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 냉가슴
아침 식사를 거른 채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회사에 출근한 장성우는 책상 앞에 앉으면서 동시에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그러나 그는 하려던 일을 금방 잊어버린 건망증 환자처럼 모니터 화면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경아의 환영이 끊임없이 눈앞을 어지럽혀 오면서 사무실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생각해 두었던 시처럼 아름답고 멋진 문장들이 머릿속에서만 빙빙 맴돌 뿐 전혀 정리가 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첫눈에 확 반했다고, 사랑의 감정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울컥 치밀어 올라와 어젯밤엔 한숨도 못 잤다고, 천사 같은 그대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고……, 말로 표현을 못하더라도 글로 표현하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으로 이경아에게 편지를 쓰려고 했었다.
그런데 컴퓨터의 전원을 켜는 순간 머릿속이 까맣게 비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탈수기로 빨래를 짜듯 머리를 쥐어짜도 도저히 키보드를 두드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답답하고 조바심이 일어 장성우의 머리는 빠개질 정도로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지끈거려 장성우는 더 이상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커피라도 한 잔 마셔야 할 것 같아 그는 사무실을 나와 휴게실 소파에 깊숙이 등을 기대고 앉아 자판기에서 뺀 뜨거운 커피를 입바람으로 후후, 식혀가며 마셨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휴게실에는 그 혼자뿐이었다.
오늘 레코드 가게에 찾아가 CD를 구입하고 나오면서 이경아에게 편지를 전해주려고 했었는데……. 이제 장성우는 다른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하지만 좀처럼 신통한 계획이 떠오르지 않아 그는 잠시동안 손등으로 턱을 고이고 앉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그녀에게 직접 고백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선택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게 마음먹은 대로 실현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장성우는 시선을 똑바로 주고서 당당한 태도로 이경아에게 ‘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내 사랑을 받아 주십시오’라고 또박또박 분명히 말하기로 했다. 애걸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만약 그녀가 ‘사랑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면 자존심이 뭐고 다 내팽개치고 애원이라도 할 각오였다. 8년 동안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그녀와 사랑을 나눌 수만 있다면 그까짓 자존심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까지 애원을 한다면 틀림없이 이경아도 감동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장성우는 미지근해진 반쯤 남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빈 종이컵을 구겨 투수가 야구공을 포수에게 던지는 듯한 투구 폼으로 휙, 자판기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기분 좋게 골인이었다.
“성우 씨,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오늘 따라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여.”
그런 장성우의 모습을 보고 화장실을 다녀오던 기획관리실의 강민지가 걸음을 멈추고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아무 일도 없어.”
강민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다고 죽어도 말할 수 없으므로 장성우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강민지 손에 꽃무늬가 그려진 포장지로 표지를 싼 소설책이 들려져 있는 것을 본 장성우는 그녀가 소변이 아니고 대변을 봤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변비로 고통을 겪고 있어 남들보다 변기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긴 그녀는 그 시간을 이용해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독서를 좋아하기보다는 변비 때문에 소설책을 읽고 있는 그녀였다.
장성우는 바람 부는 날이면 물을 그리워하는 윈드서퍼처럼 가끔 여자에 대한 욕정이 꿈틀거릴 때만 강민지를 찾았고, 그는 그녀를 만나면 일종의 의무처럼 섹스를 즐겼다. 얼굴은 그리 예쁜 편이 아니지만 가늘고 길게 뻗은 날씬한 다리와 탄력 있는 풍만한 젖가슴……, 몸 하나는 정말 끝내 주는 그녀였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장성우는 강민지와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섞으면서도 사정할 때의 쾌감 이외엔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 같은 것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몸매만큼이나 예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냥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처럼 그냥 그녀에게 깊은 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그는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이상형이 절대 아니었다. 그저 섹스 파트너일 뿐이었다.
“오늘 퇴근하고 만날까?”
장성우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나서 휴게실에 강민지와 단 둘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안 돼.”
안 된다고? 지금까지 자신과 관계를 가지면서 한 번도 거부 의사를 표현하지 않던 강민지였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안 된다’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장성우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당황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이제는 마음이 변했나? 아니면 다른 남자라도 생긴 건가? 하는 불쾌한 생각에 장성우는 짤막하게 그 이유를 물었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강민지에게 먼저 걷어차인다는 것은 자존심이 절대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아빠 생신이라 일찍 집에 들어가 봐야 돼.”
강민지가 마음이 변하거나 다른 남자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눈썹을 내리깔고 자못 난처해하고 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장성우는 말끝을 흐리며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배가 아파 먹지 못하는 사람처럼 안타까운 표정으로 강민지를 쳐다보았다. 그때 출근한 직원들이 커피를 마시기 위하여 휴게실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몰려오고 있었다.
“나중에 내가 전화할게.”
강민지는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직원들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듯 재빨리 몸을 돌려 엉덩이를 유난히 흔들며 걸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장성우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빠개질 정도로 지끈거리던 머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한결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짧은치마 밑으로 뻗은 다리가 눈부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그녀의 벌거벗은 몸이 전시장에 걸린 누드사진처럼 머물렀던 것이다.
바람도 불지 않고 따뜻한 햇볕 탓일까. 사무실에서 대치전철역까지 가려면 적어도 20분 가량을 걸어가야 하는데, 아침까지만 해도 옷깃을 여며야할 정도로 쌀쌀했던 날씨가 몸을 움츠리지 않아도 될 만큼 풀려 있었다.
