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 적
조금 열려진 창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포근한 바람이 아이보리색 커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수족관 안에는 어린 아이의 팔뚝만한 잉어와 향어 가 육감적인 컬러로 치장한 20여 마리의 열대어들과 한데 어우러져 있었고, 바닥의 수석들 틈새로 나무젓가락처럼 말라비틀어진 미꾸라지 한 마리가 굶주림에 못 이겨, 다른 녀석들이 먹다 남은 찌꺼기라도 주워먹기 위해, 폭군처럼 난폭한 잉어의 곁을 힘겹게 유영하고 있었다.
천체의 이동으로 인해 작렬하는 햇살이 혼의 이마로 고정되는 순간,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몸을 옆으로 돌려 자신에게 집중된 햇살을 피해냈다. 그때 흩뿌려져 있는 모이를 주워 먹기 위해 베란다에 모여든 비둘기들의 지저귐이 혼의 의식을 현실의 세계로 내몰았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아무 생각도 없이 천장에 부착되어 있는 원형의 시계를 더듬던 그의 두 눈이 다시 스르르 감겨졌다. 그리곤 금방 뭔가 야릇한 꿈이라도 꾸는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몽롱함에 사로 잡혀 있던 그의 몸이 갑자기 용수철처럼 퉁겨져 올랐다.
「이……이럴 수가?」
그의 일그러진 시야로 86년 영국의 'Wembley'구장에서 수많은 관객들의 호응에 보답하듯, 오른 팔을 높이 치켜든 '프레디 머큐리'의 대형 포스터가 들어왔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그 옆에 매달려 있는 뻐꾸기 시계를 찾았다. 두 바늘이 시계 광고에 늘상 나오는 시간인 10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이 놈들이 단체로 직무 유기를 하다니! 가당치 않게 너희들도 노조를 결성했단 말이냐?」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차며 벌떡 일어섰다. 그의 전라의 몸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침대 맡에 놓여져 있던 자명종 시계를 집어들며 협박하듯 뇌까렸다.
「매일 아침 7시 40분이면 박진감 넘치는 기차 소리로 날 깨워야 하는 네 의무를 잊었단 말이냐? 한두 번도 아니고, 더 이상은 네 놈의 무책임함을 용인할 수가 없다. 내 오늘은 단호히 네 놈을 익사에 처하고 말리라!」
오른쪽 안면을 완전히 일그러뜨리며 수족관 앞에 멈춰서 시계를 들고 있던 팔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 순간 자명종 시계에서 요란한 기차소리가 터져 나왔다. 화들짝 놀라며 시계를 코앞에까지 가져다 댄 혼은 10시 10분에 고정되어 있는 알람 눈금을 확인하고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세차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고 보니 수업이 없던 그제, 새벽 늦게 까지 음악을 만들다가 동이 터 올 무렵쯤에서야 침대에 누워 10시 10분에 알람을 맞춰 놓았던 것 같았다. 그리곤 재조정하는 것을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없는 살림 더 축낼 뻔했군……」
자명종 시계를 내려다보던 곤혹스런 눈빛을 오디오 세트 쪽으로 옮긴 혼의 두 눈은 다시 독기로 번뜩였다.
「하지만 도저히 그대는 용서할 수 없음이로다. 늘 똑같은 시간에 '베토벤'의 '대공'을 연주하기로 되어 있는 네 놈은 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는지 소상히 아뢰거라!」
죄인을 심문하는 조선시대 사또와도 같은 위엄 있는 말투로 오디오 앞에 멈춰선 그가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아무 말도 없다는 건 감히 이 본좌를 능멸한다는 거냐? 네 놈은 감전사에 처하겠노라!」
오디오를 집어들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런 그의 시선에 컨센트에서 뽑혀져 아무렇게나 바닥을 뒹굴고 있는 전원 플러그가 포착됐다. 가슴을 움켜쥐며 뒷걸음질쳤다.
「읔, 이럴 수가! 우, 우찌 이런 일이?」
눈가에 게슴츠레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음, 하마터면 오판에 의한 즉결심판으로 가세가 쫄딱 기울 뻔했군. 이래서 사형제도는 어서 없어져야 한다니까……」
잠시 멋쩍은 웃음으로 오디오와 자명종 시계를 번갈아 돌아보던 별안간 욕실로 줄행랑을 쳤다. 곧 화산처럼 분출될 지 모를 자명종 시계와 오디오 세트의 항명을 일찌감치 회피하려는 듯…….
