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터디 시간에 겨우 맞춰 동아리방에 도착한 은수는 다홍이 비디오를 처음으로 돌려놓고 있는 것을 보고 커피를 뽑아왔다.
“저녁은 먹었어?”
“네. 선배는요?”
“나야 뭐 간식 먹었지. 이따가 스터디 마치고 밥먹으러 가면 돼.”
다홍은 요즘 스터디 시간에 쓸데없는 말은 한마디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리 다쳐서 며칠 태워주면서 가까워지나 했는데 무슨 일인지 오히려 더 과묵해졌다.
“오늘은 호주의 캥거루 사태예요. 이번 스크립트는 유난히 of가 많으니까 발음 주의해서 잘 들어봐요. 자, 시작합니다.”
문득 문득 고개를 들어 다홍을 보면 촉촉이 젖은 눈동자와 마주치곤 했다. 무슨 슬픈 생각을 하기에.. 스터디가 끝나자마자 다홍은 도서관에 가려고 가방을 챙겼다. 사전을 두 개씩 들고 다녀야 해서 항상 짐이 많다.
“들어줄까?”
“괜찮아요. 저녁드셔야죠?”
“괜찮아. 도서관 갔다가 집에 가서 먹던지.. 아직은 배가 안고파.”
“전 배고픈데 그럼 호떡 하나씩만 먹을까요?”
은수는 빙긋 웃었다. 군것질을 좋아하지 않는 다홍이 자신이 배고플까봐 그렇게 말한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 호떡 하나씩만이다.”
둘이 호떡을 먹고 있는데 보라와 1학년 후배들이 은수와 다홍을 보고 몰려들었다.
“선배님, 저희도 호떡 사주세요.”
1학년들의 천진난만함이 귀엽기만 해서 다홍은 일일이 후배들에게 호떡을 종이에 싸서 건네주었다.
“그럼 맛있게들 먹어. 선배 다 드셨으면 가요.”
“다홍언니, 저희 술마시러 가는데 언니도 같이 가실래요?”
보라는 노래방 이후 다홍이 좀 편해졌는지 다홍의 팔을 잡았다.
“다음에 내가 술한잔 살게. 나 내일 시험 있어서 오늘은 좀 곤란한데.”
다홍도 보라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
은수와 다홍이 도서관으로 가고 혜영이 보라에게 신기한 듯 물었다.
“다홍언니, 갑자기 왜 너한테 잘해주는데?”
“다 그런 수가 있지. 다홍언니 솔직히 직설적이라서 그렇지 모난 성격은 아니잖아. 우리 괴롭히는 사람도 아니고.”
“너 은수선배한테 꼬리친다고 싫다며?”
“알고보니 그런게 아니더라구. 은수선배가 다홍언니 좋아하는거지 언니는 관심없나봐. 아직도 아무 소문 없는거 봐라. 둘이 스터디 한지가 벌써 두 달이 넘었는데. 항상 똑같잖아.”
기말고사가 끝나 방학하기 전에 동아리 총회가 있었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다홍은 은수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이 보였지만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퇴근하고 바로 오는 길인가 보다. 총회가 끝나고 다같이 술을 마시러 갔다. 여전히 준용과 은수 옆은 어린 후배들 차지가 되었고, 민경과 다홍은 다른 선배들과 한자리에 앉았다.
세운은 전부터 다홍을 좋아하고 있어서 또 다홍이 있는 자리로 옮겨왔다.
“이다홍, 오늘은 살아서 집에 못간다. 알지?”
“이 선배님이 또 왜 이러시나? 선배는 술 그만 마시고 취업 준비나 하러 가세요. 4학년이 아직도 동아리 나타나면 3학년들이 대체 언제 선배노릇 해보냐고요?”
그런 말도 다홍이니 세운은 기분 나쁘지 않았다.
“한번 선배는 영원한 선배. 한번 후배는 영원한 후배. 몰라? 자, 건배~”
세운은 또 건배를 열창했다.
“다홍, 넌 선배가 술을 드시면 안주라도 좀 챙겨주는 센스는 밥말아먹었냐?”
“그런 센스는 이미 국 끓여 먹었거든요. 안주도 얼마 없는데 선배는 그냥 술만 드시든가.”
다홍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골뱅이무침이 담긴 접시를 세운 앞으로 밀어놓았다.
다들 몇 잔 마시자 술이 취하는지 나이트 가자는 누군가의 제안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났다. 학교 근처에 새로 생겼다는 나이트는 생각보다 작고 사람도 별로 없었다.
“역시 나이트는 호텔 나이트가 최곤데. 여기 물 너무 안좋다.”