장성우는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순이네라는 분식집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열 평도 안되어 보이는 좁은 분식집엔 라면을 먹는 사람들로 발디딜 틈도 없이 꽉 들어차 있었다. 아마 어젯밤에 과음을 해서 아침식사를 거르고 출근한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라면을 먹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장성우 역시 한 시간 일찍 출근하느라 자신도 아침을 굶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하지만 그는 그냥 발걸음을 옮겼다. 대학교에 입학하고서부터 지금까지 자취생활을 지겹도록 오래한 그는 좁은 분식집에 들어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비집고 앉아서 먹을 정도로 라면을 좋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 그는 이경아에게 사랑을 고백하러 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장성우는 마치 배고픔을 잊으려는 듯 무척 빠른 걸음으로 대치전철역으로 향했다.
이경아의 레코드 가게는 강남구 신사동 사거리에서 말죽거리 방향으로 30미터 가량 올라가 오른쪽 도로변에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레코드 가게 앞에 놓인 커다란 스피커에선 요즘 한창 인기가 뜨고 있는 김수영의 노래 ‘눈사람’이 경쾌하게 흘러나와 사람들의 발걸음을 흥겹게 해주고 있었다. 좀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가게를 찾는 손님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경아는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장성우는 빨간 불길에 휩싸인 단풍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조정희의 소설 ‘난 종이로 만든 배를 타고……’를 읽고 있던 그때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벌서 8년 전의 일이었지만, 그는 그 일이 바로 엊그제 일처럼 느껴졌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책을 읽고 있는 이경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장성우의 가슴은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책을 읽는 레코드 가게 안의 여자’라는 영화 속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은 배우처럼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여자였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유리창이 가로막고 있어도, 이경아의 달콤한 아카시아꽃 향기가 장성우의 코끝을 스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심장이 터지도록 안아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려 천천히 그녀를 품에 안는 꿈을 꿨다. 꿈에 취한 그는 오랫동안 분홍빛 황홀감에 빠져 있다가 현실로 되돌아왔다.
장성우는 사무실을 나설 때만 해도 시선을 똑바로 주고서 당당한 태도로 이경아에게 ‘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내 사랑을 받아주십시오.’라고 또박또박 분명히 말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장성우는 마음먹은 대로 밀어붙일 수 있을 만큼 용기가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뭇잎이 다 떨어진 가로수 뒤에 몸을 숨긴 채 레코드 가게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이경아의 모습을 훔쳐보면서 핸드폰을 꺼내 간판에 써 있는 전화번호를 보고 버튼을 누르는 게 고작이었다. 말 한마디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전화벨이 울리자 읽던 책을 덮어 탁자 위에 올려놓고 몸을 일으켜 황급히 전화기가 놓인 계산대 앞으로 걸어가는 이경아의 모습을 보면서 장성우는 핸드폰를 껐다.
이경아가 수화기를 집으려고 하자 울던 어린아이가 뚝하고 울음을 그칠 때처럼 전화벨 소리가 멈췄다. 그녀는 멋쩍은 표정으로 전화기에서 손을 거두었다.
그런 이경아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는 장성우는 짧은치마를 입어 우윳빛 같은 허벅지가 반쯤 드러난 그녀의 쭉 뻗은 늘씬한 다리와 풍만한 젖가슴에 온 신경이 가 있었다. 여자들까지도 질투를 느낄 정도로 끝내 주는 농염한 몸매를 가진 그녀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그에게는 가슴이 찢겨지는 것 같은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장성우는 이경아의 레코드 가게 앞에서 한 시간 가량을 서성거리며 그녀의 움직임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한 시간 동안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기회가 너무나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레코드 가게문 근처에조차 가보지도 못한 채 사무실로 그냥 돌아온 그의 가슴속은 바위에 눌린 듯 답답하기만 했다.
장성우는 자리에 앉자마자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책을 읽던 이경아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사실 할 말이 있어도 그 할 말을 하지 못할 거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수화기를 들고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장성우는 이경아의 레코드 가게 전화번호를 수첩에 적을 필요가 없었다. 애써 외우지 않아도 일곱 개나 되는 전화번호를 쉽게 머릿속에 입력시킨 그였다. 그러나 그녀의 전화기는 통화 중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한 번만 더 듣고 싶었는데……. 그가 김 빠진 맥주를 마신 기분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벨이 울렸다.
“영업부 장성우입니다.”
장성우는 목소리를 낮게 깔며 사무적인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
“나, 민지야.”
전화를 건 사람은 강민지였다.
“웬일이야?”
자신도 모르게 장성우의 목소리는 퉁명스럽게 튀어나왔다. 그의 머릿속이 이경아의 생각으로 가득 들어차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 퇴근 후에 만나.”
그러나 강민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상기되어 있었다.
“아빠 생신이라 일찍 들어가 봐야 한다면서?”
“갑자기 아빠가 지방 출장 갈 일이 생겨서 내일로 미뤄졌어.”
“그래? …….”
장성우는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을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왜, 무슨 일이 있어?”
“아냐, 아무 일도 없어. 이따 퇴근하고 동해에서 만나.”
동해는 두 사람이 가끔 가는 일식집이었다. 강민지를 퇴근 후에 만나기로 한 장성우는 퇴근하고 나서 다시 이경아의 레코드 가게로 달려가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려던 계획을 내일로 미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