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4.24, 청담동-
'정말 악취미도 가지가지군..'
진철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황금같은 주말, 게다가 커플로 인산인해를 이룬 까페에서 만나자고 하는 노친네라니..! 게다가 상대방은 약속시간을 벌써 30분이나 넘긴 상황이었다.
'쳇, 너무하는군.'
마음같아선 당장에라도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상대는 진철이 마음대로 바람맞힐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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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철이 거의 목석이 되어갈 무렵, 입구에는 검은 양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사내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곧장 진철에게 다가왔다.
"김진철 씨 되십니까?"
진철은 아무 말도 안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상대방은 좀 겸연쩍은 듯 헛기침을 해댔다.
"비서실장님께서 약속을 지키지 못하실 것 같다고 이걸 대신 전해드리랍니다."
검은 양복의 사내는 품 속에서 노란 서류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진철이 물었다.
"이게 뭐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상대방은 서류를 건네자마자 사라져버렸다.
"젠장, 엿이나 먹으라지..!"
서류 속에는 백만 달러짜리 수표 한 장과 대통령이 직접 쓴 감사편지, 그리고 도영파의 두목 강도영을 비롯한 부하들의 인적사항과 중요 사항이 낱낱이 적힌 서류가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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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철의 차는 청담동을 벗어나 영동대교로 막 진입하고 있었다. 오늘 그가 만나기로 한 사람은 김관석 비서실장이었다. 비서실장과 만나는 건 그의 약혼녀인 영신의 몫이었지만, 공교롭게도 영신은 세미나 관계로 미국에 가 있었다. 진철은 불현듯 영신의 빈 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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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철의 차가 까페를 벗어나 다리에 이르기까지, 주위 건물 옥상에 있는 전광판은 마치 합창을 하듯 단 하나의 소식만을 토해내고 있었다.
'국민당 198석 확보! 여당 의석수 3분의 2 확보로 향후 정국에 큰 파란 일듯'
정치란 때로 애들 장난보다 못한 거라고 진철은 생각했다. 겨우 세 명의 정신나간 양아치들의 손에 대한민국의 미래를 걸어야 했다니..교회 사건 이후, 세 문제아들은 남해의 어느 외딴 섬에 갇혀있다는 얘기만 들릴 뿐이었다. 진철은 짐작했다. 그들은 아마 이번 정권이 끝나기 전엔 절대로 그 섬에서 나오지 못할 거라고..진철은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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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5.5, 한남동-
소형 트럭 한 대가 대윤의 집 앞에 멈추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차고의 문이 열리더니 트럭이 그 속으로 들어갔다. 트럭에서 내린 두 사람은 화물칸을 열어 준비한 물품들을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대형 탁자, 파티 용품 등 종류도 가지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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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께서 말씀하신 게 저 친구들입니까?"
"그래. 나같은 부류는 항시 주목의 대상이니까 상관없다 쳐도, 귀한 손님들이 오시잖나. 그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부른 거네. 나 말고도 고객들이 꽤 있다더군."
저택 2층에서 상택과 대윤이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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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맞아요?"
"와, 집 증~~말로 크다!"
정장 차림의 한 무리의 여자들이 대윤의 집 앞에 와서 떠들고 있었다.
"내 다른 사람은 별로 걱정 안하는데, 선해인씨?"
"예, 수간호사님."
"여기선 제발 그 촐싹거리는 성격 좀 버려주길 바래요. 내가 어려운 부탁 하나요?"
"아, 아뇨. 전혀.."
강지숙은 선해인에게 재차 다짐을 받았다. 미리 엄포를 놓았지만,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았던 탓이었다.
"딩동!"
해인은 그 새를 못참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어머, 재벌집도 벨은 똑같네?"
지숙의 마음속에 암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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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객은 오대윤을 비롯하여 영신의 병원 직원들과 진철의 회사 동료들, 그리고 블랙 나이트의 나머지 멤버들이 전부였다. 결혼식 무대가 대윤의 집 정원인지라 규모가 너무나도 작았지만, 이날의 주인공들은 그런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다. 피아노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주례를 맡은 전재윤 앞으로 예복 차림의 진철이 먼저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여기저기서 소근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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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영신은 한 노인의 손에 이끌려 진철에게로 다가갔다. 그 노인은 영신 아버지와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영신이 결혼한다고 하자 머나먼 이국땅에서 부랴부랴 찾아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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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과 신부가 나란히 서고 주례가 시작되자, 식장의 한 켠에서는 떠들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과 이를 막으려는 사람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원장님 너무 이뻐요! 화이팅!"
