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시각 2시30분.
밤이 깊었습니다.
오늘 제 인생에 어떤 전환점이 될지 모르는
미묘한 일을 시작하게 되어서
심히 마음이 복잡하네요.
그래도 일단은...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
============================ 화이팅 ==========================
어느새 침대 커버를 꼭 움켜쥐고
작게 소리치고 있는 그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난
최대한 빨리 결론을 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지만
이렇다할 답은 나오질 않았다.
기억
- ..... 미안, 역시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
요즘 정신없는 일도 너무 많았고....
좀 갑작스럽기도 하고....
나도 그녀가 싫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바라는 형태의 대답을 내놓기엔
마음에 확신이 부족했다.
이도저도 아닌 내 대답에 화가 났는지
한나는 톡 쏘듯 한 마디를 던지고 병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한나 - 오빠처럼 우유부단한 사람... 제일 싫어.
=탕=
영 뜬금없는 계기로 두 번째 된서리를 맞게 된 나.
내가 댄스 연습을 그만두자고 할 때 마다
= 내가 오빠한테 흑심 있어서 이런 것 같아요? =
라고 당돌하게 되묻던 그녀의 모습과
지금 그녀의 모습이 마음속에서 미묘하게 엇갈렸다.
하아.... 이것 참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러는지....
난 알다가도 모를 그녀의 속내에 고개를 저으며
내일의 일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오후,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가신 뒤
화장실이 가고 싶어진 난
침대 옆에 놓인 보조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기억 - ........
짜....짧다. 손이 닿지 않는다.
난 침대 끝에 아슬아슬하게 엉덩이를 걸친 채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보조기와의 거리는 아직도 미묘하게 부족했다.
괜한 모험을 하기 보단 안전제일을 택한 난
엉덩이 쪽부터 조심조심 침대에서 내려섰다.
힘들게 두 발을 딛고 뒤로 돌아선 순간
어느새 내 앞에 와있는 보조기.
흠칫 놀라 올려다 본 곳엔
한나가 조금 찌푸린 얼굴을 하고 서있었다.
기억 - 와....왔어?
한나
- 네~. 집에 가서 생각해보니까
오빠가 분명한 답을 줄 때까진
계속 오는 것 밖에 대책이 없더라고요.
아~ 이거 정말 너무 불공평하지 않아요?
가위바위보 하는데 뭐낼지 다 보여주고 하는 것 같아.
이래서 먼저 고백하면 안 되는 건데....
그렇게 푸념 아닌 푸념을 쏟아놓으며
익숙한 손놀림으로 링거며 슬리퍼를 챙겨주는 그녀.
하루 이틀 본 모습도 아닌데 왜 새삼스레 코끝이 찡해지는 걸까?
절대 안 올 거라 생각했던 그녀가 내 앞에 있어서?
단지 그게 반가운 걸까? 아니면...
기억 - 한나야... 미.... 미투.
한나 - 네?
기억 - 미투라고.... 미투....
한나 - 미투? 미투가 뭐예요?
기억 - 미...미투 말이야 미투! 엠, 이, 콤마, 티, 오, 오....!
한나 - Me, too?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 아!!
그녀는 그제야 어제 했던 말이 생각났는지
손바닥에 주먹을 치며 날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내 날 향해 뿌루퉁 볼을 부풀려 보이는 그녀.
한나 - 어쩜.... 무슨 대답을 그렇게 밖에 못해요?
기억 - 응? 왜.... 왜? 네가 그랬잖아.... 미투면...
한나
- 그건 내용을 예로 든 거죠!
진짜 그렇게 대답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기억 - 아.... 그런 거였어? 난 이런 일이 처음이라.....
한나 - 진짜 센스 제로에 로맨스도 제로에 위트도 제로에....
기억 - 미안. 금방 다른 말을....
듣고 보니 그렇다는 생각이 든 난
다른 적당한 말을 찾아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이런 내 말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말을 이어가는 그녀.
한나
- 아.... 진짜 난 왜 이런 대답에 감동하고 그러는 거야?
오빠랑 있다보니까 나까지 이상해졌잖아요!
진짜... 씨.... 뭐야 이게.... 바보!
눈물을 참으려는 건지
천장을 올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리던 그녀는
이내 날 향해 옆 침대에 있던 쿠션을 집어던졌다.
기억 - 억? 잠...잠깐....
내부 구조 붕괴로 인해 제로나 다름없는 방어력을 가지게 된 난
그녀의 쿠션 공격에 심각한 충격을 받아 침대에 주저앉았고,
그런 날 한나가 와락 끌어안았다.
한나 - 고마워요. 오빠... 고마워요...
기억 - 아... 잠깐 한나야, 아파. 아프다니까... 정말 아파....
한나 - 분위기 깨지 말고 좀 참아요! 남자가 그런 걸 가지고.....!
