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 부산의 기숙사에서 대학생활을 하는 여대생입니다.
저는 오늘 공강인지라 하루종일 할일도 오갈데도 없이 그냥 기숙사방에 박혀있었죠. 좁은 기숙사방에 혼자 박혀 몇 시간씩 일도 없는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스스로가 참 한심해지고 이따끔은 왜 사나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렇게 앉아있다 씻으려고 욕실에 들어가니, 좁은 기숙사 욕실 한쪽 벽면에 달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참으로 처량해 보이지 않겠습니까.
요새들어 가족들과도 떨어져있고 애인도 없는데 이 판에 겨울이라고 눈은 오고, 친구들은 저마다 애인 팔짱끼고 사라지고.. 외로움에 지치고 스트레스에 지치고 신경성 위염이 도져 소화불량으로 저녁마다 토해대는게 일 이었습니다. 중간고사 때 공부를 한다고 낮밤을 뒤바꿨더니 그게 돌아오지가 않아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하루에 몇 번씩 토해대면,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살이 빠지지요.
불면증 때문에 꼬박 밤을 새고 밖이 희뿌옇게 밝아올때나 잠이 드니 자연 늦게 일어나고 하루에 식사는 많아봤자 두 끼, 주로 한 끼에 나머지 허기는 커피나 물로 달래는데 그나마도 토하니 제 인생에 있어선 이례적인 수치로 살이 빠져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울을 보니 평소에 비해 부쩍 날씬해-_-진 모습에 다크서클이 어디까지나 짙게 드리워지고, 머리는 산발로 풀어헤친(감으려고 방금 풀었으니 당연한..)웬 여자가 있는겁니다. 그게 나인 겁니다. 앉아도 접히지 않는 뱃살이 원래 기뻐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유없이 서러워져 혼자 우울해하며 씻고나니 뜬금없이 저녁도 안 먹은게 생각이 나지 않겠습니까. 시계를 보니 9시 50분.
뜬금없이 지갑만 챙겨들고 기숙사를 뛰쳐 나왔습니다. 왜 나왔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으며 아마 평생 모를 것 같지만.. 그렇게 뛰쳐나와 셔틀버스를 타고 학교 정문앞에 내려 걸었습니다. 거리에 사람은 많은데 혼자인 사람은 나뿐이고, 저마다 커플 아니면 삼삼오오 모인 친구들끼리 왁자지껄..저만 혼자 멍청히 그 거리를 걷더군요. 사람들을 구경하고, 또 그러다 사고싶어하던 두꺼운 니트 스웨터를 보곤 걸음을 멈추고, 가격을 물어보곤 기겁하기도 하고.. (무려 4만7천원이라더군요 -_- 비싼옷 잘 사시는 분들은 47만원짜리 옷도 잘 사시겠지만.. 저는 아직 학생이라 그런지 옷 값이 2만원만 넘어가면 손이 벌벌 떨려서..) 그렇게 걸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학교와 많이 멀어졌더라구요. 지갑속엔 3천원이 있고.. 은행이 보이길래 충동적으로-_-들어가서 만원을 인출했습니다. 그때까진 짜다리 쓸일도 없었는데 왜 돈을 인출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추측하건대 충동적으로 기숙사를 뛰쳐나갈때 제정신도 거기다 놓고 나갔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다시 길을 건너 걸어올라왔습니다. 그 은행 건너편에 바로 셔틀 정류장이 있었는데 왜 걸어올라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뭐에 홀린듯 걸었죠.
그러다 문득 치킨집이 보였습니다. 예전에..반년도 넘었네요. 반년도 훨씬 넘게 전에...그땐 봄이었죠. 저도 저 좋다는 애인 있을때, 그 애인이 내 얼굴 보겠다고 부산까지 찾아와서 사줬던 바로 그 치킨집이었습니다. (제가 치킨을 쩜 좋아해서리..) 왜 갑자기 노란 조명아래 놓인 반쯤 튀겨진 닭을 보고 울컥했는지... 그 자리에서 닭 한마리를 충동구매 했습니다 -_-
튀긴 닭 보고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에라이 내가 치킨 한 쪽도 못 먹겠냐..' 싶은 생각이 든 거죠. 아파 굶고 토해도 걱정해주고 챙겨주는 사람 하나 없는데, 죽 한그릇 못 얻어먹는데 내 몸 내가 챙겨야지 싶기도 하고, 혼자사는 이의 이유없는 서러움이랄까요. 내가 벌어 닭 하나 못 사먹는게 인생인가 싶기도 하고, 내일 당장 엎어져 죽을지도 모르는데 먹고보자 싶기도 하고요.
