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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이야기 <펌>

rnrudRns |2003.06.25 05:34
조회 237 |추천 1

육이오 육이오 발발 후 개정 병원으로 서울 세브란스 의사들이 속속 남하해서 하루 밤 묶고 또 다시 부산을 향해서 떠난다. 최재유 박사가 와서 차선생도 피난을 떠나시오. 아무래도 사태가 심상치 않소, 한단다.

우리 숙부님과 아버지는 이미 떠나셨다.

소문에 인민군이 들이닥치면 이북 사람부터 닥달한단다.

우리 아버지는 사위보고 자네 장모님 부탁하네 하시고. 숙부이 신 이영춘 박사는 병원 부탁하오 하시고 가셔버렸다.

우리 어머니는 그 때 입원실에 계셨고...

밤이면 공습이 무서워 창문에 온통 까만 카-텐을 드리우고.

갑작스레 우리도 떠납시다. 우선 륙구삭구를 만드시오 한다. 함 에 들어있는 광목을 꺼내 쫙쫙 찢어서 큰 가방을 두 개 만들기 시작했다. 재봉틀에다 들들 들들 박고 있는데, 아직 어린 동복이 가 엄마! 우리도 죽이면 어떻게 해?

아무도 죽인다는 얘기를 한 것 같지 않은데, 상황이 그렇게 느 껴지나보다.

멜빵을 여러 겹으로 튼튼하게 만들어 우리 집에서 좀 값이 나 갈만 한 것을 무작정 쑤셔 넣었다.

패물, 비단 등...

다음 날 새벽 4시, 동트기 전에 동순이 업고, 일곱 살 먹은 동 생 주민이 손잡고 고무신 차림에 앞만 보고 마구 달린다. 큰 길 을 향해서, 논 두렁으로...

동복이는 고 또래 애들만 소달구지에 타고... 남편은 밤에 만든 륙삭을 짊어지고. 하나는 영환의 형인 영룡이가 짊어지고... 지 경 쪽으로 열심히 걸었다.

지경 진료소에 이르러 우선 쉬는 모양이다.

숙모님도 계셨는데, 만삭이시라 복대가 시원치 않은가, 조카사 위인 그 이가 다시 양글게 쨉매주고 있었다.

다시 남으로 남으로 가는데, 고무신 때문에 발바닥도, 뒤꿈치도 아파 죽겠다. 나는 고무신을 벗어 들고 간다. 해가 뜨기 시작하 니 땀이 비오듯하고 물이 먹고 싶어 죽겠다. 주민이는 연신 칭얼 대며 운다. 저만치 보이는 우물가에 가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뻘덕 뻘덕 마시니 꿀맛이다. 주민이도 마시게 하고 또 피난 행렬 을 놓칠세라 뒤따르나 따라가지를 못해서, 타고 가는 소달구지는 온대 간대 없고 그 이만 애통 터진가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손 짓한다. 우린 맨 꼴찌로 허겁지겁 따라 가는데, 저 뒤에서는 대 포 소리가 펑! 펑! 들려오니 쉴 수도 없는 노릇.

가만히 보니까 그 사람은 아무 것도 짊어지지 않고 맨 손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도저히 힘들어서 그냥 길가 에 던져 버렸단다. 결국 그나마 쌀이라도 바꿔 먹으려고 갖고 나 온 물건들은 버리고 만 것이다.

가다 물 마시고 가다 물 마시고 종일 물만 마시면서 걸었다. 맨발로 걸어가는 데, 따가운지 어쩐지 아예 감각도 없이 멍하다.

밤 11시 경, 신태인 근처 화호 병원에 도착했다. 가보니깐 계 화도 와 있었고. 아버지, 주헌이 다 보인다. 먼저 떠나셨는데...

상을 쭉 펴놓고 꽁보리밥에 된장국에 김치인데 숟갈로 퍼서 입 에 넣으면 그대로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곧 꿀맛이다.

떠나기 수일 전부터 나는 치통 때문에 감자를 삶아 으깨서 설 탕으로 개서 꼴딱 꼴딱 생키곤 했었지. 그런데 그 날은 아침부터 입으로 물만 마시며 힘들게 걸어가는데 이빨 아픈 기억이 없다. 잔뜩 긴장하면 아픈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장했다가 배불리 밥을 먹고 나니 잠이 비오듯한다. 상묵 오 빠 네랑 우리 아버지랑은 그 길로 또 행차하신단다. 이북 사람 말을 하니 위험하다고...

