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잠깐."
준은 서둘러 성민과 마주한 책상의 반대편 의자를 빼며 앉았다.
"자, 자. 보자. 내가 어제 뽑은 자료 중에 우연히 본 독특한 게 있는데.. 말이지." 준은 가방을 열더니, 가득한 파일들 사이에서 책을 꺼낸 후에 말했던 부분의 페이지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들척였다.
성민은 준이가 어색한 무언가 때문에 서두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준이 책상위로 펼치며 가리키는 사진과 그에 관한 글이 눈으로 들어오기보다는 오히려 읽어주며 설명하는 준의 얼굴을 이상하게 쳐다보게 되었다.
"지금 말하고 있는 게, 내 얼굴에 적혀 있냐? 뭘 그렇게 쳐다봐."
"아..니, 니가 좀 이상해서 그러지."
"뭐가 이상한데?"
"딱 꼬집어서.. 그.. 이유를 설명하기는 좀 뭐한데, 암튼 너 그래, 지금."
"쓸데없는데 신경 쓰지 말고, 이거나 봐. 이번에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꼭 나가야 된다면서 흥분한 사람이 누구였지..?"
"나..지."
성민은 민망함을 없애려고 일부러 과장된 표정을 만들면서 대답했다.
"알면, 됐어."
준이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자, 성민은 한번 더 준을 바라 본 다음, 책 속의 사진을 내려봤다.
"엄마, 나한테 전화 온 거 없었어?"
현관문이 열리기 무섭게 현주는 엄마를 보며 물었다.
하지만 엄마의 고개가 가로로 저어지자, 현주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신을 벗고 거실로 들어왔다.
"왜, 기다리는 전화 있어? 매일 들어오기가 무섭게 전화타령이야?"
현주는 엄마를 뒤로하고 한숨을 쉬며 방으로 들어갔다.
"너,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일은, 무슨. 아냐, 엄마."
뒤 따라 바로 들어온 엄마를 힐끔 한번보고 난 뒤에 현주는 갈아입을 옷을 옷장에서 꺼내며 말했다.
"원, 애도. 안 하던 짓 하니깐, 그러지. 그러게 그 흔한 휴대폰 하나 사라고 하니까는."
"그거 없었을 때두 없는 대로 잘 살았는데, 남들 다 가지고 다닌다고 사는 거.. 따라하는 거 같아서 싫어."
"암튼, 고지식한 거 꼭 빼 닮았어요, 아주. 누가 그 아버지의 그 딸 아니랄까봐."
현주는 엄마의 말에 피식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저러나 연습은 잘 되가? 교수님하고 저녁식사라도 한번 함께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널 이쁘게 보시고 출전시키시는 건데."
"엄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서울콩쿨이 무슨 미인 대회야? 이쁘게 보고 말구게? 그리고 고등학교 때처럼 대회 때마다 선생님들 찾아다니면서 신경 쓰고 그런 거 하지 않아도 돼, 엄마. 내가 지금 다니는 곳은 대학이라구, 대학."
현주는 약간 짜증이 섞인 말투로 엄마를 대했다.
엄마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현주의 태도에 당황해 하는 것처럼 보이자, 현주는 바로 엄마에게 가까이 가서 손을 잡았다.
"엄마.. 이젠 그런 신경은 안 써도 돼. 실력으로 대회에 나가고, 또 교수님한테도 실력으로 인정받는 거란 말이야. 그래서 한 말이니깐, 내가 지금 한 말에 서운했으면, 풀어.. 아니니깐, 응?"
"실력만으로 인정한다면 엄마가 무슨 걱정을 해.. 아무튼 니 말대로 엄마.. 이제 그런 뜻으로의 신경은 쓰지 않을게. 그치만 그래도 언제 교수님하고의 저녁식사는 하자. 너 하나 대회 출전시키기 위해 연습시키시는 건데, 부모로써 교수님 노고에 그 정도의 감사 표시는 해야 되는 거니깐."
"그래요, 알았어."
현주는 엄마의 손을 놓았다.
"옷 갈아입고, 씻어."
엄마가 방을 나가자, 현주는 침대로 풀썩 걸터앉았다.
고1때 전국고교대회의 출전자격을 놓고 막판까지 결전을 벌였던 때가 있었는데, 끝내는 현주가 못 나가고 다른 무용반 선배에게 자격이 넘어간 일이 있었다. 나중에 그 선배의 부모님이 대학 진학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마지막에 무용선생님께 성의 표시를 했던 게, 출전자 선발 때 작용을 했다는 소문이 나왔었다. 그 때, 그 소문에 충격을 받았던 엄만, 가만히 있다가 딸의 대회출전 기회를 막았던 게 아닌가 하는 맘에 그 이후로 무용반의 일에 적극적이리 만큼 활동을 해 왔다는 걸 현주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대학에 와서도 혹시나 그런 일들이 염려되어 그러는 거라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싶었고, 그래서 했던 말인데.. 그런 식으로 화내서 말하지는 말았어야 했다고 현주는 후회했다. 모두 딸을 위해서 했던 엄마였는데.. 하는 생각이 들자, 현주는 엄마가 맘에 걸렸다.
"다녀오셨어요?"