혼의 하야부사는 금방 터져 나가기라도 할 듯 광포한 엔진음을 토해 내며 아스팔트 위를 폭주하고 있었다. 혼잡한 출퇴근 시간이건 한산한 시간이건 그때 그때의 교통량과 도로 사정이 허락하는 한계속도로 주행하는 건 혼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한계속도라는 건 곧 생사를 결정짓는 경계선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예기치 못한 돌발 사태가 발생하는 경우 바로 즉사로 이어질 수 도 있는 일이니까. 더욱이 딱지를 끊더라도 절대로 헬멧은 쓰지 않는 혼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사선을 넘나들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스피드가 갖고 있는 마력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보다도 훨씬 강렬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었고 혼은 이미 죽음을 불사할 만큼 철저히 중독되어 있었다.
법과대학 건물 앞 빈 공간에 하야부사를 멈춰 세운 혼이 왼쪽 팔목의 아날로그 시계를 들여다보며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굳……. 최고 기록을 무려 1. 4초나 단축시켰군! 자축하는 의미에서 성화에 불을 당겨볼까?」
가죽 점퍼의 왼쪽 주머니에서 마운트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는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정말 아름다운 아침이군.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야……」
강원국립대학교 법학과에 떠도는 믿을 만한 소문 중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박종찬 교수의 미소는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천사의 그것처럼 투명하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그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써 결코 교리에 어긋나는 법이 없는 선인임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수업에 임할 때의 그의 미소는 악마의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그토록 너그러운 미소 뒤에 살인자를 심리하는 재판관과도 같은 파상적인 질문을 쏟아 붓는다. 그리고 나서 자신을 흡족케 하지 못한 사람에겐 막대한 양의 민법전을 써오도록 명령한다. 그의 질문 공세를 피하기보다는 차라리 저승사자의 부름을 피하는 게 더욱 쉽다. 그는 천사의 탈을 쓴 루시퍼다!〉
그런 박 교수의 물권법 강의가 204호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전공필수 과목인데다 박 교수의 학점인심이 워낙에 야박한 탓에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 쉬는 시간엔 옆 강의실에서 의자를 끌어오는 소리로 법대 건물은 난장판이 되고 만다. 오늘도 100여 명이 넘는 학생들로 강의실은 발 디딜 틈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만원이었다.
박 교수가 노란 색 분필로 [傳貰權과 住宅賃貸借]라는 글씨를 큼지막하게 휘갈긴 후, 출석부를 뒤적거렸다.
「유혼군!」
대답이 없자 박 교수가 강의실 전체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똑똑한 발음으로 출석부에 기재되어 있는 이름을 호명했다.
「유혼?」
역시 대답이 없었다. 그 순간 박 교수의 안면에는 예의 그 전율스런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의 오른 손이 볼펜 쪽으로 미끄러져 갔다. 바로 그 순간 살며시 강의실 뒷문이 열리면서 혼이 빼꼼히 얼굴을 디밀었다. 워낙에 청강생들이 많은지라 출입문이 열려지는 공간까지도 학생들의 책상으로 점령되어 있었기에 혼은 강의실 안에 고개만 들이민 채 입구를 막고 있는 그 학생이 빈틈을 만들어 줄 때까지 꼼짝없이 기다려야했다.
철제로 된 책상의 다리 부분이 대리석 바닥을 긁어대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학우들이 나지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에 고개를 든 박 교수가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고개를 들어 실내를 훑어 봤다. 지각생 하나가 책상과 책상 틈을 비집으며 열심히 빈자리를 찾고 있는 광경이 포착되었다. 눈치 빠른 그가 대번에 상황을 파악한 후, 확인하듯 말을 던졌다.
「보아하니 자네가 '유혼'이라는 멋진 이름의 주인인 듯 하군. 그런가?」
영문을 모르는 혼이 어색한 미소로 대답했다.
「대단한 직관력이십니다」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칠판 쪽으로 돌아선 박 교수가 [傳貰權과 住宅賃貸借]라고 적혀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지적했다.
