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그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도
스물아홉에 느낀 사랑
양선아의 존재가 내 마음속에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가득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입사하고 십오 년 동안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일에만 몰두해 오던 잡지사에서 쫓겨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경영 상태가 악화되었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다른 직원들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다는 이유 하나로 구조조정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내가 단 한순간도 꿈꾸지 않았던 일이며, 나에게 있어서 신부가 유부녀와 정을 나누다 들킨 소식을 접한 신자들보다 더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아침 일찍 출근하자마자 사장의 호출을 받은 나는 그동안의 회사 분위기를 보아 드디어 찾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면서도,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사장실의 문을 노크했다.
그러나 혹시나 했던 한 가닥 실낱같은 내 기대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안절부절못하는 내 모습을 실눈을 뜨고 바라보는 사장의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 부장이 그 동안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해 준 건 잘 알지만, 워낙 회사 사정이 나빠져서…….」
아무리 회사 경영이 악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십오 년 동안이나 머슴 부리듯 부려먹던 사람을 당장 그날로 내쫓는 사장의 횡포에 나는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분노를 느꼈으나 등 뒤로 감춘 주먹만 쥐었다 폈다 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장님, 하지만…… 오늘부터 당장 그만 둔다는 것은…….」
나는 능글맞은 사장을 노려보면서 한두 시간을 죽도록 패 주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다른 직장을 잡을 수 있을 때까지 만이라도 말미를 달라고 비굴하게 사정을 했다.
「미안하네.」
사장의 말 한 마디로 내 구차한 사정은 냉정하게 묵살되고 말았다.
「내가 사장이라고 해서 회사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은 이 부장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결과는 나쁘지만 이 부장을 위해서 내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네.」
사장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사장은 틀림없이 제 손으로 구조조정대상 제 일호로 나를 지목했을 것이다. 겉모습은 유순한 호인 같지만 사장이 진실 된 삶과는 우주의 공간만큼이나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진작 깨달았어야 했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몰골로 사장실을 나오면서 나는 사장실에 불을 질러 사장과 함께 지글지글 타 죽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며 비상계단을 이용해 일층으로 내려갔다. 사물 정리는 아무도 출근하지 않는 일요일에 나와서 할 생각이었다. 직원들을 마주보며 그들이 마지못해 하는 동정 섞인 위로와 격려를 받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어차피 잘리고 나면 모든 게 끝인 것이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땅을 헛밟지 않으려고 애쓰는 술 취한 사람의 걸음걸이로 비상계단을 빠져나와 출입문 쪽으로 향하는데 로비에 있는 휴게실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손까지 흔들면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모르는 척하며 곁눈질로 슬쩍 그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손정근 차장이었다. 아마 나보다 먼저 회사의 구조조정 조치에 대해 알고 있던 그가 나를 위로한답시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쁜 자식!」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그와 마주치기 싫어 황급히 건물을 빠져나왔다. 내가 회사에서 쫓겨남으로써 좋아지는 건 앞으로 부장이 확실시 된 손정근 차장이었다. 겉으로는 나를 위로하면서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그의 기분에까지 희생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나는 이렇게 해서, 어느 날 갑자기 직장에서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남들이 모두 출근하는 시간에 겨울잠 자는 개구리처럼 몸을 웅크리고 방바닥에 누워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 쓴 채 이리저리 뒤척이며 아침을 보내게 된 것이다. 생각할수록 황당하고 끓어오르는 분노에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그러나 그 어느 것보다도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은 찬바람이 이는 듯한 가족들의 냉랭함이었다. 아내와 중학생인 딸년은 물론 초등학생인 아들놈까지 나를 위로하기보다는 비난이 담긴 어조로 내 무능력을 탓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와 자식들을 원망하고 싶지 않은 나는 가정과 직장에서 형편없이 곤두박질쳐진 내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십오 년 동안 몸담고 있으면서 정이 듬뿍 들었던 사무실의 모든 것들이 그리워지곤 했다. 책상과 의자, 손때가 시커멓게 묻은 컴퓨터와 복사기, 특히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커피를 마시기 위해 동전을 집어넣던 자판기 등 따위가 그리웠다. 다시 회사에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그 동안 쌓였던 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장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충무로라고 알리는 지하철 안내방송이 눈을 감고 무의식 속에 빠져 있던 나를 일으켜 세웠다. 대치 역에서 타 내내 서서 오다가 운 좋게 옥수 역에서 앉게 된 것도 잠시, 아쉽게도 겨우 네 정거장만에 내려야 했다.
