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화 사랑의 경주에는 골인 지점이 없다.
전철을 타기 위해 지하도 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귀에 익은 클렉션이 울렸다.
짙은 쥐색 차이나풍의 반코트를 입은 그가 차문을 열고 내려섰다.
"가는 곳이 어디요?”
“대학로쪽요.”
“타요 그럼. 나도 그쪽으로 가는 길이니까.”
그가 조수석 쪽으로 돌아와, 아주 매너 좋은 사람처럼 차문을 열어 주었다. 어쭈? 이런 건 또 어디서
배웠대?
“경로우대요.”
차에 오르자 그가 놀리듯 말하며, 차문을 닫고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와 앉았다.
“경로우대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죠. 내가 한 살 많으니까, 말 놔도 되지?”
기어를 넣던 그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돌아보고, 그런 나는 시침을 떼며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누님이라고 불러 드려요? 이왕이면 아주 제대로 경로 우대하죠 뭐.”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쁠 거 없지.”
그가 음흉한 미소를 날리더니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큰 도로로 나오자 느닷없이 희긋희긋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도시의 첫 눈이었고, 완연한 겨울이 시작됨을 알리는 것이었으며,
수많은 남녀 솔로들의 비애가 시작되는 시점인 것이다. 처음엔 날리기만 하던 눈이 점차 굵어지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흩날리는 굵은 눈송이가 바닥으로 퍽퍽 쓰러졌다. 이러다 금세 쌓일 것
같다. 대학로에 발이 묶이진 않을까 싶은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차는 대학로 근처까지 진입했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젠장, 날 한 번 잘 잡았네.”
거칠게 툭 튀어 나온 말에 그가 고개를 힐끔 돌리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날을 세울 땐, 영락없는 여자가 분명한데, 보면 볼수록 재밌는 구석이 있단 말야.”
“뭐라구?”
“아닙니다. 어디쯤에 세워주면 되요?”
“저 앞쯤에서 그냥 세워 줘. 뛰어가는 게 더 빠르겠어.”
차는 나무늘보처럼 아주 더디게 움직였다.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자 그도 함께 차 문을 열고 내려섰다.
“내릴 거까진 없는데. 고마워, 조심해서 가.”
나는 손을 들어 보이며 돌아섰다.
“누님. 날도 좋지 않은데 몸조심 하세요, 누님.”
종종걸음으로 발을 떼는데 일부러 목청을 높이며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어깨가 움찔거렸다.
내 옆을 지나치는 사람들이 힐끔 나를 돌아본다. 어우, 저 자식이. 나는 잡아먹을 듯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그럼 누님, 다음에 또 봅시다.”
사실 내가 한 살 많긴 하지만, 생긴 걸로 봤을 땐 그가 훨씬 선배처럼 보였다. 그런 그가 내게
꼬박꼬박 누님이라고 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 거릴 수밖에. 나는 주먹을 들어 보이다
잽싸게 몸을 돌려 뛰었다.
“누님. 조심해서 가요, 누님.”
나는 마치 내 일이 전혀 아닌 듯 무시하고 앞만 보고 달리다, 그대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아이쿠,
엉덩이야. 엉덩이뼈가 나간 건 아닐까. 아, 완전 작살이네. 그럼에도 나는 창피함이 더 컸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걷긴 했지만, 영 자세가 어정쩡했다, 뒤뚱거리며 나는 혜나와 약속한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 차 세현, 이 망할 자식.
이 나이에 소개팅이라니. 차라리 맞선자리가 편할 것 같았다. 독특한 헤어스타일은 그렇다 쳐도
유행처럼 기른 턱수염은 배우나 어울릴까, 실제로 앞에 두고 보니 영락없는 노숙자 같았다.
쇼핑몰을 운영하는 직업이니만큼 스타일도 비즈니스일 것이다. 그와는 사뭇 대조적인 말끔한
스타일의 남자는 회계 기장이란다. 극과 극을 체험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혜나는 이런 남자들을
어떻게 알고 지냈을까. 남편이, 세상에 존재하는 딱 한 명의 남자라고 믿고 산 그녀였다는 건
말짱 거짓말이었을까.
