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영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분명 이 목소리는 화영이다. 날 부르고 있는 화영이의 목소리에 여기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 어둠속에서 하루 빨리 나가고 싶은 생각뿐이다. 너무나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이 순간 나에게 간절하게 바라는게 있다면 그건 화영이다. 화영의 품에 안겨 잠들고 싶은 생각뿐이다.
춥고, 습하고, 바람도 들어오지 않는 이 어둠속에서 벗어나 화영이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화영아.. 화.. 영아."
숨이 막힐 것 같은 시간이 지나고, 내 목소리인지 짐승의 목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애타게 화영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심장이 터지도록 내 몸에서 피가 다 터져버리도록.... 한번만이라도 화영를 보고 싶었다. 그렇게 간절히 또 간절히 화영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화영의 냄새가 화영의 숨소리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 따뜻한 몸을 안고 싶어서 미치도록 이곳을 나가고 싶어졌다.
병우의 병실을 3년째 지키고 있는 어머니는 오늘도 병우의 침대머리에서 두손 모아 기도를 드리고 계셨다. 하루라도 빠진적이 없을 정도를 늘 이렇게 기도를 드리면 아들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병우의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였다. 힘들게 정상적인 사람의 몇배의 힘이 필요할 만큼 천천히 눈꺼풀을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으로 빛을 보았다. 어둠에 익숙한 병우의 눈이 환한 빛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다시 감겼다.
병우는 다시 두 눈을 힘겹게 뜨고는 화영이를 찾았다. 분명 자신의 옆에 화영이가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화영의 얼굴을 찾았다. 여기가 어디인지 병우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그건 둘째 문제였다. 지금은 화영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화.. 영":
다듬어지지 않는 탁한 병우의 목소리에 기도를 드리고 계시던 어머니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아들의 얼굴을 살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어떤 말도 필요가 없었다. 3년간 감겨 있던 숨만 쉬고 있던 아들이 두 눈을 뜨고 세상을 보고 있다는게 감사할뿐이었다. 뜨거운 눈물이 어머니의 뺨을 타고 흘렀다.
"류자키.. 날 알아보겠니?"
울고 계시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어느 곳에도 화영은 없었다.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었다. 화영이를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고, 잠시 후 의사 선생님들이 우르르 들어와 날 살피고 있었다. 뭐라고 말을 하지만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귀에서 윙윙 소리만 들릴뿐 머리가 깨어지게 아팠다. 이럴때 화영이 날 안아준다면 한결 편할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머니 화영이는 어디에 있나요?'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말은 바로 이 말이다. 근데 아무도 나에게 필요한 말을 해주지 않아 답답할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나가고, 다시 어머니와 단둘이 남게 되었을때 난 화영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내 목에서 소리가 내 뜻대로 나오지 않았다. 답답하게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몇시간이나 흘렀을까? 아직도 내 곁에는 화영이가 없다. 도대체 화영이는 어디에 있는건지... 왜 아직 내 곁에 없는건지 모르겠다.
"어...화... 영....이"
겨우 겨우 몇마디 할 수 있었다. 목이 타는 듯했지만 그래도 말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화영이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류카지 아직 아무말도 하지마. 너는 3년동안 깨어나지 못했어. 3년동안 이 병실에 누워서 잠을 자고... 그러니까 너무 애쓰지마. 천천히... 앞으로 시간은 충분해"
3년동안 내가 여기에 있었다고... 분명 난 화영이에게 가기위해 공항에 있었다. 그리고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고 한다. 일주일도 아니고 한달도 아니고 일년도 아니고, 무려 3년이라고 한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거지. 화영이는 왜 또 보이지 않는거지. 머리가 깨질것 같아서 병우는 두 눈을 감았다.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여기서 나고 싶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화...영"
"그 애는... 애기는... 오지 않을거야. "
그 말과 동시에 병우의 심장 박동수는 측정할 수 없을만큼 높아만 졌다. 그래서 의사를 또 다시 불러 안정제를 투입하고서야 잠이 들었다.
서울에 온 화영은 맞선을 보기 위해 평소와는 다르게 멋을 내고, 강남으로 향했다. 부자들은 선보는 장소는 남달랐다. 일주일 동안 일본에서 죽어라 일만하고, 다시 한국에 와서는 좋은 소리도 못듣고, 그 동안 쌓여있는 자신의 일때문에 죽어라 일만 했다.
죽어라 일만 하고 찾은 휴일에는 친구대신 맞선이나 보게 생겼다. 남의 맞선 대용품으로 나가는 자신의 신세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내가 미친년이다. 친구 맞선 땜빵이나 하고... 이게 무슨 꼴라지인지?"
약속 장소에 도착한 화영은 자신의 처량한 처지를 중얼거려 보았다. 호텔 커피숍 입구에 잠시 서 있었다. 이런 곳은 처음이라서 화영도 어리둥절했다.
"강남에서 제일 유명하다고 하더니.. 진짜 죽이네."
긴장하면 화영은 혼자말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신기하듯 쳐다볼 때도 있지만 좀처럼 고치지 못하는 버릇이라서 화영이도 당혹스러운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을 느낀 화영은 그 남자와 두눈이 마주치면서 민망한 나머지 시선을 빨리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한순간이었지만 정말 잘생긴 남자까지는 아니고, 옷빨이 좋다고 해야하나 스타일이 괜찮은 남자였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다. 개성있게 한번보면 그 남자의 스타일에서 풍기는 카리스마때문에 눈길이 가는 남자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그런 남자였다.
약속 시간 오분전이라서 화영은 앉아서 기다리기로 했다. 여기에 온 사람들은 다들 옷차림이 남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나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처럼 느껴져서 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