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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깃든 밑그림

태클양 |2007.08.16 00:26
조회 1,843 |추천 0

 

 

 

 4. 죽음이 깃든 밑그림

 

 

  천리안이라던가 투시력 같은 시기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정확하게 내다볼 수  있다면 여러 가지 편리한 점들이 있겠지만 경우에 따
라서는 어처구니없는 불행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하지만 나한테 그런 능력이 있다 곤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지금도 나는 그것이 초능력으로 일어난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그 무서운 사건은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갑자기 일어났다.
  그건 어쩌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초자연적인 힘이 잠시 나에게 찾아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젊은 적에 그림 공부를 위해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얼마동안 지냈다.
  그 당시 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화가라 무척 가난했다.
  그래서 드 토라방스라는 허름한 거리에 위치한 작고 초라한 여관에서 계속 묵고 있었다.
  그림을 공부하러 독일에 갔지만 일단 돈을 벌어야 했다.
  그래서 초상화를 주문 받아 그리고 거기서 받는 수고비로 생활했다.
  그 때 내가 그린 대상들은 뚱똥부 아주머니,늙은 여주인 무릎에 앉아 졸고 있는 고양이, 턱수염
을 기륵 잔뜩 무게를 잡은 마을 관리, 삼각모자를 쓰고 어깨에 힘을 준 촌장 등이었다.
  그런데 이 일이 여간 고역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힘든 게 아니라 그림을 주문한 사람들 구미에 맞춰 주는 게 힘들었다.
  뚱뚱보 아주머니를 보이는 그대로 뚱뚱하게 그리면 돈은커녕 그 집에서 쫓겨나기 일쑤였다.
  심지어 주인을 닮아 의뭉스럽게 늙은 고양이도 실제보다 훨씬 날렵하고 젊게 그려야 했다.
  모든 게 그런 식이어서 아름다운 작품을 그리고 싶은 열정에 불타고 있던 내 마음은 자꾸 그늘
지기만 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자니 당연히 손님과 자주 싸웠고 자연히 초상화 주문도 줄어들었다.
  결국 나는 초상화가에서 밑그림화가로, 다시 밑그림 화가에서 그림자 화가로 전락했다.
  수입도 점점 줄어들어 결국 숙박 비도 지불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갔다.
  내가 묵고 있던 여관 주인 라프 영감은 방세를 받아내는 데 천재적인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방세를 내지 않은 사람을 매일 찾아와 달달 볶아대 견딜수 없게 만들었다.
  "자, 이제 지불할 때가 됐잖아?
  계산 어느 정도 밀렸는지 알고 있겠지? 아니, 뭐 그렇게 걱정만 하라는 건 아냐.
  자, 먹고 마시고 편히 쉬어.
  돈만 내면 되니까.
  하느님은 하늘을 나는 작은 새에게도 먹이를 준비하시니까.
  하느님은 하늘을 나는 작은 새에게도 먹이를 준비하시니까 말야.
  아, 그런데 당신이 밀린 게 2백  프로링이랑 10크로이치마란 건 알지? 뭐, 그렇게 많은 것도 아
닌데..." 주절주절  이어지는 그 잔소리! 이런 빚독촉 잔소리를 들어본 사람들은 모두 알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지...
  화가로서 가진 예술에 대한 사랑,  미를 사랑하는 마음도 라프 영감 같은 사람 앞에선  그저 주
눅들고 만다.
  영감이 하는 잔소리를 듣다 보면 정신이 멍해지고 나중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 가난해도 예
술을 한다는 자랑스러운 자부심조차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라프 영감이 드디어 나를 감옥으로 보내겠다며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을 영감에게 몰리던 어느 날 밤 난 감옥에 들어가는 공포에 몰려 자살을 결심했다.
  면도칼을 손에 쥐고 창가에 있는 낡은 침대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아아!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없을까?
  예술을 위해 내  인생을 바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싶지 않은  엉터리 그림만 그리면서 빚
졸리고.
  이젠 여관집 주인에게 협박까지  받다니. 도대체 나는 왜 살아 있는  걸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마음과 반대로 자살은 점점 내 눈앞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인간은 잡식 동물이야.
  송곳니랑 어금니, 앞니가 있는.
  턱이 그걸 증명하잖아.
  송곳니는 고기를 자르기 위한 거고, 앞니는 과일을 깨물기 위해서.
  어금니는 음식물을 부수고 잘게 씹기 위한 거지.
  하지만 씹을 게 아무것도 없을 때 인간은 의미 없는 존재야.
  바로 지금 내가 그 쓸모 없는 인간인 셈이지.'
  그야말로 무의미하고 쓸모 없는 생각이 나를 구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결국 자살하는 일 조차 바보짓 같았다.
  하여튼 면도칼을 펼치는 것조차 귀찮아 그만두고 다시 쓸모 없는 공상에 빠지느라 촛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그 날밤 난 라프 영감 때문에 무척 지쳐 있었다.
  아무리 그림이나 예술에 대한 생각을 하려고  해도 머리에 떠오르는 건 그림자 그림으로 돈 벌
계산뿐.
  그때 내가 가진 단 하나 욕구는 라프 영감의 지겨운 공격에서 풀려 나는 것뿐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어야 한다!

 

 

