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민은 승희가 숙소에서 떠나고 어느 정도에 시간이 흘렀을 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
었다. 하지만 내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지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까지 그녀는 접속해 들어오
지 않았다. 이제 조금씩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는데... 이 민영으로든 차 동민으로든... 동민은 눈을
감은 채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았다. 그녀와 함께였던 순간들... 고작 한 것이라곤 밥 먹으며 웃었던
일 밖에는 없는데 왜 이리 여운이 남는 것인지... 짧은 시간이긴 했어도 어느 때보다 소중했던 시간이었
다는 것을 동민은 몸소 느끼고 있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들이었다. 어렸을 때 뭣 모르고
했던 첫사랑이후로 오늘처럼 가슴 설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적이 없었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더 이
상에 시간은 필요치 않을 듯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욕심과 같은 마음이 생겼다. 오늘과 같은 기회라
는 말이 아닌 오늘과 같은 잠시 잠깐에 순간이 아닌 언제 어디서든 매 순간순간들을 그녀와 함께 하며 만
들어 가고 싶다는... 동민은 천천히 승희의 ID 눌렀다.
동석과 동민 승희는 아침일찍 촬영지로 출발했다. 교통 체증에 걸리게 될까봐서 일찍 출발했던 것이었
는데 조금의 막힘없이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해운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촬영 팀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는 맨꼬라비로 도착했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따질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동석의 공이 제일 컸다.
톨게이트를 지나고 조금 더 달렸을까 어느 순간부터 눈앞에 펼쳐진 끝도 없는 푸르스름한 풍경에 세 사
람 다 잠시 정신을 빼앗겼었고 눈치에선 둔한 동석이 오늘따라 눈치 빠르게 행동하는 덕분에 세 사람은
시원스레 파도가 출렁이는 바닷가에서 사진도 찍으면서 마음껏 바다의 향취도 느끼면서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오느라고 아슬아슬하게 촬영시간에 맞춰 촬영지에 도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도
착한 세 사람은 그래도 배는 채워야 했기 때문에 대충 때우고는 촬영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첫 촬영 신
은 동민 혼자의 신이었다. 첫 장면이 샤워를 하고 나오는 장면이었기 때문에 젖은 머리에 동민을 만들어
놔야했다. 승희는 동민의 얼굴에 메이크업을 끝내고 젤과 분무기로 동민의 머리에 촉촉함을 만들어냈
다. 어느 정도 머리에 마무리가 되어갔을 때 승희는 살며시 동민의 얼굴을 보았다. 분무기에서 뿜어져 나
오는 물 때문인지 동민은 눈을 감고 있었다. 승희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의 얼굴을 보았다. 처음 그에게
가슴 떨림을 느꼈던 때가 떠올랐다. 화장 때문인지 그때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젖은 머리에 그의 모
습은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멋있어 보였다. 여자가 가장 아름다워 보일 때가 젖은 머리로
샤워를 하고 나올 때라고 하는 말을 들었었는데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동민의 모습을 보니 남자 또한
가장 매혹적으로 보일 수 있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순간 승희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
냥 이대로 이 사람의 모습만을 보며 옆에 있을 수는 없는 것일까... 자신의 손으로 언제까지나 이 사람의
모습을 꾸며주며 돋보이게 만져줄 수는 없는 것일까... 언제까지나 어제와 같은 미소를 보며 함께 웃을
수는 없는 것일까... 미진이 했던 모든 얘기들을 무시해 버리고 싶었다. 자신에 감정만으로 욕심을 부려
보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자신도 모르게 움직여야 할 손이 잠시 멈춰져 있었나보다 한순간 정신을 차
리고 얼핏 보니 동민의 감겨져 있던 눈이 떠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손의 움직임이 멈춰서 끝난
줄 알았나 보다. 승희는 얼른 시선을 돌리며 다시금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동민의 시선이 자신에게 고
정되어 있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피했다. 왠지 그와 눈이 마주치게 되면 이런 자신의 생각들을 고스란히
전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모든 준비가 끝이 나고 촬영에 들어갔다. 젖은 머리에 헐렁한 옷차림으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동민의 모습... 멋있었다. 저런 사람의 사랑을 받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 저런 사람
과 사랑의 대화를 속삭이며 함께 웃는 다면 어떤 느낌일까... 승희는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머리를 살
며시 흔들었다. 이런 생각으로 자신의 감정을 끌어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상처만 더 깊어지고 크게 남
을 것이었기 때문에... 그날 촬영은 실내에서의 촬영으로만 끝이 났고 스텝들과 함께 저녁을 먹은 세 사
람은 배정 받은 방들로 향했다.
