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남(24)을 아십니까. 요즘 '젊은 남성의 패션 아이콘'으로 급부상한 남성 모델입니다. 드라마에도, 영화에도 얼굴 한번 나온 적 없지만 인터넷 팬 클럽 회원 수만 5만여 명입니다. '벼락 스타'가 따로 없죠. 그는 멋있어서, 소위 '뽀대'가 나서 인기를 얻었습니다. 길이는 좀 짧고 몸에 꼭 맞는 재킷이 특징인 그의 수트 스타일, 해지고 뚫어져 낡은 청바지를 입은 그의 모습은 '배정남 스타일'로 불립니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그의 이름만 입력해도 의류.구두 등 '배정남 아이템'이 수백 개씩 쏟아질 정도입니다. 그가 새 모자를 쓴 사진이 인터넷에 뜨면 네티즌들은 '어디서 그런 모자 살 수 있느냐'며 아우성입니다. 그 순간 그 모자는 '배정남 모자'가 됩니다. 짙은 눈썹과 반항적인 표정, 자신만의 '멋지게 옷 입는 법'으로 주목받는 그를 만났습니다. "대체 배정남 스타일이 뭐죠?"
#스타일로 뜬 스타
"그냥 옷이 좋아요." 첫 대면. 인상이 차가웠다. 고향은 부산. 이름도 남자답다. 이런 남자의 대답치곤 뜻밖이다.
"같이 살던 사촌 누나들이 초등학생인 제게 이것저것 많이 입혀줬어요. 그게 싫지 않았고 자연스레 옷이 좋아졌어요."
그래도 평범한 관심만으로 이 시대 청춘들이 열광하는 스타일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
"대학은 의상학과에 갔죠. 부산공고 금속과를 나왔는데 저보다 공부 못하던 친구들이 대학 가는 걸 보고 무심코 지원했어요. 그런데 막상 가 보니 별로 배울 게 없었어요. 몇 달 만에 그만두고 옷 장사를 시작했죠."
어릴 때부터 옷이 좋았던 소년은 옷가게에 취직했다. 따로 배우지 않았지만 그의 타고난 감각은 부산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2002년 3월 가게에 들른 탤런트 김민준(김민준 역시 부산 출신. 당시 무명 모델이었다)의 소개로 모델 일을 시작했다. "모델은 1m80㎝가 훨씬 넘어야 하는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첨엔 못한다고 했어요. 제가 1m77㎝거든요."
스무 살 부산 사나이는 겁없이 상경했고 디자이너 송지오의 패션쇼로 모델계에 입문했다. 일은 만만치 않았다. 수입이 변변치 않았고 수명도 짧아 보였다. 몇 달 만에 다시 낙향. 하지만 그는 수개월 활동만으로 팬카페가 생길 만큼 강한 인상을 남겼다(공식 팬카페는 데뷔 석 달여 만인 2002년 7월 생겼다).
그러나 '스타일을 향한 열망'은 잠들지 않았다.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2003년 여름 재도전하면서 "모델로 성공한 뒤 원하는 걸 하자"며 독기를 품었다. 일은 순조로웠고 몇 개의 CF와 수많은 잡지 화보 주인공이 됐다.(올 3월 패션잡지 W코리아의 화보에 가수 이효리의 상대역으로 등장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키스신이 포함된 이 화보가 '베드신'으로 잘못 알려져 더욱 주목을 받았다)
패션잡지.CF 노출이 잦아졌다. 그의 스타일도 부산에서 서울로, 그리고 전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누가 따로 광고를 한 것도 아닌데 네티즌들은 자발적으로 인터넷 여기저기서 그를 찾아 헤맸다. 눈치 빠른 옷장수들은 '배정남 스타일'을 간판으로 내걸었고, 인터넷 의류 쇼핑몰엔 그의 스타일을 본뜬 옷이 넘쳐났다.
#배정남 스타일은 이것!
