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부 높이 나는 새는 짝을 잃는다.
4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는 전철역에서 혜나와 나는 헤어졌다. 혜나는 다른 약속이 있다고
했다. 나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2호선으로 갈아타고 역삼동을 막 지났을 때 누군가 내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조금 거리를 두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여기서 또 보네요.”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었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택시 사건의 주인공. 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우리 통성명이나 하죠. 차 세현입니다.”
그가 손을 내밀며 말했지만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누가 이름 알고 싶댄나. 피식 웃으며 내민
손을 거두더니 다시 말을 걸었다.
“오늘이 세 번째 우연이라는 거 알고 있어요?”
하마터면 나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웃음을 겨우 참고 그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돌아보고는
썩소를 한 방 날려 주었다.
“아무래도 인연인 것 같은데.”
“이것 보세요. 우연의 반복은 인연이라고 말하고 싶은 가요? 누가요? 나하고 당신이요? 사람 봐
가면서 작업 거시죠. 그런 말에 현혹할 나이는 아니거든요. 이 나이면 나잇살도 안 빠지지만,
그런 얕은 수작에도 잘 안 넘어가거든요.”
“그런가요? 그런데 사람 말을 좀 오해하는 것 같군요. 착각도 잘 하시더니. 인연이라는 말이 어디
남녀 사이에서만 존재합니까? 나는 단지, 우리가 자주 부딪히는 것 같아서 이것도 인연이다 싶어,
서로 인사 정도는 하고 지냈으면 하는 마음에 했던 말인데, 그렇게 흥분할 건 없잖아요? 뭐, 싫으면
그만두슈.”
그러더니 손에 든 신문을 활짝 펴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말문이 막혔다. 왜 이 사람한테는 매번
이런 식으로 당하고 있는 걸까. 정말 볼수록 얄미운 놈이다. 저렇게 펄펄 살아 있는 주둥이만큼이나
사는 것도 야무질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자꾸 약이 바짝 올랐다.
“이것 봐요. 나한테 대체 왜 이래요?”
나는 그가 펼치고 있던 신문을 확 젖히며 화를 냈다.
“내가 뭘요?”
“매번 왜 사람 약을 올려요? 당신, 나 알아요? 누가 아는 척 해달라고 했어요? 부탁인데, 제발
다음엔 봐도 모른 척 좀 해줄래요?”
“그럽시다.”
그리고선 다시 신문을 확 펼치는 게 아닌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상실된 상태였다. 정말이지
분하고 억울한 생각이 자꾸 들었다. 저 놈을 한 방 먹였으면 좋겠단 생각이 마구 솟아올랐다.
잠실역에 다 왔을 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선 그가 펼쳐서 보고 있던 신문을 확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자 씩씩거리며 신문을 발로 마구 밟아댔다.
“다음에 한 번만 더 아는 척 하면, 당신 얼굴을 이렇게 만들 줄 알라구.”
문이 열리자 나는 빠른 걸음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벙찐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던 그의
얼굴이 떠올라 통쾌했다. 입구를 향해 계단으로 내려가는데 누군가 내 팔을 확 낚아챘다.
그 바람에 몸이 앞으로 기우뚱 거렸다. 그였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팔을 뿌리쳤다. 최대한 도도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뭐요? 나한테 볼 일 남았어요?”
그가 그런 내 얼굴 앞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가방을 들어 보였다.
“난 남은 거 없고, 당신이 남긴 게 있길래.”
나는 그의 손에서 달랑 거리는 가방을 홱 뺏어 들고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누가 고마워하기라도
할까봐? 변태 자식. 지하도 출구로 나오자 나는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출구로 나갔나? 어쨌든 기분 나쁜 놈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날 찾고 있었어요?”
두리번거리다 돌아서는데 언제 왔는지 그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별꼴이야 정말.”
나는 무안한 마음에 그를 밀치며 앞서 걸어 나갔다. 괜히 뒤는 돌아봐서 망신이네.
난 몸서리를 치며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지란은 귀가 전이었다. 하루 종일 걸었던 탓인지 발은 퉁퉁 부어 있었다. 족욕기에 물을 넣고 발을
담갔다.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사직서를 던지고 백수 생활한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갔다. 그 동안에 나는 아무런 계획을 세워 놓지 않았다. 당분간은 계획 없이 지낼 생각이었지만, 조금씩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오래전에 손을 놓았던 그림을 다시 시작하기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 그냥 취미로 해보는 거야.