    살인 현장을 그리다

  언제인지 모르게 잠들었는데 새벽쯤 눈을 떴다.
  그런데 웬일인지 잠들기 전이랑 내 마음 상태가 완전히 달랐다.
  초상화나 그림자 그림  따위는 그만두고 훌륭한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가슴 깊은 곳에서
용솟음쳤다.
  램프를 켜고 낡은 작업복을 걸치고 종이 위에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종이 위에 그리는 것은 어딘가 이상했다.
  그 밑그림은 내의지 와 전혀 상관없이 저절로 그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면서 선을 그렸고 명암을  넣었고 바림(미술 용어, 색칠할  때 한쪽은
진하게 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차츰 옅게 흐리게 하는 일)을 만들어 넣기도 했다.
  그 밑그림은 어떤 풍경이었다.
  아니, 풍경이 아니라 어떤 사건 장면이었는데  얼마나 섬뜩하고 무서운 것인지! 높은 벽에 둘러
싸인 커다란 창고 같은 방이었는데 바닥에서 2~3m 정도 떨어진 곳에 갈고랑이가 달려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푸줏간 내부란 걸 알 수 있었다.
  왼쪽에는 나무 손잡이가 커다란 톱니바퀴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손잡이로 톱니바퀴를 움직여 소
를 천장으로 끌어올리는 것 같았다.
  타일을 깐 바닥은 완전히 피바다였다.
  그 피는 망으로 막힌 배수구로 흘러갔는데 망 위에는 소머리, 다리등 뼈다귀가 쌓여 있었다.
  벽에 엉성하게 뚫린 창으로 굴뚝 몇 개와 근처 집들 지붕이 보였다.
  그 방구석에는 선반이 있었는데 그 밑에는  그물, 닭장, 토끼장 등 여러 가지 물건들이 쌓여 있
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토록  자세하게 그려낼수 있었을까? 상상력? 아니, 상상력만으론  도저히 불가
능한 일이었다.
  난 정말 알 수 없었다.
  '이런 풍경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본  적 없어. 어떻게 이런 것을 그리게 된 걸까? 아. 나는 드
디어 돌아 버렸는지도 몰라.'
  다시 눈을 부릅뜨고 그림을 보니 틀림없는 내 솜씨였다.
  그림에는 내가 쓰는 독특한 선이나 음영 등 특징이 담겨 있었다.
  여기엔 뭘 그리면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순간 여백에 뭔가가 흔들리며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 움직이는 것이 점점 뚜렷해졌다.
  그것은 거꾸로 솟아오른 사람 다리 하나였다.
  그것은 계속 움직이면서 종이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다리가 점점 올라오더니 무릎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계속해서 드레스 끝자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리가, 가슴이, 얼굴이 몹시 창백하고 부풀어 오른 백발 노파였다.
  그런데 노파의 목을 누군가가 조르고 있었고 그 손위에 노파의 손이 얹혀 있었다.
  노파는 목을 조르는 그 손을 떠내려고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었다.
  그건 무서운 살인 현장이었다.
  나는, 아니 내 손은 내가 본적도  들어 본적도, 그리려고 상상해 본적도 없는 살인 현장을 생생
하게 그려 버린 것이다.
  내 손에서 연필이 떨어졌다.
  난 멍하게 넋을 잃은 채 내 손이 마음대로 그려 버린 그 무서운 밑그림을 바라보았다.
  노파는 우물에 몸을 기댄 채 허리가 꺾여 있었는데 곧 우물 속으로 빠질 것 같았다.
  공포로 일그러진 얼굴은 정말 무서웠다.
  그녀의 손은 목을 조르는 살인자의 손을 떠내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목을 조르는 손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그 손 모양으로 봐선 남자인 게 틀림없었지만 얼굴은 아무리 애를 써도 보이지 않았다.
  언뜻 정신을 차려 보니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무서운 그림을 그리다니...
  분명히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거야.
  이제 그만 자자!
  그런데 내일 내손이 이 남자  얼굴을 마져 그릴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환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그 밑그림을 두려워하며 깜박 잠이 들었다.

 

 

   생각하지 못했던 큰 돈

  다음 날 새벽 일찍 눈을 떴다.
  마룻바닥에 엎드린 채 잠깐 선잠이 들었다 잠이 깨버린 거였다.
  나는 얼른 작업복을 입고 어젯밤에 그리다 둔 밑그림을 계속하려고 했다.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키가 크고 바짝 마른, 검은 옷을 입은 꽤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꽤 특이한 생김새였다.
  미간이 몹시 좁았고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온데다 코는 아주 심한 매부리코였다.
  남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확 크리스찬 베니우스 씨지요?"
  "그렇습니다만..."
  남자가 가볍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나는 후레데릭 환 스프렉타 남작입니다."
  난 깜짝 놀랐다.
  이 괴상하게 생긴 남자가 그 유명한  스프렉타란 말인가? 그는 범죄 재판소 판사였는데 굉장한
그림 애호가로 더욱 유명했다.
  나같이 가난하고 초라한 화가조차 그 이름을 알 정도니까...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왜 갑자기 이 가난하고 누추한 방까지 일부러 찾아온 것일까? 나도 모르