여튼 그렇게 복잡미묘-_-이상한 심리로 치킨을 충동구매 했습니다. 옷도, 악세사리도, 하다못해 신발 뭐 이런것도 아닌 치킨 한마리를.
지금 생각해보면 미치지 않고서야 어째 그런짓을 하냐 싶어 어이가 없지만 어쨌든 제정신을 기숙사에 놓고 온 저는 7900원짜리 양념 반 후라이드 반 치킨 한마리를 샀고(아까 충동적으로 인출한 그 만원을 가지고서요)그길로 다시 기숙사로 올라가는 학교 셔틀 정류장에 줄을 섰습니다.
제 등뒤에 줄선 남자 두 사람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맛대로 치킨 저 집에 후라이드 치킨 맛있는데... 한 마리 사면 혼자 먹긴 많고 둘이 먹긴 좀 모자르고 뭐 그런 정도인데..어쩌고 저쩌고..."
대략 제 손에 들린 치킨, 그 집 치킨이 맛있으며, 혼자 먹긴 많으나 둘이 먹긴 모자른 양이며, 후라이드 한마리에 6900원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여자인데다 그닥 폭식가는 아닌 저로서는 이게 약 3인분이라고 생각했으나 20대의 남학생들 기준에선 그럴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셔틀을 타고 기숙사 앞에 내렸죠. 대략 그 분들도 같은 셔틀을 타고 같이 기숙사 앞에 내리는 걸 보니 기숙사생인 모양입니다. 손엔 컵라면 등 간식거리가 든 커다란 봉투를 들고요.
아직 기숙사 방에 놓고 온 제정신을 찾지 못했던 저로서는 다시 홀린듯 기숙사 방으로 들어가 앉아 제정신을 주울 생각도 않고 닭을 펴놓고 먹었습니다. 드라마나 소설처럼 꾸역꾸역 한마리를 다 먹기나 하던가..딸랑 5조각을 먹고나니 더 이상 먹을수가 없더군요. KFC이런 닭이 아니라 그냥 일반 양념치킨집에서 파는 닭의 5조각이라 하면..1/4마리 정도 됩니다. 반도 못 먹은거지요. 1/3에서 1/4사이 정도 될만큼 형편없는 양을 먹고는 배가 부르다기보다 속이 거북해오기 시작해서 한숨을 푹 내쉬다 제정신을 차렸습니다.
아, 뭐 내숭이라네 그런 소리 나올까봐 미리 말합니다. 원래 저렇게 새처럼 조금 먹는 스탈은 아닙니다. -_- 폭식가도 아니지만 먹는거 디게 좋아하고 결과적으로 꽤 푹신(?)한 사이즈이며 특히 치킨은 잘 먹지만 요즘들어선 소화불량에 시달려서 속이 딱 거북하기 시작할때 그만 먹어야지 거기서 더 먹으면 바로 토해서 도로 손해납니다.
그래 반도 못 먹은 치킨을 치우려고 보니 그제야 어이가 없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이례적으로 몇주만에 몇 키로나 빠져 허리 치수가 바뀔 정도라지만 그래봤자 여전히 튼실-_-한 내 몸매 어디가 그리 서럽게 느껴졌는지부터 시작해서 뛰쳐나가 산 것이 왜 하필 치킨이었는지까지.
저녁을 못 먹어 뛰쳐나갔으면 소화도 안 되는 판에 밥을 먹고 들어오면 될 것을 왜 가장 소화 안되기로 유명한 튀긴 닭을 산건지.. 요새 조류독감 때문에 파동 일어난 닭 수요를 한마리라도 늘려보기 위함이었는지.. 조류독감 걸리면 20억 준다던데 혹 20억 받아서 등록금 걱정 안하고 학교를 다녀보고자 함이었는지.. -_- 기가 막혔습니다.
