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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홍 Story +7

수레국화 |2007.03.24 12:02
조회 656 |추천 0

잠이 올 리가 없다. 쌔근쌔근 들리는 다홍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은수의 귀를 간지럽혔다. 몇 차례나 뒤척이다가 은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자기 입으로 의사의 신분으로 다홍의 집까지 들어온 것이라고 해놓고선 잠든 다홍을 보니 갑자기 남자가 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문도 안 잠근 집에 다홍을 혼자 두고 뛰쳐나갈 수는 없다. 참기 힘든 길고도 긴 밤은 한잠 푹 자고 일어난 다홍이 시계를 보려고 일어나다 은수의 팔을 밟으면서 끝이 났다. 작은 신음소리와 함께 은수도 일어났다. 어색한 분위기..

“발목은 좀 어때?”

목이 잠긴 듯한 은수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많이 좋아졌어요. 팔은 좀 어때요?”

“괜찮아.”

은수는 일어나서 가방을 들었다.

 “갈게. 문 꼭 잠그고 침대에 들어가서 자.”

다홍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문으로 나가는 은수를 그저 보고만 있었다. 새벽 4시. 아직 날이 새려면 멀었다. 고맙단 말도 못했는데 문자라도 보낼까.. 다홍은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입력했다.

[선배, 고마워요. 잘 가세요]

너무 무미건조한가?

[선배, 오늘 무척 고마웠어요. 조심해서 집에 잘 들어가세요.]

다시 지웠다. 은수가 한두살 어린앤가. 집에도 알아서 못 들어갈까봐 걱정해주고 있담.. 다홍은 결국 메시지를 보내지도 못하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다시 자려고 이불을 싸안고 침대로 들어가 누웠다. 띠링 띠링~ 문자가 왔다.

다홍은 발목을 다쳤다는 것도 잊고는 소파로 핸드폰을 가지러 뛰어가다 주저앉았다. 분명 은수일 것이다. 핸드폰의 액정은 보기에도 좋은 연두색 빛을 뿜으며 소파에서 다홍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엉금엉금 기어가 핸드폰의 플립을 열었다.

[딴 생각하지 말고 즉시 잠들 것. 내일 아침 8시에 집앞으로 나올 것. 멋진 기사 항상 대기중.]

피식 웃었다. 발목 다쳐서 버스타고 학교가기가 불편할까봐 태워다 주려나 보다.

다홍은 어떻게 멋있게 답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넵!]

으로 끝내고 말았다. 다홍은 소중한 것인양 핸드폰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침대로 들어갔다.      


7시부터 일어나서 준비를 한다고 돌아다녔더니 발목이 시큰해지는 것 같았다. 8시 5분전. 대문밖에는 은수의 은색 승용차가 서 있었다. 은수는 차 밖에서 기다리다가 다홍이 대문을 열고 나오자 얼른 달려가 다홍을 부축했다.

“이렇게까지 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저 이제 잘 걸을 수 있어요.”

“의사로서 환자를 끝까지 책임지고 완쾌시키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지. 조심해서 앉아.”

다홍이 다시 바지와 니트로 돌아간 것이 어제의 하늘거리는 치마보다 은수에게는 더 예쁘게 보였다. 다홍의 하얀 다리를 히죽히죽 훔쳐보는 다른 남자들의 시선이 여간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음료수 사건도 있는데 더더욱 조심시켜야 한다.

“원래 그렇게 입고 출근해요?”

다홍은 은수의 푸른색 공익복이 어색한지 뚫어져라 보았다.

“아니. 가서 갈아입어도 되는데 오늘은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아서 입고 왔어.”

“계급이 뭐예요?”

“일병.”

“병장되어야 제대하는거 아니예요?”

“뭐 꼭 그런건 아니고... 난 일병으로 제대.”

“그럼 힘들지도 않겠네요? 완전 날라리 껌 아니예요?”

가끔씩 은수는 다홍이 심상치 않은 어휘들을 구사해서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껌은 아니지.. 우리도 나름 힘들어. 상수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위험한 일인데.. 함부로 낚시하는 아저씨들도 많고..”

은수는 정말 힘들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요? 그럼 낚시하다가 걸리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뭐 그냥 훈방 조치. 잡은 고기는 압수”

“그 고기는 물에 다시 풀어줘요?”

