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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빛 우정 1~3

이구아나 |2006.12.06 23:35
조회 271 |추천 0

한가로운 오후..

 

영주는 대학생활 3년만에 처음으로 사귄 남자친구와 함께 젊음이 가득한 신촌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충만감에 사로잡힌 그들.. 마치 이 세상에 그들 둘 이외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 서로에게 푹빠져있는 신참커플이다. 헌데 이렇듯 꿈길을 걷고 있는 영주를 '툭' 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으니.. 

 

"뭐야?"

 

짜증이 극에 달한 영주가 뒤돌아 소리친다. 그리고 한 순간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머리칼로 살짝 가려지긴 했지만 그의 눈을 바라본 영주는 잠시 멈칫한다.

 

"죄송합니다."

 

영주는 자신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사과를 하며 돌아선다.

 

"아는  사람이냐?"

 

영주의 남자친구가 영주의 멍해진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묻는다. 영주는 대답도 않은 채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다. 남자친구가 뒤돌아 그 사람을 쳐다본다. 누구든 한번 쯤은 돌아보게 만들 법한 매력적인 남자. 왠지 모를 우수어린 분위기가  바라보는 이의 가슴까지 저미게 만드는 묘한 사람이다.

 

"쳇! 뭐야.. 반했냐?"

 

남자친구는 기분이 상한 듯 삐죽거리며 영주의 손을 잡아끈다. 하지만 그 사람.. 그 묘한 사람은 걸음

을 옮기는 영주의 뒷모습까지 묵묵히 바라보더니 다시 돌아서서 걷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사람의 입술이 묘하게 웃고 있다. 그 웃음은 쓸쓸하고.. 또 슬프다.  


 

 

1. Past years


올해 고등학생이 된 영주는 막 등교준비를 마쳤다. 새 교복, 새 가방.. 모든 것이 새롭다. 오늘부터 새로운 세계로 입성하는 것이다. 영주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머리와 옷매무새등을 가다듬는다.귀를 살짝 덮는 커트머리와 늘씬하게 뻗은 다리.. 영주에게서는 왠지모를 중성적 매력이 물씬 풍긴다. 영주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어린시절을 떠올린다.

 

"그땐.."

 

3명의 언니들 틈에서 자란 영주는 인형놀이를 좋아했다. 예쁜치마가 갖고 싶어 떼를 쓰고, 언니들에게 머리를 땋아달라고 조르던 아주 평범한 여자아이였다. 그리고 중학생시절까지도.. 그 날이 오기전까지 영주는 여느 여중생과 다를바 없는 그런 평범한 아이였다.
그 날 낮잠을 자지 않았다면.. 그리고 입속에 있던 껌이 머리에 덕지덕지 붙어버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 단발머리를 잘라내지 않았다면.. 어쩜 오늘의 영주는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머리를 자른 다음날.. 영주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영주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감정에 그들도 당황하였으리라. 그냥 넋을 잃고 말았더랬다. 그도 그럴것이 머리를 자르는 순간 영주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녀의 숨겨져 있던 중성적 매력이 드러나버린 것이다.

그러고보면 영주에겐 분명 뭔가 다른 구석이 있었다. 날이 갈수록 쭉쭉 뻗는 팔다리도 그러하거니와 영주를 보면 어떤 아련한 느낌이 있었다. 부드러운 갈색머릿결.. 아기같은 피부결.. 하지만 무엇보다 영주의 눈을 보면 가슴이 저려온다. 깊고 촉촉한 그 눈빛이 이상하게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영주의 눈동자는 푸른빛이 감돈다. 영원처럼 고독한 깊은 바다 빛..
 
어느 누구보다도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며 사춘기라는 열병에 고통을 겪게 되는 족속이 여중생들이다. 하지만 여학교라는 울타리속에 갇힌 수감자들의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울타리 속에서 이성을 찾을 수 없을 시 그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은 조금 왜곡되고 만다. 그들의 열정은 이성과 닮은 누군가에게로 향한다. 그렇게 미림여중생들의 열정은 자연스레 영주에게로 집중되어 버렸다