채현은 현관 앞까지 나와 아빠에게 아주 밝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아빠가 거실 현관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빠른 걸음으로 이층계단을 '쿵'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힘있게 딛으며 계단을 올라가자, 채현은 놀라 엄마를 보게 되었고, 곧 엄마의 놀란 눈과 교차되어지자, 재 빨리 아빠의 뒤를 따라 이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무현의 방문이 센바람을 일으키며 활짝 열려지면서, 그 방문으로 들어가는 아빠의 뒷모습이 보였지만, 바로 뒤따라 올라온 채현은 계단의 끝에 서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서 버렸다. 곧 이어 올라온 엄마의 몸이 채현과 부딪히자, 채현은 얼른 엄마의 손을 잡고는 무현의 방으로 들어가려는 엄마를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정신 차릴 만큼은 맞고 이렇게 누워 있는 거냐?"
누워있던 무현은 문에서부터 성큼성큼 침대 쪽으로 걸어오는 아버지를 보자, 벌떡 일어나려고 했지만, 가슴의 통증이 무현을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찰 - 싹'
간신히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앉았던 무현의 뺨이 소리와 함께 반대편 쪽으로 세게 돌아갔다.
"못된 놈. 부모 망신을 시켜도 분수가 있지."
무현은 돌려진 뺨을 손으로 만지며 아버지의 말에 어이없어 하는 체념의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렇게 제가 이 집, 이 방에 들어와 누워 있게 됐구... 두 번 다시 집 나가는 일.. 없을 꺼라 말하는 이 말이.. 아버지가 보내셨던 그 대단한 깡패새끼들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불행하게 만든 사람들 보면서 맘 아파했던 만큼.. 어머니와 채현이가 저 때문에 맘 상해하면서 불행해지는 걸 참지 못해 섭니다."
무현은 헛웃음을 내보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내 식구 챙기겠다는 얄팍한 겉치레를 이유로.. 남을 밟고 올라가려는 근본적 이기심을 숨기는 이거, 이 더러운 마음... 유일하게 아버지 자식이라는 피의 증거인가봅니다. 때문에 다신 안 나가기로 했습니다. 내 식구 맘 아파하는 거, 모른 척 할 수 없다는.. 그 포장된 이유로 말입니다. 아버지에게 받은 피까지는 저도 어쩔 수 없나 보네요."
"너 이 자식.. 지금 뭐라고 하는 소리야?"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기 위해서 물으시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뭐라구?" 다시 아버지의 커다란 손이 허공에 세워졌다.
"때리세요. 때리세요... 그렇지만.. 아무리 어떤 방법을 다해 때리셔도.. 아버지에 대한 실망으로 갈기갈기 찢어져 버린 제 가슴의 상처만큼의 상처는 못 내실 겁니다."
무현은 충혈 되어 아버지를 보고 있는 눈에 더 힘을 주었다.
"에잇!"
허공에서 심하게 떨리던 손이 내려지면서 열려진 문으로 방을 나가는 아버지를 보며 무현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 감겨진 눈으로 굵은 눈물이 흘렀다.
무현의 방을 나온 아버지는 이층 거실에 서있는 아내와 채현을 보게되자, 시선을 피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 다음에 엄마가 아버지의 뒤를 따라 내려가자, 침묵하던 채현도 빠르게 오빠의 방으로 들어갔다.
"오...빠!"
"뭐하러 들어와." 무현은 얼른 흐트러진 몸과 얼굴을 고치며 다가오는 채현에게 말했다.
"오..빠!"
"가족들 속 섞이는 놈, 혼나는 건 당연한 거잖아."
무현의 쓴웃음이 입가에 어색하게 흘렀다.
"오..빠!"
"오빠 여기 있어, 채현아. 왜 이렇게 부르기만, 해..?"
살짝 건드리기 만해도 금방 울어버릴 태세의 채현을 보며 무현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됐어.. 이제 됐다구.."
채현은 무현이 하는 말과 표정들을 보며 오빠에게서 어떤 확실한 확답을 받은 것처럼 이젠 안심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그런 기분이 채현은 들었다.
"이... 울보 이채현!"
무현이 채현을 불렀다.
채현은 무현의 얼굴을 보았다.
"내일 학교 가려면 일찍 가서 자야지."
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더 무현의 얼굴을 보다가 침대 곁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가벼운 마음의 걸음인지 채현은 너무나도 오래 전에 느꼈던 것처럼 생소하면서도 기뻤다.
"이채현!"
채현은 손잡이를 돌리며 나가려다가 무현이 부르자, 멈췄다.
"내일, 정말 학교 가는 거야, 알았지? 내가 확인해 볼 거야."
"응."
방문을 닫으며, 채현은 너무나도 오랜만에 밝은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그래.. 너 때문이라도 .. 이젠 안 그래야 겠지..'
무현은 아주 천천히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켜 세워보았다. 왼손으론 여전히 가슴을 만져야했지만, 그래도 침대 밖으로 나와 방을 걸을 수 있다는 거에 가슴의 통증도 잊어버려졌다.
무현은 테라스의 커튼을 치며 옆으로 있는 의자에 앉아 밖을 보았다. 저 만치 멀리 떨어져서 보이는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떠 있는 게 보이자, 무현의 허탈해 지는 표정이 얼굴로 가득해졌다.
"너가 내 친구이긴 한 거니?"
지도 교수님 실에서 막 나오는 채현의 모습이 보이자, 현주는 채현을 기다리는 동안 벽에 기대었던 몸을 세우면서 채현이가 걸어오는 방향으로 걸어가서 팩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