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뭐라고 써야할지 막연해져서 '키에롭스키'감독의 영화명을 빌렸습니다.
어느새 퇴근시간이 다가오네요.
오후의 햇살이 옅게 깔린 구름에 퍼져 은은하게만 비치고
덕분에 공기의 온도도 기분 좋게 낮습니다.
이용자분들의 글을 읽다가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 적어봅니다.
일단 게시판1호는 남자입니다. 한때 하루키의 표현처럼 65%의 연애..혹은
80%..정도의 연애..그리고 100%의 짝사랑등을 거치며 이젠 어느 정도 나이를 먹어버린
늙은..소년정도일까요. 하지만 제 안에도 여전히..여러분들처럼 아직은 선명하게
숨쉬는 굳센 기억들이 있답니다. 이제부터 틈나는대로 써볼까합니다.
적지않는다면 머지않아 전 기억해내지 못할테고
제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 모두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영원히 사라져갈테니까요.
#1
95년의 늦여름 저에겐 오랜 동갑내기 여자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에겐 또한
저같은 남자친구를 가진, 둘도없는 단짝친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커플끼리 만나는 일은 단한번밖엔 없었습니다. 그건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 나이엔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내 여자친구와 단짝친구는..후라이드 그린 토마토..라는 영화처럼 오랜시간 각자의 상대가 있기전부터
힘든 시간을 함께해온 친구들이였고 진심으로 서로를 아껴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때 -남자-라는 것 따위는 전혀 생소했던 그들만으로 너무나 당당하고 충분한 친구들이였는데..어느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조금은 어른이 되어 각자의 상대가 가지고 가끔은 그들의 눈치를
보기도 해야하는..천천히 -여자-가 되는 과정에 있었던거죠.
그러나 아직은 그런 '역활'이 낮설기만한 그들에게 커플끼리 만나는 자리란건
마치 서투른 어른의 흉내처럼 부담스럽고 불편했을겁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구요.
하지만 뭐뭐하지마라..라든가의 주문과 간섭이 유달리 많고 함께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여자친구 어깨에 손을 올리는 등, -소유-를 표현하는 듯한 제스츄어가 많던 제 여자친구의
친구의 남자친구(죄송합니다. -_-; )와는 달리 그냥 소꿉친구처럼 조용하게 잘어울리던
제 스타일때문일까요 그녀, 그리고 그녀의 친구, 그리고 저는 종종 셋이 함께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우리는 셋 모두 노래방도, 술집도 그다지 취미가 없었기에 언제나 각자의
학교앞에서 만나 자신의 학교안의 수많은 벤치, 잔디와 또다른 그늘들을 찾아
많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도, 제 여자친구도 그리고 제 여자친구의 여자친구도
우리가 과연 세상에 나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와 같은 많은 의문과 근심을 각자 안고 있었습니다.
전 머지않아 군대를 가야했습니다.
제 여자친구는 먼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불투명한 편입을 준비하고 있었고
이에 대하여 고향에 떨어져 계신 보수적인 그 아이의 부모님은, 그런 여자친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자친구의 친구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아버지가 남겨주신 유일한 재산인
조그만 집에서 여동생과 함께...조금씩 나오는 월세와 어머니의 품일로 어렵게 대학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의 집은 강변에 있었고 2002년에 열릴 월드컵을 위한 조경문제로 몇년내에
철거된다는 소문이 기정사실처럼 되어 있었죠. 헐값의 보상을 받고 전세로 옳겨야한다면
학교를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였습니다.
즐겁게 이런 저런 농담을 하던 것도 잠시... 각자 안고 있는 문제를 생각해내고 자신에 대해
설명하려고 애쓰다보면 어느새 조용해진 우리는 다들 각자의 우울한 생각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젊으니까.....언뜻 생각하면 우리앞엔 수많은 가능성과 그것을 비추는 빛으로
가득한 듯 했지만, 달리 생각하면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것만 같던 그때..
어느날 정오, 여자친구의 호출이 왔습니다. 전 바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왜 이렇게 늦게 전화해. 엉!
-받자마자 했어...-_-
-얼른 나와.
-이 시간에? 어딘데?
-어디어디 학교앞 까페..여기 알지? 빨랑 튀어와.
두친구는 집이 가까웠는데 그곳은 그들의 집과는 상당히 먼거리에 있는 곳이였습니다.
왜 이 시간에 그곳에 있을까...
까페로 갔는데 둘다 의자에 앉은채 잠들어 있더군요.