게 벌레 먹은 낡은 가구와 먼지투성이 바닥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더럽고 누추한 싸구려 방에 있는 게 슬프고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스프렉타는 그런 것에는 통 관심이 없는 듯 작은 테이블 앞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베니우스 군 내가 여기 온 것은..."
  입을 여는 순간 그이 시선은 내 미완성 밑그림에 굳은 듯 고정됐다.
  나는 침대 끝머리에 앉아 있었는데 그 남자가 내 밑그림을 유심히 보는 게 왠지 꺼림칙했다.
  스프렉타가 여전히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채 이렇게 물었다.
  "이 밑그림은 자네가 그린 건가?"
  나는 이유 없이 가슴이 두근거려서 겨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이 밑그림 가격은 얼마인가?"
  스프렉탁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그림을 집어들었다.
  그의 시선은 아직도 그림에 고정된 채였다.
  그가 조끼 호주머니에서 돋보기를 꺼내.
  잠자코 그림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 햇빛이 방 한 가운데로 비스듬히 비쳐들기 시작했다.
  스프렉타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지옥에서 나타난 괴물처럼 흉하고 무서운 얼굴이었다.
  그 높은 코가 중간쯤에서 독수리 발톱처럼  구부러진 데다 눈썹은 송충이 두 마리가 앉은 것처
럼 진하고 굵었다.
  게다가 그 심한 주걱턱과 마르고 긴 뺨에는 얼마나 잔주름이 가득한지...
  방안이 조용한데다 잔뜩 긴장해서 거미줄에 걸려 있는 파리 날갯짓 소리마저 벼락 소리처럼 크
게 들렸다.
  "베니우스 군, 이 그림 크기는 어느 정도인가?"
  "가로 1m, 세로 1m30cm쯤입니다."
  "가격은?"
  '아까 분명히 팔지 않는다고 했는데 또 그림 가격을 묻는 걸 보니, 이 사람 그림이 어지간히 마
음에 드는 모양이군.
  좋아! 아주 깜짝 놀랄 만큼 높은 가격을 불러 주지.
  그럼 포기 하겠지.'
  "50도카토!"
  스프렉타는 아무 말 없이 밑그림을 책상 위에 내려놓더니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금화를 세기
시작했다.
  "자, 여기 50도카토. 그럼 거래는 끝났지?"
  나는 잠깐 현기증을 느꼈다.
  스프렉타는 일어나서 내게 인사를 했다.
  내가 멍해 있는 사이 그가 한 걸은 한 걸음 계단을 내려갔다.
  난 점점 멀어지는 그 소리를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그렇게 서 있다 문득 그에게 감사 인사조차 하지 않은 게 생각났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번개처럼 6층 계단을 뛰어내려가 문 밖으로 그를 쫓아 나갔다.
  그러나 거리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 버렸다.
  한참만에 겨우 방으로  돌아와 햇빛을 받아 빛나는 금화 뭉치를  보자 가슴이 두근거려 그대로
서 있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야.
  역시 죽으란 법은 없어.
  어젠 한 푼도 없어서 자살까지 생각했는데...
  어젯밤 난 갑자기 이상한 밑그림을 그렸어.
  게다가 오늘은 큰 돈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고.
  아! 정말 잘했어.
  어젯밤에 면도칼을 펴지 않은 건.'
  그리고 나는 편안히 앉아 어젯밤에 그린 그림을 다시 그렸다.
  다행히 기억은 아주 생생했다.
  연필로 몇 번만 더 만지면 그걸로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곧 실망했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노파 목을 조르는 손의 주인공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점점 초조해질 때, 하필이면 그 때 라프 영감이 노크도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금화 뭉치를 보더니 눈이 휘둥그래져서 고함을 쳐댔다.
  "자! 드디어 들켰군.
  화가 양반!
  이래도 돈이 없다고 계속 잡아 뗄 건가?"
  그리고 영감은 손가락을 갈퀴처럼 구부리곤 할퀼 듯이 내 얼굴을 향해 달려 들었다.
  화가 치밀었다. 영감이 내게 했던  그많은 모욕과 욕설 그리고 탐욕스러운 눈매, 파렴치한 웃음
들이 나를 갑자기 끊어오르게 만들었다.
  나는 성큼 뛰어가 그를 붙잡아 문 밖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영감 얼굴에 부딪힐 만큼 문을 세게 닫았다.
  그러나 바깥으로 쫓겨난 라프 영감은 쉰 목소리로 고함을 지렀다.
  "내 돈이야! 이 도둑놈아! 그건 내돈이란 말야."
  "무슨 일입니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다른 방에 사람들도 나왔는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을 확 열어제치고 라프 영감을 발로 걷어찼다.
  영감은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헛소리하지 마!"
  나는 정신없이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워 버렸다.
  그리곤 내가 한 일이 만족스러워 양손을 비볐다.
  라프 영감에게 한 방 먹인 게 기분 좋아 다시 목탄을 들고 밑그림을 시작했다.
  조금만 더 그리면 완성이 될 것 같았다.
  그때 뭔가 이상한 소리가 났다.
  금속이 돌에 부딪히는 아주 불쾌한 소리였다.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보니 헌병 세 명이 보였다.
  그들은 총을 바닥에 세운 채 여관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라프 영감이 다리라도 부러졌나..."
  나는 불안해져 중얼 거렸다.
  정말 인간처럼 치사한 건 없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자살하려던 내가 지금은 영감이 죽었을까  봐. 그래서 교수형을 당할까 봐
떨고 있다니!
  