「전세권과 주택 임대차에 관해 설명하려던 참이네. 아직 강의를 하진 않았지만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으로서 당연히 이 부분에 대해 한 번쯤은 예습을 했을 거라고 믿고 질문할까 하니 그런 내 기대를 져버리지 말아 주게네!」
조금 전까지 킥킥대던 학우들의 표정이 갑자기 경직됐다. 혼이 대답을 못 할 시에는 자신들 중 어느 누가 그 부담을 떠 안게 될 게 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결코 어려운 질문은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말고 차분히 대답해 주게나. 전세권과 주택 임대차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한 후, 양자의 차이점에 대해 논해 보겠나?」
강의실은 책장 넘기는 소리로 가득했다. 하지만 사전지식 없이는 대답하기가 불가능한 질문이라는 걸 깨달은 몇몇 학우들은 진심 어린 마음으로 혼이 박 교수의 질문공세에 선방해 주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표정들이었다. 기대 반 우려 반의 시선이 혼에게 집중됐다.
「다혜 언니!」
경영대 401호에서 교양 수업을 마치고 계단을 내려오던 다혜가 귀에 익은 목소리에 걸음을 멈춰 섰다.
「언니도 사질변, 들어요?」
입학 초에 학생운동 판에 발을 들여놓았던 그녀는 그 계통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러하듯 출석일수가 모자라 학점이 썩 좋지 못했다. 졸업할 때가 가까워진 지금 당시의 불성실함으로 얻어진 F학점을 때우기 위해 1, 2학년 후배들 틈에서 '사회의 질서와 변동'을 비롯한 몇몇 교양 강좌를 듣고 있었다. 다혜는 지난날의 불성실함을 후배 미영에게 질책받는 것 같아 얼굴을 붉혔다.
「으, 응…… 재수강하는 거야!」
미영이가 옆으로 다가서자 다혜가 다시 보조를 맞췄다.
「언니, 지금 어디로 가세요?」
「왜?」
미영이가 혀를 내밀며 개구쟁이처럼 웃어 보였다.
「혹시 명동 쪽으로 나가면 언니 차, 얻어 타고 가려구요」
「명동 가니? 잘 됐다. 나두 그쪽으로 가는데!」
티뷰론이 서있는 법대건물 앞에 다다른 다혜가 키를 꺼내 문을 열었다.
「명동에는 왜 가는데?」
미영이가 문을 열고 보조석에 올라탔다.
「아르바이트 때문에요!」
「무슨 아르바이트?」
오토스틱을 R에 맞춘 다혜가 엑셀 페달에 발을 얹으며 물었다.
「국민학생 피아노 레슨해요」
「얼마나 받는데?」
「세 명을 가르치는데요, 일주일에 3번 레슨 해주고 10만원씩 받아요!」
「한 달에 삼십이면 용돈은 되겠, 어머!」
다혜가 느닷없이 비명을 질렀다. 후미 쪽에 주차해 있던 덩치 큰 오토바이가 티뷰론의 후방측면에 걸려 둔탁한 소음과 함께 폭락했던 것이었다.
「왜 그래요, 언니……?」
영문을 모르던 미영이 뒤를 돌아보고는 모터 싸이클 한 대가 쓰러져 있는 광경에 울상이 됐다.
「어, 어떡해요, 언니……?」
다혜가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가자 미영이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넘어져 있는 하야부사에 매달려 안간힘을 써봤지만 녀석은 도무지 꼼짝도 하질 않았다.
「어쩌죠, 언니?」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다혜가 물었다.
「지금 몇 시니?」
「열 한시 반이요……」
그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떡하지? 어제도 레슨을 빼먹었는데……」
「따라서 전세권과 주택임대차, 그리고 임대차 보호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임대차는 외관상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반대로 질적인 면에서는 이와 같은 커다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약 5분 여에 걸친 혼의 긴 대답이 끝났다. 그리고 강의실 안은 환호성과 박수소리로 가득 찼다. 박 교수가 양팔을 어깨 위까지 으쓱해 보이며 전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시 후 들뜬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가 손뼉을 마주쳤다. 모든 이목이 그에게 집중됐다.
「정말 훌륭한 대답이었네. 내 강단에 선 7년 동안, 자네처럼 완벽한 예습을 준비한 학생을 일찍이 보지 못했네. 앞으로 내 수업에 나올 필요 없네. 시험도 보지 않아도 돼. 자네 학점은 무조건 A+니까 말일세!」
시기와 부러움이 뒤섞인 함성이 혼을 향했다. 혼이 그들을 둘러보다가 검지와 중지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어 보였다.