퇴근시간 때라 그런지 지하철 안은 많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어 나는 사람들을 비집고 간신히 내릴 수 있었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불과 오 분 거리밖에 안 되는 고등학교 반창회 장소인 음식점까지 가는 동안 나는 졸지에 실업자가 된 가엾은 신세를 한탄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나는 이번 모임에 참석할 의향이 전혀 없었다. 친구들을 만나면 주눅이 들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항상 그렇듯 모여 봤자 지 잘났다고 시부렁거릴 것이고, 그 말을 듣고 너 잘났다고 맞장구치며 앉아 있는 게 지옥 같으면서도 할 수 없이 반창회 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어젯밤 늦게 집으로 전화해서 이번 모임에 나오지 않으면 이십오 년 동안 지켜 온 의리를 끊겠다는 윤덕재의 협박에 가까운 강요에 못 이겨서였다.
「야, 이게 누구야? 너, 재우아냐? 소문에 의하면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으려고 죽지 못해 산다면서?」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농이 가득 찬 입으로 인사를 하면서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다행히 동창들의 귀에는 내 근래의 동향이 들어가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새삼스럽게 세월이 빠르다는 것을 느꼈다. 이번 모임에 나온 동창들 중엔 벌써 하얗게 머리를 물들인 녀석이 있는가 하면, 안경 도수를 더 올린 녀석, 이마에 주름이 가득 패인 녀석, 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진 녀석이 있었다. 그들의 변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세월의 빠름에 혀를 차며 방석에 엉덩이를 올려놓았다.
내 앞에 놓인 테이블 맞은편에는 고등학교 때 철학자를 자처하며 엉뚱한 궤변을 늘어놓으며 우리를 웃기는 바람에 돈키호테의 별명을 얻은 박태영과 수업료를 제 때 납부하지 못해 분기마다 매번 집으로 쫓겨나곤 했던 가난한 농부의 아들 강현철이 앉아 있었고, 내 옆에는 협박으로 나를 이 자리에 끌어들인 윤덕재가 앉아 있었다.
오늘은 지 잘났다고 시부렁대는 녀석은 없었다.
실업자 생활에 주눅이 들어 있던 나는 그 굴레에서 벗어나 철없던 시절의 동창들과 말잔치를 벌이며 술을 마심으로 해서 예전에 나로 되돌아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희망이 있고 활기가 넘쳐흐르던 그 시절의 나로…….
모임이 끝나고, 나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금의 처량한 내 신세를 한탄하는 어조로 윤덕재에게 고백하고 말았다. 그에게까지 날 속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며칠 전 회사에 전화를 했더니 전화 받는 아가씨가「그만 두었다」고 몹시 불친절하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그 아가씨가 잘렸다고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농담조로 말했다. 누구라고 말하지 않아도 나는 전화 받은 아가씨가 누군지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아가씨는 채미선이었다.
「괘씸한 년!」
나를 찾는 전화가 오면 회사를 그만 두었다고 하지 말고 출장 간 것으로 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는데, 그까짓 부탁하나 들어주지 않는 채미선에게 그 동안 잘 해주려고 노력했던 것을 생각하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채미선은 눈에 띌 만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남자 직원들이 군침을 흘릴 정도로 각선미가 늘씬하고 섹시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나까지 그 무리에 속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나이 차이가 열일곱 살이나 벌어지는데다가 나는 회사 여직원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다. 차라리 룸살롱에 가서 돈을 주고 즐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하고는 상관없이 될 수 있는 대로 여직원들과는 동생 대하듯 하면서 다정스러워지려고 노력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여직원들은 제 주제는 생각하지 않고 내 마음의 진실을 색안경 끼고 바라보았다. 내 친절이 자기들을 유혹하려는 미끼로 알았던 것이다. 채미선 역시 그랬을 것이다. 미친년들……
윤덕재는 내 어깨를 토닥거리며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앞으로 좋은 일만 생길지 모르니까 희망과 용기를 잃지 말라고 하며 날 위로했다. 좋은 친구였다.
날이 갈수록 아내와 자식들은 가족이라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나를 대하는 태도가 마치 파충류 닮은 외계인을 대하는 듯 했다. 저 여자가 내 아내였고, 저 놈들이 내 자식이었다니…….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 받은 충격을 단 한순간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깊은 상처로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절대로 예전처럼 되돌아갈 수 없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내와 자식들을 다시 사랑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나와 아내는 성적 충동을 느낄 땐 서로 부둥켜안고 뒹굴었다. 처음엔 나는 아내와의 관계를 예전으로 되돌려 놓고 싶은 욕심으로 신혼 시절의 감정을 갖고 성관계를 가졌지만 결과는 그런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 내 자신을 혐오할 정도로 참담했다. 아내는 그저 성관계를 즐겼을 뿐이었다.
