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 다홍은 드디어 한국 땅을 밟았다. 뜻하지 않게 대학원까지 3년을 영국에서 머물렀더니 비행기 안에서 본 희뿌연 서울의 상공조차 너무 반갑다. 입국 수속을 끝내고 짐을 찾으려고 기다리는데 아무래도 한 가지가 빠진 듯하다. 학위증이 든 가방이 오지 않았나보다. 다급하게 항공사에 가서 물어봤더니 짐 하나가 히드로 공항에서 택이 떨어져서 있다는 것이다. 항의해 봤지만 공항 직원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짐은 다음 비행기로 들어온다니 다음날이나 되어야 찾을 수 있어서 대구 공항에서 찾기로 하고 대구로 가는 리무진 버스에 올랐다. 라디오에서는 전국에 홍수 주의보가 내렸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다홍은 피식 웃었다. 어리던 시절, 홍수주의보 때문에 뜻하게 지리산에 갔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한잠을 푹 자고 일어나니 동대구 버스 터미널이다. 다행히 고모가 터미널까지 차를 가지고 나와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엄마가 해놓은 밥을 허겁지겁 먹고는 잠들어 버렸다.
엄마가 10시라고 깨웠다. 공항에 짐을 찾으러 갈 시간이다. 대강 씻고는 모자를 눌러쓰고 지하철을 타고 공항으로 갔다. 비행기가 도착해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항공사 직원은 다홍이 분실물 영수증과 여권을 내밀자 짐을 내주었다. 가방을 끌고 지하철을 타러 가려는데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설마했지만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살짝 옆으로 돌아볼때는 확실하게 누군지 알아 볼 수 있었다. 다홍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혹시나 그가 알아볼까봐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보고 걸었다. 쿵~ 다홍은 무엇엔가 부딪쳤다. 바닥을 향한 다홍의 눈에는 잘 닦여진 구두와 남자의 양복 바지가 보였다. 고개를 들고 싶지 않았다.
“고개 들어봐, 이다홍”
그가 맞다. 예전처럼 온화한 미소로 그가 다홍을 내려다 보고 있다. 뭐라고 인사를 하지..
“은수선배... 잘 있었죠?”
“그럼. 언제 들어왔어?”
“저기..어제요.”
“왜 들어와놓고 연락안했어?”
“전화기가 없어서.....그때 가면서 해지해버려서..”
변명을 둘러 댔지만 다홍이 그의 번호를 잊어버렸을 리 없다.
“김선생, 먼저 가서 세미나 자료 좀 받아줘. 나도 곧 따라갈게.”
은수는 같이 온 사람을 먼저 보내고 다홍의 손을 잡았다. 다홍은 그 손을 뿌리쳐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몸은 마음과 다르게 은수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은수는 공항 한켠에 있는 이동통신사 가판대로 갔다.
“여자들이 쓰기에 좋은걸로 번호는 7939로 해서 하나 개통해주세요. 자, 신분증이랑 카드. 이 카드로 매달 결제되도록 해주시구요. 아참, 발신자 표시도 해주시구요.”
직원은 장사도 안되는데 잘 되었다는 표정으로 서둘러 개통했다. 은수는 주민등록증과 카드를 받아 지갑에 넣고는 핸드폰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작고 이쁘니 괜찮다. 그지? 잘되나 한번 걸어볼까?”
그는 자기 번호를 누르고는 전화벨이 울리자 흡족한 표정이었다.
“내 번호는 0번에다 저장해두고 벨이 울리면 즉각즉각 잘 받아야 돼. 알았니?”
다홍은 은수가 내미는 핸드폰을 받을 수 없어서 자꾸 뒷걸음만 쳤다. 은수는 다홍의 손에 핸드폰을 들려주었다.
“이번에는 또 어디로 도망가려고? 절대 이제는 내 손에서 못 벗어나니까 그런 줄 아셔. 자, 가자.”
은수는 지하철 타는 곳까지 다홍을 데려다 주고는 택시를 타고 세미나장으로 갔다.
집에 와서도 다홍은 핸드폰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많이 내리는데 은수는 서울까지 잘 갔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민경이 생각나서 민경에게 전화를 했다. 수업 중인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올해 교사 일년 차라서 항상 바쁘다고 하더니 엄살을 아닌가 보다. 어둑어둑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전화벨이 울렸다. 민경이다.
“7256 전화하셨죠?”
“나야. 빨강다홍.”
“네? 야~~압”
민경은 소리를 지르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교무실에 있던 선생님들이 일제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야, 너 언제 들어왔어? 이 번호는 뭐야? 어디서 많이 본 번혼데..”
“한가지씩 물어라. 들어온지 한 4일쯤 되었나.. 전화는 그냥 생겼어.”
“어떻게 그냥 생긴건데?”
“알면서 묻기는. 대구 공항에서 은수선배를 만났는데 다짜고짜 끌고 가서 핸드폰 사준거야.그래서 지금 고민이다. 이 전화기를 어찌 해야 할지.”
“어쩐지.. 번호가 낯익은 것이라 했다. 은수선배가 대구공항엔 왜?”
민경은 사정을 다 듣고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너랑 선배 하늘이 내린 인연 아니냐? 어떻게 몰래 숨어들어 온 애가 거기서 딱 마주쳐 버리냐? ”
“서민경씨, 또 쓸데없이 연결하려고 하지 마세요. 오늘도 바쁘니?”
