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세계속의 공포여행]
이 책은 19세기와 20세기의 프랑스 환상 작가라고 불리는 작가들의 작품 중에서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쉬운 몇 작품들을 추려 다시 꾸몄습니다.
환상 문학이란 환상을 보는 인간의 능력과 그 환상 상태에 대해 쓰는 것입니다.
물론 환상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만, 그런 환상(헛것을 보거나 생각하거나 하는 것)
은 인간의 마음에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즐거운 환상을 보거나 무서운 환상에 고통을 당하거나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그럴 만한 이
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무서운 환상은 사람 마음속에 극도의 고통이나 슬픔이 들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
니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는 인간이 느끼는 고통이나 슬픔의 원인이 범죄나 양심의 가책 때문일 수
도 있습니다.
환상은 현실과 관계없는 것이지만 근본적으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진실을 그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악마의 초상화
청년 화가
12월초답지 않게 무척 추운 밤이었다.
그날 난 품이 넉넉한 코트로 몸을 감싸고 런던 시내를 산책하고 있었다.
실내에 있는 게 답답해 운동을 좀 해볼까 하는 생각 외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
천천히 걷기 시작해 런던 중심 가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화가 위제누를 만났다.
그와 난 오래 된 친구 사이로 특별히 가깝게 지내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그에겐 어쩐지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그 역시 두꺼운 외투 깃을 세워 껴입고 있었는데 가스등 아래 서 있었기 때문일까...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물결처럼 일렁였다.
"야아! 이런 데서 만나기도 하네!"
내가 큰 소리로 말하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정말 운이 좋군. 요즘은 좀처럼 자넬 볼 수 없더니 말야." 위제누도 말했다.
"그런데 자네 웬일인가?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응? 아, 아무것도 안이야. 좀 추워서... 운
동 부족 탓이지." "난 자네에 대해 잘 알진 못하지만 어쩐지 자네가 늘 마음에 걸려.
뭔가 나쁜 일이 있는 것 같아서 말야."
지나가듯 던진 내 말에 위제누가 석고처럼 굳었다.
"뭐라고?"
그의 커다란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길을 걷고 있던 사람들까지 놀라 우릴 쳐다봤다.
"아니, 자네 건강 상태가 별로 안 좋아 보여서 말야.
이런 말을 하면 실례일지 모르지만...
자네가 걱정돼서말이야.
아! 오늘 밤 우리 집으로 가서 함께 지내지 않겠나? 여기서 좀 멀기는 한지만, 조금 걷는 건 자
네 건강에 도움이 될 테니까.
만약 얘가 길어지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소파도 있고 말야." "나는 우리 집 아닌 데선 절대 잠을
자지 않는다네, 샤를르. 아냐, 잠을 못 자." 그의 마지막 말은 너무 작아서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
었다.
위제누가 곧 목소리를 크게 해서 말을 이었다.
"좋아! 찬성이야. 기쁘게 자네 집에 가지."
우리 집까지 가는 동안 위제누와 나는 꽤 기분이 좋아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감정 변화가 심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쾌활해진 게 놀랍진 않았다.
오히려 여러 가지 물어 보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자마자, 나는 난로로 달려가 불을 지폈다.
그리고 식탁을 정리하고 포도주 한 병과 잔 두 개를 준비했다.
"자네를 위해 건배하자구.위제누!"
내가 말했다.
"자자! 그만두지. 그따위 형식적인 인사는."
따분하다는 듯 위제누가 대답했다.
"그럼 좀더 우리 세대 기분에 맞는 건배를 할까?"
"그런 게 좋지.
자네가 하고 싶은 대로하게.
나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말야."
"정말 괜찮지?"
위제누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왜 그런지 그가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전혀 상관없네."
"그럼. 나는 악마의 초상화를 위해 이 잔을 바치겠네." "나도 그렇게 하겠네. 그 초상화를 위
해!"
토마스 경
악마의 초상화? 이건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응, 그런데 그 재미있는 건배에 대해 설명 좀 해주지 않겠나?" 의제누는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포도주를 몇 모금 마시고 말했다.
"응, 그렇게 하지. 뭐, 특별히 숨길 이야기는 아니니까.
그리고 난 악마 숭배자도 아니라네.
그리고 난 더 이상 그 이야기를 감추고 싶지 않다네." "아, 아냐. 뭔가 말하기 힘든 추억이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 생각하기도 싫어.