"선 간호사! 좀 가만히 있을 수 없어요?"
강지숙은 얼굴이 벌개져 있었다. 지숙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포기한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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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웁!"
난데없이 영신이 헛구역질을 하자, 재윤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부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속이 안 좋은가 봅니다. 조금 있으면 주례 끝나니까 그때까지만 참길 바랍니다."
하지만,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영신이 연달아 헛구역질을 하자, 하객의 절반은 사태(?)를 짐작했다.
"어머나, 어떡해! 원장님 속도위반하셨나봐요! 웁~!"
지숙은 황급히 해인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하객들의 시선은 이미 해인에게로 쏠려 있었다. 재윤이 상황을 수습한답시고 하는 말이 더욱 걸작이었다.
"흠흠! 내 수많은 결혼식을 봐 왔지만 이토록 용감무쌍한 신랑신부는 처음 봅니다.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았지만 2세를 봐서라도 이만 끝내야겠군요."
"우하하하!!"
여기저기서 웃음보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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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철이 녀석, 너무 행복해 보이지 않냐?"
"그래 보이긴 합니다만,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대윤과 유성은 저택의 창가에 서서 이제 막 부부가 된 진철과 영신이 소형 볼보를 타고 공항으로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상관이 없다니..너도 이제 결혼해야 할 나이가 되지 않았냐?"
유성은 아무런 대답이 없이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니 맘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영이라는 아이, 3년 넘게 찾는다고 광고를 해도 아무 소식이 없질 않느냐?"
유성은 그 말에 눈을 부릅떴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언젠간..언젠가는 좋은 소식이 있겠죠. 전 절대로 포기 안합니다."
"그래, 부디 그 마음 변치 마라. 기다리다 보면 네 말대로 되겠지. 참, 조금 있으면 혜연이도 온다고 했으니까, 다같이 저녁이나 먹자꾸나."
"예,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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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5.8, 상도동-
"세~탁! 세~~탁!"
태원빌라 바로 옆 상가에 위치한 세탁소의 주인이 빌라 곳곳을 돌면서 내지르는 소리였다. 매일 아침 일곱시에 빌라 전체를 돈다고 해서 빌라 주민들이 그에게 붙인 별명은 '자명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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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자명종이 지나가네~~"
"그래. 오늘은 일요일이니까 학교 쉬겠네?"
"당연하지, 자기야."
혜연은 침대 속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놓은 채로 중얼거렸다. 혜연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독립을 선언했고, 등록금을 제외한 생활비 전부를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면서 충당하고 있었다. 혜연이 친한 동성 친구들을 꼬드겨 완벽한 작전을 세운 덕에, 대윤은 자기 딸이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딸의 동거남이 비서실 직원일거란 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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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얼큰한 해장국 대령이오~~!"
"냄새 죽이네. 역시 수원씨밖에 없다니까? 알아서 해장국도 끓여주고 말야."
혜연은 웃으면서 수원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어허, 까분다."
"왜, 싫어? 그럼 입이라도 맞추랴?"
혜연의 그칠 줄 모르는 애정행각은 금세 제동이 걸렸다.
"식탁에서 딴 짓하기 없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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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원, 그의 이력은 다소 특이했다. 신영백화점 비서실에 입사하기 전, 그는 촉망받는 안기부 요원이었다. 하지만 간첩 혐의를 받은 한 대학생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수원을 비롯한 여러 명의 직원이 간접적으로나마 고문에 가담했음이 밝혀짐에 따라, 여론 무마용으로 이들은 사표를 쓸 수밖에 없었다. 수원이 안기부에 들어간 지 5년 3개월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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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연이 수원과 인연을 맺은 데는 그의 전직이 큰 역할을 했다. 혜연이 그에게 부탁하고자 한 것은 한 여자의 행방을 찾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었고, 드디어 마무리 단계에 와 있었다. 그 와중에 둘은 언약식을 할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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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영등포에 있어."
수원은 밥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혜연은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어?"
"니가 찾고 싶어하는 여자말야. 영등포에 있다구."
"영등포에서..뭐 한대?"
"윤락가."
혜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마치 심한 충격을 받은 듯, 그녀는 밥 먹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 했다.
"나 거기로 데려다 줘. 언니가 어떻게 사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봐야겠어."
"우선 밥부터 먹고.."
"지금 밥이 문제야? 난 복장터져 죽을 거 같은데!"
항상 밝기만 한 혜연이 눈물어린 얼굴로 서 있었다. 수원의 기억에 혜연의 이런 표정은 난생 처음이었다.