단짝 현정이도, 민지도 영주앞에서 얼굴이 새빨개져버렸다. 등굣길 곳곳에서 여중생들이 튀어나와 편지를 주고 도망가기도했다. 화장실만 다녀와도 영주의 책상위엔 늘 간식거리가 쌓여있었다. 발렌타인데이에 받은 초컬릿박스는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처음엔 예상치 못한 낯선반응에 당혹해 하던 영주였다. 하지만 꿈많은 소녀들이 제공하는 관심과 사랑에는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이 있었다. 소녀들은 영주의 왕국을 만들어주었고 영주가 그 왕국을 떠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영주에게 모든 권력을 부여했다. 권력의 달콤함이란..
결국 영주는 그 특권을 포기할 수 없었던가보다. 영주는 소녀들위에 군림했고.. 소녀들은 그의 통치에 열광했다. 소녀들은.. 영주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권력이란 절대 쉽사리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주는 노력했다. 중학교 시절 내내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소녀들의 저항할 수 없는 압력아래.. 그 무서운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점차 그들의 기호에 완벽히 부합하는 이성상으로 다듬어진 영주.. 그러니 누구라도 영주의 눈빛에 가슴이 설레지 않은 이가 있었겠는가..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영주는 이미 미림여중의 전설이었다. 수많은 후배들의 눈물과 숨막힐 듯한 꽃다발속에서.. 전례없는 그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그녀의 왕국에서 물러났다.


 

이제 고등학생이 된 영주...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주는 또 여고에 배정을 받았다.

 

"고딩들한테도 먹히려나?"

 

영주는 거울속 자신의 모습에 실없는 웃음을 흘려보내며 서둘러 집을 나선다.

 

1학년 2반..
앞으로 영주가 몸담을 반이다. 영주는 교실문을 열고 들어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기저기서 영주를 흘긋 거리는 소녀들의 눈빛이 느껴진다. 결국 고딩들한테도 먹히는 모양이다. 다시 한번 영주왕국이 탄생할 것인가?

 

"쿡!"

 

영주는 괜히 웃음이 난다. 그 순간..

 

"저기.."

 

누군가 영주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예?"

 

영주는 흠짓 놀라며 그 누군가를 돌아본다. 아담한 체구에 무척 착해뵈는 여자애가 영주에게 잠깐 나와보라는 손짓을 하고있다. 어리둥절한 영주는 일단 그 아이를 따라 교실문을 나선다. 여자애는 말도없이 앞장서서 얼마를 걷더니 결국 인적 없는 작은 공터에 멈춰선다. 영주도 걸음을 멈추었다.

 

"희선언니가 불러달래서요."

 

그제서야 입을 연 여자애는 새빨개진 얼굴로 황급히 자리를 뜨고만다.

 

"뭐지?"

 

영주는 아직도 어리둥절한채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순간 낮은 발자국 소리가 공터를 고요히 울리기 시

작하고.. 저기서 영주를 향해 다가오는 한 여학생이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영주의 앞에 멈춰선 그녀.. 유리처럼 투명한 피부와 커다란 눈이 매력적인, 굉장한 미인이다! 그런데 이 여학생은 아무말도 않은 채 영주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뿌듯한 미소만 짓고 있다. 영주는 괜히 민망한 마음에 고개를 살짝 떨구어 버린다.

 

"너.. 혹시.. 나 모르겠니?"

 

드디어 여학생이 입을 열었다. 그제서야 영주는 고개를 들어 그 미녀를 찬찬히 살펴본다.

 

'그래! 어쩐지 낯이 익다했지..'

 

희선.. 민희선. 영주의 중학교 시절 미림여고 얼짱으로 유명했던 바로 그 희선이다.

 

"희선.. 선배님?"

 

영주의 한 마디에 희선의 얼굴가득 웃음꽃이 피어난다.

 

"아는구나.."

 

영주를 바라보던 희선의 얼굴이 곧 붉게 물들어버린다.

 

"근데 무슨일로.."

 

영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희선에게 묻는다.

 

"어.. 다른게 아니고.."

 

희선은 잠시 머묻거리는가 싶더니,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영주의 눈빛에 다시 한번 볼이 발그레

해진다.

 

"그게.. 나랑 자매하자구."

 

"자매요?"

 

"어.. 모르니? 우리학교는 자매맺는 전통이 있거든. 나는 너랑 맺고 싶어서.. 미리 말해두는거야."

 

"아.."

 

영주는 뜬금없는 요구에 어색한 미소만 머금고 있다.

 

"왜? 싫니?"

 

갑자기 희선의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새어나온다. 영주는 깜짝 놀라서는..

 

"아니 그게 아니라.."

