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홍과 스터디룸으로 들어서려던 민경은 안에서 여자 후배들이 다홍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들려서 문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는데도 다홍은 무표정하기만 하다. 저놈의 무표정. 언제쯤 웃고, 화내고 젊은 애들이 하듯 너도 그렇게 할거냐?
“그러니까 다홍언니가 은수선배한테 일부러 아픈척 해서 침 맞았다는거 아냐”
“그 언니 은근히 여우같은데가 있어. 보기에는 곰같이 생겨도 말이야.”
후배들은 밖에서 목소리가 다 들리는 것을 모르는지 깔깔 웃으며 다홍 얘기를 하느라 정신없었다.
“뭐해? 안들어가?”
다홍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스터디룸 문을 열었다. 후배들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너희들 목소리 밖에서 다 들려.”
다홍의 무표정함이 오히려 후배들을 더 위축하게 만든다. 보라가 얼른 분위기를 수습해보려고 나섰다.
“언니, 저희가 언니 욕할라구 그런건 아니구요....그러니까..”
“욕하던데뭘. 괜찮아. 사람 없을때야 뭐 임금님 욕도 한다는데.. 너도 은수선배 좋아하니?”
보라는 직접적인 질문에 당황한 듯 얼굴이 붉어졌지만 곧 특유의 애교스러움으로 상황을 넘기려했다.
“아이~ 언니는.. 은수선배는 누구나 다 좋아하잖아요.”
“그러니?”
보라는 더 이상 말이 없는 다홍의 반응이 불안한지 자리를 뜰 줄 몰랐다. 민경이 얼른 보라를 잡아 당겨서 자리로 보냈다.
“빨강다홍, 오늘 스피치 주제 혼전순결이던데 봤어?”
“어.”
또 무뚝뚝으로 일관한다. 기분이 별로라는 증거다. 다홍이 그럴때면 민경은 답답해 죽을 것만 같다.
5분 스피치 발표는 2학년 우석이다. 우석이의 스피치가 끝나자 준용은 토론을 시작했다.
영어로 진행되는 토론이다 보니 돌려말하기가 어려워 다들 직설법으로 말해서 복학생 선배들은 이해를 돕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도 해서 후배들의 야유를 들어야만 했다.
“Da-hong, What's your opinion?"
준용이 무뚝뚝하게 시계만 보는 다홍을 흘려볼 리가 없다.
“It just depends on your mind. Actually, I'm inexperienced."
다홍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 선배들이 쿡쿡 웃었다.
“ But I'd like to keep my virginal purity for my future husband. I know every woman thinks like me."
이번에는 남자들은 시큰둥하고 여자들이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경 역시 다홍의 의견에 동조했고, 남자들은 혼전 순결은 의미가 없다고 일관했다. 준용은 필리핀에 있을때 매춘굴에 갔었던 경험을 이야기했다가 민경의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토론이 끝나고 식사하러 가려고 가방을 챙겨 나가는데 은수가 문 밖 벤치에 앉아서 마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수형, 언제 왔어요?”
“좀 전에. 6시까지 근무라서 마치고 오기 바쁘네. 밥 먹으러 가자.”
다홍은 여자 후배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일부러 은수와 거리를 두고 천천히 따라갔다. 은수와 준용이 한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자, 여자 후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 옆에 앉았다. 민경과 다홍은 멀찌기 떨어져서 밥을 먹어야만 했다. 알게 모르게 준용과 커플인 민경의 속도 그리 편치만은 않았다. 준용이 동아리 회장을 하면서부터 여학생들이 준용 주위로 자꾸만 몰려드는 것도 그렇게 반가운 일은 필시 아니다. 무표정하게 밥만 먹고 있는 다홍을 불렀다.
“빨강다홍, 너 오늘 은수선배랑 스터디하고 도서관 올거야?”
“아마도. 왜?”
“그럼 올때 니 책은 니가 다 들어. 니 책 은수선배가 날라다 준다고 후배들이 말이 많더라.”
“그러지 뭐.”
“넌 하여튼 속 편한 인간이야. 대체 니 머릿속에는 뭐가 들었냐?”
“뇌. 알면서.”
민경은 포기하고 밥을 먹었다. 다홍과 친구를 하는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니까.