"가서 뭘 어쩌려구 그러지? 그 여자가 널 보면 얼마나 비참해할지 생각은 한 거야?"
수원은 혜연을 책망했다. 수원이 알기로, 윤락가 여성들의 대다수는 '자발적인' 케이스가 아니었다. 무턱대고 혜연과 함께 거기 갔다가 예측 불가능한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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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급한 건, 한시라도 빨리 그 여자를 빼내오는 거야.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라고 장담 못하니까. 그 여자 가족관계는 어떻게 돼?"
"가족은..아무도 없어."
"고아란 얘기야?"
"내가 알기론 그래. 언닌 고아원에서 자랐으니까."
"그래, 우선은 그 정도면 됐어. 헌데 말야, 하나 물어봐도 돼?"
"뭘?"
"너랑 그 여자랑 도대체 무슨 관계인지."
"비밀 지킬 수 있어?"
"니가 입 다물라면 죽을때까지 그래야지."
"나한테 이복오빠가 하나 있는 거 알지? 박유성이라고.."
"어, 그래. 그런데?"
"유성이 오빠 애인이야."
"뭐?"
혜연의 말은 현재형이었다.
"오빠가 이제까지 안해본 일이 없어. 언니가 없어진 다음부터 지금까지 틈만 나면 전국을 찾아 해멨거든. 오빠도 느끼는 것 같아. 언니가 뭔가 잘못되었으리란 걸 말야. 그래도 절대로 포기 안할 사람이야. 우리 오빠는."
'윤지영 당신..참 복받은 여자로군.'
수원은 속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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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5.9, 영등포-
거리의 건물들이 하나같이 어둠에 휩싸인 가운데, 블이 켜진 곳이라곤 영등포 역사와 근처의 빨간 네온사인이 줄줄이 켜진 집들 뿐이었다. 지나가는 발길이 뜸한 가운데, 신형 벤츠 한 대가 길가에 주차했다. 아슬아슬한 길이의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벤츠에 접근했다.
"오빠! 한번 놀다 가. 내가 잘 해줄께!"
남자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야! 너 말고, 니 주인 어딨어? 내가 좀 보잔다고 그래."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얼굴에 칼자국이 깊게 새겨진 남자 하나가 다가왔다. 포주가 분명했다.
"당신이 날 불렀소?"
포주는 벤츠를 가리키며 물었다. 차에서 내린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포주는 우선 차의 번호판을 살폈다. 렌트카 같아 보이진 않았다. 금목걸이 체인에 노랗게 염색한 머리..이건 누가 봐도 졸부의 자식이거나 대기업 회장의 망나니 자식이라고밖엔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돈냄새를 감지한 포주가 물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매우 친절했다.
"누굴 불러드릴까요? 말씀만 하십쇼. 금방 대령해 올리겠습니다."
노랑머리의 남자는 시종일관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다른 애는 됐고. 내 친구가 저번에 여길 왔었거든? 근데 쥑이는 애가 하나 있다고 하던데 말야. 몸매 빵빵하고 얼굴도 이쁘고. 이름이 갑자기 기억이 안 나네? 윤..뭐라고 했는데 말야."
조건에 맞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다. 포주는 연신 굽신거렸다.
"아, 지영이 말씀이군요. 금방 불러드리겠습니다."
"잠깐만!"
"예?"
"걔 얼마면 돼? 몸값 말야."
포주는 생글생글 웃는 겉모습과는 달리 속으로는 미친놈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포주생활 8년에 여잘 아예 사겠다는 놈은 처음이었다.
"그게..좀 비쌉니다. 석 장입니다."
"삼천?"
"아뇨, 그 열배입니다."
포주는 어디 돈 있으면 내보라는 식으로 튕겼다. 제아무리 대기업 2세라고 해도 반쯤 미치지 않고선 이런 일에 그만한 돈을 내놓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로선 엄청 횡재하는 셈이었다.
"뭐? 이런 미친 새끼!"
남자는 포주의 배를 걷어찼다. 포주는 땅에 엎어진 채로 자기 앞에 서 있는,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을 듯한 남자를 보며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남자는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포주에게 내던지며 말했다.
"이거랑 여자랑 바꾸는 게 어때?"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여자 하나가 탄성을 질렀다.
"저거 다이아잖아?!"
"의심나면 보석상 가서 알아보든가?"
포주는 조금전까지 지니고 있던 모욕감 따윈 씻은 듯 사라져버렸다.
"마, 맞겠죠. 조금만 기다리십쇼.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포주는 골목으로 들어가다 말고 한 여자에게 말을 건넸다.
"야, 이거 진짜 맞냐?"