계화는 나에게 떼어 놓으시고...

그 이는 우리도 가야 할텐데... 나는, 나는 죽으면 죽었지 또 못 걷겠어요. 그냥 자요 우기고 하루 밤 맛나게 자고 깨보니 인 민군이 뒤 따라 쳐들어 왔단다.

우리 남은 사람들은 밖에 나가 패전병 처럼 손을 들고 항복하 고 말았지.

그 다음부터는 인민군들 밥을 해 대라며 돼지 잡아오고 감자와 쌀을 몽땅 가져온다.

가마솥에 감자 찌개하고 밥을 해서 차려 놓으니 지친 인민군들 이 털석 주저 앉아 수저질에 힘이 없다. 필시 강제로 끌려 나온 게 역력하다. 늙은 병사로부터 애숭이까지, 같은 동포인데, 이게 무슨 일일까? 측은하기까지 했다.

그 반면, 서슬이 시퍼렇던 여자 장교는 동무들? 무엇해요. 빨 리 빨리 먹으라우요...

기운 뻗쳐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그 이는 부상병들 치료하라고 병원에 갇히고 우리들은 매일 이 들의 식사 준비를 하고...

안되었던가, 몰래 더 시골에 방을 구했으니 살짝 나가라는 전 갈이 와서, 우리 여자들은 하나 둘 살금살금 빠져 나와 농사짓는 동네에 갔더니 방은 방인데, 자리를 깔지 않고 그대로 흙방이다. 담요를 보내 주어서 그걸로 장판 삼아 깔고 피난 생활이 시작됐 다.

칠월 초라 한창 논일이 바쁜가, 새꺼리 내 간다고 큰 가마솥에 밥하고 반찬하고 부산하다. 가만히 보고만 있기가 뭣해서, 불 때 는 건 이제부터 내가 맡겠다며, 보리 대를 밀어 넣으며 불을 때 는데, 팍팍 탁탁 소리가 나고 밥물이 보글보글 넘고 재미있더라. 그 곳에 우리들을 두고 가면서 그이는 날더러, 우두커니 놀지 말 고 안집 일도 도와주고 옷도 검소하게 입으라고 당부하고 갔었 지.

마루에서는 대 여섯 살 난 애기가 배가 부었는지 산만하고, 어 디가 아픈가 가만히 앉아 밖을 내다보고 앉아있다. 왜 나가 놀지 않느냐 물었더니 벌써 언제부터 설사 병으로 고생을 한단다.

약이 없으니 자연히 낫기를 기다린단다.

나는 피난 올 때 그 동안 애기들 아플 때 먹다 남은 약 봉다리 를 죄다 싸서 애기 포대기 틈에 끼어 가지고 왔었지. 그 때 그 때 어디 아플 때 먹든 약이라고 기록했기 때문에 쉽게 설사 약을 찾아 그 애기에게 먹이니 곧 좋아졌다. 애기 할머니랑 애기 엄마 가 고마워서 물고기를 묵은 지 밑에 깔아 지진 것을 한 사발 갖 다 준다.

그 때까지 우리는 쌀은 있어서 냄비에 해 먹었지만 반찬을 구 할 수가 없어서 밖에 나가 미안하지만 풋고추 두어 개 따다 넣고 된장 지지면 그래도 맛 있었고 호박 잎이라도 밥 위에 찌면 주민 이와 동복이가 저희들만 먹으련다고 했지.

그 때 호박 잎 싸먹던 맛이 제일 일품이었지.

빨래도 그 댁거랑 같이 냇가에 나가 빨아주고 한 집 식구처럼 스스럼없이 서로 도와가며 지내다가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는 판단이 섰던가 도로 개정으로 가야겠다는 전갈이 왔고 곧 몇 시간 후면 소달구지가 당도할 것이니 준비하란다. 돌아가는 길은 전원 소달구지에 타고 편히 간다니 다행이다.

주인집 할머니와 아주머니는 이 말을 들은 즉시 쌀을 씻어 두 고부간에 쿵덩 쿵덩 재빨리 쌀가루를 뽀사서 시루에 안쳐 흰 무 리 떡을 만들어 뜨끈뜨끈한 떡을 한 석작 주면서 가다가 혹시 모 르니 요기하란다.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그런데 그 댁 주인 이름도 다 잊어버렸구나.