“이번에 내가 취직한 회사, 회계업무를 맡고 있으신 분이셔. 그 옆 분은 친구.”
비상이란 것은 이걸 두고 한 말이었을까. 나는 아직 배가 덜 고픈 모양이다. 아무리 절실한 심정
이라 해도 가리지 않고 먹어대긴 싫으니 말이다. 회계 기장이란 남자의 이름은 박수찬이라고 한다.
그의 친구는 하 진. 독특한 스타일만큼 이름도 튀는 걸 보면, 정말 그 사람의 이름이나, 외모가
자신의 운명과 어떤 연관성이 있긴 한가보다.
만남은 언제나 정해진 절차가 있는 모양이었다. 누군가 그렇게 정해 놓은 것도 아닌데 우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만남에 있어서는 항상 똑같은 순서를 밟고 있다. 통성명이 끝나면, 자신의
직업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너무나 식상하게 전한다.
자리는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생각보다 하 진이란 독특한 캐릭터의 남자는 진솔하고, 유쾌했다.
그에 반해 박 수찬이란 남자는 다소 침착하고, 말수가 적었다. 혜나는 내내 박수찬이란 사람에게서
어떤 한 마디라도 끄집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대화를 시도하곤 했다.
“어머.”
하진이란 남자가 화장실을 간 사이 다소 침체 된 듯 한 분위기에서 혜나는 낮은 음성으로 놀란 듯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혜나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를 뻔 하여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다.
“어머, 어머, 어머.”
혜나는 민망해 하면서도 하진이란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튀어도
너무 튄다 했다. 하체에 너무 밀착된 검은 진을 입은 것이 사단이었다. 밀착된 정도가 아니라, 거의
쫄 바지 수준이었으니, 그 애매하고도 은밀한 곳이 민망하게도 너무나 불거져 나와 있었다.
나는 괜히 얼굴이 시뻘게지면서 시선을 주지 못하고 있었고, 혜나 역시 당황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격이 좋고 뭐고 간에, 그만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여자를 만나러 오면서 노골적인 옷차림은 또 뭔가. 도시에 첫 눈이 내리는 바로 오늘, 나는 정말
이지 길고도 긴 겨울의 시작부터가 끔찍해졌다.
“하하하하, 봤니? 봤어? 살다 살다 그런 물건은 또 첨 본다.”
혜나는 숨넘어갈 듯 웃어댔다. 나 또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너무 웃어댔더니 아랫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내가 아까 왜 벌떡 일어났게? 순간 나도 모르게 거길 확 잡아버릴 생각이었다니까.”
“미쳤어, 미쳤어.”
“그 사람, 너무 자랑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 남자들의 당당함은 거기가 얼마나 크냐, 작으냐에
있다던데. 여자 여럿 잡겠더라.”
택시를 타고 일부러 큰 도로에서 내려 혜나와 나는 걷고 있는 중이었다. 너무 웃어대느라 걸음은
자꾸 늦어졌다.
“그래서 그 사람, 그렇게 당당했나?”
“자랑스러울 만도 해.”
“무조건 크다고 좋은 줄 아는 남자들이 어리서은 거지. 발은 무턱대고 큰데 비해, 신발이 작아서
맞는 게 하나 없으면, 결국 맨발로 다닐 수밖에 더 있니?”
“아, 오랜만에 너무 웃었더니 기분이 맑아지는 것 같다. 사는 맛이, 절로 나네.”
혜나는 눈물을 닦고 바짝 붙어 팔짱을 끼었다. 오랜만에 혜나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으니 기분까지
정말 어려지는 것 같았다.
“너 생각나니? 대학 3학년 때, S대 영문학과 애들하고 소개팅 했던 일 말야.”
나는 아주 오래 전의 기억처럼 꿈을 꾸듯 혜나에게 물었다. 그게 벌써 십 년 전의 일이라니.