 

  네가 범인이다

  계단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어수선함으로 가득 찼다.
  발자국 소리, 총끼리 부딪히는 금속성, 두런 거리는 말 소리...
  이런 것들이 파도처럼 방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방문을 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법률에 의거해 너를 체포한다. 이문을 열어라!"
  나는 부들부들 떨며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문 열어라!"
  아까와 같은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렸다.
  나는 얼른 지붕으로 도망갈까 생각했다.
  그러나 작은 창문으로 머리를 내미는 순간 현기증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잠깐 동안 아래 풍경들이 한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유리창, 창가에 놓인 화분과 새장, 철망 그리고 아래쪽에 있는 발
코니와 그 아래 가로등, 그리고 또 여관 입구에 붙은 '붉은 집'이란 간판까지...
  세 번째 경고 소리가 들렸다.
  "열어라! 아니면 부수고 들어간다."
  도망갈 수 없다고 생각이 들어 포기하고 자물쇠를 풀었다.
  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누군가가 내 목덜미를 세게 때렸다.
  그리고 술 냄새를 풍기는 작고 뚱뚱한 남자가 말했다.
  "당신을 체포한다!"
  남자는 턱까지 단추를 잠근 꼭 맞는 녹색 프록코트에 연통처럼 생긴 모자를 쓰고 있었다.
  게다가 커다란 갈색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손가락마다 모양이 다른 반지를 끼고 있었다.
  또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경찰 서장이었다.
  피스톨 총구처럼 생긴 콧구멍은 하늘을 향해  솟은 데다 윗입술은 말려 올라가 앞니가 온통 드
러나 있었다.
  마치 불독처럼 생긴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밑으로 내려가자!"
  그가 부하들에게 체포하라는 신호를 하며 소리 질렀다.
  명령 받은 남자가 이미 겁에 질려 떨고  있는 나를 잡아 끌었고 다른 남자들은 내 방안을 여기
저기 뒤져대기 시작했다.
  나는 중병을 앓는 환자처럼 양 겨드랑이를 부축 받으며 계단을 내려 갔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발걸음은 한 발, 한 발 휘청거리며...
  그들은 나를 던지다시피 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마차 안에는 늠름한 체격을 한 남자가 둘 있었다.
  두 남자는 곤봉을 보이며 위험을 했다.
  "도대체 내가 뭘 어쨌다는 겁니까?"
  한 남자에게 물었다.
  그 남자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다른 남자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한스, 이 놈이 뭘 했느냐고 묻는데."
  그 웃는 낯이 더욱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드디어 마차가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어둡고 넓은 마당, 병원 창문처럼 늘어선 창문에는 제각기 조그만 환기 장치가 달려 있었다.
  그러나 감옥 안 어디에도 초록색은 찾을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 사방을 둘러 보아도 삭막하기 짝이 없는 풍경이었다.
  아! 이곳이 나의 새로운 집이구나.
  슈릇셀이라는 간수 한명이  마치 양말을 서랍장에 넣듯 나를 돼지우리  같은 감방에 던져 넣었
다.
  나는 양손이 뒤로 묶인 채였기 때문에 구겨지듯 넘어져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라프 영감이 굴러 떨어지면서 비명을 질렀지만 정말 죽을 줄은 몰랐어.
  그래, 누가 자기를 죽였는지 말은 안 했을 거야.
  그래, 취조를 받을 때 이렇게 말해야지.
  라프 영감을 민 건 옆방에 사는 안경 파는 노인이라고.
  그렇게 하면 그 노인이 나 대신 교수형을 받겠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마음이 조금 안정됐다.
  더러운 이불 위에 걸터 앉았다.
  그러나 갑자기 라프 영감이 죽기전에 내가 범인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다리가 저려 오면서 기침이 심하게 났다.
  마치 이미 교수대 밧줄에 매달려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 복도를 걸어오는 슈릇세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돼지 우리 같은 유치장 문을 열고 손짓으로 따라오라는 표시를 했다.
  슈릇셀과 다른 간수 두 명을 따라 긴 복도를 걸어갔다.
  복도에는 마당으로 통하는 창문이 군데군데 있었는데 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복도를 중간쯤 지날을 때 철창에 갇힌, 그유명한 악질범 직크 작크를 발견했다.
  그는 곧 처형될 예정이었다.
  그는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구속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손과 발은 묶여 있어도 입은 자유로웠다.
  그가 나를 보자 이렇게 소리 질렀다.
  "어이! 친구 내가 처형될 때 내  오른쪽에 네 자리를 마련해 두지." 슈릇셀 일행은 서로 얼굴을
보며 웃었지만 나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슈릇셀은 나를 천장이 높고 컴컴한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방 안에는 긴 의자가 반원형으로 놓여 있었다.
  높이 달려 있는 창문 두 개는 굳게 잠겨 있었다.
  벽에는 고목으로 만든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고통스럽게 벌린 그리스도의 양팔, 괴로운  표정으로 기울어진 얼굴, 이런 것을 보며 나는 까닭
모를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정면에 있는 단상에는 높은 의자가 있었는데 두 사람이 빛을 등진채 앉아 있었다 .
  빛 때문에 얼굴 윤곽이 확실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중의 한 사람이 스프렉타라는 걸 알았다.
  또 한사람은 아주 뚱뚱했다.
  얼굴은 동그랗고 양팔은 짧았다.
  스프렉타와 같은 판사 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 두사람밑엔 서기가 앉아 있었다.
  그는 낮은 테이블에 앉아 깃털 펜으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나는 억지로 의자에 앉혀졌고 그리고 스프렉타는 소리를 높여 내게 말했다.
  "크리스찬 베니우스, 이 밑그림은 어디서 구했나?"
  그의 손가락은 지금은 그이 것이 된 나의 밑그림을 가르키고 있었다.
  그림을 힐끗 보고 내가 대답했다.
  "그건 제가 그린 겁니다."
  모두들 조용했다.
  서기가 내 대답을 적었다.
  서기가 쓰는 깃털 달린 펜이 종이 위에 사각사각 달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이 질문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라프 영감을 발로 찬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 같군.' 스프렉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확실히 네가 그린 거지? 그런데 이 밑그림 주제는 뭐지? 뭘 그리려고 했느냔 말야."
  "이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손이 제멋대로 움직여 그린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그리려 했던 게 아닙니다."
  "하!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그럼, 그림  안에 있는 것은 눈으로 본 것을 그린 게 아니란 말
인가?" "예, 상상력이 저도 모르는 사이 이런 풍경을 그리게  한 겁니다." 스프렉타가 아주 엄격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피고 크리스찬 베니우스.
  잘 생각해 보는 것이 좋아.
  거짓말하면 안 좋아."
  나는 얼굴이 흥분해 큰소리로 말했다.
  "내가 얘기한 것들은 모두 사실입니다."
  "서기, 그대로 적게."
  또 사각거리는 펜소리...
  스프렉타가 말을 이었다.
  "이 노파는 ... 우물에서 살해된 이 노파도 역시 상상해서 그렸단 말이지?" "물론입니다."
  "노파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단 말이지?"
  스프렉타는 몹시 화가 난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다시 앉아서 작은 소리로 동료와 의논하는 것 같았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 때문에 실루엣처럼 보이는 그 두사람의 옆 얼굴과 그리고 내 뒤에 서 있
는 침묵...
  모든 것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어쩌란 것인가? 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
  난 마음 속으로 불안하게 울부짖었다.
  갑자기 스프렉타가 간수에게 외쳤다.
  "죄인을 마차에 태우게.
  그리고 메쩨르 거리로 가자."
  그리고 내쪽을 흘낏 쳐다보고 말했다.
  "크리스챤 베니우스. 조금 진정하고 정의에 대해 생각해 봐.
  죄를 고백한다면 신의  자비를 구할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 말은 마치 갑자기  총알처럼 내
머리 속을 크게 울리며 지나갔다.
  나는 두 팔을 벌리고 뒤로 쓰러졌다.
  "그렇게 끔직한 말을..."
  그리고 나는 의식을 잃었다.

  

 