“뭐해?”
“어.. 아니야. 그냥 확인해 볼 것이 있어서...”
동민은 휴대폰으로 메일을 남기고 있었다. 먼저 샤워를 한다고 욕실로 들어갔던 동석이 어느새 다 씻었
는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대며 물어왔고 다행이도 메일을 다 보낸 뒤라 얼른 휴대폰을 닫으며 돌
려 대답했다. 휴... 저 녀석에게 안 걸려서 다행이군. 이 모습을 보았으면 또 꼬치꼬치 캐물으며 분명 한
소리 하고도 남았을 놈이지... 어제 저녁 동석은 승희가 가고 심통을 부리면서 투덜거렸었다. 혼자 떼놓
고 간 것도 모자라서 둘이서만 저녁을 먹고 들어왔다고... 그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동민은
아무렇지 않은 듯 평소와 다름없이 그를 대했었고 혼자서 계속해서 투덜거리던 동석은 그의 성격에 맞
게 아침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또한 평소에 그로 돌아와 있었다. 동민은 알고 있었다. 심통 부리며
투덜거리긴 했어도 그의 진심이 어떠했는지... 동석에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투덜거리면서도 얼굴 한
부분으로는 웃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어제 자신의 방에서 나갈 때 마지막으로 혼잣말처럼 한 말들
로... ‘자식 기껏 친구 떼놓고 두 사람이 함께할 시간을 만들었으면 멋있는 곳에나 가서 시간을 보낼 것이
지 해장국이 뭐야? 해장국이... 으이구.. 차려진 밥상도 제대로 못 찾아 먹는 놈...’ 훗...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차려진 밥상도 제대로 못 찾아 먹는 놈.. 어떠한 일에서든 웬만해선 자신이 있는 동민이었는데
동석에 말대로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제대로 할 줄 아는 거 없이 서툴기만 하니... 동민은 그렇게 혼자 피
식 웃으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는 자신도 욕실로 향했다.
오늘 있을 촬영은 바다와 모래사장을 배경으로 하는 촬영이었다. 그런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라
고 해야 할지 바람은 없는데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촬영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기에 예정대로 촬
영에 들어갔지만 촬영이라는 것이 한 두 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젖어
드는 옷에 축축함으로 한기를 느끼며 모두들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승희는 잠자리가 바뀐 탓인지 멀리
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탓인지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피곤함도 있었지만 비로 인해 젖어드는 축축함에
몸까지 오들오들 떨려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오전과 낮 촬영을 끝내고 오후에 접어들자 빗방울이 굵어지면서 촬영도 접어야했다. 빠듯한 일
정 때문에 날씨가 조금 흐릴 것이라는 일기예보에도 강행했던 촬영이었는데 생각하고 있던 촬영분에 촬
영을 끝내지 못했으니 감독만이 한숨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배우들이나 스텝들은 기회라는 생각으로
모두들 들떠 있었다. 비로 인해 촬영이 중단 되었으니 남은 시간은 자유 시간이었으므로... 감독에 지시
로 촬영을 접자 촬영 팀과 배우들 그리고 매니저와 코디들 무슨 관광 온 사람들 마냥 희희낙락 웃으며 따
스함에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비 때문인지 모두가 술 한 잔에
생각이 간절했다. 비록 촬영은 중단 되었지만 그 생각은 감독 또한 같았다. 그래서 모두 식당으로 향했
고 내일의 날씨를 확인해 보니 오전까지는 비가 올 것이라고 했다. 식당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으며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무슨 할 말들이 그렇게 많았는지 쑥덕쑥덕 거리며 회포들을 풀어
나갔다. 그런데 두 사람만이 분위기에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동민과 승희. 동민은 아까부터 안 좋
아 보이는 승희 때문에 걱정이 되어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아 보였는
데 오전 내내 비를 맞아서 인지 그녀의 안색은 좋지가 않았고 따스한 곳으로 들어왔는데도 몸을 움츠리
고 있는 모습을 보니 분명 몸이 안 좋은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동민은 주위에 분위기를 맞춰가며 승희
를 지켜보았다. 승희 또한 힘겹게 내색하지 않으며 분위기를 맞춰가고 있은 듯싶었다.
