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
어떤 스페인어 교사가 학생들에게
스페인어에는 명사에 성의 구별이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컨대,
스페인어에서 "집(house)"은 여성이지만 "연필(pencil)"은 남성입니다.
한 학생이 물었습니다.
"컴퓨터(computadora)는 남성인가요, 여성인가요?"
바로 답을 알려주는 대신, 그 교사는
학생들을 남학생과 여학생들로 나눈 다음
토론을 해서 컴퓨터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판단해보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네 가지 이유도 들어보라고 했습니다.
- 12세기 희대(稀代)의 연애 사건 :
그런데 위의 프롤로그에서 교사의 수업 방식은
중세 최대의 연애사건을 일으킨 스토아학파의 학자 중 한 사람인
아벨라르가 썼던 방식으로 여겨진다.
기욤과 아벨라르 변증법...
잘 써먹으면 작업용(?)으로도 만빵인... ㅋ
아벨라르의 논리학을 살펴보면서
난 언어의 본질에 대해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언어의 자의성, 분절성, 추상성 등
언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조금은 모순되지만 그것이 그 속성이자 특성인...
아벨라르(Pierre Abelard)...
신의 본질조차도 변증법적으로 풀고자 한 유럽 최초의 지식인!
서양 문화를 지배한 신과 인간,
그리고 그 중재적 능력으로서 그가 강조한 이성에 대한 관념은
데카르트에게 고스란히 전승되어,
'나'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통해 데카르트는
중세철학과 명백하게 선을 그을 수 있었고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새로운 명제는
이 명백한 경계짓기를 위해 발명된 것으로
이로 인해 데카르트적 명제는 하나의 진리로서
근대까지 서구문명을 이끌어온 핵심적 사유방법이 되었는데,
이를 중세의 아벨라르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면
아무래도 무리가 따르는 과장이겠으나
그렇다고 전혀 근거 없는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그런 아벨라르에게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희대의 연애 사건이 있었으니,
운명적(?)으로 사랑하게 되고
그리하여 한 사람이 불구가 되기까지
그 사건(?)은 불과 일년반 남짓한 기간에 일어났다.
아벨라르(Abelard)는 12세기 중세 신학자이자 카톨릭 수사였고
엘로이즈(Heloise)는 후에 수녀(원장)이 되지만
그들은 평생에 걸쳐 서로 사랑했다.
그들은 <트리스탄과 이졸데> 만큼이나 유명한 중세의 커플이었다.
트리스탄은 음악교사로서 이졸데를 처음 만나고,
아벨라르는 가정교사로서 엘로이즈를 만나게 된다.
엘로이즈 외에 그 누구도
아벨라르의 욕구, 그의 사상적 토대, 그의 철학적 신학적 진지함,
그리고 이에 못지 않은 그의 인간적 약점 등에 대해 더 잘 알지는 못했다.
- <중세 최대의 연애사건>, 에버하르트 호르스트(Eberhard Horst)
"연인에게 필요한 일반적인 매력들을 일일이 따져본 후,
나는 엘로이즈를 잠자리로 유혹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쉽게 성공하리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때 내게는 젊음과 뛰어난 외모가 있었고
나를 추켜세우는 높은 평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사랑을 받는 영광을 누리는 여인이 날 거절하리라는 두려움 따위는 갖지 않았다."
모든 것은 이처럼 아벨라르의 오만과 자아도취에서 비롯되었다.
적어도 그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시작이야 어떠했든 두 사람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달아올랐던 모양이다.
개인교수를 자청한 아벨라르는 곧 엘로이즈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이후 두 사람은 엘로이즈의 삼촌이자 후견인인 풀베르의 눈을 피해
그야말로 뼈와 살이 타는 밤을 보내게 된다.
아벨라르의 고백을 들어보자.
"그녀의 공부는 우리에게 은밀히 사랑을 나눌 기회를 주었다.
눈앞에 책을 펼쳐도 책의 내용보다는 사랑의 말들이 먼저 다가왔고,
가르침보다는 입맞춤이 더 절실했다.
내 손은 책장보다 그녀의 가슴에서 더 자주 방황했고,
사랑에 빠진 우리의 눈길은 책을 향하기보다는 서로를 향했다...
요컨대 우리는 욕망에 이끌려 모든 사랑의 행위를 시험해보았고,
사랑의 이름으로 고안한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 환영했다."
이제 아벨라르는 학문을 버리고 제자를 멀리하며,
강의를 정형화하고 (유일) 강의록을 신성시하는 소위 '중견교수 신드롬'에 빠지기 시작한다.
ㅡㅡㅋ
어쩌면 대학의 역사를 얼룩지게 만든 이 무서운 병마(?)를
처음 접하고 퍼뜨린 장본인이 바로 그인지도 모른다. ㅋㅋ
"관심과 집중력이 떨어짐에 따라 내 강의는 영감을 잃고 단순히 반복적이 되어갔다.