  그림과 똑같은 일이

  정신을 차렸을 때 마차는 천천히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감옥으로 올 때와는 다른 거리였다. 내 옆에는 역시 경관 두 명이 있었다.
  경관 중 한명이 동료에게 담배를 권했다.
  불현 듯 담배 생각이 나 손을 내밀자 그는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나는 창피해서 얼굴을 붉힌 채 창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담배를 가지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바깥을 본다면 싫더라도 수갑을 채워야 돼!"
  나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 징그러운 괴물아! 악마에게 먹혀 버려라!"
  마차가 멈추고 경관 한명이 내렸다.
  그 동안 다른 한 명이 내 목덜미를 잡았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이 나를 바깥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나는 울퉁불퉁한 도링 깔린 길을 비틀비틀 걸었다.
  양쪽 벽에선 노르스름한 물이 끈적끈적하게 흘러 내려 악취를 풍기로 있었다.
  나는 두 남자에게 끌려 자꾸 어둠 속으로 깊게 걸었다.
  어둠 저쪽에서 넓은 방이 어슴푸레 보였다.
  한발 한발 걸어갈수록 점점 더 큰 두려움이 몰려 왔다.
  그것은 가슴을 지르는 듯한 마치 악마에게 짓눌리는 듯한, 이상한 공포감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점점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다.
  경관 하나가 한 손으로 내 팔을 잡으며 고함을 질렀다.
  "어이! 뭐야? 왜 그래! 자아, 걸어!"
  그 복도 끝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 아아! 그것은 바로 전날 내가 그렸던 그 방이었다.
  그걸 보며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이해할수 있겠는가?  이끼 낀 한쪽 벽, 닭장,  토끼장, 큰채와
작은채, 높은 것과 낮은 창문 하나까지, 금간 작은 유리창까지 그 밑그림에 있던 것과 똑같았다.
  이 기괴한 사태에 나는 덜덜 떨었다.
  우물 옆에는 스프렉타와 동료 재판관 한명이 서 있었다.
  두 사람 발 밑에는 그 노파가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창백한 얼굴, 놀라 커다랗게 치켜뜬 흰자위가 많이 드러난 눈, 꽉 깨문 혀...
  너무 처함한 광경이었다.
  스프렉타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아, 어때? 뭔가 할 말 있나?"
  나는 말을 잃었다.
  "너는 이 여자,  테레사 베카를 돈을 뺏기 위해  목을 조르고 우물에 빠뜨려 죽인  걸 인정하겠
지?" 나는 소리 질렀다.
  "아니! 아니오! 나는 이 노파를 모릅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아아! 신이여! 도와 주십시오."
  겁에 질려 절규하는 나를 보며 스프렉타가 한심하다는 듯 소리쳤다.
  "정말 질렸다!"
  그는 더 이상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동료와 함께 돌아가 버렸다.
  경관들이 내 팔목에 수갑을 채웠다.
  나는 멍하니 넋을 잃고 나도 모르는 사이 감옥으로 다시 끌려왔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
  의식이 혼란해서 정말 내가 그 노파를 죽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의 혼란한 모습을 보며 감시인들은 나를 진범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 날 밤 감옥에서 내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더러운 이불 위에 걸터 앉아 작은 창문을 눈앞에 두고 결국에는 끌려 올라갈 교수대를 상
상하며 적막한 밤을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침이 밝았다.
  아침은 또 다시 맑고 푸르러 눈부신 빛이 작은 창문을 비추었다.
  창문의 십자형 창살을 타고 햇살이 따사롭게 빛났다.
  그리고 그빛은 벽 구석구석까지 고루고루 비추고 있었다.
  바깥 거리는 아주 소란스러웠다.
  그 날은 장이 서는 금요일이었다.
  나는 야채를 실은 짐차와 커다란 바구니를 싣고 가는 고깃간 마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닭 울음소리, 그리고 물건을 파는 여자들이 지르는 흥정 소리...
  드디어 날이 환하게 밝자, 사람들 소리가 점점 시끄러워졌다.
  물건이 가득 든 바구니를  들고 왔다갔다 하는 아주머니들, 큰소리로 옥신각신 물건  값을 깎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시간을 짐작했다.
  아침 햇빛과 함께 다시 내 가슴 속에 자신감이 조금 싹트기 시작했다.
  어둡던 마음이 어느새 걷히고 호기심이 머리를 들었다.
  난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싶었다.
  다른 죄수들은 이미 작은 창문으로 기어올라가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벽에 구멍을 뚫어 발을 딛기 쉽게 해놓았다.
  내가 올라갈 차례가 왔다.
  타원형 창문 턱에 팔을 걸치고 목을 굽혀 내다보니 사람들  모습이, 활기찬 모습이 보이기 시작
했다.
  내 뺨에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때 내 머리속엔 이미 자살 따위는 흔적도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서 호흡하고 싶을 뿐이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울부짖었다.
  '아아! 살아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가?
  마차를 끌게 해도 좋아.
  다리에 커다란 족쇄가 채워지더라도 좋아.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저 살수만 있다면...'

 

 

   진짜 범인을 보다

  그 오래된 시장은 매우 번잡스럽고 지저분했지만 그 때 내눈엔 정말 멋있게만 보였다.