 

하며 희선을 진정시킨다. 아무래도 보통성격의 소유자는 아닌 듯 싶다.

 

"답해줘. 할건지 말건지.."

 

하지만  난감한 영주는 할 말을 잃고 만다.

 

"어서!"

 

이제 거의 악에 가까운 희선의 목소리에선 살기마저 느껴진다.

 

"아, 예..할게요. 그렇게 해요."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버린 영주... 결국 천하의 영주가 엽기녀에게 두손을 들고 말았다.

 

그렇게 공포의 시간은 지나가고 어느 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래.. 별 일이야 있겠어? 밥이나 먹자!'

 

희선사건으로 인해 영주는 기분이 좋지 않다. 뭔가 잘못걸려들었다는 생각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져 버렸다. 

 

'에잇! 첫날부터 이게 뭐람...'

 

숟가락이 코에 들어가는지 입에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밥을 먹고 있는 영주..

 

"저.."

 

누군가 영주의 등을 톡톡 두드린다. 영주는 화들짝 뒤를 돌아본다.

 

"저.. 희선언니가.."

 

아침에 찾아왔던 그 아이다. 안그래도 침울해있던 영주는 급기야 짜증이 솓구치고 만다.

 

"뭐야! 또 뭔데!"

 

영주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아이는 얼마나 놀랐는지 얼굴이 새빨개져선 떨리는 손가락으로 뒷문을 가

리킨다. 거기선.. 희선이 팔짱을 끼고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영주는 고개를 한번 떨구고는 천천히

일어나 희선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간다. 희선은 자신의 앞에 우뚝 멈춰선 영주를 올려다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묻는다.

 

"너.. 오늘 한번도 나 안찾아왔지?"

 

"전.."

 

"그래! 첨부터 모든 걸 기대할 순 없으니까.."

 

희선은 큰 인심이라도 쓴다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더니,

 

"자.. 이거."

 

하며 영주에게 폰하나를 건낸다.

 

"저.. 폰 있는데요?"

 

"이건 내 전용폰이야! 내가 부르면 당장이라도 달려오라구! 화장실 갈때두.. 청소할때두.. 항상 소지하

구 있으라구! 알겠지?"

 

서둘러 자기 할 말만 마친 희선은 용건이 끝나다는 듯 팽그르르 시녀하나를 끼고는 횅하니 가버린다.

그런 희선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영주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쳇!"

 

영주가 피식 하고 실없는 웃음을 흘린다. 느낄 수 있었다. 아닌척 하지만 떨리는 희선의 손.. 영주의 눈

한번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던 희선의 초조한 표정.. 영주가 모를리 없다. 희선의 모습은 몇 년간 경험해왔던 수많은 여자애들과 조금도 다를바 없었다.

희선이 건내준 폰을 한동안 바라보던 영주의 입가에 알수없는 회심의 미소가 번지기 시작한다.

 

'주도권은 나에게 있다..'


 

5교시가 마쳤다.

 

[드르르르르, 드를르르]

 

그리고 종이 치기가 무섭게 희선이 준 폰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폰주인이나 폰이나 똑같구만..."

 

영주는 한동안 촛점을 잃은 눈빛으로 폰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그 폰을 집어들고는

희선의 반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영주가 걷는동안에도 폰은 쉴 새 없이 요동치고 있다.

 

"작작좀 하시지!"

 

집착녀.. 자기감정을 속이지 못하는 여자.. 희선이라는 여자는 그런 여자다. 그러나... 그런 여자일 수록

다루기는 더욱 쉬운 법! 영주는 희선의 반에 다다라 창문넘어로 교실을 들여다 본다. 희선이 보인다.

희선은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핸드폰의 통화버튼을 끝도 없이 눌러대고 있다. 그러다 도저히 못참겠는

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씩씩대며 앞문을 향해 걸어나온다.

 

"엇!"

 

한순간 희선과 창밖의 영주의 눈이 마주쳤다. 푸른빛이 감도는 영주의 눈동자.. 희선의 걸음이 잠시 멈칫한다. 잔뜩 흐리던 희선의 얼굴은 순식간에 반짝반짝 개어버린다. 한동안 그렇게 멍하니 서 있던 희선은 정신을 차린 듯 잰걸음으로 교실문을 나와 무척이나 화가 난 표정으로 따질기세를 취한다.

 

"너! 왜 전화 안받어!"