「형, 너무 멋지셨어요」
강의가 끝나고 계단을 내려오던 혼에게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인 승진이 얼굴을 붉히며 다가섰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같은 조에 배정되어 조별 장기자랑을 비롯한 모든 프로그램을 함께 준비했던 터라 다른 누구보다도 애착이 가는 녀석이었다. 얼마 전에 입대영장이 나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씁쓸한 얼굴로 승진의 어깨 위에 오른 팔을 휘감으며 혼이 말했다.
「성진이한테 들었다. 영장 나왔다며?」
언제나처럼 자신 없는 목소리로 승진이 대답했다.
「네……」
「입대 일이 언제야?」
「7월 5일이요.」
「자식, 섭섭해서 어떡하지? 그 동안 건망증 심한 엉아, 뒤치닥꺼리를 도맡아 해준 네가 군대 가면 이제 난 이 험한 세상을 어케 살아가냐……」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혼이 말했다. 승진이 머리를 긁적이며 수줍게 웃어 보였다. 그의 표정에도 아쉬움이 역력해 보였다.
「가기 전에 엉아랑 술 한잔하자! 물론 늘 엉아가 신세를 졌으니까, 술값은 당연히……, 니가 부담하는 걸로 하고」
승진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지었다. 해맑은 그의 미소가 혼의 마음을 더욱 서운하게 만들었다. 그 때였다. 법대 건물을 막 빠져 나온 그의 눈에 큰 대자로 뻗어 있는 하야부사가 포착된 건.
「저 자식이 무슨 불만이라도 있나……? 왜 디비져 있는 겨?」
그러나 그 뿐이었다. 누군지 모를 원인제공자를 향해 인상을 구긴다던가, 욕설을 내뱉는다던가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그 한 마디를 내뱉고는 다시 승진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 대신 휴가 나올 때마다 너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풀코스로……, 니가 쏘면 부담 없이 얻어 먹어는 줄게」
당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하지만 승진은 혼이 허락만 한다면 빚을 내서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지금까지 밥을 먹을 때나 술을 마실 때나 단 한 차례도 자신이 계산하도록 내버려 둔 적이 없었던 혼이었다. 그의 이런 발언은 단순히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의도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느긋한 걸음으로 하야부사 앞에 당도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거 없이 녀석을 부둥켜안고는 일으켜 세웠다. 여자 둘이서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서도 일으켜 세우지 못했던 육중한 하야부사였지만 지금은 마치 애인을 만나러 가기 위해 준비를 마친 여인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처럼 너무나도 쉽게 자세를 고쳤다.
연료통 부분에 노란색 포스트 잇 메모지 하나가 붙어 있었다.
〈죄송해요. 후진하다가 그만 댁의 오토바이를 넘어뜨리고 말았네요. 아무리 용트림을 해도 세워지지가 않아서 그냥 가요. 혹시 수리비가 들어가게 되면 011958862××로 연락 주세요〉
이찬진 사장이 이 쪽지를 봤다면 당장에 저작권을 팔라는 제안을 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깔끔하고 앙증맞은 글씨체들이었다. 그 동안 하야부사의 부상 부위를 점검한 승진이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찌그러진 부분은 없지만 색이 좀 벗겨졌는데요, 형?」
하지만 혼은 승진의 우려에는 관심 없다는 듯 쉰 소리를 늘어놓았다.
「너, 군대가기 전에 애인 하나 만들래? 물론 목소리나 글씨 예쁜 놈치고 쓸만한 놈을 보진 못했다만……」
「누가 입대일 앞둔 놈을 애인으로 두려고 하겠어요?」
「왜 고무신 거꾸로 신을까봐 걱정 되냐? 사내 대장부라면 그런 정도 추억도 갖고 그래야지, 임마!」
뒷머리를 긁적이는 승진을 아래위로 흘겨보다가 쪽지를 건넸다.
「애인으로 만들던가, 아니면 가다가 버려라!」
「형, 무슨 이상이라도 있으면 어쩌시려구요?」
도색이 벗겨진 부위를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며 혼이 말했다.
「얘, 등치를 봐라! 이 정도에 빌빌거릴 놈으로 보이냐? 그리고 명품일수록 부상을 많이 입는 거야. 그만큼 험한 역경을 이겨왔다는 증거거든」
뭔가 말을 하려던 승진이 완강한 혼의 말투에 머뭇거리는 동안 혼은 하야부사에 올라 시동 버튼을 누렀다. 머플러를 통해 묵직하지만 경쾌한 엔진 음이 터져 나왔다.
