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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홍 Story +13

수레국화 |2007.03.29 23:00
조회 768 |추천 0

학원 등록을 끝내고 고시원을 네 군데나 돌아도 빈방이 없었다. 총무아가씨들은 한달 전에 예약이 다 끝났다며 귀찮은 듯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겠단 말만 했다.

은수는 아무말없이 다홍의 뒤를 따라다니다가 다홍이 다른 고시원에 가보려고 하자 다홍을 말렸다.

“그만 고집피우고 우리집에 가자. 여기서 다니기도 쉽고, 누나가 쓰던 방이 있으니 그대로 몸만 들어가서 살면 되고.”

“안된다니까요. 어디 결혼도 안한 과년한 처녀가 총각네 집에 들어가 살아요?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만 다홍은 그렇게 세 군데를 더 돌고 나서도 방이 없어서 일단 은수의 차에 올랐다.

“이제 우리집에 가는거다. 알았지? 처음부터 내 말 듣고 우리집에 갔으면 이런 고생 안해도 될텐데. 여튼 고집쟁이를 누가 말려.”

“민경이네 집에 가면 돼요. 고시원 날때까지만 있으면 되니까.”

은수는 다홍의 고집을 알기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경은 은수가 상황 설명을 하자 눈치를 채고는 얼른 둘러댔다.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좀 걱정된다. 우리 아버지 성격알지? 너 11시에 수업 마치고 지하철타고 의정부까지 오면 12시 넘을텐데 우리 아버지 그런거 못봐주시거든. 여자는 무조건 12시 전에 집에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하시잖아. 그렇지 않으면 조신하지 못한 여자가 된다고.. ”

“그럼 안돼?”

“꼭 그런건 아니지만 눈치는 좀 많이 보인다는 거지. 난 선생님들끼리 회식있어도 무조건 12시까지는 들어가거든. 아니면 문잠그고 안열어주시니까.”

다홍은 고민이 많은 얼굴이 되었다.

“기냥 모텔에서 며칠 지낼까? 그 사이에 고시원이 날 수도 있잖아.”

그러자 준용이 펄쩍 뛰었다.

“얘가 큰일날 소리하네. 모텔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 더구나 여자 혼자 지내면 그건 100% 나 잡아잡수쇼 하는 거야. 차라리 그러지 말고 우리집에 와라. 여자형제가 없어서 그렇지 뭐 당장 며칠이야 어떻게 안되겠냐?”

“그러지 말고 은수선배 말대로 은수선배네 집으로 가. 식구도 별로 없고 부모님 계시니까 잘 돌봐주실거고, 무엇보다 당장 낼모레가 개강인데 고민할 시간이 없잖아.”

민경의 말에 다홍이 흔들리는 듯 했다. 저녁을 먹고 준용과 민경은 눈치껏 갈데가 있다고 먼저 가고 은수는 고민하는 다홍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가자. 아까 전화했으니까 지금쯤이면 니 방 다 치워놨을거야.”

“에휴~ 나 정말 가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이러다 소문나서 시집도 못가면 어떻게 해.”

“정 안되면 나에게 시집와. 뭐 희생하는 셈치고 내가 받아주지뭐.”

“뭐 그런 일은 없을테니 쓸데없이 희생하고 그러지 마요. 에휴, 이런 농담할때가 아닌데..”


다홍은 은수의 집 앞에 도착하자 긴장이 되었다. 당분간이지만 그의 부모님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것이다. 다홍은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밖에서 담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그림에서 나오는 정원을 옮겨 놓은 듯 예쁘고 가지런히 손질된 정원이다. 2층으로 된 집은 햇살이 잘 들어오게 커다란 통유리로 해서 집안의 불빛이 환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현관에 들어가자 마자 문을 열어준 50대 초반의 아주머니에게 넙죽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은수 선배 후배인 이다홍입니다. 당분간 신세지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어도 사모님께서 신경쓰라고 하셨어요. 어서 들어와요.”

사모님? 

“이모, 오늘 고생하셨어요. 토요일인데 일찍 가시지도 못하고. 제가 아끼는 후배니까 저처럼 잘 챙겨주세요. 나가시죠. 댁까지 모셔다 드릴께요.”

아주머니가 가방을 챙기러 들어간 사이 은수는 귓속말로 다홍에게 설명했다.