 

"왔잖아."

 

낮지만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 영주가 전에 없이 단호한 말투로 희선을 일격에 제압한다.

 

"그래두.."

 

팽팽하던 희선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바람이 빠져버린다.

 

"이건.. 필요없어. 폰두갠 너무 부담스럽단 말야.."

 

영주가 폰을 희선에게 건내준다.

 

"그럼.. 연락은.."

 

"앞으론 내 폰으로 전화해, 그럼 받을 테니까.. 니 폰 줘볼래?

 

희선은 폰을 건내려다 말고.. 깜짝 놀란 듯

 

"왜..왜?"

 

하고 묻는다.

 

"내 번호 찍어주게.."

 

"아..아냐.. 그냥 불러줘. 내가 찍을게."

 

"010 342...."

 

희선이 가만가만 영주의 번호를 찍고 있다. 불과 한시간전과 판이하게 다른 희선의 모습. 그녀는 이미

영주에게 길들여져 버렸다.

 

"어, 수업시작하겠다. 나 그만 가볼게."

 

영주는 아무말 없는 희선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왔던 길을 돌아선다. 영주가 그렇게 돌아서는

순간 희선은 아찔해지는 정신을 가다듬는다. 그리고는 유유히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영주의 뒷모습에 넋을 잃고 만다. 희선은 고개를 떨구어 자신의 폰을 바라본다. 희선의 폰에는 이미 영주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이미 오래전 부터 희선의 전화번호 목록에서 자리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던 번호.. 

 

희선이 영주를 처음 보았던 건.. 중학교 2학년 여름쯤이었을 것이다. 보드라운 분홍빛 피부에 귀를 살

짝덮은 갈색머리를 흩날리며 희선의 앞을 쓱 지나치던 아이..
갈색머리아래 반쯤 가려져 있던 그 아이의 눈동자가 언뜻 희선을 바라봤었다. 빨려들듯한 그 푸른 눈

동자.. 봄내음처럼 향긋하게 사라져가던 그 아이의 비누냄새도.. 잊을 수 없지..

 

얼마 후 전교적으로 유명해져 버린 그 아이.. 언제나 촉촉히 젖은 듯, 슬픈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그 아이가.. 영주였다.

 

'이제.. 영주번호를 누를 수 있어..'

 

영주의 눈빛에 달구어진 희선의 붉은 볼이 좀처럼 식을 것 같지 않다.  

 


[머해? 안졸려? 나 배고파..]

 

희선의 문자다. 희선은 도대체 수업을 듣기나 하는 건지. 하루에도 수십통의 문자를 날린다.

 

[나두]

 

영주는 간결하게 한 마디를 보낸다. 점점 희선을 상대하기가 버거워짐을 느낀다. 그러나 감정기복이

워낙 심한 희선인지라 함부로 싫은 소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수업시간이 마쳤다.

 

"저기.."

 

누군가 영주의 등을 톡톡 두드린다.

 

"어.. 알겠어.."

 

영주가 익숙한 듯 일어선다. 입학 후 하루도 빠짐없이 영주의 등을 두드리는 성희.. 영주가 고개를 돌

리기도 전에 재빨리 뒷걸음질치며 자리를 피하는 여린아이다. 역시나 뒷문에는 희선이 서 있다.

 

"왜?"

 

영주가 느린걸음으로 희선앞에 선다.

 

"이거.."

 

희선이 과자가 잔뜩 든 봉지를 내민다.

 

"뭐야?"

 

"배고프다며.."

 

희선은 붉어진 얼굴로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어.. 너두 배고프댔지.."

 

"난 괜찮아.. 많이 먹어.. 그리구 내일 콘서트 안갈래? 나 티켓이 생겼는데.."

 

"내일? 내일은.. 좀 그런데.."

 

"왜?"

 

희선의 목소리톤이 한층 높아진다.

 

"어.. 그날이야.."

 

영주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한다. 희선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그럼 할 수 없지..머.."

 

희선은 재빨리 돌아서서 가버린다. 희선은 그런 종류의 말을 듣기 싫어한다. 영주에게도 그날이 있다

는 걸 인정하기 싫어한다.

 

"너두 먹어.."

 

영주는 초코바하나를 꺼내 멀찍이 서 있는 성희에게 건내준다.

 

"괘..괜찮아.."

 

"왜.. 먹어."