다홍은 스터디가 끝나고 은수가 커피 한잔 마시고 가자고 해도 도서관간다고 책을 챙겼다.
“시험있어?”
“아뇨. 선배 옆에 제가 자꾸 있는 것이 선배 추종자들 눈에 좋게 안보이나봐요. 가는 곳마다 말이 따라다녀서리. 도서관이나 갑시다요. 아참. 책도 제가 다 들고 갈거니까 그냥 따라오기만 하셔요.”
“신경쓰여?”
“그럼요.”
“뭐가?”
“당연한걸 묻고 그러시네. 선배랑 저랑 아무사이도 아니죠? 그렇죠?”
“말하자면 그렇지. 그런데?”
“그런데 제가 선배랑 엮여서 소문나면 좋겠어요, 안 좋겠어요?”
“그거야 나 정도면 소문나도 괜찮지 않나?”
“헉쓰, 병이야. 스스로 침 놔서 왕자병 좀 치료해봐요. 대체 말이 통해야 말이지..원..”
“이거 치료 불가능인데.. 나랑 소문나서 안 좋을 건 없잖아?”
“많아요. 일단 후배들이 굽신거리지 않고 오만방자해지고, 도서관에서 낮잠도 퍼질러 못자요. 소문나거든요. 곰같다고.”
“곰? 하하..뭐 그런 것쯤이야 감수해도 되는거 아니야?”.
“또 병 나온다. 이보셔요, 한의사 선생님. 저는요 줄리엣처럼 멋진 남자 만나서 후회없이 연애해본다는 아주 당찬 꿈이 있거든요. 여기서 헐값에 넘어갈 수는 없죠. 지금까지 연애한번 안하고 버텨온게 얼만데.. ”
“나도 알고 보면 로미오처럼 멋진 남잔데.. 그렇게 안보여?”
“로미오는 무슨... 시대가 어떤 시댄데 아직도 로미오 타령이람. 어서 일어나요. 도서관 가게.”
줄리엣을 먼저 말한건 다홍인데 은수의 로미오를 무시하고 다홍은 가방을 메고 책을 옆구리에 꼈다. 자꾸만 책이 흘러내려서 몇 계단 내려가지 못해서 책이 바닥에 다 떨어져 버렸다.
“이거 네 권만 들고 와요. 자꾸 떨어지고 난리야. 쳇”
소문난다고 자기가 다 들고가겠다고 큰소리 치더니 책을 몇 권 은수 팔에 안겨주고 앞서 걸어갔다. 아무래도 그 책을 다 들고 도서관 3층을 오르는건 무리겠지.
역시나 생각했던 대로 후배들이 휴게실 앞에 모여 수다 떨고 있었다.
“은수 선배님, 이제 스터디 끝나셨어요?”
보라가 달려와 은수의 팔에 매달리는 바람에 은수가 들고 있던 책이 떨어졌다. 다홍은 보고도 못 본척 먼저 열람실로 들어가 버렸다. 은수도 허겁지겁 책을 주워들고 다홍을 뒤따라가려는데 보라가 잡았다.
“선배님, 커피 한잔 뽑아주세요~.”
1학년의 매력은 아무래도 시와 장소와 메뉴를 가리지 않고 빈대붙는 것이니까 은수는 책을 한쪽 옆구리에 모으고 주머니에서 동전을 찾았다.
“자, 이걸루 두 잔 뽑아서 혜영이도 갖다주고. 그럼 이따가 보자.”
보라는 여전히 은수의 팔을 잡고 있었다.
“은수 선배님, 오늘 술한잔 사주세요. 금요일인데 다른 선배님들은 다 공부하신다고 해서 지금 1학년 끼리만 술마시러 갈 참이었거든요.”
보라는 은수가 거절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은수는 책을 가져다 놓고 온다며 열람실로 들어갔다.
“나 애들이 술 사달래서 지금 갈건데 같이 갈래?”
“아뇨. 전 조금있다가 집에 갈 생각인데요.”
“그럼 내 가방 좀 가지고 있어줘. 가능하면 빨리 올게.”
그렇게라도 해야지 다홍이 가지 않고 기다려 줄 것 같아서 은수는 가방을 다홍의 가방위에 걸어두고 갔다.