아아! 그런 게 있어.
그런데 그게 지금도 너무 생생해.
지금도 그 느낌이 그대로 남아 있단 말야."
어느 새 난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부탁이야, 위제누.
말해 줘.
꼭 듣고 싶어."
그가 주먹을 꽉 쥐고 괴로운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괜찮겠어? 물 한잔 갖다 줄까?
"응? 아, 아니. 지금부터 말 말하려고 하던 참인데.
괜찮다면 내얘기를 들어 줘. 괜찮지?
자네도 잘 알다시피 우리 아버진 꽤 이름이 알려진 의사였어.
아버지는 세상에서 흔히 훌륭하다고 말하는 쓸데없는 교육을 내게 시켜 주셨지." "난 여덟 살이
되자마자 나주 작은 인원만 들어갈 수 있는 기숙사학교에 들어갔어.
아니, 아버지 손에 끌려 억지로 처넣어진 거지. 거기서 열 다섯 살까지 있었어.
그래서 그리스어랑 라틴어를 완벽하게 배웠고 수학도 열심히 배웠지.
그런데 세상에 나와보니까 난 아무것도 아는게 없었어, 난 자신도 제대로 모르는 바보지. 실
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상식은 전혀 몰랐던 거야."
"자넨 공부한 걸 후회하는 거야?"
"아냐, 난 단지 가르쳐 주지 않은 것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뿐 이야.
학교를 마치고 나오자 아버지는 내가 당신과 같은 길을 걷기를 원하셨지.
그래서 난 아주 당연하게 의대를 가야 했어.
나는 내가 하는 약속이 어떤 건지 별로 신경도 안 쓰고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네.
그 대신 일 주일에 몇 시간만은 자유롭게 데생을 연습할 수 잇도록 해달라는 단서를 달았지.
난 그것만으로 충분했어.
단 한번도 따로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데생공부는 그때까지 내 인생에서 유일한 즐거움
이었어.
아버지는 이 조건을 받아들였어.
그러나 아버지는 내 조건을 받아주지 않으셨다면 더 좋았을 거야.
왜냐하면 나는 아버지가 주시는 돈을 데생과 그림 배우는 데 다 써버렸거든.
게다가 붓 잡느라고 메스하곤 거리가 멀어졌고 해부학보다는 오마크(오락장)에 살아있는 모델
들을 더욱 좋아했으니까 말야."
위제느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들이닥쳤어.
그리곤 내 의학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테스트를 하셨지.
당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영 거리가 멀었거든.
아버진 나에게 엄하게 타이르셨지만 그 정도 훈계는 나한테 별 효과가 없었어.
그 뿐만 아니라 그때 난 적당히 기회를 잡아서 제일 유명한 의사 조수가 되는 것보단 훌륭한
역사화를 그리는 화가가 되는 게 소원이라고 아버지에게 항의했어.
처음엔 아버지도 상당히 놀라 반대하셨지만 결국 내가 미술공부를 계속하도록 동의해 주셨어.
그 뿐만 아니라 런던 안에 있는 모든 화랑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잇도록 조치해 주셨어.
그리고 필요할 때는 금방이라도 이탈리아로 여행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자금을 제공해 주시겠다
고 든든한 약속까지 해주셨지.
예술에만 전념할 수 잇도록 해주시는 아버지 배려 덕분에 난 밤이고 낮이고 오직 그림 공부만
했다네.
그래서 나는 미술학교에서 최우수 학생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어.
나는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했어.
내가 토마스 윌슨 경을 소개받은 것도 아마 그쯤이었을 거야.
토마스 경은 은퇴한 고급 관리였는데 런던에서 재일 비싼 동네에서도 가장 호화롭고 좋은 저
택에서 살고 있었어.
게다가 그는 그림을 보는 눈이 꽤 높다고 알려져 있었거든.
그래서 그에게 내 그림 비평을 부탁하기 위해 한 장을 맡겨 뒀는데 아주 높게 평가해 줬어.
그리고 내가 무척 마음에 든다며 가까운 곳에 두고 싶다고 했어.
그래서 난 내가 가진 모든 힘을 기울여 시작한 그림을 토마스 경에게 주기로 결심했다네.
처음에 그 그림을 시작할 때는 아버지에게 드릴 작정이었는데 그가 내 그림을 너무 좋게 평가
해 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게 예의 같았지.