「가기 전에 한 번 보자? 엉아가 풀 코스로 확실히 보내 줄 테니까!」
역시나 특유의 쑥스러운 듯한 웃음으로 승진이 허리를 굽혔다.
「들어가세요, 형!」
혼은 그 답례로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모아 이마에 가져다 대며 거수경례하듯 자세를 취해 보였다. 하야부사가 경영대 건물을 우회하며 박물관 쪽으로 미끄러져 갔다. 흐뭇한 미소로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승진은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다시 법대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렸을 때 한번쯤 초능력 혹은 영능력 따위에 심취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었다. '유리겔라'니 '미스터 마릭'이니 하는 염능력자들이 어떤 해에는 몇 번씩 내한해 마술과도 같은 장면들을 연출하곤 했었다.
TV 수상기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물론, 촬영장에서 그들의 쇼를 바라보던 관객들까지도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기적과도 같은 일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공연 내내 자신들이 특별한 인간이라 그런 일들이 가능한 건 결코 아니라고 강조했었다.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들과 같은 잠재능력을 보유하고 있고 꾸준한 훈련으로 기적과도 같은 일들을 창출해 낼 수 있다며 보는 이들을 세뇌했었다.
아마 나도 그들에게 세뇌되었던 것 같다. TV 모니터 앞에 앉아 그들이 시키는 대로 스푼을 휘어보려고 무던히 애를 쓰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대로 내 손에 쥐어져 있던 스푼은 기역자로 꺾여 있었다. 그러나 당시엔 내 안의 잠재의식이 발현된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솔직히 지금 생각해 보면 두 손의 완력으로 억지로 구부려 뜨려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난 어른이 되고 난 후에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을 자주 꿨다. 그렇다고 슈퍼맨처럼 두 팔을 앞으로 쫙 뻗은 자세로 멋지게 비행하는 건 아니었다. 흡사 자전거를 타는 것 같은 자세로 두 발을 열심히 허우적대야 공중으로 날아 오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독수리처럼 꼭 폼이 나야 하늘을 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모기처럼 촐싹 맞게라도 하늘을 날 수만 있다면 그 얼마나 황홀하겠는가? 남들이 들으면 웃을지 모르지만 아주 어린 꼬맹이 때부터 내 꿈은 단 하나였다. 맨 몸으로 하늘을 나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초능력의 신비에 한참 매료되어 있던 중학교 시절, 난 대형서점에서 '조셉 머피'의 '초능력의 세계'라는 책을 구입했다. 아직까지도 그 책을 쓴 작가의 이름이 기억하는 걸 보면 당시의 내가 얼마나 초능력을 동경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난 매일밤 잠자리에 누워 머리 속으로 온갖 초감각적인 상상을 그리는 습관을 갖게 됐다. 염력으로 물체를 움직이는 상상, 맨 몸으로 밤하늘을 비행하는 상상, 내 몸이 미세한 입자로 분해되어 아주 먼 이국 땅까지 공간이동을 해 가는 상상 등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대부분의 초심리학자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인간들의 잠재의식에는 무한한 초능력이 내재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의식의 철저한 방해로 인해 자신의 잠재의식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의식으로부터 해방하라.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당신의 잠재의식을 끊임없이 자극해 수면으로부터 깨어나게 하라. 무한한 잠재의식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으리라. 아인슈타인도 고작 자신의 뇌의 1%밖에 활용하지 못했다. 나머지 99%를 일깨울 수 있다면 당신이 곧 신이요, 신이 곧 당신이 되리라」
하지만 몇 년 동안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던 나의 주문과도 같은 상상은 놈을 죽이기 위해 '부안'으로 떠나던 그 날부터 단절되고 말았다. 바로 코앞으로 닥쳐온 응징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내 머릿속은 터져 나갈 듯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몇 년을 그토록 무던히도 내 잠재의식을 자극해 왔건만 아무런 신비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난 초능력자들과 초심리학자라는 인간들은 모두 온갖 감언이설로 사람을 현혹시키는 사기꾼들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최근에 벌어진 일들은 그런 나의 결론을 번복케 만들고 있다. 오늘 아침 일도 그러했고 며칠 전 제이슨의 눈을 빌려 서류의 내용을 볼 수 있었던 것도 내가 그토록 간절히 바래왔던 상상들이 아니었던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지금 이 시점에서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런 능력이 내가 원하는 때마다 발현될 것인가 하는 점과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발현이 가능한 것인지가 중요할 뿐이었다.