 

영주가 성희에게 한걸음 다가선다. 당황한 성희의 얼굴이 붉어진다. 거절하는 법을 모르는 아이..성희

만 보면 영주는 안쓰런 마음이 앞선다.

 

"고마워.."

 

성희가 작은 손을 내밀어 초코바를 받아든다.

 

"너.. 귀찮지 않아?"

 

영주가 묻는다.

 

"아.. 괜찮아."

 

"거짓말.."

 

영주의 말에 성희의 코끝이 빨개진다. 곧이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성희는 조용히 엎드려 버린다. 울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와! 같이 먹자 영주!"

 

짝궁 지윤이 과자봉지로 달려들어 과자봉투를 북 뜯어낸다.

 

"좋겠다 영주 넌~ 먹을 게 떠나지를 않네!"

 

지윤이 과자를 와작와작 씹어대며 말한다. 선머슴처럼 괄괄한 성격의 지윤은 누구보다 편한 친구다.

 

"많이 먹어라.."

 

영주는 한마디를 하고는 그냥 엎드려 버린다.

 

[딩동댕동]

 

수업시간이다. 성희는 아직 엎드려 있다. 영주의 마음이 편치않다.

 

[너, 이제 성희한테 심부름좀 그만 시켜라.]

 

결국 영주가 희선에게 문자를 보낸다. 하지만 희선에게선 답이 없다. 영주는 수업을 듣는다. 국사시

간.. 이 시간엔 늘 졸음이 쏟아진다.

 

[땡땡떙]

 

쉬는시간..

 

"졸려.."

 

영주는 쓰러지듯 책상으로 엎드려버린다. 헌데 '톡톡' 익숙한 손이 조심스레 영주의 등을 두드린다.

 

"뭐야!"

 

영주가 짜증을 내며 돌아본다. 성희가 죄라도 지은 듯 한 폼으로 특유의 뒷걸음질을 친다. 그리고 뒷문

에는 역시나 희선이 서 있다. 영주는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희선에게 다가간다.

 

"또 뭐! 내가 잘 때는 건드리지 말랬지!"

 

영주는 쌓여왔던 짜증이 폭발하듯 소리친다.

 

"왜! 성희한테 또 심부름 시켜서 화나니?"

 

"뭐?"

 

"왜, 좀 시키면 어때? 성희가 나보다 좋니? 그렇게 안돼 보여?"

 

희선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기 시작한다.

 

"나중에 얘기하자."

 

영주가 희선을 진정시킨다.

 

"뭔데! 지금 얘기해! 하라구!"

 

희선이 눈물을 글썽이며 악을 쓴다.

 

"그만.. 미안. 그만해.. 나중에 연락할게."

 

영주가 희선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며 진정시킨다. 영주의 손길에 잔뜩 곤두서 있던 희선의 가시가 누

그러지고 만다. 영주는 훌쩍이는 희선을 교실까지 데려다 주고는 다시 반으로 들어선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영주에게로 집중되고 있다. 희선이 그 난리를 피우고 갔으니 당연하다. 머리가 아프다. 역시 희선은 버겁다.

영주는 터벅터벅 자신의 자리로 향한다. 아이들은 애써 모른 척 영주의 시선을 피해주고 있다. 한데..

유독 한 아이의 거침없는 시선이 느껴진다. 영주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보란듯이 영주를 관망

하고 있는 눈빛.. 영주가 그 시선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 시선은 영주의 푸른눈빛에도 흐트러짐이 없다. 아니, 오히려 영주를 조롱하고 있다. 그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눈빛에 결국 영주가 먼저 시선을 거두고 만다.

 

'이규원'

알 수 없는 아이다. 창백한 피부에 화장이라도 한 듯 눈밑이 붉은 이 소녀는.. 냉소적인 눈빛으로 누구

와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으며.. 그 특유의 여유만만한 표정과 고혹적인 자태로 누

구도 자신에게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경고를 발산하고 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와 늘씬한 몸

매로 모두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그 시선을 즐기지는 않는.. 한마디로 예사롭지 않은 소녀다.

중학교 시절을 거쳐 고등학교로 진학한 지금 이 순간까지 이토록 영주를 철저히 무시하는 이는 없었다.

어떤 말도.. 괴롭힘도 없었지만 영주는 규원의 그 눈빛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자존심이 상해버린다. 싫

다. 규원의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의 모습이 싫다. 하지만 더욱 싫은 건.. 언제부터인가 그런 규원을 동경하게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방과 후..