거의 한마리 그대로 남은 치킨을 바라보자니 어이가 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네이트온에 접속해서 친구한테 얘기하니 거의 뒤집어지더군요. 닭 한마리를 충동구매 했다니 웃기기는 웃기겠지요 -_-; 그러다 같은 기숙사에 친구가 들어오길래 닭 먹을라나 물어봤습니다.
어차피 저 혼자 그 닭 끼고 있어봤자 주말내내 먹어도 다 못 먹을꺼고 결국 일요일 즈음엔 남은 닭이 상해서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될거니까요. 물어보니 친구도 술 먹고 방금 들어온거지만 지하로 오라더라구요. (친구는 남자 기숙사, 저는 여자 기숙사라 지하에서밖에 못 봅니다) 지하로가니 방금 닭 안주에 술 먹고 왔다는 친구는 한 쪽만 먹고 그만 먹어 결국 닭은 아직도 거의 한마리 가까이.
제 룸메는 집에 간 듯 외박인지라 혹시 누구 줄 사람 있으면 가져가라고 했더니 룸메가 있긴 한데..너 안 먹냐며 물어보는걸 어차피 소화 안되서 닭 많이 못 먹는다고 가져가서 반겨줄 사람 있으면 갖고가랬더니 룸메와 룸메 친구들에 방에 뭐 보고 있다고 갖고 갔습니다.
비록 충동구매지만 버려지는 것보다는 남이라도 배부르게 먹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방으로 올라왔더니 닭 갖고간 친구에게서 쪽지가 오더군요.
"야 내 룸메가 너 봤대"
그냥, 직감적으로 아까 그 두 남자가 떠올랐습니다 ㅠ_ㅠ 제 뒤에서 도란도란 닭 집 상황과 상세한 가격까지 얘기하던.. 물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 두 사람 맞다더군요. 세상에! 하느님 아버지!
정말 그 순간 쪽팔려서 땅 파고 들어가 눕고 싶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얼마나 웃겼을까요. 오밤중에 셔틀 끊기기 일보직전에, 웬 쪼마난 여자가 머리는 산발(감고난 직후라 덜 말랐으니 풀어헤치고 나갔습니다. 제 머리는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인데 약간 곱슬이라 그다지 차분하거나 찰랑이지는 않습니다-_-;)로 풀어헤치고 두꺼운 겨울 잠바를 입고서 닭 한마리를 사들고 가는 걸 보면서 "아 맛있는 닭이다" 했는데 그게 약 2시간 30분 만에 자기들 앞에 와 있다니.
나름 저거 들고가서 룸메이트랑 먹겠구나 했을건데 알고보니 혼자 충동적으로 닭 사다가 반도 못 먹고 주는거라니.. -_-; 그래도 그 분들 '저 여자 미쳤네'하지 않고 고맙다고 잘 먹었다고 해주시더군요 ㅠ_ㅠ 뭐 웃기야 엄청 웃으셨겠지만서도..ㅠ_ㅠ 어쨌든...그때까지 약간 서러운 기분이 남아 있었는데 그 쪽팔림에 서러움도 잊었습니다. 너무 황당하고 세상 참 좁네 싶기도 하고..
아까 닭 충동구매에 뒤집어지게 웃었던 친구는 이번에도 역시나 무척 즐거워하며 뒤집어지게 웃었습니다. 자기 룸메에게 닭 날라다주고 저를 쪽팔림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은 그 남자 동기는 한 세상 웃다가면 그만 아니냐고 하고..
그래 한 세상 웃다 가기로 했습니다. 오밤중에 왜 닭 한마리를 충동구매한건지 몰라도, 저 하나 삽질-_-로 인해 친구가 두 명이나 즐겁고, 친구의 룸메와 그 친구들은 배가 부르면서도 즐겁고, 저 스스로도 나름 어이없지만 즐겁고, 또 우리에게서 그 이야기를 전해들을 다른 사람들까지 즐겁지 않겠습니까.
이 이야기를 읽고, 세상사 지친 여러분도 짧은 순간이지만 즐거우시길 바랍니다.
늦은 밤, 불면증에 시달리는 한 여대생이었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