"아저씨 바보에요? 다이안지 아닌지 깨보면 알잖우."
"참, 그렇지."
포주는 돌을 아무거나 집어들고 반지를 향해 내리쳤다. 다이아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포주는 남자를 돌아보며 멋쩍은 듯 웃음을 지었다. 남자는 그를 비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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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분 쯤 지나자, 포주가 남자에게로 여자를 끌고 나왔다. 남자가 물었다.
"니가 윤지영이냐?"
여자는 아무 말도 않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서 대답 못해?"
포주가 손을 치켜들자, 남자가 나섰다.
"내 여자한테 지금 뭐하는거야?"
"앗, 죄송합니다."
"너도 여기 있기 싫지? 나랑 낙원으로 가자. 뿅 가게 만들어 줄 테니깐."
지영이라는 여자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 마치 끌려가듯 차의 조수석에 탔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으며, 심하게 울었는지 눈 주위가 퉁퉁 불어 있었다. 남자가 지영을 차에 태우고 우회전해서 사라지자, 거리는 다시 예전처럼 변했다. 다만 포주만이 반지를 손에 쥔 채로 싱글벙글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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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변을 질주하던 벤츠가 멈춘 곳은 어느 다리 밑이었다. 정면으로 백 미터쯤 떨어진 공터의 어둠 속에 소형차 한 대가 주차해 있었다. 남자는 벤츠의 헤드라이트를 한번 켰다 켜더니,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요."
'뭘 기다리라는 거지?'
지영은 뭔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남자가 맞은편의 차로 걸어감과 동시에 한 여자가 소형차에서 내려 이리로 다가오는 것이 지영의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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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을 태우고 온 남자는 다름아닌 수원이었다.
"용우야, 도와줘서 무지하게 고맙다. 근데 반지는 어떻게 구한거냐? 아무리 봐도 진짜던데."
"며칠 전에 부잣집 여러 군데 털린 거 아십니까?"
"혹시 도곡동 얘기냐?"
"예, 그거 내가 한 겁니다."
"뭘? 도둑질을 니가 했다고?"
"정확히 말하면, 전문가한테 시킨 겁니다. 기껏 금고를 열었는데 비밀 문서만 가져가긴 좀 싱겁지 않습니까? 그래서 수고비 대신 금고에 있는 귀중품은 알아서 하라고 했죠. 반지는 그 과정에서 제가 슬쩍한겁니다."
장광설을 늘어놓는 그는 수원이 안기부에 근무하던 시절 그의 2년 후배였다.
"근데 선배도 이렇게 꾸며놓으니까 진짜 양아치 같습니다?"
"너 지금 그 말 재밌으라고 하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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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은 자신도 모르게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얼굴이 눈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마치 쇠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혜연이 뭐라고 말을 하려던 찰나, 지영은 그녀를 외면하고 돌아섰다.
"언니, 나 몰라요? 나 혜연이에요. 오혜연이요!"
지영은 잠시 심호흡을 한 뒤, 혜연을 정면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아, 그쪽 아가씨 이름이 오혜연이군요.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죠?"
"언니, 혹시..자격지심이나 뭐 그런 거예요? 나한테까지 그럴 필요 없잖아요?"
"나참, 살다살다 별 꼴을 다 보네. 척 보니까 귀티가 나는데, 사람 갖고 장난치는 거 아냐. 알겠어?"
지영은 혜연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대며 위협조로 말했다. 멀리 차 안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수원이 혀를 찼다.
"이런이런~~, 연극하는 게 빤히 보이는군. 너무 어설퍼."
옆 자리의 후배가 끼어들었다.
"보아하니 헤어진 자매 같은데, 자격지심 때문에 저러는 거 아닙니까?"
"틀렸어."
"예? 그럼 뭐죠?"
"니가 핵심은 잘 짚었는데, 저 두사람 친자매는 아냐. 하지만 그 이상으로 서로를 아껴주던 사이였지."
"그럼, 혹시 레즈..?"
"에라, 이 짜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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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안에서 약간의 소동이 벌어지고 있을 그 시간에, 두 여자 사이의 분위기는 냉정과 열정을 오가고 있었다.
"언니, 나 언니가 왜 그러는지 알아요. 나한테 피해가 갈까봐 그러는 거라면,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내가 다 알아서.."
"헤이, 철부지 아가씨. 날 다른 누구랑 착각한 모양인데, 아까워서 어쩌냐? 괜히 비싼 다이아 하나만 날렸으니 말야. 지금이..새벽 두 시네. 제기랄, 이 시간이면 벌써 세 번은 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어디서 굴러먹다 온 잡놈..아니지, 반지까지 줬으니까 VIP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난 택시타고 집에 갈 테니까 나랑 하고 싶으면 영등포로 오라고 그래. 내 말 이해했지? 그럼 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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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실패입니다. 선배님."