“기억나지 그럼. 그 자식들, 싸가지가 바가지라고 우리끼리 튀어버렸잖아.”
“그 호프집에서 먹고 싶은 거, 왕창 시켜 놓고 튀었으니, 얼마나 분했겠냐. 그 이후에 한 번 우연히
그 멤버들 중에 한 녀석을 만났다는 거 아니냐. 그 녀석이 어, 어 하면서 내게 손가락질 하는데, 순간
걸리면 죽겠구나 싶어서 냅다 토꼈지.”
그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나는 깔깔 거렸다.
"그래도 그때는, 순수했는데.”
웃음을 멈춘 혜나는 시무룩해졌다.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어도 한 사람에겐 눈물부터, 그리고
다른 한 사람에겐 웃음부터 줄 수도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긴 한숨을 토해내는 혜나는 고개를 들어
눈발이 그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이 먹고, 결혼해서 애 낳고 살다 보니 나도 어느새 아줌마가 되어 있더라. 직장에 나가면서부터
내가 아줌마란 사실을 피부로 느낀다. 젊고 날씬한 애들하고 같이 일하려니까 괜히 자괴감이 들기
도 하고. 그런 애들 보면서 나, 무슨 생각 드는 줄 아니? 상사와 부정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애는
없을까. 눈웃음이라도 살살 치는 애를 보면,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그러다 문득 나 자신을 돌아
보면, 그이가 내게 준 병이 참으로 깊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해. 그래서 자꾸 주위를 둘러보게 돼.
아무나 걸려라. 그래서 날 이 상황에서 좀 벗어나게 해다오. 그런데 쉽게 마음이 서지가 않아.”
조금 전의 웃음을 터뜨리던 혜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요즘엔 내가 참 못났단 생각이 너무 들어.”
사랑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사랑이 실패로 돌아가는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애초에 실패를
일부러 조작하는 사랑은 없으므로. 알면서도 우리는 자신의 사랑에 대해선, 그만큼 관대하지 못한다.
“내가 그 사람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지금 아주 살맛이 나겠지? 눈에 가시 같은
존재가 알아서 사라져 주었으니, 사랑이 더 꿀맛이겠지.”
“그러지마. 너만 힘들어져.”
“지금도 충분히 힘들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어.
난 내가 아주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맥없이 무너진 거야.”
“억울하고 분하면, 가서 매달려. 아니, 멱살이라도 잡고 끌고 와. 이렇게 매일 너를 학대하면서,
질질 짜지 말고, 가서 그 년의 머리채라도 뜯어 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미 깨진 사랑 붙들고
미련하게 굴지 말구.”
사랑을 하면 모두 약자가 된다고 했던가. 저렇게 나약하고, 볼품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랑이란 녀석이 참으로 대단하다. 별 게 아닌 것 같은 사랑도 실패로 끝나면 위대하게 보인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사랑, 그게 대체 뭐 길래.
“이 의리 없는 것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지란은 팔짱을 끼고 서서 노려보며 말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기운 없이
들어와 거실 바닥에 훌러덩 드러눕자 지란이 발로 팔을 툭툭 차며 말했다.
“재미가 아주 좋았던 모양이네. 기운 빠질 정도로 논 걸 보니 말야.”
“충분히 지쳐 있으니까, 너까지 나 기운 뺄 생각하지 마라.”
“왜 나만 빼?”
그녀가 털썩 주저앉으며 앙탈을 부렸다.
“철딱서니 없기는.”
나는 귀찮아서 등을 돌렸다. 너무 고단하여 이대로 잠이 들었으면 좋겠다.
“누가 연애하겠대?”
“있는 것들이 더 해 아주. 있는 거나 잘 챙기셔.”
“한 눈 파는 것들은 내가 이 두 눈으로 지키면 되는 일이야. 그런데 나도 이제는 한 눈을 좀 감아
보려구.”
“그러시든지.”