“일단 입에 낚시바늘이 찔렸던 놈들은 제대로 못 살더라고. 어쩔 수 없이 매운탕해먹어야지.”

“선배가?”

“아니. 난 아직 쫄따구라서 그냥 압수만 해주고, 우리 선임이랑 소장님이 매운탕을 잘하지.”

다홍이 아주 심각하게 듣고 있어서 은수는 웃음이 나왔다.

“이거 소문내면 안되는거 알지?”

“그러죠 뭐. 그럼 몇시까지 출근이예요?”

“8시쯤에는 가 있어야지.”

“지금이 벌써 8시 20분인데요.”

“어머니 해외가신다고 공항에 모셔다 드려야 한다고 했어. 9시 전에 가서 교대하면 돼.”

다홍이 졌다. 은수는 다홍을 정문 안까지 데려다 주고는 돌아갔다. 다홍이 강의실에 들어서자 민경은 다홍이 학교에 온 것이 놀라운 모양이다.

“오늘 못 올 줄 알았는데..”

“이깟 발목 하나 삔 것 가지고 결석하면 되냐?”

“어제 은수선배가 너희집까지 갔었어?”

“어. 침 놔주고 갔지”

“아무 일 없었어? 그냥 침만 놓고 간거야?”

“그럼?”

“아니... 우리는 또 늦은 밤에 남녀가 한 집에 있다보면..... 에이, 그런게 있잖아.”

“그런거 없었다 서민경. 너희들 사상이 의심스러운데.. 준용선배랑 너,  나 모르는 뭔 일 있는거 아니야?”  

민경은 얼굴이 붉어지며 손까지 내젓었다.

“아니야 아니야. 우리는 그런 일 없어. 키스도 아직 못해봤단 말이야.”

“그래? 그럴줄 알았어.”

민경은 다홍이 꼬치꼬치 물을 줄 알았는데 수긍해버려 무시당하는 기분이었다. 

“뭐야 너? 그럴줄 알았단 말은 우리가 애같단 뜻이야?”

“아니, 니가 보수적이라서 준용선배가 달라들어도 순결 어쩌고 하면서 안된다고 할 줄 알았지. 그래도 손이라도 잡은게 어디냐?”

“내가 그렇게 보수적으로 보여?”

“좀 많이. 그렇다고 나쁘단 뜻은 아니야. 사람은 지켜야 할 것이 있으면 스스로에게 일종의 룰 같은 것이 되어버려서 탈선하지 않으니까 좋은 것일 수도 있지.”

“그래도 내가 좀 보수적인긴 해. 그렇지? 선배가 보기엔 답답해 보일거야.”

“준용 선배는 오히려 너의 그런 면이 좋은 것 같던데. 안그래?”

“그런가?”

“정 찜찜하면 키스라도 해보던지. ”

“넌 키스해봤어? 못해봤지?”

“어. 로미오가 나타나기만 하면 잽싸게 해버리지뭐”

그놈의 로미오와 줄리엣 타령은 몇 년째 듣고 있구만 대체 언제나 그 로미오가 나타나려는지.. 그런데 그 로미오를 향한 다홍의 사랑이 순식간에 바뀌게 되었다.


발목이 다 낫지 않아서 주말내내 집에서 공부해야 하는 다홍 때문에 민경도 아침 일찍 일어나 다홍네 집으로 갔다. 시험기간만 되면 새벽부터 도서관가서 자리싸움해야 했는데 다홍네 거실에서 상 하나 펴놓고 하니 공부가 저절로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자 둘이 모였는데 공부만 할 리 없었다.

“공부 잘돼?”

민경은 영미시 과목 정리를 끝내고 영작문 책을 펼치는 다홍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홍도 그 미소가 무슨 뜻인지 안다.

“조금만 쉬었다 할까?”

“그래. 티비볼까?”

“안돼. 그럼 오늘 우리 공부는 못하고 계속 티비만 보다가 끝나. 다른거 뭐 머리 식힐 거 없어?”

“음... 그럼 요 앞에 가서 만화책이라도 빌려올까? 너 회원증 있지?”