띠리리리.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무릎을 꿇고 물이 묻은 발을 세워 엉금엉금 기어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여보세요.”
상대는 말이 없었다. 나는 휴대폰을 왼쪽 어깨와 턱 사이에 끼어 놓고 다시 엉금엉금 기어서
족욕기에 발을 담갔다. 자세를 똑바로 고쳐 잡고 나는 다시 물었다.
“여보세요?”
“잘, 있었어?”
그였다. 다섯 번째의 남자. 결국 사직서를 쓰게 만들었던 사람.
“지금도 잘 있어요.”
심장이 벌떡벌떡 뛰고 있었지만 나는 애써 태연하게 굴었다.
“그냥…….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네.”
할 말이 참 없었다. 끝난 사이에서는 할 말도 같이 사라지는 모양이다.
“나, 이번에 과장으로 승진했어.”
“잘됐네요, 그렇게 원하더니. 축하해요.”
“응.”
그도 내게 할 말이 별로 없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시간이 없으니까.
“내일 시간 어때?”
무슨 뜻으로 묻는 걸까. 그저 옛애인의 안부가 궁금한 걸까, 아님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신호일까.
나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 안 돼?”
“시간이 안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냥, 그냥 한 번 보는 것뿐이야. 어렵게 생각하지 마.”
“우리가 지금 쉬운 사이는 아니잖아요.”
“아직도 날을 세우는 걸 보니, 나한테 맺힌 게 많은 모양이군.”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생각이 혹시, 바뀌면 문자라도 보내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 쪽도 자신이 없어서였을까. 만나는 것도, 만나지 않는 것도.
갑자기 우유부단해진 내가 의심스러웠다. 전화를 끊고 나는 가만히 생각한다. 옛애인의 전화를
받을 때, 다른 이들은 어떤 마음일까. 지란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심장이 이렇게 팔딱팔딱 뛰고
있는 건, 내가 아직 그를 사랑해서일까.
저녁 아홉 시가 넘어서야 지란이 들어왔다.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건만 나는 돌아보지 않고 코털을
뽑는 것에 열중했다.
“혜나는?”
지란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아직.”
“아직도 골이 나 있는 거야?”
“쪽팔려서 그렇지 뭐.”
족집게를 내려놓고 돌아보자 지란이 앞에 앉았다.
“쪽팔리긴 나도 마찬가지지 뭐. 어쨌든 막말한 거 미안해. 하지만 너도 심했어.”
“이하동문.”
“혜나가 늦네.”
지란이 일어나 가방을 들고 방으로 향하자 나도 모르게 또 대뜸 나섰다.
“현우 만나고 오는 길이니?”
“어.”
지란이 방으로 들어가자 나는 내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다. 남의 연애사에 왜 이렇게 입을 대고 싶어
안달을 낼까. 사랑에 빠지면 당사자가 보지 못하는 허점투성이를 삼자는 본다. 그래서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다. 내 눈에는 가시밭길인데, 지란은 꽃밭인줄 착각하고 맨발로 걸어간다. 발바닥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는 것이 내 눈에는 또렷하게 보이는데, 왜 지란은 보지 못할까 하는 생각에
자꾸만 입을 대는 것이다. 사랑은 가시밭길도 아프지 않고, 꽃밭이라는 환상을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사랑이 이토록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많은 바보 속에 나 또한 한 사람임은 분명했다.
혜나가 돌아왔다. 그녀는 몹시 지쳐 보였다. 지란과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움직이는 방향대로
시선을 움직였다. 그녀가 욕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며 거실에 앉아 있었다.
지란은 자꾸 나를 힐끔 거렸다. 무슨 말인가를 먼저 꺼내주길 원하는 것 같았다. 머리에 수건을
둘러쓰고 혜나가 나와 앉았다.
“호기심 많은 똘똘이들 같아.”
혜나가 피식 웃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그이하고 그 여잘 만났어. 셋이서 말야.”
지란과 나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혜나는 오히려 덤덤했다. 긴장한 것은 오히려 우리였다.
“쥐어뜯었어?”
지란이 참지 못하고 불쑥 끼어들었다.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었어. 하지만 정말 쥐어뜯고 싶었던 사람은 그이야.”
“그렇겠지.”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렇게는 하루도 못 버티겠단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그들을 만났어. 생각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계집이야. 기가 막혀서.”
혜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대체 얼마나 젊기에?