그도 아주 기쁘게 내 그림을 받아 주었다네."
"응, 토마스 경이 예술에 대해 풍부한 정열과 지식이 있다는 건 나도 들어 본 적 있어." "내가
자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토마스 경 따님에 관한 것이라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그것을 말하지 않은 진짜 이유는... 아마 말로는 그것을 표현할 수 없었
기 때문일 거야.
어쨌든 결국 나는 로라를 열렬하게 사랑하게 되었다네.
이런 일을 내가 미리 얘기해 두는 것도 내가 그녀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자네가 그냥 맹목적
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야.
자네도 잘 알겠지만 난 과장하는 걸 싫어해.
난 늘 거짓 없는 정확한 묘사를 하려고 하지.
로라 윌킨스 양은 그리스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전형이었어.
말아 올린 검은 머리카락은 그 빛나는 하얀 피부 위에 얹어져 빛났다네.
아니, 그러니까 간단히 얘기하자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처음 본 순간부터 내 마음과 혼
을 모두 그녀에게 빼앗겨 버리고 말았던 거야." "로라 양도 자네의 갑작스런 사랑에 응답해 주었
나?" "후, 내가 주었던 만큼이라고 할 수는 없지.
하지만 내 찬미를 전혀 모른 척하진 않았어.
내가 하는 아첨에 웃어 주기도 했고 가끔 내 그림을 칭찬해 주기도 했어.
그래서 나는 점점 그림과는 거리가 멀어졌다네.
주위 사람들도 잊어버렸어.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모근 것을 팽개치고 오직 로라 양만을 위해 눈이 멀어 버린 거야."
"그래서 로라 양 부친은?"
"아니, 그보다 먼저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있어.
우리 아버지 말야.
내가 위킨스가에 아주 친하게 출입하게 된 후 한 달쯤 지났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그렇게 자유롭게 쓸 수 있던 돈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1/3로 줄어들었어.
왜냐하면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땐 아버지가 진료를 해서 버는 돈을 거의 모두 내게 주셨기 때
문이었어.
그런데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 환경 변화에도 로라를 향한 내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네.
내 마음이 얼마나 그녀에게 향해 있었는지 짐작하겠지?"
슬픈 선고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며칠 동안 침울해 있던 나는 다시 윌킨스가를 다시 찾아가기 시작했
어.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내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내 처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하고 청혼
했다네.
하하, 그녀는 가정교육을 잘 받은 아가씨답게 모든 이야기를 자기 아버지에게 말하고는 나를
토마스 경에게 가게 했지."
드디어 자넨 그토록 하고 싶었던 중요한 이야기를 토마스 경에게 하게 됐군." "그래, 맞아. 하지
만 내가 그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각오를 다졌는지 자넨 모를 거야.
그 집안은 최고 귀족 계급인데다 대단한 부자였어.
게다가 토마스 경은 자부심이 대단한 고급 관리였고...
반대로 난 연금 350본드로 제대로 받지 못하는 가난뱅이 화가였어.
그런 주제에 그 댁 따님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려니 얼마나 곤혹스러웠을지 상상이 가지?"
"그럼, 상류 사회에서 지키는 예의란 걸 자네는 아직 잘 모르는군.
그들은 절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아. 그들은 출신 성분 때문에 그렇게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
다고 말했어.
그리고 집사를 부르는 벨을 눌렀어. 날 배웅해 주라고." "음, 자네는 그 이후로 로라 양을 만나
지 못했나?"
"하! 그랬다면 정말 좋았겠지!"
그는 거의 부르짖다시피 말했다.
"토마스 경과 가족들은 며칠 후 파리로 떠났어.
나도 허겁지겁 따라갔어.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어.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로라와 난 단 한 마디도 나눌 시간이 없었어.
그대로 그들이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니까 온몸에 있는 피가 거꾸로 몰리는 기분이었어.
그래서 급히 따라갔어.
그런데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토마스 경이 사는 파리 주소를 알아보지 못했어.
그래서 난 매일 피곤한 몸을 이끌며 파리 시내를 헤매고 다녔어.
우연히 그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야.
난 매일 극장이나 화려한 무도회장 입구나 줄지어 선 마차 사이를 미친놈처럼 헤매고 다녔어.