“결혼은 일륜지대사라 했거늘, 어찌하여 한 우물만 보고 그 우물의 깊이를 알 수 있으랴. 이 우물,
저 우물도 내 눈으로 확인해야 아는 법. 그러니까. 그런 좋은 기회에 왜 날 뺐냐구.”
“양다리라도 걸치겠단 소리야 지금?”
나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물었다.
“그럼 안 되니?”
“막 나가기로 했냐 이제?”
“신중하겠다는 거지, 그게 어디 막나가겠다는 소리니?”
“어이구, 골 아퍼.”
“적어도 결혼은 아무나 하고 할 순 없는 거잖아.”
“사랑은 아무나 하고?”
“아무나인지 아닌지를 가려내겠다는 거지.”
“왜 마음이 바뀐 건데?”
“혜나, 보면서 마음이 바뀌었어.”
“그게 두려우면 차라리 사랑을 하지 마.”
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니가 그런 말 할 자격이 되냐? 그건 너한테 해줘야 할 말인 것 같은데?”
나는 그런 지란을 쏘아보다 욕실로 들어갔다. 바지를 내리고 변기에 앉으며 나는 금세 심란해지는
마음을 추슬렀다. 사랑은 끝이 없는 중독이다. 우리는 모두 중독자다. 이 중독자는 그만 자고 싶다.
꿈속에서는 이 죽일 놈의 사랑 때문에 울고 웃는 일이 없을 테지.
한참 오르가슴의 마지막 절정을 향해 치솟고 있는 찰나였다. 밖에서 나는 소음이 어찌나 크게
들리는지 나의 흥분된 꿈을 일순간 깨뜨리고 말았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다시 그 꿈을 이어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아침부터 저 자식, 왜 저래?”
지란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 왔다. 결국 꿈은 산산이 깨어지고, 잠은 저만치 달아나기 바빴다.
나는 이불을 확 걷어냈다. 서글픈 내 나이여. 비참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나의 육체여. 솔로의
인생은 비애다.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몽정이었건만, 그것마저도 허락하지 않는 개 같은 소음은
대체 뭐란 말인가.
“대체 무슨 소리야?”
거실로 나와 베란다에 서 있는 지란을 보며 묻자 지란은 여전히 아래를 내려다보느라 대답이 없었다. 이 소음의 정체는 주차장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소리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욕실로 들어갔다.
젖은 팬티를 확인하자 한없이 무기력해졌다. 불쌍한 이 서영.
아무래도 씻어야 할 것 같아 다시 욕실에서 나오는데 클렉션 소리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었다.
“누가 차를 막고 있는 모양이네.”
나는 지란의 곁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아냐. 완전 미친놈이야.”
낯익은 사내가 운전석 문을 열고 서서 일부러 클렉션을 울리고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그때까지도
남아 있던 잠이 확 달아나 버렸다. 그는 놀랍게도 차세현이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기다렸다 듯
손을 흔들어 보이는 게 아닌가. 오, 제발. 아파트 베란다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죄다 그에게
손가락질을 해대고, 욕설을 내뱉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너무나도 순박한 웃음으로 손을 멋지게
흔들고 있었으니. 지란이 찢어질 듯 한 눈초리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도 모르게 움찔 물러섰다.
“뭐야, 너 아는 사람이야?”
나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어댔다.
“너한테 손 흔드는 거 맞는데?”
“그…….그러게.”
“뭐야 너?”
지란이 그와 나를 번갈아 보며 의심의 눈초리를 날리는 순간 너무나도 또렷한 그의 음성이 들려 왔다.
“누님.”
다리가 탁 풀리면서 그대로 주저앉을 뻔 하는 나를 지란이 잡아끌었다.
“니가 말려. 안 그러다간 저 사람 시체 되서 나가겠다.”
아, 내 인생의 태클들이 왜 이리도 많은지.
“금방 내려 갈 테니까, 아무 짓도 하지 마. 알았어?”
나는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며 서둘러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일요일 아침부터 니가 죽고 싶어
환장을 하는구나. 소원이라면 내 오늘, 너를 아주 제대로 죽여주마.
