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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누르 다이아몬드

돈키호테 |2003.06.08 14:55
조회 620 |추천 0

역사적으로 유명한 다이아몬드 중의 하나로, 세계 최고의 인도산 다이아몬드로 알려져 있으며, 그 역사는 13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이 다이아몬드는 인도 마루와의 라자왕 일족의 소유물이었다.

200년 후에 무갈 제국의 최초의 황제였던 바불(재위기간: 1526-1530)의 소유가 되었고, 그의 아들로부터 그 유명한 타자·마할을 건립하였던 샤·자항 황제(1627-1758)등을 거쳐 무갈 황제의 일족의 손에서 떠나,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다녔다고 한다.

그 시대에 이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를 손에 넣은 사람은 세계를 정복, 통치할 수 있다고 믿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코이누르라는 명칭은 상당히 나중에 되어서야 붙여졌다고 일컬어지며 그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739년 페르시아왕 나딜·샤가 인도에 침입, 테러를 약탈하며 많은 보물을 탈취하였고 "코이누르"를 찾기위해 동분서주 하였으나 결국 이 거대한 다이아몬드를 발견하는데는 실패하였다. 당시 정복된 무갈왕은 그의 터번 안에 다이아몬드를 숨겨서 항시 착용하여 결코 손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딜·샤는 이것을 빼앗기 위하여 묘안을 고안하였다.
체포된 무갈 왕을 연회장에 불러 동양의 습관에 따라 터번을 교환할 것을 제안하였고, 패배자였던 무갈 왕은 이 제안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결국 나딜·샤는 교환한 터번을 가지고 돌아와 터번의 실을 풀고 이 큰 다이아몬드를 꺼내려 할 때 마루에 떨어뜨렸는데 그때 그 다이아몬드의 찬란한 휘광성을 보고 놀라서 "코이누르"를 외쳤는데, 이때부터, 이 다이아몬드의 이름이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로 명명되었다고 전해진다.

"코이누르"란 빛의 산이라는 뜻으로, 그 휘광성이 마치 거대한 산의 정도만큼이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 후 이 다이아몬드는 나딜·샤가 페르시아에 가지고 돌아 갔으나 인도가 영국에 합병되었을 때 다시 인도에 반환되었고 판자부천의 라홀(현재의 파키스탄)의 보석 창고에 소장되었다. 그러나 1849년에 판자부천에서의 시크 교도의 반란이 있는 후에 배상의 일부로서 영국의 동인도 회사에 넘어가게 된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 의해 1600년에 설립되었던 동인도 회사는 1850년에 창립 250주년을 맞이하여 세인트제임즈 궁전에서 거행된 대 리셉션 석상에서 동회사로부터 빅토리아 여왕(1819-1901)에게 헌상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이 다이아몬드가 1851년에 런던의 크리스탈 궁에 전시되었을 때 파이어(Fire)가 적은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었기 때문에 재연마 할 것을 결심했고, 암스텔담의 코스타 공장의 유명한 다이아몬드 커터였던 볼생기가 이 작업을 위해 영국에 초대되었다.

연마 비용은 총 4만달러(약 4800만원)가 소요 되었으며, 연마형태는 연마전에는 186캐럿의 올드 인디언 커트에서 109.9캐럿의 오빌 브릴리언트 커트로 연마 되었다.

이것은 이 다이아몬드를 안전하게 착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여왕뿐으로 왕은 착용할 수 없다는 전통적인 관습을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빅토리아 여왕은 이 다이아몬드를 사촌 동생인 알렉산드라 여왕에게 계승하였고 그녀는 이것을 제관식때 착용하였다(Queen Alexandra's Crown). 그 후 1911년에 메리(Mary) 여왕을 위해 특별히 새로운 왕관(Queen Mary's Crown)이 제작되었는데 왕관의 중앙에 이 다이아몬드를 옮겨 세팅시켰고, 1937년에는 왕태후(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어머니)의 제관식의 왕관(Queen Elizabeth The Queen Mother's Crown)에 이 다이아몬드가 옮겨졌다. 왕태후는 이 다이아몬드를 부착한 왕관의 둥근 장식 부분의 다이아뎀으로서 나라의 행사시 이용하고 있었다. 현재는 런던 탑안에 보관되어 영국 왕실 보석으로서의 주요한 보물중 하나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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