11시. 민경이 집에 가자고 왔지만 은수의 가방이 있으니 같이 갈수도 없어서 민경과 준용을 먼저 보냈다. 하필 전화기도 가방에 두고 갈 건 뭐람.
다홍은 폐문시간인 12시까지 기다렸다. 폐문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경비 아저씨가 문을 잠그러 다녔다. 사물함에 책을 넣고는 은수의 가방까지 들고 일단 밖으로 나왔다. 5월이라고는 하지만 밤기온은 아직 서늘했다. 은수는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후배들 전화번호도 모르니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혹시 전화번호 적힌게 있나 해서 였다. 동아리 건물은 아직 불빛이 군데군데 있었다. 동아리방에는 마침 멤버들 전화번호부가 있어서 다홍은 보라에게로 전화를 했다. 거의 끊어질 무렵이 되어서야 전화를 받았다.
“나 다홍인데, 은수선배랑 같이 있니?”
“네. 무슨 일이세요?”
“그럼 선배 가방 동아리방에다 둔다고 이따 갈 때 찾아가라고 전해줘”
“네.”
보라는 더 이상 듣기 싫은 듯 끊어버렸다.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듯 보라는 그때 그때 목소리도 얼굴 표정도 다 바뀌는 것 같았다. 다홍은 버스가 끊어진 시간이라 택시를 타려고 지갑을 꺼내다 보니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점심때 문구점 갔다가 문구가 든 봉지에 넣어뒀는데 그 봉지를 민경이가 들고 가버렸다. 산넘어 산이다. 슬슬 화가 치밀었다. 은수 때문에 민경이네를 먼저 보냈는데, 이젠 차비가 없어서 은수를 불러야 한다. 보라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은수선배 좀 바꿔줄래?”
“무슨 일인데요? 지금 전화받기 좀 그런데..저 화장실 와있거든요. 저한테 얘기하세요.”
“그럼 나 차비없어서 집에 못간다고 전해줄래? 지갑을 민경이가 가져가서..”
“네.”
보라는 또 차갑게 끊어버렸다. 제대로 전하기는 한걸까. 30분을 기다려도 은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보라에게 전화하려니 그 목소리 또 듣고 싶지도 않아서 동아리 방에서 무작정 기다렸다. 잠시 졸았는지 한기가 몰려왔다. 시계는 1시 20분을 가리키고 있다. 그때서야 헐레벌떡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짐작대로 은수였다.
“아직 안갔어?”
“갈 수가 있어야 말이죠. 보라가 저 차비 없어서 기다린다는 말 안해요?”
“아니, 그런 말 없던데. 그럼 차비 없어서 여기서 기다린거야?”
“네. 가요. 늦었어요.”
은수는 다홍이 펄펄 뛰며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택시 안에서도 다홍은 말이 없다. 택시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에도 다홍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은수는 다홍이 많이 화가 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 다 왔으니까 선배도 조심해서 가세요.”
“잠깐만. 화 많이 난 거 알아. 그러니까..”
“안들어도 선배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요. 늦었으니 그만 가세요.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다홍은 은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먼저 할말을 하고 들어가 버렸다. 은수는 화가 나고 답답할 뿐이었다. 조금 다홍과 가까워지나 했는데 전보다 더 멀어진 것 같았다. 보라가 계속 시간을 잘못 가르쳐준 덕분에 1시가 넘어서야 도서관 앞으로 갈 수 있었다. 이미 불이 꺼져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도서관을 뒤로 하고 동아리 방으로 뛰어갔다. 가방도 핸드폰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집에 가기 전에 다홍을 한번만 보고갔으면 하는 바램으로 동아리방 문을 열었다. 역시 다홍이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드는 다홍의 눈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엉뚱하지만 눈빛만은 맑고 따뜻했는데 그 송아지같은 눈이 서린 빛을 내뿜고 있었다. 택시에서도 집앞까지 바래다 주는 길에서도 다홍은 말없이 앞만 보고 걸었다. 택시에서 함께 내리는 은수를 만류하지 않은 것도 은수와 그런 애정어린 실갱이조차 하기 싫은 까닭이라는 것을 은수는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