젖은 머리를 말릴 새도 없이 나는 허겁지겁 주차장으로 뛰어 나갔다. 슬리퍼 밖으로 튀어나온
발가락이 시려 죽을 맛이다.
“뭐야 너 아침부터?”
“연락처도 없고, 몇 호에 사는 지도 알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었죠.”
“대체 나한테 왜 이러니 정말?”
나는 화가 나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지나가던 주민들이 힐끔거리며 수군거렸다. 멀리서 경비
아저씨가 뛰어 오는 것이 보이자 나는 그만 딱 죽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이봐, 아가씨. 사랑싸움도 적당히 해야지, 동네 주민들 생각도 안 하는 겨? 아까부터 계속 저러고
있는데, 어찌 얼굴 한 번 안 내밀어 그래? 그리고, 젊은 총각도 그러는 거 아녀. 어디 자랑할 때가
없어, 동네에서 소란을 피워대는 겨? 거, 웬만하면 사이좋게 지내요. 주민들 생각도 좀 하고.”
경비 아저씨는 내가 뭐라 대꾸할 새도 없이 자기 말만 끝내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럼에도
그는 히죽거리며 얄밉게도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좋은 말 할 때 가라. 어?”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며 협박을 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즐기고 있는 듯 했다.
“얼른 차려 입고 나와요.”
“그냥 가라. 이 누님은 지금 피곤하다. 그리고 담부터 여기서 놀지 말고, 다른 동네에서 놀아. 알았니?”
“다시 시작해요? 주민들이 이번엔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너, 정말?”
그래, 말씨름을 한들 내가 당해낼 수가 있으랴. 물고 늘어지는데 어쩔 도리가 없다.
“원하는 게 뭐야?”
“같이 영화 봅시다.”
헛웃음이 나왔다. 대체 이 자식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잠깐 이 자식이 생각보다 괜찮은 놈이라고
여겼던 그 짧은 시간마저 착각이었다니. 같이 가주더라도 그냥 갈수는 없지. 나는 주먹으로 그의
머리에 알밤을 한 대 세게 주고 돌아서 뛰었다. 그가 ‘아’ 하는 순간 나는 고소한 기분에 돌아보며
외쳤다.
“기다려 짜식아.”
아프지? 아플 거다. 어, 어, 어…….내 입에서 나온 황당한 소리는 곧 비명으로 바뀌었다. 철퍼덕.
슬리퍼를 질질 끌고 뛰었던 나는 다리가 꼬여 그 자리에서 자빠지고 말았으니. 아픈 건 아픈 거고,
뒤에서 지켜보고 있을 그에게 너무 민망한 나머지 벌떡 일어나 한 쪽 다리를 질질 끌며 안으로
잽싸게 뛰어 들어 갔다. 들어가서 보니 오른 쪽 무릎이 깨져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아야.”
이 아까운 피. 아까워서 헌혈도 안 하는데,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흐르다니.
큰 도로로 진입하자 마치 가장행렬이라도 하는 듯 꼬리를 물고 서서히 앞으로 나아가는 수많은
차들이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려대고 있었다. 사고가 있는 모양이었다. 차장으로 고개를 내밀고
앞을 기웃거리던 그가 체념한 듯 창문을 올리며 물었다.
“까진 무릎은 괜찮아요?”
나는 슬며시 치마를 무릎까지 끌어 내리며 말했다.
“괜찮을 리가 있겠니? 근데 대체, 넌 무슨 배짱이니?”
“내 별명이 막두열이에요.”
“막두열?”
“막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푸웃.”
그의 말에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꿈이든, 성공이든, 사랑이든 난 뭐든지 막 두드리죠. 열릴 때까지 말입니다.”
어쭈, 제법이네. 가끔 한 번씩 나를 감동 시킨단 말야. 순간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말려들면
안 된다.
“그러지 말고 우리, 친구합시다.”
“뭐?”