“나야 뭐 초임교사가 그렇지뭐. 넌 올해 시험쳐서 무조건 내 밑으로 와. 나도 후임 좀 거느려보자. 이번주까지 기말 시험문제 내면 담주는 좀 한가한데.. 서울로 놀러올래?”
“글쎄.. 7월초부터 학원 개강이라서 가긴 가야하는데 아직 모르겠다. 집이 없어서..”
“아. 맞다. 너희집 세줬다고 했지? 언제까지야?”
“올해 말까지. 아직 몇 달 더 남았어. 그래서 대구에서 학원 다닐까 생각중이야.”
“내가 삼수생의 경험으로 말하건데 서울와서 고시원에 살더라도 일단 올라와. 공부는 말야 분위기가 젤 중요하거든. 너 혼자서 청승떨고 학원이랑 도서관 다닌다고 해서 임용고시란게 붙는게 아니야. 분위기야 분위기. 임용고시도 흐름이란게 있거든. 일단 올라와. 정 안되면 우리집에서 지내면 되잖아.”
“글쎄다. 일단 서울 올라가서 이야기해보자. 내 짐도 서울집에 있으니. 주말에 서울에서 봐. 준용선배도 같이 나올거지?”
“당연하지. 그 찰거머리 내가 나오지 말래도 너 왔다면 금방 나올거다.”
다홍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샤워를 하면서 다홍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유심히 보았다. 3년전과는 많이 달라져있다. 영국에서 미용실 가기가 번거로워서 등을 반이상 덮던 긴 머리도 자르고 고기를 많이 먹어서 살이 5킬로나 쪘다. 갸름했던 얼굴은 동글동글해졌고 그만큼 성격도 더 두루뭉술해진 것 같다. 처음 영국에서 수업을 들어갔을 때는 영어로만 말해야 하는 부담감 때문이기도 하고 내성적인 성격 탓이기도 해서 문화충격에 빠져 우울증까지 걸릴뻔했지만 기숙사 친구들과 같은반 친구들의 도움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다홍은 방 한쪽에 세워둔 여행가방을 펼쳤다. 서울로 올라갈 때 가져갈 짐을 다시 정리하기 위해서다. 아무래도 대구에서 공부하기에는 벅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민경의 말을 믿고 서울에서 고시원에 있을 작정이다. 최소한의 옷가지와 생필품을 챙겼다. 잠이 오지 않았다. 전화기를 들고 은수의 번호를 누르려다 얼른 닫았다. 다른 것들은 모두 자신감 백배가 되어 돌아왔지만 은수 문제 만큼은 3년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은수가 전화했다.
“왜 전화안했어?”
은수는 대뜸 마치 그러기로 약속이나 했었던 듯 물었다.
“그냥 뭐...”
“부끄러워서? 아니면 아직도 내가 애인이 있을까봐 조심하느라?”
“아니.. 그런게 아니고..”
바보. 뭐라고 말도 못하게 계속 버벅거리기만 한다. 민경의 메일에서 이미 은수의 애인 문제는 오해였다는 것을 알았지만, 막상 은수가 혼자라 해도 어떤 특별한 관계가 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다홍은 뭔가 은수에게 떳떳한 모습이 되고나서 그를 만나고 싶었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되었고 은수는 이제 다홍의 그런 어눌함을 재미있어하며 더더욱 적극적으로 다가오려 하고 있다.
“이번주말에 서울 온다며? ”
“민경이가 그래요?”
“준용이한테 들었어. 준용이도 벼르고 있는거 알지? 너 아무 말도 없이 유학가서.”
“알죠. 아니어도 메일보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너 돌아오면 죽었어’라고 써 놨던걸요.”
“하하 준용이가 많이도 섭섭했나보네. 몇시에 올거야? 내가 터미널로 마중나갈게.”
“그러지 않아도 돼요. 약속 전에 들를 데도 있고.”
“어디? 같이 가면 되지.”
“7월부터 학원 다닐거라서 학원도 등록하고 고시원도 알아봐야해요.”
“고시원에는 왜? 독하게 공부해 보려고?”
이런..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족속같으니라구..
“살던 집 세놔서 올해 말까지는 들어갈 수 없거든요. 또 고시원에 있어야 공부도 더 잘되고 하니깐...뭐..겸사겸사.”
하지만 은수는 다홍이 토요일 아침 버스에 오르기도 전부터 전화를 해서는 버스에 탔는지 도착시간은 몇시인지 궁금해 죽었다. 다홍이 서울에 도착할 무렵 은수가 터미널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다. 버스가 들어서자 은수는 재빨리 차에서 내려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려오는 대구차로 갔다. 다홍은 뭘 그렇게 꾸물거리는지 제일 마지막에 내렸다.
“짐 내려야 돼요”
다홍은 자신보다 더 커 보이는 가방을 버스 짐실이에서 꺼냈다. 은수는 트렁크에다 가방을 실어놓고는 그제야 좀 느긋하게 다홍을 마주볼 수 있었다.
“그땐 말이야, 세미나 때문에 사실 좀 바빠서 자세히 볼 수가 없었거든. 한번 보자. ”
은수는 다홍의 볼을 감싸쥐고는 훑어 보았다.
“이렇게 변해서 왔구나. 말괄량이 아가씨처럼 되었네. 살도 좀 찌고. 이제야 좀 인간 냄새가 나네. 전에는 너무 말라깽이라서 라인이 없었거든.”
다홍은 부끄러워 은수의 손을 뿌리치고 얼른 차에 탔다. 서른이 되더니 넉살만 좋아졌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