개정을 향해 달구지가 가고 있는데 느닷없이 B29가 나타났다. 우리 일행은 잽싸게 구루마에서 뛰어 내려와 논두렁이로 가서 납 짝 업드렸다.

그런데 동순이가 놀라 와- 하고 운다. 나는 질겁을 하고 울지 마! 시끄러워! 하며 입을 막았지. 마치 비행기에서 미군이 우리 애기 우는 소리가 들릴까봐 순간적으로 저지르는 행동이다. 비행 기가 멀리 사라진 뒤 생각해보니, 그 비행기에서 어찌 땅 위에서 우는 애기 소리가 들렸겠는가? 웃음이 나와 깔깔 웃어버렸지.

다시 달구지 신세가 되어 덜그덕 거리면서 당도한 개정 병원 정문 앞에는 인민군이 총을 들고 삼엄하게 보초를 서고 있었고 문초가 시작되었는데, 우리들은 겨우 집으로 들어갔는데, 숙모님 만은 안 된단다. 곧 해산할 것 같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바깥 동 네로 가실 수 밖에 없었지. 주운이를 그 때 병원 뒤 농가에서 출 산하셨으며 그 때 너희 아버지가 봐 드렸지.

몰래 몰래 식량도 공급해드리고.

다시 돌아온 의사들은 인민군의 노예가 되어 지시하는 대로 움 직일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고 우리들은 살얼음 걷듯 조심조 심하며 지내게 되었다.

피난 가면서 입원실에 계신 어머니를 모시고 떠날 수가 없어 서, 어이없게도, 급한 김에 그 산지기 딸인 기자에게 어려운 부 탁이지만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우리 어머니 너희 집에 모시고 가 돌봐줄 수 없느냐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떠나 왔으니 불효 막 급이라.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기자네 집에 안 가시고 은자와 함께 우 리 집을 고스란히 잘 지켜주고 계셨다.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고 은자가 그 때 10살인 데 그 효성은 또 얼마나 갸륵한가.

죄송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사택엔 구두 발로 들어가서 가져갈 만 한 것 모조리 가져 가 버렸는데, 우리 집은 환자와 소녀가 있으니 그들도 인간인지 라 손을 안댄 모양이고, 댑대 피난 가던 우리가 좀 값나간다는 물건들을 길에다 버리고 만 해프닝이 벌어진 셈이다.

언제 공습 경보가 울릴지 모르기 때문에 끼니가 돌아오면 보리 밥이라도 신속히 해서 먹고 사이렌 소리가 나면 앞 다투어 방공 호 속으로 피신하고. 이런 나날을 되풀이하는 중 9.28 수복이 다가오니 슬슬 슬슬 인민군들이 사라졌다. 우리들이 방공호 속으 로 피신할 때면 기운이 없으신 우리 어머니는 벽장 속으로 들어 가시어 문을 꼭 닫고 계셨더란다. 남들은 싹 방공호 속으로 들어 간다는데 방 안에 누워 계시기가 불안하셨던 모양이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냐.

김치 거리가 없어 고구마 줄거리로 김치 담고 가지로도 김치 담고. 우선 가까운 곳에 있는 푸성귀는 모조리 지혜를 짜서 반찬 을 해 먹었지. 이전에는 툭하면 소화가 안되네, 이가 쑤시네 했 는데, 이런 일도 싹 가시고 하는 일없이 삼시 밥만 해 먹는데 왜 그리도 빨리 배가 꺼지고 무엇이든지 다 맛이 있던고....

병원에서는 군인들 수술할 때마다 감시하는 군인이 서 있었고. 수술이 끝나 좀 쉬고 싶어도 집도한 의사더러 직접 환자 옆에 앉 아 회복할 때까지 지키라는 고역을 맡았으니 얼마나 고되었겠는 가.

만약에 그 환자가 더 나빠지면 가만 안 둔다고 협박하며 늦게 야 돌아와서 등화 관제 때문에 전기불도 못키니 유리 창문 쪽으 로 밥상을 드리고. 이것이 김치고 이것이 나물이래요 하며 저녁 을 드셨지.

그 때 이미 병중이었던가 간혹 복통을 호소하고 자주 화장실 출입을 해도 그런 엄청난 병에 걸린 줄은 짐작도 못했었지.