“그 나이면 누님 소리 듣는 것도 고역일 텐데. 그리고 나, 당신보다 나이는 한 살 어리지만 졸업은
같이 했어. 내가 한 해 일찍 학교를 들어갔거든.”
이 자식 봐라. 처음엔 그저 입담만 센 왕싸가지인 줄 알았더니 지금 보니 선수다.
“나한테 지금 작업 거니?”
“여자들이 잘하는 착각이 뭔 줄 알아? 남자가 힐끔힐끔 쳐다보면 자기한테 맘이 있는 줄 안다는
거지. 이봐요, 이 서영씨. 정말 미인 앞에선 남자들이 고개조차 들지 못한다는 거 몰라? 그 나이면,
착각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 텐데.”
“하, 그래. 나, 나이 헛으로 먹었다 어쩔래? 사내자식이 입만 살아서는.”
“여자 나이 서른 넘으면 불독이라던데, 조심해야겠네. 이러다 옴팡 쓰게 생겼어.”
“야, 불독은 뭐 아무나 무는 줄 아니? 사람 봐가면서 물어 이 자식아. 하도 애원해서 영화 한 편 봐
줄랬더니 얘가 사람 맘 상하게 하네. 야, 깝치지마. 너도 어차피 놀아 줄 사람 하나 없고, 그 훌륭한
언변에 넘어 오는 여자 하나 없어서 지금 나하고 있는 거 아냐?”
나는 가끔 흥분하면 목청이 커지는 게 문제였다. 목청만 커지나, 얼굴까지 붉어져서는 다혈질의
성격이 금방 탄로가 나고 만다. 결국 나는 또 나잇값 못하고 흥분해서 괜히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해버린 셈이었다.
“보면 볼수록 재밌는 사람이라니까.”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가 쿡쿡 웃음을 흘리며 기어를 바꾸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해봐야 본전도 못 찾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남자에게도 입담으로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던 이 서영이가 어쩌다 이런 망신을 연속으로 당하고 있는 지 모를 일이었다.
오래 전 삼풍백화점의 사건으로 자신의 연인을 잃게 되는 비운의 남자가 그녀가 남긴 다이어리의
여정에 따라 여행을 떠나는 가을로란 영화의 마지막 신이 화면에서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상처보다 풍경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영화군. 대사가 너무 작위적이지 않아?”
그는 하품을 길게 하며 기지개를 켰다. 역시 남자와 여자는 이럴 때도 틀리다.
“상처가 있으니까, 풍경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거야. 눈물이 있어서 웃음이 더 밝은 것처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쩜 보는 눈이 이렇게 틀릴까.
“사실 유치하잖아.”
“만약 니가 저 상황에 있다면 유치하겠니? 그리고, 사랑은 원래 유치해. 유치하다고 생각하고 보면
덜 유치한 것도 사랑이야.”
아, 나는 어쩌자고 이렇게도 흥분을 잘 하는 것일까. 빌어먹을.
“어이구, 또 한 명의 시인이 탄생하는 순간이군.”
말을 말자 싶어 자리에서 나오는데,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옆모습이 내 앞을 지나쳤다.
줄 지어 서 있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그가 누군가 싶어 앞을 기웃거렸지만 그의 뒤통수만 보일
뿐이었다.
“그 나이에도 아직 사랑을 환상으로 보는 당신이, 너무 귀엽다.”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는 그를 홱 돌아보았다.
“너 정말? 누가 환상으로 본대?”
그에게 눈을 째려주며 나는 다시 앞에 있던 그 사람을 찾기 위해 목을 길게 뺐다. 드디어 홀로 나왔
을 때,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 여깄는데 누굴 그렇게 찾으슈?”
나는 그의 말에 대꾸도 없이 인파 속을 헤집고 앞서 나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그를 발견
했다. 그의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어린 여자. 그는 혜나의 남편이었다. 어이없는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사랑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불균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삼촌과 조카쯤? 당당한 사랑이
아님에도 그는 너무나 당당하게, 그 전에 혜나와 함께 했을 장소를 양심의 가책도 없이 휘젓고
다니는 것이리라. 어린 여자 아이의 손을 잡고 말이다. 나는 일부러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섰다.