  나이 먹은 여자들이 야채 바구니, 닭과 오리가 든 바구니, 달걀 바구니 앞에 앉아 있었고 그 뒤
에는 헌옷을 파는 유태인들이 낡은 목재 빛깔을 띤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기 파는 사람들은 커다란 도마 위에 고기를 놓고 자르고 있었다.
  망토를 걸친 사람들 한 무리는 파이프를 입에 문 채 뒷짐을 지고 점잖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
누고...
  웅성거림, 군중들의 와글거림, 흥정 소리, 고함 소리...
  그 모든 것이 나를 사로 잡았다.
  감옥이라는 아주 비참한 환경에 있었지만 내가 세상에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다.
  그 때 내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등에 커다란 쇠고기 덩어리를 지고 지나가는 남자였다.
  그를 보는 순간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저 놈이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나는 밑으로 뛰어내렸지만 손가락 끝까지 부들부들 떨렸고 얼굴엔 경련이 일었다.
  식은땀이 솟았고 숨이 막혀 그저 작은 소리로 더듬거릴 뿐이었다.
  "저, 저 놈이다.
  그 놈이 저 곳에 있어!
  저기에 있어!
  아아, 나는 저 놈이 진 죄를 뒤집어쓰고 죽음을 기다리는 거야.
  아아! 신이여!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 때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역시 생각대로 거기엔 몽땅 목탄 연필이 들어 있었다.
  나는 벽을 향해 뛰어가 지금까지 떠오르지 않았던 살인 광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미 막히는 곳이 없었다.
  주저하는 곳도 없었다.
  나는 그 남자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 남자를 확실히 본 것이다.
  남자는 내 눈앞에서 모델 역할을 했으니까.
  10시쯤 되자, 간수가 감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내가 그리고 있는 밑그림을 보더니 깜짝 놀라 신음 소리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는 목탄을 잡은 손을 쉬지 않으며 소리쳤다.
  "판사 님을 불러와 주시오!"
  "판사 님들은 너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나는 수수께끼 인물, 노파를 살해한 범인을 묘사하는 밑그림을 손질하며 다시 소리쳤다.
  "진상을 밝히고 싶습니다."
  범인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하얀 벽 위에 모습을 드러낸 그 얼굴은 아주 무서웠다.
  그리고 몇 분 후 재판관 두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벽에 있는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참으며 간신히 소리쳤다.
  "이 사람이 진짜 살인범입니다."
  스프렉타가 잠시 동안 묵묵히 있다가 내게 물었다.
  "이 남자의 이름은?"
  "모릅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지금 시장에 있습니다.
   트래방스 거리로 걸어가다 왼쪽으로 꺾어  들어간 다음 세 번째 좌판에서 고기를 자르고 있습
니다." 스프렉타가 동료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상대방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그 남자를 데려와 볼까?"
  복도 쪽에 서 있던 간수 몇 명이 명령을 받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재판관 두명은 아직도 밑그림을 바라보며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침대위에 혼이 빠진 사람처럼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드디어 먼 곳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구원받을 때를 절실히 기다리며,  지나가는 순간순간들을 마치 오랜 시간처럼 길게 느껴  본 적
이 없는 사람들은 모른다.
  기대와 희망과 불안함에 가슴을 졸이며 기다려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은 그때 내
가슴 깊은 곳에 잠겨 있던 그 절실한 기분을 이해할수 없을 것이다.
  나는 살인자의 발자국 소리, 간수들에게 이끌려 걸어오는 그 발자국 소리를 분간할 수 있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재판관들도 흥분한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쳐들고 심장을 마치 누군가에게 꽉 눌리고 있는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문이 열렸다.
  남자가 들어왔다.
  그 얼굴은 흥분해서 빨갛게 부풀어 올라 있었고 넓은 어깨는 불안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에 빠진 작은 눈은 늑대처럼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스프렉타가 아무 말 없이 그 남자에게 그림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남자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공포를 느낄 만큼 커다란 괴성을 질렀다.
  그가 갑자기 커다란 주먹을 꽉 쥐고 간수들을 때려 쓰러뜨렸다.
  실로 무시무시한 격투가 복도에서 벌어졌다.
  들리는 것은 고깃간  남자가 내쉬는 거친 숨소리, 고함소리,  바닥에 나뒹굴어졌다 다시 일어나
맞는 소리, 그리고 간수들의 발자국 소리...
  결국 살인자는 잡혔다.
  목이 뒤로 젖혀졌고 양팔은 등뒤로  여 올라가 있었다.
  눈은 붉은 핏발이 가득했는데 단념한 표정으로  살인 현장 그림이 있는 벽을 바라보며 뭔가 생
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마치 자기 자신에게 얘기하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누가 날 보고 있었단 말야? 그런 한밤중에!" 그리고 나는 누명을 벗었다.