"아직 속단하긴 이르지. 넌 일단 전화박스에 가 있다가 내가 신호하면 수화기를 집어들어."
"그냥 그러기만 하면 됩니까?"
"그래, 나한테 다 생각이 있어."
수원은 거칠게 차를 몰아 순식간에 지영의 앞을 막아섰다. 놀란 지영이 욕을 퍼부었다.
"아니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차에서 내린 수원은 지영을 응시하며 말했다.
"윤지영씨, 연기는 이제 그만 하죠? 훤히 보입니다."
지영은 잠시 주춤했지만 지지 않고 맞섰다.
"그래. 내가 졌다, 졌어. 내가 그 이름도 똑같은 여자로 행세하면 나한테 뭘 해줄거지?"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당신의 옛 애인, 아니지..당신은 그렇게 생각할 지 몰라도 그 상대는 아직도 당신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박유성씨 아시죠?"
순간 지영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수원은 그걸 얘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저기 전화박스 안에 있는 남자 보이시죠? 내가 신호하면 곧바로 박유성씨 집에 연락해서 이리로 오라고 할 겁니다. 만일 그가 당신의 현재 모습을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상상만해도 짜릿하지 않습니까?"
"오빠, 제발 그만해."
옆에서 혜연이 말렸지만 수원은 요지부동이었다.
"혜연이 넌 가만히 있어. 내 식대로 할 테니까."
"당신 도대체 뭐야?"
"윤지영씨 당신하고 여기 있는 혜연이 둘만 아는 어떤 비밀같은 거 하나만 얘기하면 됩니다. 어려울 거 없잖습니까? 아님 신호를 보낼까요?"
수원은 지포라이터의 뚜껑을 열었다.
"라이터의 불을 켜는 게 신호입니다. 3초의 기회를 드리죠. 하나..두울..!"
"그, 그만해! 제발.."
'게임 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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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타났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요. 한번 거기 발을 들여놓은 이상,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죠. 괜히 다른 사람들까지 입장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내 말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날 그냥 보내주세요."
벤츠 안에는 수원과 지영, 둘뿐이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당신..순진한 거에요, 아님 멍청한 거에요?"
"앞으로 한 달 안에 영등포 윤락가는 자취를 감출 테니까 말입니다."
지영은 잠시나마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 말 농담이죠? 차라리 예수가 저 한강 밑에서 걸어나온단 얘길 믿고 말죠."
수원의 표정은 너무나도 진지했다. 지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차 물었다.
"정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경찰로 안되니까 이젠 군대라도 동원하나요?"
'그들이 누군지,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겁니다.'
...
...
...
"실례되는 질문입니다만, 마약에 손댄 적 있습니까?"
"네, 처음에 잡혀갔을 때요. 하지만 그 뒤론 전혀 아니에요. 뭐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요."
"불행중 다행입니다. 그리고, 영등포에서 사신 지는 얼마나 되셨죠?"
"그러니까..3년 하고 7개월이요."
"혹시, 강도영이란 이름을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그 이름을 어떻게 잊겠어요?"
"경찰이 몇 번이나 그놈을 잡으려고 하다 허탕만 쳤는데,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도주로를 파악하지 못해서랍니다. 행여라도 그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으면 얘기해주셨으면 합니다."
"글쎄요, 경찰 수백명이 몰려와도 그 인간은 못잡아요. 왜냐고요? 수십채의 건물이 뻥뻥 구멍이 뚫려서 동서남북 어디로든 나갈 수 있는 데다가, 그는 일당백이거든요. 보통의 경찰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에요. 정말로 군대가 총들고 설치면 또 모를까..이거면 됐나요?"
"덕분에 중요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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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츠에 탄 후배가 점차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수원과 혜연, 그리고 지영 또한 소형차에 탄 뒤 어딘가로 향했다. 새벽이 되어 차츰 어둠이 걷힐 무렵, 수원 일행은 한남동 주택가로 들어서려다 경비를 이유로 입구에서 차단당했다. 낡은 소형차가 문제였다. 혜연이 창 밖으로 얼굴을 비추자 그제서야 얼굴을 알아본 경비 하나가 이들을 통과시켰다.
"길거리를 전세낸 것도 아닐진데, 너무들 하는군."
"그러게 말야."
회장의 집에 거의 다다르자, 지영의 가슴속은 스멀스멀 두려움이 가득찼다.