사실 텔레파시(Telepathyː원격교감)나 근거리 사물을 인지(투시ː透視. Clairvoyance)하는 정도의 능력은 초능력의 세계에서는 초보적인 단계에 불과하다. 인간의 발육과정으로 따지자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유아(乳兒) 정도라고나 할까.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에스퍼(EsperːExtra Sensory Perception에서 첫글자만 딴 E.S.P에 'er'을 붙여 '초능력자'라는 뜻으로 사용함)들이 이 단계에 속한다.
그 다음 단계라면 염력(PK-Psycho Kinesics. 念力ː정신력으로 사물을 움직이는 능력. 정신적 원격 조작 등을 포함하는 정신적 물리 현상)으로 사물을 움직이게 하거나, 어떤 사물의 내력을 더듬을 수 있는 '물체인지'(物體直觀ː어떤 물체를 통해 그 물체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설명하는 것. Psychometry라고도 불린다. 영국에서는 J.헤팅거에 의해 연구되었는데 그는 63명이 소유하고 있는 물체를 사용하여 1,266건에 대한 서술을 했고 그 중 605건은 정확히 들어맞았다고 전해진다) 정도라고 얘기할 수 있다. 이 정도라면 어느 정도 걸음마를 마스터한, 그래서 이제는 관성으로 인해 발이 따라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도 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된 소아(小兒)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이 단계에 오르게 되면 신체적 접촉 없이도 근거리의 사람이나 동물을 해할 수 있게 된다. 염력을 이용해 산 위의 돌덩어리를 굴린다던가 더 발달된 이는 타인의 의지를 조종해 대리살인케 할 수도 있게 된다.
과거 냉전시대에 소련과 미국을 위시한 냉전국가들은 초심리학이 미래의 전쟁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될 거라고 예측하여 은밀하게 에스퍼들을 발굴·양성시켰었다. 소련은 KGB를 주축으로 이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16년 이상 실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바 있는 바타로프, 가르로프, 미코니프 등의 증언에 의하면 소련에는 당시 모스크바에 3곳, 레닌그라드에 2곳, 그리고 시베리아와 니지니타길, 키예프, 자포로제, 타간로크, 오뎃사 등 11 곳의 초능력 연구소에서 첩보 전쟁에 투입될 에스퍼들을 양성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동유럽에서는 폴란드의 바르샤바대학, 프라데그크라로그대학, 체코슬로바키아의 카렐대학, 브라티슬라바대학, 동독의 동베를린, 불가리아의 소피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등 7군데 연구소에서 에스퍼들을 양성해왔다.
미국의 CIA도 여기에 뒤지지 않았다. 요한센, 테일러, 죤슨 등 12명의 초능력자, 물리학자, 전자 공학자, 생물학자, 의학자 등이 미국의 콜럼비아대학, 뉴욕대학, 듀크대학, 스탠포드대학, 캘리포니아대학, 메닝가재단, 벨재단, 항공 우주국(NASA), 해군 무기연구소, 공군 무기연구소, CIA, FBI 등 공식적인 곳만도 21군데에서 초능력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밖에도 공식 기관의 원조를 받는 개인적인 기관이 적어도 수 십 군데로 추정되고 있으며 주립, 시립의 대학, 전문 대학 등의 초심리학 연구소를 포함하면 수백 군데에 달한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들에게 착출된 초능력자들이 대부분 이 정도 단계에 도달한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극소수는 어느 정도의 정신집중만으로도 자신들이 서 있는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까지도 마치 영화를 보듯 생생히 관찰할 수 있었다. 이것을 '원격시(遠隔視)' 혹은 '천리안(千里眼Remote Viewing)'이라고 하는데 그들 중 일부는 단지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영향을 미치는 염력이나 정신감응을 구사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이 정도라면 100미터를 전력으로 질주하는 성인에 비유할 수 있다.