그리고선 그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빤히.
그러자 그가 내게 얼굴을 돌리다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표정이 굳어지고, 허둥대며
여자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렸다.
“이 봐요, 전 병희씨.”
나는 그냥 보내기가 싫었다. 세현은 옆에서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곁을 지키고 있었다. 앞서
가던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당당하게 그의 앞으로 나섰다. 그리곤 아주 똑바로 그의 얼굴을
훑고, 그의 옆에 있는 어린 여자를 위아래로 훑어 주었다.
“엄연히 마누라가 있는데, 이렇게 돌아다니면 뒤통수가 가렵지 않아요? 아, 맞다 사랑이라고
그랬지. 얘, 너 이 남자 사랑하니?”
나는 일부러 목청을 높이며 어린 여자에게 물었다. 주위 사람들이 힐끔 거리자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황하기는 어린 여자도 마찬가지였지만, 젊음은 어디서나 당당한가
보다. 금세 표정을 풀고 고개를 빳빳하게 들며 내게 말했다.
“아줌마가 무슨 상관이야? 남이야 사랑을 하든, 결혼을 하든.”
“원래 아줌마들은 남의 일에 관심이 많어. 그러니까 내 말 똑바로 들어. 전병희씨도 똑바로 들어요.
간통으로 집어넣는 건, 똘똘이를 생각해서 참아주는데, 대신 정신적 피해보상 정도는 해줘야 할
거야. 내가 혜나 부추겨서라도 소송할거에요. 위자료라도 듬뿍 받을 수 있게. 사랑보다 돈이 최고
라는 걸 아줌마가 되고 알았지 뭐야. 돈이 없음 사랑도 바닥나지. 그렇지 꼬마야? 넌, 영악해서 알고
있을 거야. 어디, 돈 떨어지고도 그 사랑이 오래 가는 지 두고 보자.”
몰려든 주위 사람들을 비집고 나오는데, 세현이 뒤따라 나오며 말했다.
“누구야?”
“개자식.”
“어?”
“태생이 개자식이야.”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기분이 왕창 구겨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는 심란해진 마음으로 차창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술 한 잔 할래요?”
“좋지.”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남의 일에 왜 그렇게 열을 올려? 사랑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 깊이 관여하는 게 아냐.”
“친구의 일이야.”
“친구라도 그런 식으로 끼어드는 거 싫어해. 아마, 당신 친구도 그럴걸. 그 친구가 아직 끝을 내지
않은 상태라면, 당신 욕 좀 듣겠어.”
“이젠 사랑이 아냐. 저러고 다니는 걸 내 눈으로 보면서도 참아야 돼?”
나는 버럭 화를 냈다.
“이젠 사랑이 아니라고 누가 그래? 친구가 그래? 혼자서 판단하지 마. 자기가 알고 있는 게 사랑의
전부는 아냐. 왜 남의 사랑을 당신이 해석해? 사랑은 그 사람의 마음이 아주 돌아서지 않는 이상
끝이 날 수가 없어. 한 쪽만 끝냈다고 해서, 사랑이 끝나는 게 아니란 말야. 일방적이라도 사랑은
계속 이어지는 거지. 사랑엔 골인 지점이 없다는 말도 못 들어봤어? 절벽 끝까지 가는 게 사랑이고,
그 절벽에서 뛰어 내리는 것도 사랑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랑엔 골인 지점이 없다? 실연은 모든 사랑의 끝이 아니란 말일까.
나는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사랑의 골인 지점이 결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
이다. 그리고 그 결혼이 평탄하게 흘러 무덤 속까지 함께 가는 것 또한 골인 지점은 아니란 말일까.
아, 망할 놈의 사랑. 정말 골치 아프다. 대체 왜 사랑은 멈추지 못하는 거야.
이 끝도 없는 질주는 언제쯤이면 끝이 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