영주는 교문앞에서 희선을 기다리고 있다. 토라진 희선을 다독이기 위해선 함께 영화라도 한편 봐줘야 한다. 쏟아지는 여고생들.. 모두들 한번 쯤 영주를 흘긋거리며 지나간다. 영주는 이미 이 학교의 유명인사다.
저기서 희선이 걸어오고 있다. 상기된 표정.. 영주와의 데이트에 벌써부터 설레는 모양이다.

 

"많이 기다렸니?"

 

희선이 밝은 목소리로 영주에게 묻는다.

 

"아니.."

 

"그 놈의 가가멜이 어찌나 종례를 오래하는지 말야.."

 

희선은 흥분한 목소리로 영주를 붙잡고 재잘재잘이다. 영주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긴

다. 희선은 영주팔에 팔짱을 끼고는 오늘 아침부터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렇게 몇걸음을 걸었을까.. 순간 누군가 영주와 희선을 슥 지나친다. 영주는 문득 걸음을 멈춘다. 규원이다. 규원이 잠시 이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규원의 눈과 영주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 짠한 느낌이 영주의 온몸을 진동한다. 언제부턴가 느낀 것이지만.. 규원의 눈빛은 낯설지가 않다.

 


"으악!"

 

눈을 뜬 영주는 튕기듯 침대에서 뛰쳐나온다. 늦잠을 자 버린 것이다. 전 날 한참이나 잠을 못 이룬 채

뒤척인 까닭이다.

 

"엄마! 왜 안깨워어!"

 

"가쓰나.. 나도 인제 일났다!"

 

엎친데 덮친격.. 오늘따라 엄마도 늦잠이다. 영주는 간신히 세수만 하고 집을 뛰쳐나온다. 교복위에 걸

친 점퍼가 박쥐날개처럼 펄럭인다. 늦으면 안된다. 오리걸음에 뜀뛰기 그리고 엎드려 뻗쳐.. 힘든 건 둘째치고 그거 완전 체면 구기는 일이다.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자 이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더! 더!

 

'쎄입!'

 

다행이다. 단 몇초를 남겨두고 영주는 아슬아슬하게 교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머리는 뒤집어지고 점퍼는 어깨뒤로 넘어가 있는 꼴이라니.. 긴장이 풀린 영주는 힘빠진 다리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긴다.

 

"야."

 

몇 걸음을 걸었을까. 누군가 뒤에서 영주를 부른다. 낯선 목소리.. 영주가 덤덤히 뒤를 돌아본다.
'이규원'.. 특유의 여유로운 자태로 서 있는 규원이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규원은 그렇게 멈춰선 영주에게 한걸음 두걸음 다가오더니 영주의 머리를 매만진다.

 

"엉망이군.."

 

규원의 말투와 행동은 놀랍도록 자연스럽다. 하지만 규원이 그러는 동안 영주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다. 예상치 못한 규원의 행동에 당황하기도 하거니와 황송함마저 느껴진다.

 

"왜 안오나 했더니.. 오늘 늦었었구나?"

 

규원이 영주의 눈을 바라보며 말한다. 영주를 기다렸다는 뜻일까.. 어쨌든 처음이다. 규원이 이렇게 영

주에게 말을 거는 거..

 

"칠칠치 못하긴.."

 

규원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어깨뒤로 넘어간 영주의 점퍼를 가지런히 정렬해 벌어진 지퍼를 쭉 채워버린다. 이런 걸 데자부라는 것일까.. 이 상황.. 영주에게 낯설지가 않다. 일순간 규원의 냉소어린 눈동자에 감정이라는 것이 엿보인다. 낯익은 규원의 눈빛.. 순간 영주가 놀란 눈으로 규원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너.. 나 알지.."

 

영주의 뜬금없는 질문에 규원은 대답은 않고 알 수 없는 미소만 짓고 있다.

 

"규원.. 이규원.."