"다 왔습니다. 내리시죠."
"아, 아뇨. 난 여기 있을게요."
수원은 약간 한숨을 쉬었다.
"아깐 그렇게도 당당하더니, 어지간히 겁이 많군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회장님께는 이미 마음의 각오를 시켜드렸으니까 말입니다."
"걱정 마, 언니. 돌이 날아오면 내가 막아줄게."
...
...
...
문이 열리고, 세 명의 남녀는 정원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서 회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누가 왔냐?"
수원이 대답했다.
"저하고 혜연 아가씨, 그리고.."
"지영이 말이냐?"
"예, 회장님."
거실에서 나온 대윤은 잠깐 일행을 보더니, 2층으로 올라가며 말했다.
"양 비서,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네. 자넨 혜연이하고 거실에서 쉬게나. 그리고 지영이 너, 넌 내 방으로 좀 올라와라. 할 얘기가 있다."
지영은 약간 두려운 듯 수원과 혜연을 돌아봤지만 별로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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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이 너, 이제까지 사창가에 있었다면서? 설마 그런 몸뚱아리로 내 아들과 어떻게 해 보려는 건 아니겠지?"
지영의 예상은 얼추 맞아떨어지는 듯 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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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아, 거기 좀 앉아서 내 얘기 좀 들어라."
"예.."
갑자기 대윤은 태도를 바꿨다. 하지만 잔뜩 주눅이 든 지영은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너, 유학 보내줄까?"
"예? 아뇨, 전.."
"내 얘기 끝까지 들어봐라. 아까 한 얘긴 널 떠본거고, 사실 난 니가 지난 수년간 어디서 뭘 했든간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허나 나 하나만 초연하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 내 아들놈이야 나랑 같은 마음이겠지만, 만에 하나 유성이 그 녀석이 니 과거를 걸고 넘어지면 내가 걜 두드려 패서라도 기어이 니 신랑으로 만들어 놓을 각오가 되어있으니까 말야. 하지만..갑자기 목이 마르구나. 물 한컵만 가져다 주겠니?"
"예."
대윤은 지영이 가져온 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 말을 이어갔다.
"하여간 늙으니까 말도 길게 못하겠군. 아, 하던 얘기 마저 해야지. 너도 잘 알겠지만, 난 신영그룹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건 곧 내 집안이 어떻게 굴러가느냐에 따라 그룹의 주가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는 뜻이지. 유성이가 먼저 혼인을 하면 널 여러 사람들한테 소개시키는 건 당연한 일이고, 혜연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만일 그 와중에 니 과거를 아는 이가 단 하나라도 있다고 한다면..상상하기조차 싫은 일이지."
지영은 이쯤에서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님, 절 며느리로 인정해주시는 것만도 감사합니다. 더는 민폐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영은 눈물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 그것을 본 대윤은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너 뭐하는 버르장머리냐? 내 얘기 아직 안 끝났다."
"예, 아버님."
"아버님이란 소리 듣기 좋군, 내 본론만 말하지. 지영이 너, 성형수술하는 건 어떠냐?"
"예?"
"구태여 얼굴을 다 뜯어고치지 않아도, 코나 눈 모양만 살짝 변화를 줘도 전혀 딴 사람처럼 보인다는구나. 니 생각은 어떠냐?"
"저는..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당분간 외국에 좀 나갔다 오너라. 돈은 내가 댈 테니까."
"글쎄요, 전.."
"이건 니 의무사항이야. 적어도 내 며느리라면 어느정도 교양은 쌓아야 하지 않겠냐? 내 말이 틀렸냐?"
"아닙니다."
"생각같아선 유성이랑 같이 보내고 싶지만 애들 가르치는 녀석을 멋대로 내보낼 수는 없는 일이니 그건 니가 좀 이해해라."
"예, 아버님."
"일주일 내로 어디든 니가 가고 싶은 델 골라서 나한테 말해라. 대략 6개월 정도 있다가 들어오면 되겠지. 그런 뒤에 크리스마스 전날 결혼하도록 해 주마. 크리스마스 이브에 하나가 된다..멋지지 않냐?"
"아버님, 감사합.."
지영은 감정이 복받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다 큰 녀석이 울기는..?"