여자친구의 옆에 털썩 앉자, 잠이 살짝 깬 친구..한참 내 얼굴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밤새 학교에서 이야기를 했는데..새벽부터 우리 너무 추웠어....
-술도 마셨지..속 쓰리다. 너 돈 좀 있냐..? 배고파...
-너무 추워서 담배한갑 사서 한대씩 피워봤는데..전혀 안따뜻해지더라구..?
-문열자마자 여기 들어왔어..우리 커피값 없어..
뭐랄까..전 약간 화가 나더군요. 애들이 왜이리 망가져서 지낼까. 커피값을 내주고
가까운 분식점에 데려가서 김밥과 라면을 사먹였습니다. 다른 때와는 다르게
제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던 여자친구..
- 치즈김밥 한줄만 더 시켜두 돼?
- 안돼.
두줄 더 가져왔더니 마저 잘먹더군요. 지켜보고 있자니 약간 슬프고 답답한 심정이 되었습니다.
제가 먼저 일어서며
-집으로 가자..데려다줄께 둘다
-야..야...우리가 어린애냐? 데려다주게...
앞장서서 걷는 제 뒤로 두 친구는 팔짱을 끼고 뭐가 그리 추운지 가운데로 잔뜩 모여
웅크린채 천천히 따라 걸어오더군요.
가끔 웃음소리가 들리면 뒤돌아보다가..어느새 우리는 지하철 2호선을 탔습니다.
아직은 낮시간이라 텅비어 한산한 전철..우리셋은 앉아서 말없이 덜컹거리는 전철에 몸을 맡겼습니다.
둘은 어느새 서로 기대어 잠들어 버렸습니다.
내릴때가 다가와서 둘을 깨웠습니다.
-다음 정거장이야.
일어서려던 저를 조용히 쳐다보던 여자친구는 천천히 내 팔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한 바퀴만 더 돌자..
뭐라고 할말이 사라진 저는 ..잠시 서있다가 자리에 앉았습니다.
다시 돌기 시작한 지하철.. 이번엔 저역시 잠들어 셋은 그렇게 순환선의 절반을 돌았습니다.
제가 문득 잠에서 깨었을때 둘은 물끄러미 자고있는 저를 쳐다보고 있더군요.
-너..차암.. 잘잔다..
- .....
시계를 보자 어느새 시간은 오후 4시, 그렇게 하루는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지하철이 이윽고 지상구간으로 나오자 햇살이 텅빈 지하철안을 노랗게 물들였습니다.
-있잖아
-응..
-혜원이(여자친구의 친구-가명-) 어제 xx랑 헤어졌대...
혜원이는 멍청히 고개를 들어 몇정거장을 더가야하는지 세고 있더군요
제가 말했습니다.
-잘됐네..
-왜?
-전부터 맘에 안들었어.
-왜?
-상당히 썰렁했어.
-그게 다야?
-응
둘은 멍청하게 저를 쳐다보다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대답하길
-니가 더 썰렁해!
그리곤 화들짝 놀래서 서로를 쳐다보다가 -찌찌뽕!- 외치며 서로를 꼬집더군요.
하지만 전 제 여자친구가 아픈게 싫어서...여기서 또 유치하게 편을 들었습니다.
-혜원아. 아프지?
-응! (둘다 볼이 빨개지려던 참..먼저 놓는 사람이 지는겁니다.)
-있잖아. 내가 잘 아는데....
-..??
-희연이(제 여자친구-가명-)는 아직 자기 힘의 20퍼센트밖에 사용하지 않았어..포기해..
잠시 버티며 생각하던 혜원이는 대답하길
-난 아직 내 힘의 5%밖엔 사용하지 않았어!!
여기서 드디어 제 여자친구가 입을 열더군요.
-난 아직 1%밖엔...
정말 유치해서 팔짝 뛸 노릇이였습니다. 별안간 벌어진 상황에 제가 피식 웃자
동시에 셋은 까르르르르, 까르르르르..
그 웃는 모습마저 유치한 영화의 한컷처럼 그렇게 웃었답니다.
그 웃음이 그칠 무렵..혜원이가 말했습니다.
-희연이 이번달부터 집에서 학원비도 생활비도 안주기로 했대.
벌어서 다니든 말든 맘대로 하라고..
어느새 다시 조용해진 그 친구들을 위해..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더군요.
답답해진 마음에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바닥만 쳐다보던 제 눈에 문득
왼손에 걸린 손목시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손목시계는 우연히 생긴 것이였는데, 제가 차기엔 부담스러운 정도의 고가였고
무엇보다도 중앙에 스페이드 무늬가 음곽으로 크게 박혀 있었습니다.