다홍은 책상 서랍에서 깨비책방 회원증을 꺼내 주었다. 민경이 책을 빌리러 간 사이 다홍은 짜파게티를 끓였다. 쇼핑백 한가득 만화책을 빌려온 민경은 상 위에다 꺼내 1권부터 정리했다.

“2개나 빌렸어?”

“어. 둘 다 워낙 잘 나가서 우리집 앞 책방에서는 예약해야 하는 거라서 보이길래 얼른 빌렸지. 풀하우스랑 오디션. 봤어?”

“아니. 일단 짜파게티먹고 보자.”

둘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짜파게티 면발을 후루룩 거리며 만화책을 펴놓고 읽기 시작했다.

“헛. 짜파게티 국물 튀었다. 야, 그냥 다 먹고 보자.”

다홍은 만화책에 박힌 짜파게티 검은 점을 물수건으로 닦고는 얼른 그릇을 식탁으로 가져가서 먹었다. 민경도 식탁에 서서는 얼른 남은 면발을 입에 넣고는 씽크대에 그릇을 넣었다. 다홍은 소파에 앉아서, 민경은 바닥에 엎드려서 열심히 만화책을 봤다. 과자 바스락 거리는 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풀하우스 1권 어디있어?”

다홍은 오디션 10권을 벌써 다 봤는지 민경이 깔고 있던 1권을 건네 받았다.

16권까지 단숨에 읽고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민경도 오디션 마지막 10권을 다 읽고 책을 덮었다.

“라이더 베이 멋있지?”

“어, 나 엘리같지 않아?”

“니가 왜?”

“일단 검은 머리에다가 엘리처럼 부모님이 살던 이 집을 사수하려고 애쓰고 있잖아. 비슷하지?”

“별로 애쓰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그럼 이 집을 사는 사람은 라이더 베이냐? 요즘은 젊은 사람들 주택에서 안 살려고 하는데 그럼 너의 라이더 베이는 좀 노땅이겠다.”

“야~~ 혹시 아니? 우리집을 내놓으면 젊은 사람이 투자하려고 살 수도 있잖아. 라이더 베이처럼 잘생겼음 좋겠다.”

“너희 아버지가 이 집 파시긴 파신다니? 꿈도 야무지셔.”

“헤헤 그런가? 여튼 난 오늘부로 로미오 버렸다. 이제 라이더를 만나야 해.”

“몇 년만에 로미오 버렸는데 이제 좀 현실에서 찾지 그러냐? 로미오보다 라이더가 더 비현실적이야. 그렇게 잘 나가는 영화배우가 이다홍을 만날 리가 없거든. 넌 만나본 연예인 있어?”

“당연하지. 얼마전에 대학로 갔다가 장동건도 봤지. 완전 빛이 나두만. 그럼 장동건이 라이더가 아닐까? 그때는 살짝 스쳤는데  운명을 몰라 본 것일 수도 있어.”

“이다홍 아주 소설을 쓰셔. 기왕이면 주변에서 찾아봐. 음.... 성이 장씨니까 은수선배도 장씨네. 그지?”

민경은 다홍의 마음을 떠보고 싶었다. 은수가 자꾸만 가까워지려고 하는 것과는 달리 다홍은 좋아하는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아서 정확한 마음을 알 수 가 없다.

“장씨라고 다 같은 장씨겠냐? 후광이 비쳐야지.”

“무슨 후광? 부처님이냐 후광은 무슨..”

“예전에 내가 아는 언니가 그러던데 자기는 남편을 만날 때 그 사람 많은 명동에서도 남편이 걸어오는데 후광이 비치더래. 주변 사람들은 다 희미하게 보이고. 넌 그런 적 있어?”

“아니. 그렇지만 사람마다 운명을 알아보는 방법이 다를 수도 있잖아.”

“넌 어때? 준용선배가 남들과 달라?”

“그런 것 같기는 해. 난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있어도 준용 선배는 금방 찾거든. 선배가 그렇게 키가 크지 않아도 불쑥 솟아나와 보여. 이상하지?”

다홍은 준용을 생각할 때의 민경의 행복한 표정이 부러웠다. 민경의 전화벨이 울렸다.

“선배? ..다홍이네 집. 안돼. 어디 남자가 여길 오려고.. 은수선배도 학교 왔어요?”