대윤은 지영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맞은 편 방이 유성이 방이니까, 출국 전까지 그 방 써라. 필요한 거 있으면 가정부한테 말하고. 난 회사 나가봐야 하니까 이따 저녁때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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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유성은 학교에 병가를 내고는 지영에게로 달려갔다. 원칙대로라면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대윤이 학교에 거액의 기부금을 내고 있는지라 예외를 둘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유성과 지영은, 지영이 케냐로 떠나기 전까지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한달 뒤, 출국장에서 유성은 지영에게 하나의 다짐을 받아냈다. 남은 생을 함께 하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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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6.22, 영등포-
밤이 늦은 시각, 영등포 역사의 옥상 문을 열고 한 남자가 길다란 가방 하나를 내려놓았다. 진철이었다. 소음기를 단 우지 기관단총과 유탄 발사기 하나. 진철이 가방에서 꺼낸 것은 그게 전부였다. 진철은 난간으로 다가가 건물들의 배열을 살펴보았다. 삼거리를 기준으로 세 도로 옆의 건물들이 마치 자로 잰 듯 일직선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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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주변의 건물들은 십년 전만 해도 완벽한 공동체였다. 하지만 도영파가 자리를 잡고 윤락가가 형성된 이후 상인들은 하나둘씩 다른 지역으로 도망치듯 자리를 옮겼고, 지금에 와서는 도영파가 관리하는 윤락가 일대의 몇몇 술집을 제외하고는 장사하는 이들을 찾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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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철이 요 며칠간 윤락가 주변을 돌아다녀 본 결과, 윤락가 건물의 맞은편에 위치한 상가의 대부분은 문을 닫은 지 오래된 듯 했다. 집집마다 셔터가 굳게 내려져 있었으며, 이것은 그가 하려는 일에 엄청난 플러스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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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을 이십여분 정도 남겨놓고, 봉고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윤락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길가에 주차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각자 임무 알지?"
"여부가 있습니까?"
"그래, 오늘밤 마음껏 누벼보자. 제한 시간은 삼십 분이니까, 그 안에 일을 마무리지어야 돼."
역사의 옥상에 웅크려 있는 진철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의 손에는 특이한 생김새의 방독면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보통의 방독면이 아닌, 적외선 안경이 결합된 것이었다. 정각이 됨과 동시에 역사 주변 일대를 정전시키기로 미리 계획했기 때문에 이 장비는 없어선 안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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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버들에게 있어서 이번 일은 그다지 바람직한 일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겉으로는 도영파라고 하는 악질적인 집단을 뿌리뽑음으로써 정의를 조금이나마 실현한다는 명분 하에 이번 일을 계획했지만, 실상은 도영파를 제거해야만 영등포 역에 신영백화점이 입주해서 이익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권 차원에서도 눈엣가시 같은 우범지대를 단번에 정리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힘이 꼭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정전을 시키고 뒷수습에 만전을 기하기로 약속하는 등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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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
영등포 일대가 순식간에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진철의 유탄발사기에서 발사된 유탄 하나가 목표건물의 옥상 환기구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것은 수면개스가 들어있는 탄두였다. 나머지 멤버들은 방독면을 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도영파의 일원들과 윤락녀들, 그리고 이들을 찾아온 손님들이 마구 엉켜서 쓰러져 있었지만, 도영파를 색출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도영파는 내부결속 차원에서 왼손에 용 문양의 반지를 끼도록 했기 때문에, 반지 낀 사람만 찾아내면 되는 것이었다.
"우두둑!"
여기저기서 목이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조용하면서도 재빠르게 학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숨을 틀어막고 용케 건물 밖으로 뛰쳐나간 이들은 피아 가리지 않고 진철이 갖고 있는 우지 기관총의 제물이 되었다.
"제길! 우두머린 어디 간 거야?"
"걱정마라. 도망쳤다고 해도, 이제 그 놈은 퇴물 신세니까. 그보다, 여자하고 민간인부터 옮겨야지. 빨리 데리고 나가자. 겨우 십분밖에 안 남았어."
"예. 웃샤!"
멤버들에게 업혀 나온 여자와 민간인들은 아무런 표시도 돼 있지 않은 커다란 트레일러로 옮겨졌다. 트레일러 안에서는 한 남자가 이들을 안쪽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사람들을 전부 트레일러에 싣고 난 뒤, 상택은 트레일러 뒤의 트럭 운전사한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트럭 뒤에서 큼지막한 가방을 멘 두 남자가 내려서 이리로 달려왔다. 상택은 그들과 악수하며 물었다.
"댁들이 그 악명높은 콤프라더스입니까?"
"훗, 알아주시니 영광입니다. 그나저나 아작내야 하는 데가 어딥니까?"