집에 있으면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돈 받으러 온 빚쟁이처럼 싸늘한 바람이 이는 아내의 냉랭한 태도에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아 무작정 밖으로 나와 서점에 들러 부담 없이 읽을 만한 책을 골라 공원에 가서 읽기도 하고, 벤치에서 책을 베개 삼아 낮잠도 자고, 배가 고프면 분식점에서 라면이나 국수로 배를 채우고, 전자오락실에 들어가 어린 학생들 틈에 끼어 게임도 하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영화구경을 했다. 그리고 밤에는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며 기쁨과 슬픔과 괴로움이 교차하는 서민들의 세상사는 이야기를 엿듣는 게 나의 하루 일과 전부였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양선아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이 그 무렵이었다. 그날, 출판사를 운영하는 윤덕재에게서 나에게 출판물을 편집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직원들이 있는 데 내가 왜?」
「다 내보내고 아무도 없어.」
「다 내보냈다니?」
직원을 다 내보냈다는 윤덕재의 말에 나는 가슴이 답답해 왔다. 또 나 같은 사람이 여러 명 생겼다는 동질감 때문이었다.
「요즘 잘 되는 일이 어디 있겠어. 할 수 없이 직원들을 다 내보낼 수밖에 없었어.」
윤덕재와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각각 다른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잡지사에 기자로 취직을 했고, 그는 대기업의 홍보실에 근무를 하다가 문예지에 소설이 당선되자 회사를 그만 두고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출판물이 나올 때마다 그때그때 편집을 외주 줘서 출간하기로 했어. 마침 자네가 시간이 많으니까, 내가 특별히 자네한테 부탁하는 거야. 자존심 상한다고 내 부탁을 거절하지는 않겠지? 작업은 내 사무실에 나와서 해.」
사실 윤덕재는 실업자 생활에 잔뜩 기죽어 있는 나에게 조금이라도 용기를 북돋워 주고 싶은 의도에서 다른 사람도 많지만 나를 선택한 것이다. 그 사실을 그가 말을 하지 않아도 피부로 충분히 느낀 나는 순순히 그의 뜻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처음으로 맡은 편집은 신춘문예 출신인 신인 여류작가의 수필집이었고, 그 여류작가가 바로 양선아였던 것이다. 만일 윤덕재가 나에게 그 일을 맡기지 않았다면, 또한 그녀가 수필집을 그에게 출판을 의뢰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 아니, 내가 회사에서 쫓겨나지 않고 집에서 외계인 취급만 당하지 않았더라도 그녀가 내 마음속에 자리 잡지 않았으리라.
나는 양선아를 소개받으면서 그녀의 이름이 낯설지 않다는 생각에 처음엔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그 이름을 기억해 내지 못했고, 애써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 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마주 대하는 순간 몸이 굳어지면서 사춘기 시절로 되돌아간 듯 어떤 흥분을 느낀 탓도 있었다.
양선아는 마치 여류 소설가 배역을 맡은 영화배우처럼 아름다웠다. 그녀의 모습에 넋을 빼앗긴 나는 처음 미팅에 나가 아름다운 여학생을 파트너로 맞이한 여드름 많은 남학생처럼 얼굴까지 빨개지면서 갑자기 혼란스러워지는 내 감정을 그녀와 윤덕재에게 눈치 채지 않기를 바라면서 뜨거운 커피를 홀짝홀짝 마셨다. 그녀가 나에게 어떤 주문을 외워 마법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가슴이 뜨끔해진 나는 재빨리 내 감정을 숨기기 위해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그들과 헤어져서 집으로 가는 길에도 일단 양선아의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자 나는 머릿속에 가득 찬 그녀의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구조조정대상이 되어 회사에서 쫓겨날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인생에 있어서 여자는 아내만 있는 줄만 알고 살았었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해서 한결같이 행복만 있을 수 있겠는가. 살면서 더러는 아내가 나에게, 내가 아내에게 실망하고 미워하기도 했었지만 나에게 있어서 여자는 아내 외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아내를 만난 십칠 년 동안 그렇게 살아오면서 다른 여자가 내 가슴속에 자리 잡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었다.