 “일하는 아주머닌데 너도 편하게 이모라 불러. 음식 솜씨 좋으니까 먹고 싶은거 있으면 해달라고 하고. 부모님 멀리 가셨으니까 내가 올때까지 2층 니 방에 가서 짐 좀 풀어.”

다홍은 티비에서 보듯 상시로 도우미 아주머니를 채용하는 집은 처음이다. 청담동이라고 할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건데.. 다홍은 은수가 아주머니를 태워다 드리러 나간 후에 집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학교다닐때 국사책에 단골로 나왔던 도자기들이며, 그림들이 집안 구석구석을 장식하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분재가 취미이신 듯 계단 층층이 분재 화분이 놓여 있었다. 2층은 자녀들을 위한 공간인지 거실로 보이는 곳에는 벽면이 온통 어린아이의 그림으로 가득 차 있다. 초등학교 시절 은수가 탄 그리기 상이었다. 은수가 그림에도 소질이 있는지는 몰랐는데 중학교까지 상이 있는 걸 보면 꽤나 그림을 잘 그렸던 모양이다. 뚜껑이 열린 채 피아노가 한 벽을 차지하고 있어서 아는 노래 몇 곡을 두드려 보다가 1층으로 내려왔다. 정원을 향한 창문은 활짝 열려져 있다. 밤공기가 시원하게 거실을 휘감았다. 소파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은수가 들어왔다.

“니가 쓸 방도 봤어?”

“아뇨. 방들은 문이 다 닫혀 있어서 열어 볼수가 없었어요.”

“그럼 이리와 봐. 이모가 알아서 깨끗하게 다 치워 놓았을거야.”


은수는 다홍을 2층으로 데려갔다. 은수는 자기방 맞은편이라며 누나의 방을 열었다. 다홍은 우선 그 크기에 놀랐다. 커다란 침대와 옷장, 화장대를 제외하고도 티테이블과 시스템 책상과 책장이 같은 재질로 맞춰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싱글 침대와 책상과 옷장을 넣고 나면 겨우 걸어 다닐 만큼 좁았던 자신의 방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컸다.

“너무 커요.”

“그렇다고 작게 줄일 수는 없는데.”

“그런 뜻이 아니라 생각보다 너무 커서 부담돼요.”

“부담가질 것 없어. 오늘은 부모님 여행가셔서 못 오시니까 긴장 안해도 될거야. 내일 오시면 그때 인사하면 돼. 일단 짐 풀고 편히 자도록 해. 2층엔 화장실이 하나니까 나랑 같이 써야해. 좀 불편하더라도 이해해줘. 그리고 청소나 빨래는 이모가 다 해주시니까 굳이 니가 하려고 안해도 돼. 니가 하면 오히려 이모가 불편해 하시거든. 넌 공부만 열심히 하세요.”

“저 지금 정신없어요. 이렇게 좋은 집에 선배가 살 줄 몰랐거든요.”

“이렇게 좋은 집에 살면 나에게 시집오는거야?”

“캭, 쓸데없는 소리.  저도 이렇게 좋은 집에서 공부가 될지 모르겠어요. 주눅들어요.”

“천하의 이다홍이 무슨 말이야? 영국에서는 이런 집 많잖아.”

“영국이랑 다르죠. 사실 기숙사에만 있어서 가정집에는 많이 못 가봤어요. 여튼 영국이랑은 달라요. 영국은 이런 집이어도 그냥 가정집 같은데 여긴 무슨 모델하우스 온 것 같아요.”

“하지만 여기서 살다보면 나름대로 편해질거야. 여기도 사람사는 곳이거든. 자, 얼른 가서 짐정리해. 난 이제 씻어야 겠다. 나 먼저 씻어도 되지?”

그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자기 방으로 갔다. 다홍은 어안이 벙벙해서 침대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가만, 그러고보니 이 집에는 둘 밖에 없는 것이잖아. 다홍은 번뜩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문을 잠궈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계속 문만 쏘아보고 있었다. 갑자기 노크소리가 나서 다홍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야, 들어가도 되지?”

은수는 잠시 후 다홍의 대답이 없자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답이 없어서 걱정했네. 왜 아직도 그러고 있어?”

“이 집에 선배랑 나 둘 뿐인거죠?”

“그렇지. 왜? 긴장돼?”

“아니. 절대 긴장같은거 안해요. 그런데 언제 잘거예요?”