나는 예전에 한 말들을 그냥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영감이 오는 것은 학문의 비밀을 설파할 때가 아니라
사랑의 노래를 지어 부를 때였다."
빠리는 온통 두 사람의 스캔들로 떠들썩했건만,
유독 '미련한' 풀베르만 한동안 똥오줌 분간을 못했던 것 같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그가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을 때
그들을 휘감은 감정의 불길은 이미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크게 번져있었다.
풀베르의 반대에 아랑곳없이 은밀한 만남은 계속되고,
급기야 엘로이즈가 임신을 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일이 본격적으로 꼬이기 시작했다고 할까.
아벨라르는 엘로이즈를 몰래 자신의 고향 브레따뉴로 보내고,
엘로이즈는 거기서 남의 눈을 피해 출산을 한다.
풀베르의 분노를 피하고 학자로서 쌓아온 명성 또한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조카가 사라진 걸 알고 광분하는 풀베르 앞에서 아벨라르는
결국 엘로이즈와 결혼할 것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엘로이즈의 입장은 완강했다.
파멸에 이르는 결혼보다는 대가없는 '자유' 연애를 택하겠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의 학자적 평판이 결혼으로 인해 손상될 것을 두려워했다.
당시 엘로이즈의 신념은 세월의 모진 풍파를 견뎌낸 어느 훗날
아벨라르에게 보낸 위의 편지 내용 속에 그대로 녹아있다.
- 엘로이즈(Heloise)의 연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
당신은 알고 계시며,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당신과 함께 무엇을 잃어버렸는 지를...
내가 생명과 영혼을 다 바쳐서 당신의 것임을 온 세상에 알릴 수 있다면,
나는 주저없이 나의 이 낡은 겉옷을 그리고 나의 오랜 마음을 바칠 수 있습니다...
굳건한 부부의 천생 인연, 초야를 밝히고 아침에 남편에게서 받는 선물
- 내가 그것에 마음을 쓴 일이 있었던가요?
아내라는 이름에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존경과 영속적인 것을 느끼겠지요.
하지만 당신의 연인으로 불리는 일은 내게는 언제나 감미롭기 그지없는 일이었습니다.
부디 화내지는 말아주세요.
당신의 정부, 당신의 창녀라고 불려도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어주실 것이로되,
만일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전세계의 지배자가 되어
내게 청혼하고 전세계를 영원히 내게 주겠다고 해도,
나는 황후가 되기보다는 당신의 창녀라고 불리고 싶습니다.
신께 맹세하고 당신이 자신을 희생으로 바친 신께 맹세하고,
제발 나를 찾아와주셔요.
오직 한분, 가장 사랑하는 분,
내게는 당신의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보다
더 원하옵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엘로이즈(Heloise)가 아벨라르(Abelard)에게
결국 아벨라르의 설득이 엘로이즈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함께 빠리로 돌아온 두 사람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린다.
애초에 결혼을 비밀에 붙이겠다는 합의가 있었지만,
'머리 나쁜' 풀베르는 이를 쉬이 잊고
이내 두 사람의 결합에 대해 떠벌리고 다니기 시작한다.
이에 격분한 아벨라르는 엘로이즈를 빼돌려 빠리 근교의 한 수녀원에 은거시키는데,
이때 그의 마음에 엘로이즈를 정말 수녀로 만들 생각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훗날 엘로이즈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히듯이
엘로이즈를 면회하러 간 아벨라르는 수녀원 식당 한 귀퉁이에서
그녀와 뜨거운 정사를 나누는 불경스러움조차 서슴지 않는다.
욕정의 이름으로든 사랑의 이름으로든 두 사람의 관계는 여전히 식을 줄 몰랐다.
하지만 모든 것이 엘로이즈를 제거하려는 아벨라르의 계략이라 생각한
'단순무식한' 풀베르는 절치부심 끝에 야음을 틈타
함무라비 스타일의 복수혈전을 감행한다.
그의 사주를 받은 정체 불명의 사내들이 아벨라르의 숙소를 급습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그의 신체 일부 (his balls -_-;)를 강제로 도려내 버린 것이다.
피의 천백배 복수, 정적을 가르는 외마디 비명, 그리고 긴 침묵...
아벨라르는 그 밤 그렇게 남성을 잃었다.
빠리의 오만한 우상이자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삐에르 아벨라르.
남성적 매력에 대한 자부심 또한 남달랐기에
어쩌면 윌리엄 월러스 못지 않은 마초였을 그는 이렇게 한 순간에 거세당하고,
육체의 일부와 성적 정체성이 동시에 잘려나가는 억겁의 고통을 맛보았다.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전해들은 빠리는 충격에 휩싸였고,
아벨라르의 제자들과 여성 추종자들은 그의 집 앞에 몰려와 울부짖으며 혼절했다. ㅡ.ㅡ;;;
그와 안면이 있는 한 수도원 부원장의 회고에 따르면,
빠리의 여인들이 그를 잃은 슬픔에 절규하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보기 딱한 광경이었다고 한다.