나중에 죽을 먹는다고 하고 점점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국 군이 수복을 해서, 인민군은 다 내빼 버리고 한숨 돌리나 했더니 난데없이 순경이 와서 수갑을 채운다. 죄목이 인민군 치료했다는 이유로 의사들 중 책임자로서 대표로 잡아간단다. 혁대를 푹 내 리고 손을 맞잡아 쇠고랑 채우는 모습을 보자니 기가 막혀 죽겠 다.

역전 유치장에 압류되어 이틀 되는 날 먹을 것을 챙겨 들고 찾 아갔더니 하는 말이, 그 양반 살이 많이 쪄서 몇 끼니 굶어도 괜 찮을 것 같으니 돌아가란다.

애걸 복걸 하다가 결국 거절당하고 돌아오는데 난데없이 왠 빈 지.

사방은 칠흑같이 캄캄한데 억센 비바람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논두렁에서 논 바닥으로 빠져 털썩 주저앉으니 볼만 한데 지나 는 사람하나 보이지도 않고 혼자 엄마! 엄마! 하고 엉엉 울면서 간신히 돌아왔다.

온통 진흙 투성이가 되어서.

김중환 선생과 윤석우 선생은 자기들도 언제 불려갈지 초조한 중에 윤 선생은 낮이면 길에 나가 (대로) 행여나 아는 사람이 지 나갈까 지키고 있었는데, 마침 부산까지 피난 갔다가 되돌아오는 목사 한 분이 찝차 타고 지나시는 걸 발견. 인사하고는 차 선생 이 갇혔다고 하니깐 그 양반이 지서에 들어가서 차 선생을 가두 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당장 내어 주시요. 호통을 치니 알았 노라고 손을 싹싹 빌면서 풀어주어 삼일만에 나올 수 있었다.

그 동안 유치장에서 세멘트 바닥에서 지내자니 춥기는 했어도 간수들이 몰래 먹을 것과 담배를 넣어주어 견딜 만 했단다. 그 길로 몸저 눕게되고 말았지.

큰방에는 남편이 누워있고, 건넌방에는 친정 어머니가 콜록 콜 록 기침 소리 내시며 앉아 계시지.

그 때의 암담했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이 방으로 갔 다 저 방으로 갔다. 생명이 꺼져 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 면서. 나의 무력함을 통탄했지.

밥상을 드릴 때면, 만약 어쩌다 귀한 생선 한 마리가 생겼을 때, 반으로 잘라 어느 쪽을 어머니께 드릴 것인가 망설이는 내 모습이 처량했고...

부산 가셨던 아버지도 다시 돌아오시어 어머니와 동생들 데리 시고 작은 댁 작은 방으로 옮기셨다. 점점 통증이 잦아지자 박종 태 선생을 김영섭 선생 댁으로 보내 와 주시기를 청하게 하니 며 칠 후 김 선생이 당도하셨고. 1951년 1월 개복 수술을 받게 되 었다. 그 때는 이미 암이 너무 퍼져 칼이 들어가지를 않아 열었 다가 그냥 도로 닫았을 뿐이라며 스트랩토 마이싱만 쓸데없이 놓 는다.

환자에게 결핵성이라 속이고, 필요도 없는 SM 주사를 매일 놓 는 것이다.

수술 전까지 너무 힘들어 부축해야만 일어나던 사람이 수술 후 며칠 만에 한결 수월하다며, 자기 근무하던 방을 보고 싶으니 데 리고 가달란다.

부축을 하고 턱없이 야윈 모습으로 걸어서 병원 원장실 의자에 앉아보고, 운동장도 쳐다보고, 포돗이 다시 집에 들어와 자리에 눕더니 피을 마구 쏟는다.


생전 마지막 모습
(1950년)

나를 속였구나. 결핵성이라더니 다 거짓말이었어. 하면서 분개 를 하고. 날더러 일본 사사끼 선생에게 편지를 쓰라며 불러주는 대로 대필을 해서 보내니 얼마 후 답장이 왔는데, 무슨 수를 써 서라도 동경으로 오라. 내가 책임지고 치료하게 할 것이니 아무 염려말고 오기만 하라는 내용이다. 편지를 얼굴에 묻고 엉엉 운 다. 그 때 상황은 이미 떠날 수가 없게 되었다.