콤프라더스..이 말은 C-4폭탄을 가리키는 '콤포지션'과 '브라더스'를 합친 말이었다. 상택이 만난 두 사람은 평소에는 육군 폭발물처리반의 소령과 대위 신분으로서 교관의 역할에 머물렀지만, 가끔씩 고위층의 의뢰로 비밀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두 사람은 가방에서 폭탄이 부착된 밧줄을 건물 주변에 길게 늘어뜨렸다. 건물 내부에도 설치했는데, 이들은 여기저기 널린 시체를 보고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자신을 소령이라고 한 남자가 상택에게 물었다.
"노파심에서 하는 얘긴데, 여기 이 놈들 죽어도 싼 놈들 맞겠죠?"
"물론입니다. 도영파라고, 이 일대를 휘어잡고 있던 깡패들이었죠."
폭탄의 설치가 다 끝나고, 소령은 상택에게 리모콘을 건네주며 말했다.
"여기 맨 위에 있는 빨간 단추가 보이죠? 그걸 누르면 건물들이 한순간에 재가 돼 버릴거요. 그럼 난 이만."
콤프라더스의 트럭과 트레일러가 사라진 뒤, 상택 일행도 떠날 채비를 했다. 상택이 시계를 보니 정전이 해제되려면 5분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떠날 시간이다."
"이상 없습니다!"
상택은 하늘을 향해 신호탄을 쐈다. 진철을 부르는 것이었다. 일행 전원이 차에 올라타자, 봉고차는 처음에 왔던 길로 핸들을 꺾어 사라졌다. 그로부터 채 일분도 되지 않아,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물 서너 채가 굉음을 내며 한꺼번에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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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된 건물로부터 삼백여미터 떨어진 한 이층집의 지하에서는 두 남녀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곧 있으면 여름이 되는지라, 결코 추위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은 도영파의 유일한 생존자로, 도영파의 두목 강도영과 윤락녀 중 하나인 원가혜였다.
"이 손 놔요! 날 어디까지 끌고 갈 셈이죠?"
"가만히 못 있어? 안그래도 불안해 죽을 지경인데, 너까지 이러기야? 섬으로 보내버리기 전에 조용히 못해?"
"전부 거덜난 놈이 입만 살았군."
제 3자의 목소리..도영은 놀라 소리쳤다.
"누구야?!"
"내 이름은 박유성이다."
그 말과 함께 어둠 저편에서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쓰윽 나타났다. 유성이 한 달이 넘도록 염원했던 순간이 찾아온 것이었다. 유성이 한발한발 다가오자, 놀란 도영은 잭나이프를 꺼내 휘둘렀다.
"가, 가까이 오지 마!"
"그렇지. 그래야 양아치답지."
유성의 시선은 순간 도영의 곁에 있는 가혜를 향했다.
"이봐, 아가씨. 괜히 곁에 있다가 옷에 피 묻히지 말고 이리로 와요."
여자는 슬쩍 기회를 엿보더니 도영을 밀치고 유성 뒤로 숨었다.
"당신, 이름이 뭡니까?"
유성은 여자한테 물었다.
"저, 전..가혜라고 하는데요. 원가혜요."
"가혜, 가혜.."
유성은 전방에서 설치는 도영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그렇군!"
유성이 떠올리고자 한 것이 생각났다. 지영이 떠나기 전, 유성에게 부탁한 말이었다.
'무리한 부탁 하나만 할게요. 제 일기장을 드릴 테니까, 맨 뒤 전화번호 적는 칸에 보면 여자 이름이 여럿 있을 거에요. 제가 영등포에 있을 때 서로 의지하던 친구들인데, 혹시라도 그들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새 인생을 찾게끔 도와주셨음 해요.'
가혜의 이름은 리스트의 맨 앞에서 두번째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신, 윤지영이라고 알죠?"
"예? 예.."
"건물을 나가면 소형 BMW가 한 대 보일 겁니다. 그거 타고 신영백화점 본점 앞에 가 있어요. 금방 뒤따라 갈 테니까. 면허증은 있나요?"
"예, 있어요."
"그럼 빨리 나가요. 여기 있으면 안좋은 꼴을 볼 테니까."
유성의 시선이 여자한테 향하는 순간, 도영은 그 틈을 이용해 칼을 찔러왔다. 칼이 정확히 유성의 가슴팍에 박혔지만, 그는 요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는 표정이었다.
"어떡하나, 상대를 잘못 골랐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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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뒤, 평범한 소매점의 주인 장씨는 지하에서 난도질을 당한 시체 한 구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시체의 손가락에 끼어 있는 반지를 보고서야 시신이 강도영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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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뒤, 신영백화점 4층의 여성의류 매장에서는 직원이 한 명 늘어났다. 새로 뽑힌 직원의 이름은 원가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