아마 그렇게 넋이 나간 채 헤매는 날 보고 사람들은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그렇게 며칠씩 돌아다니다 너무 피곤해지면 나는 쓸쓸하고 추운 셋방으로 돌아와 그대로 죽은
듯 쓰러져 잠들곤 했어.
그러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절망과 슬픔 때문에 베개가 흠뻑 젖
도록 밤새 울곤 했지."
그가 마시던 잔이 빈 게 보였다. 난 흥분한 위제누를 조금 가라앉혀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아, 포도주 한 잔 더 받지."
그는 잠자코 술을 받았다.
그리고 술로 입술을 적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이렇게 저렇게 하는 사이에 파리에 도착한 지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어.
그러나 아무 소득도 없었어.
그저 그녀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
그런데 아주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어.
로라와 처음 만났던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서 외국인들이 자주 모이는 화랑에 전시해야겠다고
말야.
오라가 그 그림을 보면 작가 이름을 물을지도 모른다는 바보 같은 기대를 했던 거야.
그런 대로 만족할 만한 작품을 완성했어.
그리고 파리에 오래 전부터 체류하던 어떤 영국인의 도움을 받아 꽤 유명한 화랑에 그림을 전
시하게 됐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며칠을 지냈어.
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지.
그래서 기대를 버리려고 하던 바로 그때. 그날 오후 로라를 드디어 만났어.
어떤 남자와 팔짱을 끼고 걸어오는 걸 말야.
그 남자는 유명한 아르탄빌 남작이었어.
아아! 정말 그건 마법사가 건 장난이었어.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과 표정 하나하나를 나는 놓칠 수 없었어.
그 몸짓과 맵시.
마치 시처럼 부드러운 발걸음과 향기, 표정..., 땅 위에 사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어.
그녀가 내쪽으로 얼굴을 돌렸고 내 옆을 지나는 순간 달콤한 웃음을 보였어.
그 웃음은 마치 나에게 주는 것 같았어.
나는 그 손을 잡으려고 한 걸음 앞으로 나간 거야.
그런데 그녀는 차디찬 얼음처럼 날 대했어.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마치 더러운 벌레를 보는 것처럼 날 무시하고 지나쳤어.
난 너무 당황해서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랐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헌병 두 사람이 나를 지키고 있었어.
그리고 발 밑에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을 그린 그 아름다운 그림이 발기발기 찢겨 있
었어.
흠, 그렇지만 난 잡혀가지 않았어.
아마 날 돌아버린 사람쯤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야.
나는 방으로 돌아와서 방세를 지불하고 그 날로 파리를 떠났어." "곧바로 영국으로 돌아온 건
가?"
"흥, 어림도 없지. 불행이 시작된 땅으로 그렇게 쉽사리 돌아오는 건 상상하기도 싫었어.
나는 그 길로 베니스로 갔어.
그런데 난 사람들이 베니스를 왜 아름답다고 말하는지 알 수 없더군.
나한테 그곳은 지옥 같은 기억만 남겨 줬으니까.
자! 내 얘기도 이제 감춰 두고 싶은 핵심에 다다랐다네.
하지만 자네가 그걸 들을 만큼 충분히 용기가 없다면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용기
는 충분해."
"다시 한 번 말해 두지만 이 얘기는 너무 기막히고 비참해." "상관없어. 어떤 얘기라도 좋아. 자
네에게 남은 나머지 이야기를 해주게."
지하실 안
"자네 혹시 베니스에 있는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주제로 한 그림얘기를 들은 적 있나?" "응, 그
러고 보니 뭔가 어렴풋하게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 "그 화가는 그 그림을 마지막
까지 완성하지 못했어.
'악마의 피앙세(약혼녀)'를 모델로 한 그 그림에 온 힘을 쏟아 붓던 중 이성을 잃고 미쳐서 결
국엔 자살해 버렸으니까."
"그 얘기가 어디선가 읽었는지,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분명히 알고 있던 얘기야.
너무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말야.
맞아! 분명히 어느 교회 지하실에 감춰 두었다고 들었는데.
다시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했다는 것 같은데..." "맞았어, 그 사건이 일어난 건 2백 년 전
이야.
그런데 실제 있었던 일보다는 마치 잘 꾸며진 이야기처럼 사람들에게 알려져 왔지.
그래서 그 무서운 작품을 숨겨준 지하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더군." "응, 이제
나도 그 얘기가 확실히 기억이 나는군."