통증이 잦아지니, 잠을 잘 수가 없고 진통제를 복용하면 습관 이 된다면서 자기가 손수 처방을 내어 날더러 약국에 가서 다른 약 들어가나 감시해가며 지어오란다. 다음에는 소변 양을 측정해 서 기록하라. 시간 맞추어 열의 상태를 체크해 기록하라. 완전 간호원이 다 되었다.

그러더니 차츰 처방 내기도 힘든가 날더러 대필시켜 약 이름을 알게 해주니, 후일 약국할 때 도움이 되기도 했었지.

집이 안 좋아서 그런가보다 이사 하자시는 어머님의 의견에 따 라 그 위 사택에서 바로 아래 사택으로 환자를 데리고 이사를 하 게된다.

그 동안에 저 윗집에선 동수가 태어났고.

간호에 지친 몸으로 진통이 오니, 그 이는 마지막으로 자기가 있는 힘을 다해 출산을 도와주었다. 내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점이라면, 출산시 아무 걱정 않고 알아서 잘 처리해 주려니 하는 믿음으로 아무 불안감 없이 해산할 수 있었다는 것, 단 이것 한 가지였다.

동수를 낳고 사흘도 못 쉬고 그냥 밤새기치는 간호에 늘 잠이 부족해서 꾸벅 꾸벅, 낮에도 꾸벅 꾸벅.

소변이 안나와 도뇨하다가 아파서 다음부터는 뜨거운 물, 찬 물 주전자 둘을 준비, 소변 마려울 때마다 세수 대야에 물 온도 를 조정해서 침대에서 내려와 엉덩이를 담그면 자연히 배뇨할 수 있었다. 이 일을 낮이나 밤이나 연속인데, 그런 수발을 아무하고 나 교대할 수가 없어, 산후 조절도 못했으니 말이 아니다.

동네 사람들이, 차 선생 댁은 부인이 먼저 어떻게 될 것 같다 고들 했단다.

하루는 주전자 물을 세수 대야에 붓으면서 마냥 줄줄 딸다 보 니 곧 물이 넘칠뻔 했다. 꿈을 꾸면서 물을 붓고 있었나보다. 다 음날 군산 아버지가 오시니 사위 말이 저 사람 힘들어서 큰일 났 어요, 한다.

어느덧 여름이 닥친다. 동순이는 이모인 계화가 데리고 잔다. 매일 밤 이모 옷에다 오줌을 싼다고 한다.

기저귀를 빨아 개켜 놓은 것을 두 손가락으로 집어들고 엄마! 기저귀 가지고 왔어! 한다.

동복이는 제 딴에 아빠 상태가 심상치 않은가, 저희 아빠가 누 워있는 방 앞마당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방 안의 동태를 살핀다.

채소 밭에 심은 가지야 오이를 따려고 계화가 바구리를 들고 따는 모습이 보인다. 오동통하니 물이 올라 한창 고울 때였지.

어머니께서 오셔서 반찬을 만들어 주시고, 나는 오로지 밤이나 낮이나 침대 옆에 앉아 부채질하다, 식사 수발하다, 소변 수발, 안마하랴 바쁘다. 부채질할 때면 으례히 꾸벅 조는 바람에 환자 얼굴을 탁 친다. 깜짝 놀라 깨곤 했지.

동수가 배고프다고 울면, 어멈아! 젖 먹여라! 하시면. 이 쪽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앉아 환자 용태를 살피면서 왼쪽 젖만 물리 고 그 시간에 나의 식사를 한다. 그 새 중간에 아기가 칭얼대면 숙모님 젖을 얻어 먹이기도 했단다.

언제나 이렇게 왼쪽 젖만 물렸드니 짝 젖이 되어버렸다.

하루거리로 그 먼 군산까지 나가셔서 아드님 드실만한 반찬 거 리를 사다가 반찬을 해 주시는데, 잘 먹는성 싶으면 다음 끼니에 그 반찬이 또 올라간다.

아프니깐 공연히 짜증이 나는가. 전에 없이 반찬 투정이다. 한 번 먹으면 또하구 또하구 한다고.

무슨 그런 말을 해요. 어머니가 얼마나 힘들게 장만하시는데요.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내 뺨을 찰싹 때린다. 얼얼하다. 내 생 전 그 누구에게도 뺨 맞아본 기억이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오죽이나 신경질이 나면 그럴까 싶어, 절 때려서 시원 하면 얼마든지 때리세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어머니 ∼ ∼.