“둘이 붙여 놓으니까, 원조교제라고 해도 믿겠더라구. 새파란 기집애하고 무슨 얘길 해야 하나
난감해지더라구. 그런데 그이가 제대로 정리를 해주더군. 그 기집애만 있으면 된대. 아무 것도 필요
없다더라.”
“어머머.”
지란이 놀란 토끼눈을 하며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싸대기를 한 대 때려줬어. 그래봤자 정신 차릴 놈도 아니지만. 그래서 단호하게 말해줬지. 둘이서
새 출발 하라고.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라 그랬어. 대신, 이혼은 절대로 못해준다고 했지.
내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어. 그때 해주겠다고. 배신의 죗값이라 생각하고
무조건 기다리라고 했어.”
“기다리겠대?”
지란이 다시 끼어 들며 물었다.
“남자가 어리석은 게 뭔 줄 아니? 혼인신고 서류 한 장이면 온전히 자기 사람이 된다고 착각하는
거야. 당장 이혼 해달라고 하기에 한 대 더 때려줬지 뭐. 내일 당장 집을 내놓을 생각이야. 그 집에선
못 살 것 같애.”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이번엔 내가 물었다.
“사랑에 있어서는 후회보다도 미련이 더 오래 남는다더라. 미련은 이미 버렸으니 그 까짓 후회
쯤이야 못 이겨내겠어? 미술관에서 본 그 죽음의 작품을 보고 깨달았어. 나는 이미 죽은 남자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거야. 내 사랑은 그쯤에서 죽었어. 다시 회생할 기회는 없어. 죽으면 그걸로
끝인 거야. 내 얘긴 여기서 끝이야. 그만들 주무시지.”
혜나는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남은 지란과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정말 괜찮은 걸까? 혜나가 존경스러워.”
시작할 때에 비해 끝은 이렇게 허무한 것이 사랑이구나 싶은 생각이 다시 들었다. 시작은 긴 데에
비해 끝은 말 그대로 단칼에 끝이다. 더 이상 돌아볼 여지도 없다. 끝. 혜나는 남편에 대한 사랑에
마침표를 찍었다.
나는 다섯 번째 남자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 역시 그 후로 연락이 없었다. 나는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그를 완전하게 떠나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난 지란과는
반대다. 사랑에 있어서 실수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실수가 더 이상 아닐 때에는 사랑을 지속
할 이유가 없어진다. 매번 자신의 사랑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흔들린다면 그것은 사랑이 결코
아니다. 목적은 결혼이다. 결혼에 있어서는 사랑보다도 확실해야 하므로. 그래서 난 세 명의 남자를
떠나보내는 과오를 저질렀던 것이다.
지란은 여전히 현우와 만나고 있었고, 혜나는 바로 우리 옆동으로 이사를 했다. 혜나는 바빴다. 세
살난 아이를 놀이방에 맡기고, 자신의 일을 찾겠다고 나선 것이다. 예전보다 더 가까이 두고 사는
데도 오히려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그 속이야 어떤지 알 수없는 노릇이지만 그럭저럭 혜나는 잘해
나가고 있었다.
이제 곧 해가 바뀔 차례다. 나는 해가 바뀌기 전에 조깅을 시작했다. 늦게까지 잠을 자는 습관을
바꿔야 했다. 그리고 한가한 오후 시간에는 화실에 있었다. 동양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직은 가장
기초적인 붓의 놀림을 배우느라 매일 줄만 그어대고 있었다.
이른 새벽이면 아파트를 빠져 나와 한강을 따라 뛰었다. 온 몸에서 땀이 솟을 때면 그제야 온전히 내가 깨어 있음을 느꼈다.
“나잇살이 무서워진거요?”
돌아오는 길에 주차장에서 그를 만났다. 검은 색 가방을 들고 말쑥한 차림을 한 그의 모습이 전에
비해 달라 보였다.
“아는 척 말라고 경고했을텐데요.”
“거, 이웃끼리 좀 알고 지내자는데 뭘 그렇게 빡빡하게 구시나.”
나는 더 이상 대꾸할 말문을 잃었다. 사실 그와 말장난 하는 데에도 지쳤다.
“내가 졌어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패자의 모습을 보이자 그가 빙그레 웃었다.
“그쪽, 선인장 같은 거 압니까? 가시를 너무 세우셨어. 다가서려니 같이 가시를 세울 수 밖에
없었어요.”
“직업이 대체 뭐에요?”
“변호사나 검사는 아니오.”
그가 웃으며 나를 지나쳤다. 나는 몸을 돌려 그의 뒷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그러자 걸음을
멈추고 그가 다시 돌아보았다.
