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추억에 잠겨있는 동안 현재의 시간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아니, 그다지 궁금할 것은 없다. 손으로 움켜쥐어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 사라지는
모래알 같은 이 지루하기만 한 현재의 시간들에 나는 아무 애착이 없다.
혼자 사는 이 오피스텔에 전기 스위치를 하나도 켜놓지 않으면 한쪽 벽면을 차지한 유리창들은 아스라한 초저녁 어둠으로 마루 한 중앙의 긴 의자에 누운 내 주위를 둘러싼다.
거의 매일 이 시간을 의자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보낸다. 아주 가끔은 음악을 듣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도 명확한 의식을 내 머리 속 안에 붙잡아 놓지는 못한다.
한참 동안이나 어둠 속을 걷고있는 자아를 방치하다가 문득 눈을 뜨면 창밖에서 들어온 완전한 어둠이 온 집안을 메운다.
집이 워낙 횡뎅그레한 탓에 아주 약간만 사물이 분별이 가도 굳이 불을 켤 필요가 없이 집안을 돌아다닐 수 있다. 나는 조용히 창가 끝의 침대에 눕는다.
집에서 저녁을 먹는 경우는 거의 없다.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기 전에 음식점에 들러 식사를 하고 오지 않는 경우는 저녁을 거른 채 그냥 잠자리에 든다.
침대에 누우면 창밖의 달과 바로 대면한다. 집 현관부터 맞은 편 창가까지 긴 직사각형 구조로 되어 있어 창가 반대편으로 침대 머리를 둘 수 밖에 없었다. 한밤의 짙은 어둠은 나쁠게 없지만 아침의 휑한 하늘을 눈을 채 뜨기도 전에 느껴지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도 자명종을 싫어하는 성격 탓에 자기 전에 커튼을 치지 않는다. 새벽 여명에 저절로
눈을 뜨는 습관이 몸에 잘 맞기 때문이다.
오늘 밤도 침대에 누워 바라본 하늘은 허공에 대고 조물주가 듬뿍 먹을 갈아놓은 것처럼
아주 새카맣다. 그 어느 지점부터의 내 삶을 쭉 펴서 널어놓은 것 같다. 음울하기만 한 현재의 삶..............
내 눈길은 한 곳에 고정된다.
그리 밝지 않고 차가운 질감마저 느껴지는 저 달빛.
아니, 저 달이 나를 항상 지긋이 응시한다. 그 눈길을 피하려는 듯이 다시 눈을 감았다.
그래도 눈 두덩이에는 아직 밝은 기운이 어리는 듯하다. 나는 가슴께의 얇은 이불을
머리 위로 끌어당겼다.
답답한 호흡과 어둠이 한꺼번에 나를 짓눌렸다.
나는 아침잠이 없는 편이다.
더구나 하루 생활의 반경이 적은 탓에 잠으로 풀어야할 피로가 적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김없이 오전 6시 30분 경에는 눈을 뜬다.
오피스텔이 다 그렇듯이 욕실은 아주 작다. 당연히 욕조는 갖춰져 있지 않지만 아쉽지는 않다. 유학시절까지 통틀어 기나긴 학부시절동안 항상 해야 할 과제나 논문에 밀려 느긋하게 목욕을 즐기는 습관이 몸에 배여지질 않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가벼운 샤워로 시간을 절약해야하는 상황에 오랫동안 길들여져 왔던 탓에 지금도 온 몸을 물에 담그고 시간을 보내는 여유는 내게 생소하기만 하다.
가벼운 샤워만을 끝낸 후 욕실에서 나왔다. 전신의 물기를 닦고 속옷을 골라 입는다.
머리를 헤어드라이어로 말렸다.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생머리지만 손질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질 않는다.
퍼머를 하지 않지만 머릿결이 말을 잘 듣는 편이라 드라이와 빗질만으로도 부드러운 웨이브가 들어간다.
문득 거실의 한 구석에 있는 전신 거울 앞에 선다.
천천히 거울 속의 내 자신을 응시한다.
큰 눈, 가늘고 섬세하게 길게 내려오는 콧날, 적당한 두께의 입술, 그 아래에 꼭지점을 만들며 모아진 턱선. 긴 목 밑의 선명한 쇄골. 그 아래 가슴이 베이지색 브래지어를 부드럽게
밀어올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하면 피부 상태가 눈에 꼼꼼하게 들어온다.
40을 넘긴 나이에 비해 매끄러운 피부 표면이 안도감을 준다.
눈을 내리며 아랫배를 바라본다. 시선이 거울 밖의 내 몸을 직접 응시한다. 군살하나 없는 복부를 나는 손바닥으로 살며시 어루만졌다. 내려간 손끝이 팬티 선 바로 위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