젊은이들이 배정남에 빠져드는 것은 그가 보통사람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잘 가꿔진 근육질 속살을 자랑하는 그가 보통사람? 하지만 자신의 표현처럼 '왜소한 편'인 그는 "근육 빼면 보통사람과 다 비슷한 정도"라며 "작은 체구를 어설프게 가리지 않고 당당하게 드러내는 게 내 스타일"이라 했다. 더욱이 그는 비싼 브랜드를 입지 않는다. 발품만 팔면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주머니가 가벼운 젊은층을 끌어들이는 원동력이다.
배정남은 분홍색 타이가 도드라져 보이는 회색 체크무늬 재킷(사진(1))을 입고 나타났다. 그가 '영국 밴드 스타일'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재킷의 기장이 짧고, 소매 폭도 좁은 편이다. 그는 대부분 집에 있는 옷장에서 골라 입고 왔다. 재킷 10만원, 바지 5만원, 셔츠 3만원에 조끼는 2만원, 넥타이 2만5000원. 모두 합쳐 20만원 조금 넘었다.
그는 "브랜드는 신경 쓰지 않고 시장에서든 어디에서든 맘에 드는 걸 고른다. 화려한 것은 사절이다"며 "스타일의 요체는 무난한 색채와 모양의 셔츠.바지 등을 섞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두 번째로 소개한 것은 검은색 정장(사진(2)). 조금 딱딱하게 보이는 스타일이지만 금빛 벨트로 포인트를 줬다. 재킷의 라펠 부분엔 비행기 모양의 금색 배지(badge)를 달아 벨트와 어울리게 했다. 벨트는 "허름한 시장에서 1만원에 건진 것"이고 배지는 "일본에서 몇 천원에 산 것"이다. "눈에 띌 때마다 이런 소품 하나 둘씩 사 모아도 멋 내기에는 그만"이란다.
청바지에 반팔 티셔츠(사진(3))는 전형적인 배정남 스타일. 옷의 솔기가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은 일명 '빈티지 스타일'이다. 1만원짜리 모자도 시장에서 샀고, 6만원 주고 인터넷에서 구입한 청바지는 "요즘도 찢고 덧대고 하며 입는" 그다.
소품협조=사필로 코리아(구찌.조르지오 아르마니), 보스 휴고 보스, 뉴발란스
'모델 → 배우' 선배들처럼 배정남도 연기 준비 중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차근차근 유명세를 쌓아온 배정남은 현재 몇 개의 영화.드라마 대본을 놓고 고민 중이다. 그는 얼마 전 소속사도 모델 에이전시인 에스팀에서 종합연예기획사인 카이스 미디어로 옮겼다. 연기자 데뷔를 준비 중이다.
패션 모델이 탤런트.영화배우로 진입하는 통로로 각광받고 있다. 영화배우로 입지를 굳힌 차승원과 조인성이 대표적이다. 강동원(영화 '늑대의 유혹'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주지훈(드라마 '궁' '마왕').이민기(드라마 '굳세어라 금순아' '달자의 봄', 영화 '바람피기 좋은 날').이언(영화 '천하장사 마돈나') 등 모델 출신 연기자가 활동폭을 넓혀가고 있다.
방송.영화 분야에서 모델 출신을 선호하는 것은 일단 기존 배우보다 저렴한 출연료와 참신한 이미지 때문이다. 한 관계자는 "기존의 한정된 배우들은 몸값도 비싸고 중복 출연 등으로 싫증나지만 모델들은 CF.잡지 등을 통해 이미지만 조금씩 알려졌을 뿐 신선한 느낌이 있는 데다 출연료도 싸다"고 말했다. 배씨처럼 인터넷을 통해 자발적인 팬층이 확보돼 있는 경우 새로운 인물을 알리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도 절약된다.
여성 모델보다 남성 모델의 연예계 진출이 활발한 이유도 있다. 남자 모델의 몸값이 여자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 남성 모델이 패션쇼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좁아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2월 열린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SFAA) 서울컬렉션을 위한 모델 오디션에는 남성 모델 지원자가 여성의 두 배 가까운 400여 명이 참가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남성 모델은 늘 다른 분야로 진출하기를 희망한다. 영화.드라마 제작사 입장에선 카메라 앞에서 두려움도 없고 이미지를 가꿀 줄 아는 모델 업계가 새 연기자를 찾는 황금어장으로 떠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