“언제 시간 있어요?”
나는 대답 대신 어깨를 들어 보였다.
“이름이 뭐요?”
“이 서영.”
그가 손을 들어 보이며 저만치 걸어간다. 주차 해놓은 차 앞에서 그가 다시 돌아보았다.
“내일 저녁에 여기서 봅시다.”
대체 저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생각하면 할수록 연구대상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섰다.
선을 긋는다고 해서 쉽게 생각하면 안된다. 선을 끊지 않고 먹의 농담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선을 긋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은 붓과 손가락이 친숙해져야 한다. 붓에 손이 놀아나
도 안 되고, 손에 붓이 너무 벗어나도 안 된다. 나는 며칠 째 선을 긋고 있었다. 화실엔 나 말고도
제자가 네 명이다. 스승은 매일 나와서 제자들의 그림을 대충 둘러 보시다가 내내 한량처럼 방에
들어가 누워 음악을 듣거나, 가까운 이웃과 대낮부터 술판을 벌이기도 했다. 제자들의 실력에
관심이 없는 듯 하나, 한 번 지적을 할 때에는 정확하게 나무라거나,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쭐을 냈다.
“선은 그만 그어도 되겠다. 생각보다 빠르구나. 남은 시간동안은 먹을 갈도록 해라. 너무 진해서도
아니되고, 너무 옅어서도 아니된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이 정도를 지키는 것이다. 넘쳐서도 안 되고, 모자라서도 안 되는 그
중간의 경계.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처음엔 사랑에 집착하다가 결국엔 상대에게
집착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선을 지키는 것. ‘적당’이란 단어는 매우 어렵다. 두 시간을 먹만 갈다
가 화실을 나왔다. 이미 망년회가 시작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12월은 나에게 너무 잔인한 달이다.
집에 도착한 시간이 여섯 시쯤이었다. 지란은 오늘도 역시 늦는다고 했다. 혜나는 하루종일 놀이방
에서 지냈을 아이와 저녁 시간을 보내야 했다. 역시나 나는 혼자였다. 세탁기를 돌려 놓고, 이틀째
밀려 놓았던 설거지를 끝마쳤다. 음식물통에서 나는 악취는 지란의 방귀보다도 더 지독했다.
저녁을 혼자 먹을 생각을 하니 입맛이 달아났다. 나는 어제 그가 말한 저녁시간을 사실,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세탁기를 돌리는 동안 베란다 아래쪽을 몇 번이나 내려다 보았을까. 이미 땅거미
가 지고, 어둑어둑 하건만 저녁에 보자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하는 말이었겠지?
근데, 내가 왜 그 사람을 기다리는 걸까. 나와 수다를 떨어줄 사람이 없다. 나는 빨래를 탁탁 털어
널면서도 베란다 아래를 힐끔 거렸다. 시간은 이미 저녁 여덟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빌어먹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옷을 차려 입고, 현관을 나섰다.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차가 혹시라도 그일까
기웃거리기도 했다. 역시 그냥 지나가는 인사치레였던 것이다. 오늘은 그냥 굶어 버리자. 몸을
돌리는데 클렉션이 앙칼지게 울렸다. 뒤를 돌아보자 반가운 그가 차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반가운 그? 나는 사람이 그리웠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내 마음을 들키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새침을 떼며 팔짱을 끼고 말했다.
“퇴근이 늦으시네요.”
“나, 기다린 겁니까?”
“하, 내가 왜 댁을 기다려요?”
“아까부터 여기서 기웃거리는 거, 다 봤어요. 솔직해진다는 게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까?”
“착각 말아요. 댁 기다린 거 아니었으니까. 그냥, 뭐 바람이나 쐬려고 나온 거에요.”
그는 믿지 않는다는 듯 기분 나쁘게 웃음을 흘렸다.
“저녁 전이죠? 같이 저녁이나 먹읍시다.”
나는 잠시 망설이는 듯 뜸을 들이다가 발끝으로 땅바닥을 툭 치며 말했다.
“뭐, 딱히 할 일도 없는데 그러죠.”
“멀리 가지 말고, 근천에 갑시다. 석촌 호수 근처에 손짜장 집이 있는데 맛이 괜찮아요. 자장면
어때요?”
겨우 자장이란 말인가. 그래도 뭐, 혼자 먹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 나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음식집을 가는 동안 의외로 그는 말이 없었다. 입만 산 줄 알았던 그가 말이 없으니 뭔가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음식점은 호수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과연 옛날 자장면과 같은 맛이 날까.