엉엉 울면서 어머니를 부른다.

어머니, 제가 이 사람을 때려버렸어요.

절대로 손찌검을 하는 일 없이 살기로 마음 먹었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랬어요, 하면서 엉엉 운다. 그이답지 않다.

그래. 그래서라도 화가 풀리면 쓰겄다만... 어머님 말씀이시다.

1951년 6월 2일. 자기 양력 생일이다.

두 번째 수술을 한단다. 하도 용변보기가 고통스러워 그 일이 나 도와주는 의미로. 직장 부위를 잘라 배 위로 나오게 해서, 각 각 꾸매 고정시켰다. 위쪽 장에서는 대변이 나오고, 아래쪽 장에 서는 피고름이 나온다. 아무 기척도 없이 수시로 대변이 배 위로 나오는 것이다. 다행히도 악취가 없다. 항문을 통과해야 냄새가 나는 것일까?

소독 꺼-즈 통 큰 것을 병원에서 갖다주어 가-제를 얌전하게 개켜 넣어주고 핀셋트로 수시로 오물을 닦고 새로 갈아 부치고, 종일 이 일의 반복이 시작되었다.

아이구매 배야! 아이구매 배야! 애절한 통증의 호소다. 24시간 연속.

진통제 주사나 복용약으로 가라 앉힐 수도 있는데, 본인이 거 절하니 하는 수가 없다.

매일 프라스마 한 병씩 맞는다.

기운이 극도로 약화해서 말소리도 작아진다.

프라스마 맞으면 거짓말처럼 말소리가 높아지고...

점점 몸이 붓기 시작. 아무래도 가까워 온 것 같으신가 우리 아버지는 사위에게 유언하라고 했던 모양이다. 어떻게 그런 말을 입에 담으실 수 있으셨을까? 날더러 가까이 오라드니, 아버지가 날보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래. 내가 울음이 나오려고 하니깐 울지마. 나 안 죽어. 만약에 죽게되면 할 말을 못하고 갈까봐서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거니깐 울지마.

아버님 어머님께 먼저 가게되서 죄송하다는 말씀 꼭 드려줘.

미안해. 김효진씨 아들한테 시집 갔으면 이런 고생 안시켰을텐 데...

그런 소리 말아요. 난 후회 안해요. 애기들을 나 혼자 다 어떻 게 하란 말이에요.

미안해. 이제와서 무어라고 할 말이 없어. 너무 어리고. 알아서 개성에 따라 기르시오.

한 가지 꼭 부탁이 있오. 우리 어머니 젊어서 이후로 너무 고 생만 하신 분이니 잘 부탁해요. 하지만 내 바램이지 강요는 아니 오.

의학 서적이 꽤 되는데, 병원에 신세를 너무 많이 지고 갚을 길이 없으니 모두 기증해주오.

이와나미(岩波) 문고는 내가 즐겨 읽던 책들이니 나보듯 읽어 보시오.

이것이 나에게 마지막 남긴 유언이었다.

동생을 들어오라 하더니 얼싸안고 엉엉 우는 소리가 들린다.

형이 너를 미국 유학까지 보낼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떠나게 됐구나 하며

수일 전까지만 해도 지켜주시던 어머님께서 어디가 점을 첫드 니 음력 6월 27일을 넘기면 아드님이 회생할 것이요, 했다면서 만류해도 굳이 떠나시고 안계셨다. 아들 운명하는 참상을 목격하 는 모친의 마음을 헤아려 한 말이었는데, 행여나 하셨었지.

30일에 유언을 마치고, 31일 정오, 보통학교 동창이 모처럼 문병을 왔다.

모기만한 소리로 '프라스마'를 되풀이 한단다.

그날까지 군산 시내 약국에 있는 프라스마는 다 갖다 맞고 바 닥이 나서 더 기운을 못채린 것인데, 정신은 환해서 프라스마를 원한다.

알았어. 기다려. 내 어디라도 가서 구해올께. 하고는 나가드니 1시 반쯤 운명한 다음에야 사들고 들어오더라. 병원 의사들이 침 대 주위에 뺑 돌려서서 오열해주는 가운데 12시 30분 세상을 뜨 고 말았다.

<좋은꾼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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