보라는 투덜거리면서도 연신 박찬호라는 웨이터를 불러서는 술을 주문했다. 보라의 춤은 남달랐다.
“역시 나레이터 모델하더니 몸놀림이 인어다 인어야.”
세운은 보라를 따라 스테이지로 올라갔다.
“보라 나레이터 모델하니?”
다홍은 놀랐지만 민경을 알고 있었던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라가 지방에서 올라왔잖아. 아무래도 생활비가 빠듯했겠지. 키 크고 날씬한데다 그런 쪽으로 끼가 있어 보이잖아.”
“그래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요즘은 대학생들 알바로 많이 한다던데. 예전처럼 놀아본 애들이 하는 게 아니고 시간당 알바비도 비싸니깐 괜찮지.”
음악이 바뀌면서 재즈의 피아노 선율에 맞춰 무대위에서는 파란색 반짝이 드레스를 입은 가수가 끈적끈적하게 노래를 불러댔다. 여기저기 파트너가 되어 춤을 추고 있었다. 준용도 민경과 무대로 나갔다. 몇 자리 건너에는 보라가 은수에게 춤추러 나가자고 매달리고 있었다. 다홍은 자기가 없어야만 은수도 보라를 따라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화장실로 갔다.
여전히 재즈 음악이 흐르고 블루스 타임은 계속되었다. 다행히 다홍이 홀로 나오니 준용과 민경이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은수는 사람들 틈에 묻혀 보라를 안고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나 지금 갈건데, 내일 봐요.”
“조금만 더 있다가 같이 가자. 나도 곧 가야하는데.”
“방향이 다르잖아. 속도 좀 안 좋고 지금 나갈래.”
다홍은 민경을 떼놓고 가방을 들고 먼저 나왔다. 습기를 한껏 머금은 6월의 밤바람이 다홍의 머리를 휘날렸다. 지하철역을 지나 한참을 걸었다. 갑자기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영등포시장이 보였다. 차츰 마음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슴 설레이던 떨림은 일상에 녹아들어 은수를 만나는 일도 평범한 일이 되어가는 것 같다. 첫사랑.....이 시작도 못해보고 끝이 나려고 하지만 다홍은 아쉽지 않았다. 자칫 연애라는 덫에 걸려 은수를 평생 잃느니 선후배로 계속 만나는 게 더 좋을 것이란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장마가 시작되려는지 날씨가 하루종일 흐렸다. 금요일이라 스터디만 끝내고 대구로 부모님을 뵈러 가려고 은수를 기다렸다. 은수는 산행이라도 가려는지 등산복을 입고 동아리방으로 들어섰다.
“어디 가요?”
“친구랑 지리산 등산가려고.”
“이 밤에?”
“여기서 지리산까지 가면 새벽 될거야.”
“그럼 내일은 서울로 다시 올라와요?”
“아니 지리산에서 자고 친구네 보건소에 들렀다가 모레 올라올 생각이야.”
“친구는 공중보건의 해요?”
“어. 그놈이 시험을 꼴찌해서 지리산 젤 꼭대기로 갔거든.”
스터디가 끝나고 은수는 다홍을 대구까지 데려다 준다고 차에 타라고 했다. 밤에 함께 차를 타고 여행을 한다는 건 없던 낭만도 생기게 마련이다. 사방이 캄캄한데서 좁은 공간에 둘만 앉아 음악을 들으며 달린다는 것은 심장이 웬만큼 차갑지 않은 이상 설레이는 건 지극히 정상이다. 다홍은 은수가 아무렇지 않게 음악을 틀고 노래까지 따라부르며 운전을 해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곤할텐데 잠 좀 자둬. 아직 두 시간은 더 가야돼.”
잠이 올 리 없다. 은수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휴게소에서 우동을 먹을 때도, 산에 막혀 라디오에서 잡음이 지지거려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다홍을 내려주고 지리산으로 가면서 은수는 전화한다는 수신호를 보내고는 손을 흔들었다. 다홍은 자신도 모르게 같이 손을 흔들며 은수를 배웅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천둥까지 치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은수가 새벽 산행을 간다고 했는데 걱정이다. 뉴스에서는 강풍을 동반한 장마가 시작되었다고 등산객 출입금지라고 연신 보도하고 있었다. 은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산에 안올라간거죠?]
답이 없다. 전화를 했다. 여전히 신호만 가다가 소리샘으로 넘어갔다. 다홍은 갑자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준용에게 전화를 해봤다. 은수의 연락은 없었다고 한다. 엄마는 오랜만에 다홍이 와서 함께 갓바위라도 올라가려고 했는데 안되겠다며 쇼핑이라도 가자고 했다. 다홍은 엄마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뉴스만 보고 있다가 연신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