“내가 혹시라도 니가 잘 때 들어올까봐 걱정되니? 그렇게 못 믿겠으면 문 잠그고 자면 되잖아. 내가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서른살이나 먹어서 함부로 이 방으로 뛰어들지는 않는다구.”

다홍은 괜한 자신의 걱정이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은수는 잘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자기 방으로 갔다. 다홍은 씻고 나오면서도 은수와 마주칠까봐 불안해하면 삐끔 화장실 문을 열고 은수가 나오나 확인하고 나서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잠글까 말까 수백번도 더 고민한 끝에 문을 잠그러 다가갔다. 그러다 다시 돌아왔다. 은수를 너무 못믿는 행동같아서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렇게 방문을 쏘아보며 고민하다가 늦게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은수는 정원에서 운동을 한다고 소리를 내는 바람에 다홍은 잠에서 깨었다. 이모가 오셨는지 맛있는 요리 냄새가 배고픈 위를 자극했다. 주방으로 내려가봤다. 이모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노래까지 불러가며 파를 썰고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잘 잤어요? 잠자리가 바뀌어서 잠을 설쳤나보네. 얼굴이 까칠하네.”

“네. 그런가봐요. 일요일도 오시는 거예요?”

“그럼 뭐 과부댁이 할일이 있나? 여기라도 와야지 나도 밥도 챙겨먹고 하지, 집에 있으면 귀찮아서 대충 먹어치운다니깐. 부모님은 대구 계신다며?”

“네.”

“아니어도 은수가 다홍이 학생 밥 잘 챙겨먹이라고 당부하더라구. 뭐 먹고 싶은거 있으면 얘기해요. 웬만한건 다 할 줄 아니까.”

다홍은 이모가 밥을 다 차리자 은수를 부르러 나갔다. 줄넘기를 하고 있던 은수는 다홍을 보자 멈추고 손을 흔들었다.

“어이, 잠꾸러기. 이제 일어났어?”

“아뇨. 벌써 일어나서 주방에 있었어요.”

“그래? 일단 얼른 밥먹고 나가자. 오늘은 좀 바쁘겠다.”

“네? 어디 가세요?”

“너 오늘 가방이랑 뭐 필요한거 사야한다며?”

“난 또 뭐라구. 근처 마트에서 사면 돼요.”

“기왕이면 백화점 가서 사. 나도 백화점 가서 우리 병원 선배 선물 하나 사야하거든. 여러 군데 돌 필요없이 백화점 가면 편하잖아.”

그를 따라 나서긴 했지만 걱정이 앞섰다. 그와 어울리다 보면 자신의 처지를 잊고 눈이 점점 높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백화점에 도착하자 그는 자주 가던 곳인지 정장 코너로 가서는 넥타이와 셔츠를 골랐다. 평소 평범한 듯 하지만 옷입는 센스가 돋보이던 그는 넥타이와 셔츠도 멋있는 것으로 잘도 골라냈다. 은수는 계산을 끝내고는 다홍을 잡화 매장으로 데려갔다. 점원이 오자마자 은수는 디스플레이된 샌들을 보여달라고 했다. 아주 편해 보이는 케주얼 샌들이다.

“신어봐. 이렇게 더운데 그 운동화 신고는 한시간도 공부 못해.”

“샌들 살 계획은 없었는데...그냥 가요.”

“이건 내가 사주는거야. 너 공부 열심히 하라구. 어서 신어봐.”

다홍은 점원이 이미 신발을 가지고 와서 발밑에 대놓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신어봤다.

“손님은 230하시면 되겠어요. 딱 맞아요. 이걸로 하시겠어요?”

“네. 그냥 신고 가자. 그럼 운동화를 쇼핑백에 넣어주세요.”

은수는 점원이 계산을 하고 운동화를 담을 동안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 이다홍 신발사이즈는 230이구나.”

은수는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브랜드로 다홍의 가방을 산다며 데려가서는 예쁜 걸로 골라보라고 했다. 마지못해 다홍이 가방을 골라서 계산을 하려다 가격표를 보고는 얼른 내려놓고 나왔다. 은수는 가격 때문에 못 산다는 것을 알고는 또 자신의 카드를 내밀었다. 다홍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은수의 카드를 점원의 손에서 낚아채 은수에게 내밀었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이것도 또 선물이라고 하려구요? 대체 뭣 때문에 선물하는데?”

다홍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할 정도로 흥분했지만 백화점 안이라 목소리를 높이지도 못하고 휙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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