카드의 스페이드가..불운을 암시하는 거라고 제 여자친구가 말해준 이후부터 종종 맘에 걸리긴 했지만
버릴 수도 없고 넣어둘 수도 없어서 차고 다니던 금장의 시계.. 몇번이였던가..그 둘은 저에게
-그거 맡겨서 닭사다먹자!
라고 농담(?)을 하곤 했고 전 무시했었죠.
전 별생각없이 그 시계를 푸르며 중얼거렸습니다.
-언제나 맘에 걸렸었어. 다 이것때문인거 같아.
어리둥절해 하다가 금새 제 말뜻을 알아챈 그 친구들은 어느새 흐흠..하는 표정이
되어 있더군요. 그때 제 여자친구가 별안간 입을 열어 말하길..
-좋다. 그럼 버리자!!
-아깝잖아...차라리 팔아서 ..닭먹자(유달리 닭을 좋아하던 혜원이 -_-; )
-아냐 과감히 버려야해! 그래야 불운이 떨어져!!
전 사실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전혀 아니였는데..어느새 대화의 분위기는 무시할 수 없는
농담처럼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잠깐의 생각을 마친후 전 말했습니다.
-그래 버리자.
-정말?
-버리자니깐. 그럼 누가 버릴래?
정작 버리라고 하니까 둘다 손을 내저으며 -아아 싫어... 난 못해!!- 하면서 웃더군요.
-그럼 내가 버릴께. 이의없지?
우린 셋은 어느새 모두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은 전철비도 없어 자판기커피를 하나만
뽑아서 셋이서 나눠마실 정도로 정말..너무도 가난했던 우리가 생각해낸 터무니없는 짓거리
제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고 그건 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전철은 저 멀리 63빌딩이 보이는 한강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내가 지하철창의 덧문을
힘겹게 열자 휙 밀려들어오는 상쾌한 바람....우리는 모두 의자위에 무릎으로 기대서서
그 바람을 맞았습니다. 그 아이들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고,
늦여름 오후의 피곤하고도 강렬한 햇빛이 우리의 눈을 아프게 할때
전 잠깐 망설이다가 창밖으로 내놓은 손에서...시계를 천천히
놓아버렸습니다.
시계는 한순간 바람의 힘으로 창의 바로 옆에 살짝 붙었다가 이내 펄럭하며
저 멀리 강물위로 떨어져 갑니다..오후의 햇살이 떨어지는 시계에 반사되어
내 눈에 반짝이며 비치던 그 순간을 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 다음 순간, 셋은 동시에 이상한 전율을 느꼈고 둘은 손을 붙잡고 들썩거리며
꺄아..소리를 지르며 팔짝팔짝 뛰더군요.
그 뒤로 부터 내려서 각자의 집으로..헤어질때까지 우리는 각자의 근심은 모두 잊어버린듯
끝없이 웃었습니다. 우리는 가난했고 지쳐있었습니다.
우리의 앞날은 불투명했고 우리는 불안했습니다
우리는 계속 환하게 웃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환하게 웃었습니다.
여자친구는 제가 제대를 4개월 남겼을때, 저를 떠났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원망도 무엇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후 그녀는 편입에 실패했고, 그 후로의 소식은 알지 못합니다.
제 여자친구의 친구는 다시만난 남자친구를 따라 외국으로 떠났다는 소문뿐, 다시는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전 올해로 예비군 훈련이 모두 끝납니다.
저는 여전히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퇴근을 할때면 햇살이 눈부신 오후의 한강을 지납니다.
다시 여름이 다가올때면 그 둘은 어느새...그렇게 혼자 서있는 제 곁에 돌아와있습니다.
그날의 웃음소리를 기억하는 저에겐... 내 평생 그러한 동감이 다시 있을까..라는
질문이 생기곤 합니다.
그들을 만날 수 있었던 시간에 감사하며 이젠 더이상 그들이 불안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아팠던만큼 행복해져있기를 바라며..이 넓은 세상 어디에 있건 그렇게
한해가 지날때마다 저와 함께 무사히 한살씩 나이를 먹어가기를,
그리고 언젠가 다시 한자리에 모여, 세상 가장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순간이
다시 돌아오기를... 조용히 기원해 본답니다.
별 추억도 아닌데 참 지루하게도 썼습니다.
또 읽어주실 분...혹시 계시면 종종 쓰겠습니다. ^_^;
(BGM-조지 윈스턴/ Prelu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