탔다. 나는 사탕이가 있는 몰디브로 간다. 사탕인 분명 거기에 있다. 분명히..
비행기가 뜬다. 지면이 저만치 멀어져 간다. 비행기는 구름을 뚫고 하늘과 충돌할 듯 날아오른다. 창문밖으로는 하얀 구름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나는 구름위를 날고 있다.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 손에 촉촉히 땀이 차오른다. 당장이라도 사탕을 볼 수 있을 것 만 같은 기분에 점점 숨이 가빠온다. 저 구름넘어에서.. 사탕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드디어 몰디브 공항에 도착한 난 보트를 타고 코코아 아일랜드로 향한다. 끝없이 펼쳐진 하늘빛의 바다.. 사탕이가 말하던 하늘을 닮은 바다를 눈 앞에 두고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감격에 조그맣게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다이버들의 보트가 가까워 온다. 다이버들이 하나 둘 잠수를 하고 있다. 나는 그들 한명 한명을 살펴본다. 내 눈은 바쁘게 사탕이만을 찾고 있다. 마스크와 호흡기에 가려진 그들 중에서 사탕일 찾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사탕이라 여겨지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심장은 터질것만 같은데 다리는 힘이 풀리기 시작한다. 불안감이 엄습하고 만다.
언제나 멋대로였던 사탕이.. 난 어쩜 영원히 사탕이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탕인 이제.. 나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무언가에 미쳐있을 사탕이.. 사탕은 떠났다.
나는 그렇게 허망하게 보트에 서서 공허한 시선을 아무렇게나 방치해버린다.
"난주 난주 강난주, 난주 난주 강난주.."
잠시 나의 귀를 의심한다. 어디선가 사탕의 목소리가 나를 부르고 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바다를 응시한다. 하늘 빛 바다위에 거짓말처럼 사탕이가 누워있다. 너무나도 편안한 표정으로 누워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얼굴가득 햇살을 담은 사탕이.. 언제나 그랬듯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박자를 맞추어 내 이름을 불러주고 있다.
"난주 난주 강난주, 난주 난주 강난주.. 만세! 드디어 만났다!"
"너.."
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술만 깨물고 만다. 언제나 날 찾아왔던 사탕이.. 이번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림 한 장을 전해주고 저렇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평범한 일상에서 나를 탈출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려고..
그 날 오후.. 우리는 쏟아지는 햇살을 따라 바다속을 미끄러져 들어갔다. 거대한 산호초와 빛나는 물고기들이 사탕이와 나를 감쌌다. 사탕이가 자유를 쫓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온 몸이 터질 듯 차오르는 자유의 느낌을 만끽하며 푸른 바다속으로 녹아든다. 내 손을 꼭 잡은 사탕이.. 사탕인 나에게 자유로 통하는 열쇠일지도 모른다. 고개를 들어 바닷물에 일그러진 햇살을 바라본다. 다시는..다시는 이 자유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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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노트를 덮었다. 사탕과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나는 Ending을 인터넷에 올리고 9월 15일이 되는 날까지 모든 준비를 마쳤다.
9월 15일 나는 공항에 들어서며 생각한다. 정말 사탕이를 만날 수 있을까? 결국 사탕이를 만나지 못한다면.. 그래 실망하겠지.. 슬플 것이다. 하지만 절대 후회하진 않을 것이다. 드디어 그 아이를 포기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비행기에 탑승 후 자리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본다. 곧 비행기가 이륙하고 구름위로 날아오르겠지.. 갑자기 두근대기 시작하는 가슴에 후.. 하고 큰 숨을 내쉰다. 왜 이리도 불안한 것일까. 나는 눈을 꼭 감는다. 하지만 그 순간.. 내 왼손이 완벽한 따스함에 휩싸임을 느낀다. 내 두근대는 심장을 잠재우는 익숙한 따스함..
"무서워?"
나는 눈을 뜨고 왼편을 바라본다. 사탕의 갈색 눈.. 언제 떠났었냐는 듯, 항상 내 옆에 있었던 것처럼 다시 날 찾아온 사탕이가.. 내 손을 꼭 잡아주고 있었다.
"나쁜 놈.."
나도 모르게 이 한마디가 툭 튀어나온다. 참고 참아왔던 눈물이 나도 모르게 주르륵 흘러내린다. 사탕은 조심스레.. 하지만 주저없이 내 눈물을 닦는다. 뭐하다 이제 온거냐고 막 소리치고 싶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냥 사탕을 보자마자.. 이 따스함을 느끼자 마자.. 내 몸에 박혀 있던 모든 원망은 없던 것이 되고 만다.
"멋진 엔딩이야.. 맘에 들어."
사탕은 내 얼굴을 보며 고유의 미소를 지어보인다.
"에잇! 니 소설이랑 똑같이 재연하려구 했는데.. 더 이상은 못 기다려.."
곧 굉음과 함께 비행기가 이륙한다. 하지만 난 아무런 불안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내 옆에는 내 손을 꼭 잡고 있는 사탕이가 있으니까..
나는 지금 하늘을 날고 있다. 끝없이 하얀 구름위를 날고 있다. 결국 내 소설은 완벽했다. 사탕이를 조금 일찍 만났다는 것 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