  악몽처럼 끔찍한 그 사건을 겪은지 벌써 몇 년이 흘렀다.
  그 뒤 나는 하늘이 도왔는지, 이젠 그림자 그림 따위는 그리지 않고 있다.
  또 더 이상 잘난 사람들 초상화도 그리지 않는다.
  공부와 인내심 덕분에 나는 화가로서 성공해 예술 작품을 그리면서 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그 날 한밤중에 겪었던 일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정말 알 수 없는 경험이었다.
  때때로 작품 제작을 하다 내 마음은 어느 새 그 날 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럴때면 나는 파페트를 내려놓고 몇 시간이고 생각에 빠져 든다.
  그것은 내가 전혀 모르는 한 남자가 , 내가 결코 본 적 없는 집 한가운데서 저지른 범죄였다.
  그것이 어떻게  해서 내 연필로,  그것도 그렇게 자세하게  구석구석까지 재현할 수  있었던가?
이것은 내가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았다.

 

 

     분신 인간

  도룸 장은 같은 중학교를 다닌 친구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론 만난 적이 없었지만 그에 대한 소문은 꾸준히 들려 왔다.
  그 소문에 따르면 도룸 장은 막대한 재산을 만들었다 곧 모두 날려 버리고 지금은 파리에서 외
국인을 상대로 관광 안내를 한다고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지 15년이 지난 어느 날  파리에 있는 어느 큰 호텔 앞에서 도룸 장과 우연히
만났다.
  그는 외국인 손님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가 먼저 알아보고 나를 불렀다.
  그런데 나는 그의 얼굴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우물쭈물하고 있는 내게 그가 명함을 내밀었다.
  거기엔 '이니야스 도룸 장 남작'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그제야 그남자가 그 도룸 장이란 걸 알았고 재회 인사를 나누고 그에게 물었다.
  "자네 외국인을 상대로 관광 안내를 하고 있다며?
  그 일로 돈 많이 버나?"
  도룸 장이 약간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넨 날 보통 가이드라고 생각하나?
  천만에 말씀! 바보 취급하면 안 돼! 나는 저런 보통 가이드들과는 다르지.
  잘보고 있으라고."
  그때 마침 그곳에 외국인 관광객 한 무리가 호텔에서 나왔다.
  도룸 장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 그 외국인들이 쓰는 언어로 말을 걸었다.
  그리고 즉석에서 계약이 댔는지 내게 속삭였다.
  "어떤가? 잘 봤지?
  나는 여러 나라 말을 한다네.
  하여튼 나하고 같이 가보세."
  나는 도룸 장과 관광객들과 함께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오페라좌 앞을 통과했다.
  그러자 그가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여기가 바로 오페라좌입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버스가 콘트와르 데스콘트 은행 지점 앞을 지나는데 도룸 장이 이상한 말을 했다.
  "저쪽에 보이는 것은 옛날 룩셈부르크 궁전  지금은 상원입니다." 그 다음에는 카페 나포리탄을
가리키며 "아카데미 프랑세즈입니다."   또 크레티 리네오 은행  앞에서는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
궁입니다." 나는 이미 질려 버렸다.
  이런 바보 같은 일이, 이런 엉터리가 있다니!
  나는 관광객들이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파리 견학을 마치고 버스에서 내릴 때 관광객들은 도룸 장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엄청나
게 많은 돈을 지불했다.
  나는 반나절 동안 도룸 장과 돌아다니면서 옛 친구를 전혀 신용하지 않게 되었다.
  '저 친구는 사기꾼이야.'
  그리고 얼마 안 돼, 내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할게 되었다.
  어느 날 프레누 감옥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도룸 장이었다.
  편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친애하는 친구, 자네는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금양모'와 아르고호 전설을 알고 있지? 금양
모는 고대 그리스의 코르키스 깊은 곳에 용이 지키고 있는 황금 산양의 털이지.
  아르고호는 그 금양의 털을 가지러 갔던 이아손이란 청년이 탔던 배고.
  그런데 나는 이 전설을 현대판으로 재현해 보려고 했네.
  아니, 한밤중에 라 페 거리에 있는 보석상 유리창을 몇 장 깬 것에 불과한 이야기라네.
  그런데 경찰은 내가 그 보석상에서 '금양모' 전설이 담긴 귀금속을 훔쳤다며 체포했다네.
  친구여! 부디 날 도와 주게.
  내가 위대한 예술가인 걸 경찰에 가서 증언해서 나를 석방하도록 부탁해 주지 않겠나?"
  물론 나는 경찰서 따위엔 가지 않았다.
  우선 법원 같은 곳에 불려 다니고 싶지  않았고 도룸 장이 반 쯤 돌아버린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룸 장은 묘하게 내 머리속에 깊게 뿌리 박혀 떠나지 않았다.
  '도대체 그 사람은 지금까지 무슨  일을 하며 살아 왔을까?' 그래서 나는 도룸 장의  과거에 대
해 알아보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아주 놀라운 사실들을 알았다.
  도룸 장의 반생은 헤아릴수 없는 만큼 많은 사건들이 관련돼 있었다.
  처음에 도룸 장은<C.I.C>라는 영화사를 만들었다.
  재미있는 영화를 제작해 그것을 미국이나 유럽 여기 저기에서 상영할 작정이었다.
  주변 사람들을 모아 영화를 제작하기  이르렀는데 도룸 장은 "평범한 영화를 만들면 아무도 안
봐 줄거야. 정말로 한 번 깜짝 놀랄 만한 영화를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냈고 그것을 실행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날 밤 도룸 장은 동료들과 별장 가까운 한적한 길로 나갔다.
  모두 여섯 명이었는데 모두 손에 총을 들고 있었다.
  드디어 두 사람이 그 길을 걸어왔다.
  그들은 젊은 남녀였다.
  도룸 장은 두 사람을 납치해 묶어서 별장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얼마 안돼 역시 지나가던 연회복을 입은 신사 한 명을 별장으로 잡아왔다.
  도룸 장 일행이든 권총을 보며 신사는 벌벌 떨었다.
  도룸 장은 신사에게 말하였다.
  "자네에게 피해를 줄 생각은 없어.
  우리가 요구하는 걸 들어주기만 하면 말야.
  자아, 이 칼로 저 두 사람을 죽이는 거야.
  싫다면 자네가 죽는 수밖에!"
  이렇게 해서 어처구니없게도 도룸 장은 실제 살인 장면을 촬영해 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필름을 가지고 유럽 일대를 돌아다니며 상영해서 큰 돈을 벌었다.
  그 살인 사건의 진범은 분명히 도룸 장이었다.
  물론 경찰들이 수사를 했지만 도룸 장은 약삭 빠르게 법망을 피해 혐의를 벗었다.
  도룸 장이 또다른 범죄를 저지른 곳은 독일 북쪽에 있는 작은 공화국이었다.
  도룸 장은 그 나라 국왕의 후계자 문제에 관여해서 엄청나게 많은 돈을 받았다.
  그리고 도룸 장은 미국으로 건너가 금광 발견 붐을 타고 쉽게 한몫 잡으려 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조사하던 중 한 가지 이상한 일을 발견했다.
  그것은 도룸 장이 같은 시기에,  멀리 떨어진 여러나라에서 두 개 아니면 세 개  장소에서 동시
에 모습을 나타냈다는 점이다.
  '이런 터무니 없는일이 있을 수 있나?'
  나는 몇번이고 확인했지만 도룸  장이 범죄를 저지른 장소와 시간을 일람표로 만들어  보니, 그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나는 또다시 도룸 장에 대해 잊어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신문 기사 하나가 섬뜩하게 나를 사로 잡았다.
  그 신문 기사는 독일 퀘룬 지방에서 있었던 일을 보도하고 있었다.

