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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이야기 (6)

고인돌 |2003.04.15 15:00
조회 119 |추천 0

네 대륙이 되고 싶어라
자유로이 비상할 수 있는 네 하늘이 되고 싶어라
울타리도, 칸막이도
경계도 없는
넓은 넓은 네 대륙이 되고 싶어라
있는 건 오로지
생명, 희열, 영광, 무한, 사랑과 신뢰
끝없이 피어 만발한
빛의 물결
네 그 대륙이 되고 싶어라
피곤에 지친 영원한 네 휴식
그 푸른 풀과 바람
그 둥우리가 깃들여 있는
넓은 넓은 네 대륙이 되고 싶어라

조병화 "남남 10"


유진은 아이들을 모두 집에 돌려보낸 이 시간이 늘 적막하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만큼은 유진 자신도 살아있음을 느낀다.

어제는 왠지 모르게 친구들과 함께 하는 공간이 낯설게 느껴졌다.

늘 혼자라는 외로움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까?

오늘따라 유난히 창밖의 풍경이 우울해보인다.

알 수 없는 슬픔이 눈가를 적시고 있었다.

'의미를 붙이자면 끝이 없어. 유진아! 언제까지 헤매고 있을래? 언제

까지 그림자속에 파묻혀 울고만 있을거니?."

유진은 아직도 그를 생각하고 있는거냐고, 아직도 그를 기다리고 있는거

냐고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다.

오늘은 7년전 그와 유진이 처음 만난 날이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그가 꼭 나타날 것만 같다.

3년전 그가 그렇게 떠나간 뒤 유진은 견뎌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살아야 할 의미를 잃어버렸다.

보내야 한다고 자신한테 맹세까지 했지만 그를 보내면 자신이 죽는다는

걸 유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죽을 결심을 하고 약을 먹었지만 쓰러지는

순간까지도 그와의 추억을 놓지 못했었다.

유진이 혼수상태에 빠져 며칠 만에 눈을 떴을 땐 이미 유진이 꿈꾸고 있

던 세상은 사라지고 없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유진의 곁에 그녀가 유진의 한 쪽 손을 두 손으로 꼭 감싼 채 잠들어 있

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진희의 모습도 느낄 수 있었다. 이미 정신은

들어있었지만 눈을 떠 차마 그녀와 진희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

살아있다는 것이 이처럼 지독한 아픔일 줄 유진은 몰랐었다.

살려놓긴 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초췌해져 갔다. 어떻게든 예전의 유진

으로 돌려놓겠다고 그녀와 진희는 달래보기도 하고 화도 내보기까지 했

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런 유진에게 지쳐갈 때 쯤 그녀는 잠들어

있는 유진에게 다가가 그 동안 하고 싶던 얘기를 조용히 건넨 적이 있다.

"유진아! 너 늘 그랬잖아. 세상 사람들 다 불쌍하게 너를 쳐다봐도 살거

라고... 얼마나 강하게 잘 살아가는지 보여줄거라고 했잖아. 너 이렇

게 나약한 사람이라는 거 세상 사람들이 알면 널 얼마나 더 하찮게 여기

겠어? 이제 그만 잊자. 잠시 꿈꿨다고 생각하자. 그것도 안되면 동욱

씨 생각해. 너 자꾸 이러면 그 사람 불행해져. 니가 그토록 바라는 게

동욱씨 행복이라면 너 이러는 거 아니야."

한쪽 어깨를 들썩인 채 조용히 울고 있는 유진을 보면서 그녀도 함께 울

고 있었다.

그리고 유진은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고, 예전처럼 밝게 웃었다.

마치 자신이 그렇게 살지 않으면 그가 정말 불행해질 거라는 그녀의 얘기

가 사실로 이루어지기라도 할까봐 유진은 그렇게 또다시 아픔을 속으로

삭히고 있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문득문득 지난 시간이 떠오를 때마다 이 말만을 되풀이한다. 삶에 대한

지독한 애착같지만 사실 유진은 그 어떤 것에도 의미를 붙이지 못했다.

어느 새 날이 저물어간다. 지석이 올 시간이다. 지석을 생각하면 잊혀

지지않는 끝없는 그리움을 끝내야만 한다고 결심하고 또 결심해보지만 생

각의 끝은 언제나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똑.. 똑.."

"지석씨! 문 열렸어요. 들어와요. 금방 챙길께요."

유진은 서둘러 책상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왠일인지 문 밖의 지

석은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런 대꾸조차 없었다.

"지석씨! 들어와요. 일이 조금 ....."

유진이 의아해하며 문을 여는 순간 그 자리엔 지석이 아닌 동욱이 멍하니

서 있었다. 순간, 유진은 들고 있던 가방을 놓치고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참고 또 참았던 그리움의 절규가 폭발

한 듯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유진아! 미안하다.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서. 끝까지 너를 안고 갔어야

했는데 도망갔던 거 정말 미안하다. 유진아... 나 너한테 용서받고 싶

어서 온 거 아니야. 나 용서하지마... 하지만 유진아 이젠 내가 안돼.

너없이 나.. 자신없다. 우리 이제 절대로 서로에게 상처같은 거 주지

말자."

울고 있는 유진을 두 손으로 꼬옥 감싸 안은 채 동욱은 흐느끼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유진은 그런 동욱의 손을 뿌리치며 그에게 얘기했다.

"왜 왔어요? 내가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했잖아요. 우리 서로 모르는 사

람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자고 그랬잖아요. 이제와서 뭐가 틀려지는

데요? 김유진이 고아라는 사실이 바뀌는거예요? 동욱씨가 나같은 애랑

어울린만한 사람으로 변해서 돌아온거예요? 돌아가요. 난 다 잊었어요.

나 동욱씨 만나서 내 곁에서 나 사랑해주는 사람들 모르고 지냈어요. 나

바보같아도 어떤 사랑이 진실한 것쯤은 안단 말이예요!."

하지만 자꾸만 눈물이 흐른다. 그토록 보고픔에 목메인 사람이 바로 앞

에 서 있는데도 보고싶었다는 말 한 마디조차 못하고 마음에도 없는 원망

섞인 목소리만 들릴 뿐이다.

"유진아... 정말 미안하구나. 너 많이 힘들거라는 거. 나만큼 많이 아플

거라는 거 알면서도 더 이상 너에게 상처같은 거 주지 않겠다고 맹세해서

그 약속 지키려고 많이 노력했어. 하지만 유진아! 우리가 어리석었어.

지난 3년이란 시간동안 난 널 잃은 슬픔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사랑은 보낸다는 말 하지 않는거잖아. 유진아 이러지말자. 그 동안의

시간도 우리에게 크나큰 낭비였다는 거 알잖니."

어린 아이 달래듯 울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동욱도 울고 있었

다. 유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순간이 꿈이라도 상관없었다. 과거로부터 그와의 추억들이 되살아나

고 사랑한다고 맹세하던 서툰 고백의 시간이 유진의 앞에 다시 머무르는

듯 했다. 동욱과 그녀는 서로의 품안에서 지난 시간을 안타까워하며 그

렇게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문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지석은 조용히 그 자리를 떠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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