다홍은 만화책을 정리하고 있었지만 은수 이름이 나오자 민경의 전화기 옆으로 다가앉았다.

“내일도 여기서 공부할 것 같은데요... 다홍이가 아직 다 낫질 않아서.. 그래요 그럼.”

민경이 전화를 끊자 다홍은 은수 이야기를 물어보려다 말았다.

“은수선배는 오전 근무하고 내일은 친척 결혼식이라 일 도와주러 가야하나봐.”

민경은 분명 다홍이 궁금해 할거라 생각해서 딴청 피우는 다홍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래?”

예상했던 대로 관심없는 척 한다.

“너한테 얘기안한거 있는데 지금 해줄까?”

“뭐? 준용선배일이야?”

“말하자면. 내가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했었다. 히히 몰랐지?”

“정말? 정말이야?”

“응. 그리고 나서 며칠 뒤에 준용선배가 니가 보는 데서 나에게 꽃 사준 것이고.”

“언제?”

“지난 기말 시험 끝나고 너 대구 내려갔을 때.”

“어떻게?”

“그날 스터디 끝나고 비디오방 가자고 했지. 가서 내가 좋아한단 말하고 손 잡아 버렸지.”

다홍은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얌전하고 내성적인 민경이 먼저 고백한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왜 그랬어?”

“왜 그랬냐니깐 할말이 없다. 그땐 기분에 고백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더라구. 남한테 뺏겨 버릴 것 같은 기분. 좀 우습지?”

“선배 반응은 어땠어?”

“그 말 기다렸다고 하더라구. 자기도 날 좋아했는데 내 마음에 확신이 없어서 고백을 못했던 거래. 니가 볼때 꽃 준 건 내 자존심을 세워주려는 선배의 배려라 할 수 있지.”

“준용선배 의외로 자상한걸.. 그럼 뭐야? 둘이서는 오만가지 낭만을 다 떨면서 선배는 왜 매일 날 못잡아 먹어 안달이래?”

“너는 막내동생 같다고 하더라. 자기는 큰오빠 같고. 그래서 자기가 잘 키워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라나.. 여튼 한정없이 어린 동생 같나봐.”

“치. 겨우 3살밖에 차이가 안나거든.”

“그래도 너도 준용선배가 편한 건 사실이잖아. 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이 친한게 넘 좋아. 너랑 준용선배가 옥신각신해도 서로 편하게 아껴준다는거 다 알아.”

그랬다. 항상 준용은 민경이 만큼이나 다홍을 챙겼고, 민경 또한 그런 준용을 고마워했다.

“그래서 말인데, 너도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먼저 고백해버려.”

“그러다 거절당하면 세상에 그런 망신이 어딨냐?”

“망신 좀 당하면 어때? 까짓거, 더 좋은 놈 만나서 보란 듯이 잘 살면 되지. 세상에 남자가 어디 그 놈 뿐이냐? 그런데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은 있어?”

“없어.”

언제나처럼 다홍은 딱 잘라서 말한다. 민경은 은수 얘기를 꺼내려다 말았다. 다홍이 먼저 말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내 삶은 뒤죽박죽 될 것 같아. 악착같이 살아온 지난  3년이 도루묵이 되는 거잖아. 유학가려고 준비한 것들이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망설이고 고민하게 되어 포기하게 될 지도 몰라.”

“사랑을 안해 보고 어떻게 알아? 그 사람이 너 돌아올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잖아”

“은수선배 얘길 묻고 싶었지? 은수 선배 좋은 사람이잖아. 꼭 애인이 아니라해도 좋은 선배로 인연을 이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이다홍, 그건 아니다. 좋아하면 거리가 문제겠냐? 은수선배도 너 좋아하는 것 같던데 왜 넌 자신이 없냐?”

“자신이 없어.. 내가 악착스럽게 사는 것도 보여주기 싫고, 나 하나 걱정하는 것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지금 나에겐 연애가 사치야. 은수선배의 마음은 아직 초기 단계기 때문에 눈에서 멀어지고 특별한 진전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마음도 멀어지는거야.”

“그러길 바래?”

“그래야 하지 않겠니?”

아직 스물 둘 밖에 안된 아이의 생각이라 하기엔 너무 노숙했다. 민경은 다홍이 생각을 반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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