  "라인 하구의  에렌브라이트스타인에서 바이에른 지방에  걸쳐 있는 '이스라엘 교단'  사람들은
요즘 대단히 흥분해 있다.
  그들 교단 중한 곳에 구세주가 나타나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구세주는 아르다빗드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지만 정부에서는 누군가가 농간을 부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아르다빗드 자신은 자기가 유태인이라고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그는 사보아 지방에
서 태어난 프랑스 인이라고 한다.
  아르다빗드는 마치 마법사처럼 돌연히 모습을 감춘다.
  보통때 그는 교단 교회에서 유태 왕국 재건을 설교하지만 저녁때가 되면 어디론가 모습을 감춘
다.
  그러나 그가 어디로 갔는지 뭘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그는 독일어를 독일 사람처럼 유창하게 한다."
  나는 이 아르다빗드라는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는 것,  그리고 독일어를 유창하게 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뭔가 수상해. 어쩐지 도룸 장이 떠올라.
  아냐, 신경과민이야.
  도룸 장에 대해 너무 생각했기 때문일 거야."
  그런데 그 다음 날 신문을 보고 나는 앗!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것은 전날 보다 더욱 놀라웠다.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프랑크푸르트에서도, 마인츠, 라이프찌히, 스트라스부르크,  함부르크, 그리고 베를린에서도 아르
다빗드가 나타났다고 동시에 알려왔다.
  아르다빗드는 독일 각 도시 유태인 교회에서 동시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각 도시에서 동시에 같은 설교를 했다.
  이 뉴스가 알려지자 유태인들이 몰려 들었다.
  베를린에서는 아르다빗드를 체포하려 했지만 유태인 군중들이 방해해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 틈에 아르다빗드는  예전처럼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런  보도는 계속해서 파리로
전해졌다.
  호외도 계속 발행됐다.
  구세주 아르다빗드는 체코 프라하에도, 폴란드  크라카우에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도, 오스트
리아 빈에도, 이탈리아 로마에도 모습을 나타냈다.
  게다가 사건은 각국 유태인 실업가들까지 관련돼 있었다.
  각국 정부는 서로 협조해 연락을 취한 결과 각국에 있는 아르다빗드와 친밀한 유태인 실업가들
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아르다빗드는 프랑스에도 모습을 나타냈다.
  니스에도, 아비뇽에도, 보르도에도, 산세르에도...
  4월 부활절이 다가왔고 아르다빗드가 파리 빅타월 광장에 나타났다.
  그리고 동시에 오스트리아에, 알제리에, 이스탄불에 성지 예수살렘에도 나타났다.
  부활절 날 나는 서재 책상에 앉아 아르다빗드에 관한 기사가 잔뜩 실린 신문을 자세히 읽고 있
었다.
  그런데 갑자기 인기척이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바로 도룸 장이 서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어, 어떻게 해서 여기로 들어왔지?"
  도룸 장은 침착했다.
  싱글싱글 웃으며 내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고 이렇게 말했다.
  "실은 자네가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말야. 자네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려고 이렇게
온거야." "그,  그보다 도대체 자네는 어디에서 온 건가? 마치 유령처럼 나타나다니!" 그가 비웃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가 묻고 싶은 건가?"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지금 자넨 내 집에 있잖아.
  그렇지?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자네는 어디에 있는 거야?"
  "대답해 주지.
  나는 3개월 전부터 오스트리아 퀸스랜드라는 작은 마을에 있다네.
  하지만 빠른 시일 내에 다른 곳으로 옮길 작정이야."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지금 오스트리아에 있어.
  하지만 내가 같은 시간에 자네 집에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지.
  나는 지금 이 순간에 로마에도 베를린에도, 비보르노에도, 프라하에도 그외 무수한 도시와 마을
에 있으니까.
  그곳 사람들은 내 모습을 볼수 있어."
  그 얘기를 듣고 나는 망설임 없이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그럼 자네가 그 아르다빗드인가?"
  도룸 장이 역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이지. 이제 자네는 내가 말하는 것을 믿겠나?
  내가 바로 그 구세주 아르다빗드야.
  얼마 안 있으면 나는 유태인들의 왕이 될거야."
  나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럼 말해보게.
  도대체 자네는 어떻게 해서 그런 기적을 일으킬수 있게 되었나?" 도룸 장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 잠깐 뜸을 들였다 이렇게 입을 열었다.
  "한 마디로 하면 내 기적은 오직 과학 덕분이야.
  갑자기 4년 전 얘기로 돌아가지만 말야.
  4년 전 난 유산을 이십만 프랑을 손에 넣었어.
  그 돈을 연구에 모두 쏟아  부었어.
  그리고 나는 무선  전신, 무선 전화, 전송 사진,  컬러 입체사진 , 활동 사진 ,축음기  등 연구에
몰두했어.
  내가 발명하고 싶었던 것은 '신출 귀몰 기계'라고 부를 수 있는 기계지.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나?
  하지만 전화로 사람 소리가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까지 전해지잖아.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야.
  몸을 투영하고 그렇게 투영된 것을 다른 장소로 잠깐 옮길수 없을까? 인간이 그런 능력을 갖게
하는 게 불가능할까? 하고 나는 생각했어.
  이렇게 해서 몇 번이나 실험을 거듭하고 수없이 실패를 거듭하다 드디어 나는 기계 두 대를 만
들어 내는데 성공했어." 그는 말을 멈추고 힐끗 나를 쳐다봤다.
  난 반쯤 넋을 잃은 상태였다.
  "그 중 한 개는 내가 갖고 다른 한 개는 몬스리 공원에 있는 작은 길 나무 옆에 두었지.
  내가 가지고 있는 쪽 기계는 나는 전송기라고 이름 붙였지.
  이 기계를 조작하면 언제, 어디서라도 나는 몬스리 공원에 나타날 수 있지.
  즉, 공원에 있는 기계는 수신기 역할을 하는거야.
  그 후 나는 수신기를 샹제리제 거리에도 설치했어.
  그래서 나는 세 군데서  동시에 나타날 수 있게 된거야.
  이렇게 해서 이미 세계를 지배한 거나 마찬가지가 됐지.
  실험이 성공하자 나는 약 2년 간에 걸쳐서 세계 각지 유대교 교회당에 수신기를 설치했어.
  다음엔 세계 주요한 도시와 마을에도 설치했어.
  그 결과가 어떤지는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거야.
  나는 유대 왕국을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고 많은 돈도 손에 넣었단 말이야.
  내 발명품은 여러 가지로 쓸모가 있어."
  도룸 장은 스스로 만족스러운지 키득키득 웃었다.
  "나는 파리 내 집에도 수신기를 설치했어.
  그러니까 난 예루살렘에 있더라도, 멜버른에 있더라도, 시카고에 있더라도 내 분신은 항상 집에
있는 거지.
  그래서 내 아내는 내가 세계 각지를 돌아 다니는  걸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지." 여기까지 얘기
를 듣고 나자 조금씩 화가 났다.
  '도대체 이 친구는 제정신인가?
  그런 이상한 기계 발명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속아서 결국엔 목숨까지 잃
었는지 이 남자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군.
  불쌍한 아내와 자식을 속이고도 마음이 편한가.'
  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만둬! 자네 머리는 좋은지 몰라.
  위대한 과학자라고 쳐.
  그렇다고 자네에게 사람을 우롱할 권리가 있는 건 아냐. 세계를 지배할 권리 같은 건 없어.
  뭐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구세주로 군림할 권리는 없어.
  이제 그만둬.
  그렇지 않으면 자네를 고발하겠어!"
  나는 너무나 화가 나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고발하려면 해보게! 하지만 나는 절대 잡히지 않아!" 그는 비웃듯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항상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권총을  들어 그를 향해 총알 여섯발을
모두 쏘았다.
  도룸 장이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얼른 달려가 보니 도룸 장은 쓰러져 흥건히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내가 사람을 살해한 것이 틀림없었다.
  난 한참 동안 어떻게 할 줄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런데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정신이 그제야 조금 맑아졌다.
  거기가 이상하게 시끄러웠다.
  '도룸 장에게 우롱당한 걸까?
  아까 얘기했던 건 진짜 도룸 장일까?
  아니면 환영일까?
  도룸 장은 변함없이 세계 어딘가에서 요상하  기적을 일으키고 다니는 게 아닐까? 나는 창문을
열고 거리를 보았다.
  많은 신문팔이들이 호외를 팔러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호외를 사러 바깥으로 뛰어 나갔다.
  그리고 호외 제목을 보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구세주 급사!"
  내가 정신을 제대로 차린 것은 새벽 한 시쯤이었다.
  시체는 아직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나는 시체를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피를 깨끗이 닦아냈다.
  다음날 신문이란 신문은 모두 '구세주'의 죽음에 관해 자세하게 보도하고 있었다.
  '구세주'는 세계 8백 40개 도시에서 죽었던 것이다.
  '구세주'는 도시나 마을 유대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던 중 갑자기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
  그리고 그 시체들은 심장 근처에 총구멍이 여섯 개나 뚫려 있었다.
  '구세주'는 8백40개 도시에서  -파리에서는 이상하게 시체 두  구가 발견되었다-같은 시체 8백
41구를 남기고 동시에 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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