주문한 자장이 나오자 군침이 돌았다. 사실 배가 무척 고픈 상태이긴 했다.
“혼자 살아요?”
그가 먼저 물었다. 나는 입안 가득 자장을 밀어 넣고 우물거리다 물을 한 잔 마셨다.
“아뇨, 친구랑.”
“내가 보기엔 백수 같던데.”
“맞아요.”
나는 다시 자장을 한 입 가득 밀어 넣고 있었다. 그런 나를 그가 물끄러미 보다 피식 웃는다. 뭐야?
저 웃음의 정체는.
“배가 많이 고팠나 보군요.”
“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먹고 보잔 심산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무슨 일 해요?”
이번엔 내가 먼저 물었다. 그러자 그는 지갑을 꺼내 명함을 한 장 건네주었다.
H자동차 디자인부 대리 차 세현이라고 씌여져 있었다.
“자동차 디자이너세요?”
“그런셈이죠.”
생긴 거하고는 정말 다르네. 어쩐지 디자이너라고 하니 사람이 달라 보였다. 오호!
“자동차 디자인으로는 최고로 꼽히는 곳이 켈리포니아에 있는 아트센터에요.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이들에겐 꿈 같은 곳이죠. 내게는 그저 꿈이 된 곳이긴 하지만, 여기서 나름대로 내 꿈을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켈리포니아가 아니라, 여기 한국에서도 세계적으로 최고의 디자인을 만들어낼 수
있는 혁신을 일으키고 싶은 게, 내 소망입니다,”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네요.”
“직업이라기 보다 꿈이죠. 꿈을 만들고 있는 겁니다.”
말장난을 치던 그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어서 놀라웠다. 순간 잊고 있던 나의 꿈을 떠올렸다.
내 꿈이 뭐였던가. 결혼?........꼬르륵. 젠장.
자장을 다 비워내고 물을 한 잔 마셨더니 그제야 포만감이 밀려왔다. 그가 휴지를 건네주며 물었다.
“몇살이에요?”
“서른 둘이요. 곧 서른 셋이 되죠. 그쪽은요?”
“그쪽보다 한 살 적어요. 일어납시다.”
아니, 한 살 어린 놈이 너무 늙은 티를 내고 있는 거 아냐. 괜히 기분 나빠지는 것 같아 휴지를 툭
던져 놓고 밖으로 나왔다.
“잘 먹었어요.”
“다음엔 서영씨가 사요.”
그리고선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의 뒷통수를 보며 나는 그의 말투를 흉내냈다.
“다음엔 서영씨가 사요.”
집으로 들어왔을 땐, 지란이 황토팩을 얼굴에 바르고 앉아 있었다. 연애가 좋긴 하나보다. 저래서
사랑하면 이뻐진다고들 하지.
“언제 왔어?”
“조금 전에. 넌 어디 갔었어? 아까 휴대폰 울리더라. 받으려다 그냥 뒀어.”
침대 위에 던져둔 휴대폰을 집어 들어 부재를 확인했다. 다섯 번째의 그였다. 그만 무시하자.
사랑이 진행이던 순간에는 미적대다가 끝이 나면, 대범해지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다. 왜 항상 버스
가 지나고 나면 손을 흔드는 걸까. 폴더를 닫고 일어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화면에 혜나의 번호가 떴다. 순간 긴장하던 마음이 풀어지고 배시시 웃음이 났다.
“이번주 토요일, 시간 어때?”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혜나가 물었다.
“시간은 왜?”
“비상을 좀 해볼까 해서.”
“비상?”
“사랑을 얻으려면 비상을 해야 하지 않을까? 때가 된 것 같아서, 이 언니가 널 좀 도우려고 그런다.”
혜나는 장소와 시간을 정확하게 말하고는 이내 전화를 끊어버렸다. 비상? 때?
먹은 너무 묽어서도, 질어도 안 된다. 적당한 물의 양과 먹의 색이 잘 맞아 떨어져야 한다. 먹의
농담을 조절할 줄 안다면 동양화의 절반은 이미 배운 셈이라 했다. 나는 오늘부터 가지를 치기 시작
했다. 가장 기초의 단계였던 선 긋기는 가지 치는 것에 매우 많은 도움을 준다. 가지를 칠 때는 끊어
내지 않고, 쉬어 줄 때엔 손목을 부드럽게 하여, 다시 뻗어 나가야 한다. 쉬운 것 같으면서도 가지를
치는 건 가장 어려운 일이다. 십 년을 넘게 공부한 이도 가지나 나무를 그리는 일이 매우 어렵다 했다.