"내가 여인들의 흐느낌을 굳이 묘사할 필요가 있겠소.
이 소식을 들은 그들은 그들의 기사인 당신을 잃은 것이 슬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소.
마치 모두가 전투에서 남편이나 연인을 잃은 것 같더이다."
'기사'라고 했다.
그들에게 아벨라르는 학자이고 선생이기에 앞서
찬란한 수사의 갑옷을 입은 '기사'였다.
변증법의 칼을 휘둘러 여성을 지키는, 아니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사.
그 기사가 막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고 쓰러진 것이다.
'죄값'을 치른 대가로 목숨은 건졌지만,
그들의 하늘에서 아벨라르의 별은 이제 영영 떨어져 버렸다.
- <세계사를 바꾼 철학의 구라들 (Kleine Geschichte Der Philosophie)>, 2004, 폴커 슈피어링
아벨라르,
그는 스승 기욤(Guillaume de Champeaux, 1070~1121)과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까지 논파하던 당대 최고의 논객이 아니던가?
사랑이 그의 숙명통(宿命痛)이 되기 전,
그는 당대 정신계의 좌장으로 입신의 탄탄대로를 밟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20살 연하의 제자 엘로이즈의 살을 살살 만지다가 급기야 임신시킨 후,
이를 사련(邪戀)으로 치부한 그의 친지들로부터 궁형의 테러를 당한다.
졸지에 성기을 뽑힌 -_-;;; 이 천재적 지식인은
육체의 허약에 따라붙는 만고의 보수주의로 회귀한다 ;
그의 신앙은 더욱 근엄해지며, 그의 학문은 더욱 추상적으로 변한다.
여담이지만,
실연한 지식인은 더욱 추상적인 학문에 몰두하는 법이라던 바르트, 그리고
자신의 동성애를 숨기기 위해 철학 속으로 도피했다는 누명을 쓴 바 있는
비트겐슈타인 등의 얘기를
참고할 만하지 않은가?
단숨에 성기의 그 초절한 맛 -_-;;; 을 잃어버린 아벨라르가
신과 예수를 더 가까이 하려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자신의 아이를 낳은 여자를
갑자기 '예수의 신부'라고 강변하면서
종교적 회오의 마조히즘에 빠진다.
또 여담이지만,
이들의 사랑은 종교의 현실적 기능에 대한 좋은 방증이다 :
종교는 예방이 아니라 참회의 기능이 보다 현실적인데,
이로써 종교가 왜 늘 모자란 사회철학일 수밖에 없는지 쉽게 가늠할 수 있다.
‘모든 종교의 핵심적 기능은 애도’라는 엘리아스 카네티의 지론도 여기에서 멀지 않다.
- Epilogue : 컴퓨터는 남성인가, 여성인가?
남학생 그룹이 발표하길, 컴퓨터는 틀림없이 여성 명사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
1. 그들을 만든 이 말고는 아무도 그 내부 논리구조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
2. 그들이 같은 동료 개체들과 소통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는 외부인들에게는 절대로 이해 불가능하다.
3. 대단히 사소한 실수도 장기 기억 모듈에 단단히 저장되어 나중에 언제라도 꺼내 쓰여진다.
4. 하나 장만해서 한 시름 놓았다 했더니, 그걸 위한 악세사리들을 사는데 매달 받는 월급의 절반을 쓰고 있다.
한편, 여학생 그룹은 컴퓨터가 남성 명사일 것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왜냐하면 :
1. 그거 갖고 뭘 좀 해보려고 하면, 먼저 작동 스위치부터 매번 눌러서 부팅시켜야한다.
2. 갖고 있는 데이타는 엄청 많지만 스스로 생각하지는 못한다.
3. 우리가 문제를 푸는데 도움이 되라고 생긴 거지만, 많은 경우 그들 자체가 문제거리다.
4. 하나 장만하자마자,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더 좋은 모델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학생 그룹이 이겼답니다. -_-;;;
- Postscript
행여 실제 스패니쉬에서 컴퓨터가 '남성 명사'라고 잘못 생각하실까 봐 덧붙입니다.
* 스페인어 : La computadora, La calculadora => 여성
원래 배, 자동차 등의 기계는 스페인어에서 여성으로 많이 사용한다네요.
controllable 하다고 생각하는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서버는 스패니쉬로 servidor, 남성형이라는 군요. ㅡ.ㅡ;
* 프랑스어 : L' ordinateur, L' calculateur => 남성
* 독일어는 그나마 중성형이 있지만,
참고로 독일어에서 컴퓨터는 남성형입니다. der Compu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