일순간 느끼는 감정도 아니고, 아내 말고 다른 여자에게 사랑을 느끼다니…….십칠 년 만에 다시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그렇다고 사랑한다는 말을 양선아에게 감히 던질 수 있겠는가. 내가 그녀를 유혹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임은 명백한 사실인 것이다. 더구나 돈 많은 사장도 아니고 백수건달로 전락된 상태가 아닌가. 하지만 나는 우연 뒤에 감춰진 필연의 만남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서재 안이 캄캄해지도록 그대로 앉아 앞으로 그녀와 만날 수 있는 방법들을 미친 듯이 궁리하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아내 곁에 누워서 양선아를 마음속에서 지우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가슴속에 새겨진 그녀의 잔영은 지우면 지울수록 더 선명하게 나타날 뿐이었다.
결국 나는 양선아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 하얗게 밤을 지새워야 했다. 계속 풍겨 오는 그녀의 향기와 계속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감히 저항할 수 없었다.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잠깐 잠이 들었는데, 그녀는 꿈속에서도 나타나 보자기처럼 커다랗게 내 마음을 덮었다.
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과연 양선아를 설득시키고,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그냥 지금처럼 그리움을 달래며 견디어 낼 것인가? 아니면 사랑을 고백해 거절과 절망을 감수할 것인가? 그녀에게 감정을 털어놓는다면 망신살은 물론 그나마 만날 수 있는 기회마저 잃게 될 게 뻔한 일이었다.
그렇게 이틀 밤을 지낸 나는 양선아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신문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소설도 읽을 수 없었고, 좋아하던 텔레비전 연속극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내 마음속은 온통 그녀의 모습으로 꽉 들어차 있었고, 끊임없이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더 이상 내 자신을 극복할 수 없었던 나는 편집 관계의 일을 핑계로 대고 양선아와 만나고 싶어 수화기를 집어 들고 그녀의 전화번호 버튼을 차례대로 누르고 나서 신호가 가는 동안 흠흠, 하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아내를 만나기 전 젊었을 때 관심 있는 몇몇 여자들에게 추근거린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적극적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열 번째 신호음이 울려도 받는 사람이 없어 바람 빠진 풍선 같은 기분으로 막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는 데 양선아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여보세요?」
양선아의 목소리는 천사의 음성이 되어 내 귓가에 꿈결처럼 감미롭게 메아리쳤다.
「……」
그러나 나는 양선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여보세요?」
내가 아무 말하지 못하자 장난 전화인 줄 알고 있는 양선아의 목소리 톤이 한 단계 더 높아졌다.
「안녕하세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안정시키며 인사를 했다. 그러는 바람에 내 신분을 먼저 밝혀야 하는 것을 깜박 잊고 말았다.
「누구시죠?」
내 목소리를 모르는 양선아의 목소리는 상대방을 경계하는 듯 찬바람이 불 정도로 쌀쌀맞았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번밖에 만나지 않은 그녀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나와, 한 번밖에 만나지 않은 내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의 마음이 서로 다르므로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양선아씨의 수필집 편집을 맡은 이재우입니다.」
「아, 이 선생님? 죄송합니다. 이 선생님의 목소리를 금방 알아들었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제 목소릴 알아듣지 못하는 게 당연한 거죠.」
나는 윤덕재에게 방해받지 않기 위해 양선아를 출판사 사무실로 부르지 않고 광화문에 있는「커피 하우스 위드」로 불러내면서 그녀가 시간이 없다면 어떻게 하나, 하고 염려를 했다. 예전에 아내를 처음 만나고 다음 번 데이트 신청을 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을 때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가슴까지 두근거렸다. 내 속셈을 모르는 그녀는 흔쾌히 승낙을 했고, 그때까지 편집 구성조차 하지 않았던 나는 그녀의 작품을 서둘러 읽기 시작했다.
양선아의 수필집「스물아홉에 느낀 사랑」은 그녀만의 독특한 감성과 서정으로 탄생시킨 진솔하고 따스한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잔잔한 감동으로 젖어 들게 하는 칠십칠 편의 수필 모음이었다. 그녀의 수필은 남녀의 애틋한 사랑과 따스함과 아름다움이 겨울 산골짜기에 쌓인 눈 속에서 돋아나는 새싹처럼 내 마음속에 봄내음을 솔솔 풍기며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양선아의 글에서 도저히 거부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그녀의 모습만큼이나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만나서 사랑을 나눌 수만 있다면 거기에 따르는 어떤 대가도 충분히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와 사랑을 나눈다는 게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 날 나는 공적인 일로 만난다는 가면을 쓰고 양선아와 첫 만남을 가졌고, 그 이후에 그 핑계를 무기로 삼아 수필집이 출판될 때까지 서너 번 더 만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지만 그녀를 만날 때마다 그녀를 오래 붙잡아 둘 방법을 궁리했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을 단 한 마디도 목구멍 밖으로 토해 내지 못하고 그녀와 헤어질 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