끝으로 100미터를 10초안에 내달리는 '칼 루이스'나 '벤 존슨'에 비유할 수 있는 단계가 있다. 이 단계의 에스퍼들은 영화에 등장하는 슈퍼맨처럼 하늘을 날아다닐 수도 있고, 서울에서 대전까지 순식간에 공간이동(Teleportation)을 할 수도 있다. 과거 우리의 설화나 신화 속에 등장하는 도인이나 고승들이 이런 경지가 아니었나 추측된다. 그들이 사용했다던 축지법은 짧은 거리의 공간이동의 연속이 아니었을까? 공간이동은 많은 ESP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데 그런 공간이동을 비록 근거리지만 연속적으로 사용했었던 그들은 모르긴 해도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에스퍼들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어쩌면 그들은 죽어 가는 생명을 되살리고 비와 구름을 부리며 과거와 미래를 오갈 수도 있었을 지 모른다. 물론 우리가 전해들어 온 일화들이 모두 사실이었다고 전제한다면 말이다.
어쨌든 최근에 벌어진 기이한 경험들로 미루어 추측컨대 난 최소한 초급단계 수준에는 도달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짧은 거리 정도는 텔레포트할 수 있는 정도의 단계에 올라 있을 지도 모른다. 난 그것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어차피 내일 아침 제이슨이 오기 전까지는 아무런 할 일도 없었고 또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손해볼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낭심 부위에 열 개의 손가락 끝을 서로 맞댄 채 지긋이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곤 아주 천천히, 폐 깊숙한 곳까지 숨을 들이 마셨다가 내 안에 가득한 공기를 다시 아주 천천히 코끝으로 내 뿜었다. 이렇게 몇 번을 반복하자 배꼽 아래 단전이 서서히 닳아 오르기 시작했다. 대기의 기운이 단전으로 축적되는 과정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초능력에 심취한 이후로 난 세상의 많은 신비현상에 대해 하나씩 눈을 떠왔다. 귀신에게 의식을 잠식당한 '빙의현상'이나 인간의 잠재의식을 움직이게 하는 '최면', 세계 도처에 출현하는 UFO, 시신을 썩지 않게 하는 이집트 피라밋의 초자연적인 현상, 심지어는 수만 년 전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고 전해지는 전설 속의 아틀란티스 대륙이나 뮤 대륙에까지 내 지적 능력의 촉수는 쉬지 않고 더듬대 왔다. 고등학교 입학을 즈음해서는 단학에도 잠시 관심을 두어 얼마간 호흡법을 연마했던 적이 있었다.
조급했던 내 마음이 거짓말처럼 편안해져 왔고 복잡했던 머리 속이 가지런히 정돈되는 듯했다. 무겁던 몸이 체내에 흘러 들어온 공기처럼 가볍게 느껴져 왔고 이내 내가 대기의 일부분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두 눈은 감겨져 있었지만 내 눈꺼풀 안 쪽엔 캘리포니아의 광활한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무수히 많은 별들이 제 존재를 알리려는 듯 깜박이고 있었다. 그것이 단지 나의 상상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나와 우주를 연결해 주는 대기가 보여주는 실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단지 지금 이 순간 내가 대기이며 대기가 곧 우주라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내가 몇 차례 더 느릿한 심호흡을 하는 동안 나는 나와 우주가 하나가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호흡을 멈춘 채 내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 내 온 몸이 초미립자로 분해되어가고 있다고 내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러한 최면은 곧 초미립자로 분해된 내 육신이 유리관의 상판을 이루고 있는 알미늄 합금의 입자들 사이사이의 빈 공간을 관통했고, 대기를 거쳐 다시 건물 천장을 통과해 가는 상상으로 이어졌다.