"그런데 엉뚱하게도 말야, 그 초상화가 갑자기 나를 사로잡았어.
그 이야기가 내 마음을 얼마나 강하게 잡아끌었는지도 몰라.
어쨌든 나는 그 그림을 어떻게 해서든 보리라 결심했어.
그걸 감춰 둔 지하실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갔었어.
한참 수소문 한 끝에 거의 폐허가 된 어느 교회 안에서 그 입구가 있다는 걸 알아냈어.
그 교회는 낮이고 밤이고 거지들과 부랑자들이 우글거리고 게다가 유령까지 나온다는 소문이
있었어.
어느 거지한테 넝마를 빌려 입고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울려 지하실에 어떻게든 들어가 볼 작
정이었어.
그 무리 중 한 명에게 지하실에 대해 들었지.
어느 날 밤 불빛이 바깥으로 새나가지 않게 등을 준비하고 샨트 죠르지오 교회로 갔어.
어둠 속을 별 어려움 없이 헤치고 갔다네.
그리고 땅보다 조금 올라온 곳이 있기에 더듬어 봤더니 그게 덮게였어.
그런데 그 덮개를 들어올리니까 밑으로 내려가는 사다리도 계단도 없는 거야.
그저 깊고 깊은 어둠만 날 둘러쌌지.
난 등불을 줄에 묶어 지하실로 내려보내 안을 살폈다네.
그 깊이는 약 2m 정도였어.
어둠 때문에 처음 몇 분 동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한참 그렇게 가다 등을 위로 향해 둘러보았더니 색이 바랜 커튼 한 장이 벽에 걸려 있는 게
보였어.
심장이 마구 두근거리더군.
난 본능으로 알았어.
그게 내가 그토록 애타게 찾던 바로 그 초상화랑 걸. 난 커튼으로 달려가 얼른 젖혔어.
그러자 그 '악마의 피앙세'가 나를 노려보는 것처럼 떨어지게 보더군.
그, 그, 그런데 그 초상화는, 하하, 그 초상화는..." "왜 그래? 빨리 말해 봐."
난 목이 타서 그를 다그쳤다.
"아아! 하느님! 그건 바로 로라의 초상화였어!"
"뭐! 뭐라고?"
"얼마 동안이나 그걸 그렇게 바라봤는지 몰라.
막 그려낸 듯 생생했어. 2백년도 더 된 그림이 말야.
막 붓을 내려놓은 거처럼 물감들이 촉촉한 광택을 뿜어내고 있었어.
암 살아서 지옥을 경험한다면 아마 그 날 밤 내가 본 그것이야말로 생지옥일 거야.
결국 그 마력이 풀린 건 이튿날 새벽 무렵이었어.
햇빛이 조금 비쳐든 다음에야 나는 정신이 들어 입구가 있는 곳까지 뛰어와서 겨우 바깥으로
올라와 온 힘을 다해 도망쳤어.
그렇지만 그 무서운 밤 기억은, 그 초상화는 계속 늘 내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았어.
꿈속에까지 쫓아와... 눈을 뜨고 있을 때도, 눈을 감고 있을 때도...
그, 그리고 아아! 저기 있어! 봐, 저기!"
그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졌고 목소리도 흥분해 떨렸다.
나는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돌렸지만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다.
조금 안정이 되자 위제누는 천천히 일어나 모자를 들고 우리 집을 떠났다.
그러나 문을 나서든 그 얼굴엔 아직도 공포가 그대로 남아있었고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며칠 후 난 그를 길에서 우연히 또 만났다.
그날 그는 초상화의 망령에게 끔찍하게 쫓기고 있다고 했다.
이제 세상에는 그가 편안히 쉴 곳이 없다고 했다.
난 의사에게 가보라고 권했지만 그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그를 방문했을 때 일어난 일이다.
문이 잠겨 잇지 않아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열었다.
그의 침울한 기분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줄 생각이었다.
위제누는 테이블 위에 얼굴을 엎드린 채 잠든 듯했다.
내가 온 것도 전혀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난 그가 잠을 깰 때까지 가다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 그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순간 무서운 생각이 들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내가 두 팔로 그를 안아 일으켰을 때 작은 병이 내 발 앞으로 떨어졌다.
병에는 '마취약'이란 딱지가 붙어있었다.
불쌍하게도 그는 이미 오래 전, 싸늘하게 죽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