 

왜 몰랐을까? 잊고 싶었던 것일까? 영주는 기억의 골 저 편에 가려져 있던 어린시절 한토막을 떠올려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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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영주는 참 작고 말이 없는 아이였다. 언제나 맨 앞자리에서 혼자 앉아 그림을 그리고 놀던 조용한 아이

였다. 그런 영주에게 누군가 손을 내밀어 주었다. 창백한 피부에 눈 밑이 붉은 아이..
영주는 그 아이를 참 좋아했다. 영주는 그 아이를 백마탄 왕자님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구해주러 온 영주만의 왕자님..
둘은 단짝이었다. 매일 같이 그 아이와 손을 잡고 걷는다는 것이 꿈만 같을 정도로 기뻤다. 매일 밤 그 아이를 만난다는 설레임으로 잠이 들었고.. 그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온 힘을 다해 골목을 달렸다. 그럴때면 그 아이는.. 잔뜩 상기된 채 숨을 헐떡이는 영주를 보며 칠칠치 못하다며 지퍼를 채워주었다. 영주는 그게 좋아서 매일같이 지퍼를 열고 그 아이를 향해 달렸다. 영주는...그 아이가 그렇게도 좋았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아이들이 그 아이를 놀리고 있었다. 그 아이를 에워싸고 하는 소리는 남자같은 여자, 호모라는 것이었다. 그럴리가 없었다. 그 아이는 영주의 왕자님이었다. 여자일리가 없었다. 영주는 그 자리를 도망쳤다.

그 후.. 영주는 그 아이를 피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무서워서 더 이상 그 아이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 아이는 외톨이가 되었다.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아이가 전학을 간다는 말을 들었다. 영주는 달렸다. 가지말라며 그 아이를 향해 마구 달렸다. 그 아이는 뒤를 돌아 영주를 바라보았다. 영주는 울며 그 아이를 붙잡았다. 하지만 그 아이는 언제나처럼 영주의 지퍼를 채워주며 칠칠치 못하다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돌아선 그 아이는 더 이상 영주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아이는.. 그렇게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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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알아본거니?"

 

규원이 쓸쓸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기억이란 참으로 신기한 것이다. 먼지쌓인 어린시절의 기억따위에 얽매여 있던 그 감정이.. 변형되지도 않은 채, 그 때의 그 느낌 그대로.. 이렇게 가슴을 뛰게하니 말이다.

 

 

수학시간..

영주는 창가의 규원을 바라보고 있다. 햇살에 살짝 비친 규원의 모습.. 아름답다.
그 날이후에도 영주와 규원이 사이의 거리는 더 이상 좁혀지지 않았다.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영주의 마음은 이미 송두리째 흔들려버렸다. 이렇게 멀찍이서 규원의 얼굴만 봐도 심장이 쩌릿하게 아려온다. 시큰시큰 눈물이 날것도 같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 하나씩 뽑아~"

 

오늘은 새로이 자리배치를 하는 날이다. 방법은 제비뽑기.. 각자 자신이 뽑은 번호의 자리로 배치를 받는다. 쪽지를 뽑은 영주는 번호를 확인한다.

"33번..."

영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규원을 바라본다. 규원의 자리는 어느 곳일까.. 영주의 관심은 온통 규원이 뽑은 자리번호에 쏠려버린다.

 

"자, 내일부터는 각자 바뀐자리에 앉는거야!"

 

반장이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있다.

 

"야! 니가 33번이야?"

 

누군가 영주를 쿡 찌르며 묻는다. 새침떼기에다 공주병으로 알아주는 수연이다.

 

"어.. 왜?"

 

"응.. 낼 보자구~"

 

수연이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로 돌아간다.

 

"34번인가 보군.." 

 

영주는 자신도 모르게 가벼운 한숨을 토해낸다.
 

 

다음날..

 

영주는 교실로 들어서 새로 배정받은 33번 자리에 가방을 던져놓고 자리를 잡는다. 규원은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다. 규원의 자리는 어디일까.. 영주는 턱을 괴고 가만히 창밖을 바라본다. 하늘이 푸르다. 가벼운 바람에 나뭇잎이 흩날린다. 어린시절의 한 토막.. 이 맘때의 추억.. 영주는 눈을 감는다.

 

'덜컥'

 

순간 의자를 빼는 소리와 함께 옆자리가 채워짐을 느낀다. 영주는 무심히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본다.

 

"안녕."

 

낮지만 부드러운 음성.. 규원의 눈이 영주를 바라보고 있다. 영주는 너무 놀라 가벼운 인삿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너.."

 

규원은 짧은 미소를 짓고는 곧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된 일일까.. 어쨌든 영주와 규원은 다시한번 짝이 되었다. 영주의 가슴이 벅차오른다. 꼭 그 시절.. 꼬마 영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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