그 순간 내 몸을 끌어당기고 있던 중력이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내 영혼을 에워 쌓고 있던 육신의 중압감도 사라져버렸다. 그 대신 한동안 거대한 해일이나 태풍에 휘말린 듯한 전율스런 느낌만이 엄습했다. 뼈까지 시린 듯한 느낌이었지만 고통스럽거나 공포스럽지는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캘리포니아 상공을 메우고 있는 별들의 인력에 빨려들 듯 내 몸이, 아니 내 영혼이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고 있음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5개 층의 천장을 관통한 내 몸이, 아니 내 몸을 이루고 있었던 초미립자들이 잠시 후 한 곳에 우뚝 멈춰 섰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떠지질 않았다. 아마도 안구를 이루고 있던 초미립자들이 아직 합체가 되지 않은 탓이리라. 그리곤 다시 조금 전의 전율이 재현됐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전율스럽지만 결코 고통스럽지 않은, 아니 오히려 오르가즘보다 수십만 배는 더 큰 희열이 내 모든 세포를 자극하는 듯한 그런 느낌. 나는 초미립자로 나눠진 내 육체의 편린들이 다시 재생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극도의 전율이 정점에 달한 순간, 조금씩 그 강도를 줄여가고 있었다. 여전히 날 끌어당기려는 중력 같은 건 느낄 수 없었지만 서서히 내 영혼을 짓누르는 육체의 중압감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 순간 난 두 눈을 치켜 떴다. 그리곤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세상이 내 발 밑에, 그것도 까마득한 곳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정면으로 아주 먼 곳에 이름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산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지만 그 산의 정상도 내 눈 아래에 있는 듯했다. 이 정도면 지표로부터 얼마나 될까? 그 높이를 가늠하기 위해 난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내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 내가 감금되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연구소 건물들이 성냥갑 만한 크기로 자리하고 있었다. 수십 번 기절을 해도 모자를 만큼 경이적인 일을 체험하고 있는 이 시점에도 난, 내가 맛보고 있는 해방감보다 더 큰 분노에 휩싸여 버렸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연구소를 향해 발길질을 했고 내 발끝에서 석양을 등진 눈꽃처럼 시뻘건 불덩이가 뿜어져 나가 연구소의 건물의 중앙을 꿰뚫어버렸다.
허거덩! 엄마한테 꾸중을 들은 꼬마가 화풀이를 하기 위해서 길거리에 널부러진 돌맹이를 걷어차듯, 별 생각 없이 그냥 발길질을 한 것뿐이었는데 저런 무시무시한 불무리가 쏟아져 나갈 줄이야. 건물 중앙을 관통한 불덩어리는 삽시간에 건물 전체를 용광로로 만들어놓았다. 흐미…….
하지만 거기서 멈추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복제인간이라고 하지만 생명이 있고 사고가 있다면 나 또한 엄연한 인간이다. 보신탕을 먹는다는 이유만으로 대한민국을 전 세계가 합심하여 타도해야 할 공적인 것 마냥 몰아 세우는 그들 아닌가? 인간의 존엄성 따윈 염두에도 없이, '인류를 위하여' 라는 거창한 명제를 내세우고는 있지만 그 이전에 명예와 치부를 꿈꾸며 그 잘난 짱구를 굴려댔을 그들의 가증스러운 머리통을 다 부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연구소의 나머지 빈 건물 몇 동을 불살라 버리는 것으로 복수를 대신했다.
수십 키로는 떨어져 있을 것으로 사료되는 곳의 한 건물에서 경광등을 번쩍이는 소방차들이 쏟아져 나왔다. 원래의 내 시력으로는 도저히 인지할 수 없을 거리였지만 난 그것을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볼 수 있었다. 언젠가 제이슨이 펼쳐든 서류를 읽을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 남은 건 내 유전자를 추출했던 그 망할 놈의 택시기사의 목뼈를 분질러 놓는 것이었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그 놈만은 숨통을 끊어 놓고 말아야 직성이 풀릴 듯했다. 그러려면 한국으로 돌아 가야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이대로 비행을 해서 대서양을 건널 수 있을까? 아니면 도무지 얼만큼이나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지 판단조차 서지 않는 그 곳까지 공간이동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여권도 없는 내가 어떻게 그곳까지 갈 수 있을까? 영화에서처럼 여권을 위조를 해야하나, 아니면 밀항을 해야하나?
도무지 답이 나오질 않았다. 하는 수 있나? 일단 텔레포테이션을 시도해 보는 수밖에……. 그게 불가능하면 비행을 시도해 보고 그것 역시 불가능하면 그 땐 밀항을 하던가 여권을 위조하는 방법을 알아봐야지.
그런데 텔레포테이션을 시도하는 중에 에너지가 고갈되어 대서양 한 가운데서 추락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운 좋게 다른 대륙에 떨어진다고 해도 분해된 초미립자들이 다시 재결합되지 않는다던가 하면 또 어떡한다? 죽지 못하고 영원히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혹시 그런 상태를 가리키는 말은 아닐까? 푸헐…….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능력이 생겼건만 그 것도 무조건 좋은 일만은 아니군. 지미……. 그런데 아메리카 대륙과 한반도 사이를 메우고 있는 바다가 대서양이 맞지? 컹……. 태평양이라그? 아니 그게 언제 글루 갔데? 우리 대서양이는 어디 가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