“승희씨. 안색이 안 좋다. 어디 아파?”
삼삼오오라 해도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래서 승희와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신경을
쓰고 있던 터라 동민의 귀에도 들려왔다. 승희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작가였다.
“예? 아.. 아니요. 그냥 어제 잠을 좀 설쳤더니.. ”
애써 자신의 표정을 바꾸며 말을 하는 승희. 한눈에 보아도 어디가 안 좋아 보이는데 피곤함 때문이라
니... 하지만 승희의 대한 그런 생각도 잠시 조금 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은 그 작가 여자가 승희에게
술을 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 몇잔 마시고 오늘은 푹 자요..."
에효...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쫓아가서 술잔을 뺏어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첫잔
에다 시작하는 분위기였고 그녀가 저렇게 말을 했는데 자신이 끼어든다면 분명 알게 모르게 뒷 얘기가
떠돌게 될 것이 뻔했다. 자신이야 무슨 말을 듣던 상관이 없었지만 그녀가 그런 일로 난처함을 당하며 힘
들어지게 되는 것은 싫었다. 동민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지켜보기만 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에 예전에 그녀가 했던 말 그대로 뚜껑 열리기 일보 직전까지 이르렀다. 몸도 안 좋
으면서 주는 족족 술잔을 비워대는 그녀의 모습 때문에... 미련한 건지 어리석은 건지 무슨 놈에 여자가
저런 몸으로 주는 대로 마셔 대로 있는 것인지.. 몸이 안 좋으면 안 좋다고 양해를 구할 줄도 알아야지...
젠장할...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다행이도 이른 시간에 시작했던 자리라 그런지 끝나는 시간도
일렀다. 동민은 자리가 끝났다는 안도감에 그녀에게 약이라도 챙겨 먹이려는 생각으로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이 인간들 아주 날을 잡았나보다..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사람들... 아쉽다며 2차를
외쳐대고 있었다. 동민은 그들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 승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다행이도 그녀는
피곤하다며 그냥 숙소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 같았고 동민 또한 그냥 숙소로 들어간다고 했다. 그렇게 일
행의 삼분에 이는 호텔 클럽으로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숙소로 돌아왔다. 동석 또한 불타는 밤을 보내
기 위해 클럽으로 향했다. 동민은 방으로 들어오자 약부터 챙겨들고 승희가 묵고 있는 방으로 갔다. 언젠
가 지방 촬영을 갔다가 감기에 걸려서 고생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약이 없어 무지 고생했었다. 그
뒤로 항상 예비적으로 약을 챙겼었다. 승희가 묵고 있는 방에 도착한 동민은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고는
벨을 눌렀다. 자신과 함께 일을 하는 사람이니 약 정도 챙겨주는 것쯤이야 뭐라고 떠들어대지는 않겠
지... 동민은 그런 생각으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갑자기 불안
함이 엄습해왔다. 미쳐 그녀가 누구와 방을 쓰게 되었는지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다. 만일 그녀와 함께 방
을 쓰게 된 사람이 지금 클럽에 가 있다면 아픈 몸에 술 까지 마신 그녀는 지금 혼자 있다는 얘기였다. 동
민은 불안한 마음으로 연이어 벨을 눌렀다. 이런 자신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에선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급해진 마음에 주먹으로 문을 두들기던 동민은 얼떨결에 손잡이를 잡고는 돌렸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동민은 조심히 안을 살피며 들어갔다. ‘탁’ 호텔이라는 명칭에 맞게 자동적으로 불이
들어왔다. 하지만 자신이 서 있는 곳만 환하게 밝을 뿐 안은 어두움과 함께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동민
은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갔고 안쪽 침대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누워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보아도 승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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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활기찬 한 주가 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