기억 - 아....네.
그렇게 난 우린 연인이 되었다.
민아와 안군이 사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7월 초.
난 40여일간의 입원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담당 의사도 인정한
=짐승 같은 회복력= 덕에
일상생활에서 불편을 못 느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된 난
재활훈련 겸 취미생활로
한나와 함께 댄스 스포츠를 시작했다.
연습장소는 그녀의 집 인근에 있는 무도학원으로
수업이 없는 낮 시간을 빌려 쓰기로 했다.
지금 도전중인 종목은 블루스.
아무리 상태가 나아졌다곤 해도
탱고처럼 격한 춤을 추기엔 무리가 있었기에
제일 잔잔한 춤을 택한 것이다.
한나 -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오늘 몸 상태는 어때요?
기억 - 아주 좋아. 아침에도 가뿐하게 일어났거든.
한나 - 다행이네요. 그럼 조금 더 빨리?
기억 - 좋지, 하나, 둘, 하나, 둘, 하나, 둘, 셋, 넷....
매일 조금씩 배워나가는 블루스 스텝처럼
한나와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신선하고 즐거웠다.
처음엔 민아 생각에 마음이 무겁기도 했지만
갈 때까지 가버린 지금 상황에서
더 이상 그런 데 신경 쓸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현재에 충실하면 그걸로 될 일이다.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
잔잔한 스텝을 밟아가던 중,
그녀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나 - 오빠.
기억 - 응.
한나 - 이러고 있으니까 오빠 심장소리 들려.
기억 - ....... 그래?
한나 - 응.... 콩콩콩콩.... 하고....
기억 - 두근두근이 아니라?
한나 - 두근두근이라기엔 너무 작아요. 이건... 콩콩콩이야.
기억 - .... 네 심장소리는 어떤데?
한나 - 글쎄요? 들어볼래요?
기억 - ....... 사양할래. 듣기도 전에 기절할 것 같거든.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소리를 듣는다니....
상상만 해도 정신이 아찔해진다.
하지만 왠지 도전해보고 싶어지는 걸....
괜히 거절했나?
한나
- 응? 갑자기 콩콩콩에서 두근두근으로 바뀌었어요.
지금 야한 생각했죠?
기억 - 아냐. 그냥 심장소리 들어보면 어떨까 싶어서.....
한나 - 어쩜, 그걸 진짜 할 생각이었어요? 변태!
기억 - 네, 네가 들어보라며?
한나 - 당연히 농담이죠! 어쩜 음흉하긴...
그녀는 종종 이런 식으로 날 놀리곤 한다.
도통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그녀의 말들.
어떻게든 되받아 쳐보려 해도 늘 당하는 건 나지만
썩 기분 나쁜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 철렁한 두근거림이.... 너무 사랑스럽다.
블루스 연습이 어느 정도 단계에 다다르면서
우린 기본스텝에서 벗어나
음악에 맞는 안무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일단 후보로 선정된 곡은
Sam Brown의 =Stop= 과
Laura pausini의 =It's not good bye=였다.
기억
- Stop은 너무.... 좀 끈적거리지 않아?
역시 It's not good bye가....
한나 - 아녜요, 뭐니뭐니해도 실제 써먹기엔 Stop이 최고라고요.
기억 - 써먹어? 어디다가?
한나 - 당연히 보여주는데 쓰죠.
기억 - ...... 어디서?
한나 - 나이트에서요. 요즘 블루스타임에선 Stop이 대세에요.
기억 - 그.... 그런 용도로 연습하자고 한 거였어?
한나
- 미국이나 유럽 같은 데라면 파티에서 써먹겠지만...
한국은 그런 게 없잖아요.
다른 사람들한테 뽐내려면 그 수밖에 없죠.
기억 -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좀...
한나
- 열심히 배웠는데 그냥 묵혀두면 아깝잖아요?
연습해서 한 번 뽐내줘야죠.
결국 그녀의 설득에 못 이겨
나이트 블루스 타임용 안무를 연습하게 된 나.
이러쿵저러쿵 불평은 해도
그녀와의 댄스연습은 즐거운 일이었고,
보름간에 걸친 특훈을 마친 난
결국 그녀와 나이트를 가게 되었다.
서울 소재 P나이트.
입구에 들어서기에 앞서
새로운 세계를 접한다는 긴장감에 몸이 떨려왔다.
한나 - 뭐해요? 안 들어가고?
기억 - 음.... 아무래도 처음 가는 거라... 좀 긴장이....
한나 - 에? 오빠 나이트 처음 와 봐요?
기억 - ....... 유감스럽게도.
한나
- 하긴... 그럴 것 같긴 하네요.
별 거 없으니까 빨리 들어가요.
그렇게 난 나이트로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