평생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손목은 자꾸 어긋나고, 붓의 놀림이 서툴러 가지는 마치 꿈
틀대는 뱀의 형상을 닮았다. 나는 제대로 되지 않자 조급해지는 마음을 다시 가다듬었다. 그러다 누
군가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다섯 번째의 그가 거기에 서 있었다.
화실 근처에 있는 레인보우라는 까페 안은 서늘한 늦가을의 풍경처럼 을씨년스러웠다. 실내에는 그
와 나뿐이었고, 주인도 없는 까페에 음악만 흐르는 것 같았다. 홍차를 가져다 놓고선 주인인지,
종업원인지 모를 사람은 자취를 감췄다.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왔어요?”
“알려고 들면 못 알아낼 게 있나.”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번은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만나주지 않더군.”
“나는 만나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나는 시선을 창 밖으로 둔 채 덤덤하게 말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만나지 못하고 떨어져 있는 그
시간동안에는, 그의 음성만으로도 심장이 뛰었는데, 막상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았다.
“그렇게 회사를 그만둔 게, 내내 마음에 걸렸어.”
“그건 강대리님 탓이 아니에요. 아무 상관 없어요.”
“강대리?”
"그럼 강과장님이라고 불러 드려요? 승진도 했다는데."
그가 씁쓸하게 웃음을 흘렸다. 나는 왜 그에게 예전처럼 오빠라고 부르지 않고, 강대리라고 순간 칭
했을까. 어쩐지 오빠라는 단어가 낯설었고, 불편했다.
“결혼이 부담스러웠어.”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피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넌 아니라고 하면서도, 매번 우리의 끝은 당연히 결혼일거라는 확인을 내게 하고 싶었던 거야.
보이지 않게 너는 결혼이란 목적을 두고, 내게 사랑을 강요했어. 그게 부담스러웠어. 난 결혼에
아직, 자신이 없어. 그래, 이기적이라는 거 알아. 그래도 난, 그저 사랑만 하고 싶었어. 결혼에는
너무 많은 책임과 의무가 따르니까. 그게 겁이 난 것도 사실이야. 그렇게 마음의 부담을 안고 평생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거야.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였어.”
“이제와 이런 얘기 왜 해요?”
나는 그의 말이 노여웠다. 그의 모든 말들이 아주 철저한 이기심의 변명처럼 들렸다.
“같은 회사에 있을 땐, 그래도 너의 얼굴이나마 볼 수 있었던 게 좋았어. 니가 없는 빈 자리가
생기면서, 이제는 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지. 혼란스럽긴 매한가지야. 하지만,
난 아직도 결혼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이 없어. 너에게 약속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 단지, 너를
끝까지 사랑하겠다는 것, 그거 하나는 약속할 수 있어. 꼭 결혼을 해야겠니?”
“이봐요, 강대리님. 당신의 사랑이 진심이라구? 사랑의 목적이 결혼일순 없지만, 사랑의 진심은
또한 결혼이에요. 정말 그 사랑이 진심이라면, 자신없는 그 결혼까지도 감수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만큼 사랑이 절실하다면요. 절실한 사랑의 상대가 원한다면요. 당신에겐 사랑이
필요한 게 아니라, 쿨한 엔조이가 필요한 거겠죠.”
“왜 진심을 모르니?”
“그 진심은 일 년전에도 알고 있었죠. 자꾸 착각하는 것 같은데, 우리는 일 년전에 끝났어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 년전에도 상황은 똑같았고, 한 치도 틀리지 않는 대화를 주고
받았다. 이제는 싫증이 났다. 더 이상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내 팔을 움켜 잡았다.
나는 그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당신은, 너무 높이 날았어. 결혼이 두려운 게 아니라, 결혼 상대자가 나라는 이유가 두려웠던
거겠지.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너무, 낮은 곳에 있었으니까. 당신은 더 높이 날고 싶었던
거야. 그러니 이젠 맘껏 날아보라구. 누가 뭐래?”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왔다. 진눈깨비가 쏟아질 것 같은 뿌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비상하는 우리를 본다. 나는 알고 있다. 우리는 서로 높이 날기를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아니라고 했지만, 어쩌면 나는 결혼이란 목적지에 닿기 위해서 한없이, 높이 비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서로 다른 목적을 두고 함께 비상했다. 그것이 이별의 첫 번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