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차장 대 박 차장
(삶의 향기- 이숙은 'HEREN' 본부장)
직업 드라마는 속성상 일반인에게는 호평을, 해당 직업군에게는 악평을 얻게 마련이다. 잡지사 한복판의 필살기를 다룬 '스타일'은 20%대의 높은 시청률에도 원작에 비해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게 잡지판의 중론이다.
얼마 전 종영한 '파트너' 또한 나는 꽤나 마음을 졸이며 봤는데 한 변호사는 "리얼리티가 없다. 몇 년 전의 의뢰인에게 동일한 건으로 소송을 제기한 것 자체가 자격상실 감이고, 상대방 로펌 변호사와 연애하는 것도 품위 유지 위반으로 징계 사안이다"고 신랄했으니 이래저래 직업 드라마는 위험한 것일까. []`
드라마 '스타일'에서도 역시 하늘이 두 쪽나도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광고주를 끌어들여, 거기서 편집장이 얼마나 받아먹은 거야?"란 대사가 오갔던 3회. 오프라인 호시절에도 광고를 게재하게 만들고 욕먹은 편집장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물며 지금 같은 불경기에 1,2등 잡지라고 편집장 마음대로 광고주를 선택하고 게다가 돈까지 받다니. 얼마를 쓴 거면 몰라도 이건 아무래도 요즘 버전은 아니다.
"오늘부터 마감이야. 각 잡고, 깃 세워." 마감을 앞둔 편집부에 던진 박 차장(김혜수 분)의 이 말은 사족없이 깔끔해서 써먹을 요량으로 메모를 해두긴 했다. 하지만 현실의 박 차장은 "첫날인데 저녁 같이 먹고 시작할까"정도로 애교 있게 외치는 쪽일 것이다. 속은 까맣게 타도 겉은 부드러운 게 현실의 박 차장들이건만 드라마의 박 차장은 부럽도록 당당하다. []`
또 하나. "소신 좀 지키세요. 이러니까 만년 2등 소리를 듣죠." 상사인 편집장에게 이런 말을 날릴 수 있는 강심장 박 차장은 없다. 물론 역학관계상 넘버 1과 넘버 2가 찰떡궁합이긴 힘들지만 현실의 박 차장은 대개 10여 명 에디터의 맏언니 노릇을 하고 있다.
후배의 섭외를 도와주고, 편집장의 결정을 에디터들에게 이해시키기도 한다. 둘의 관계는 간혹 날이 서기도 하지만 결국 박 차장은 편집장의 오른팔인 셈이다. []`
쓴 김에 떠올리면 "'스타일'이 네 일기장이야? 쉬고 싶으면 영원히 쉬어." 이 장면. 잡지는 오랜 세월 다져온 그 잡지만의 고유한 맥락. 기사 가이드라인 등이 있어 간혹 에디터 훈련용으로 '일기장 운운' 할 때도 있다. 하지만 편집장은 대개 "드릴 말씀 있는데 시간 있으세요"라는 면담 요청을 가장 무서워한다.
"그만둔단 말만 아니면 시간 많아." 벌렁거리는 가슴을 쿨한 척 달래가며 대응하는 새가슴 편집장이 열에 아홉인 것을, 무슨 배짱으로 영원히 쉬라는 말을 날린단 말인가. []`
"인터뷰 안 하겠다"는 사람을 섭외해 멋진 화보를 만들어내는 장면은 과장과 희화화를 거쳤지만 대체로 맞다. 전화와 메일은 기본이고, '시안을 들고' 집으로 무작정 찾아가기도 한다. 인터뷰이가 좋아하는 사람을 먼저 설득해 함께 등장시키는 것 또한 익숙한 수법. 인터뷰이의 '오케이'를 얻기 위해 그야말로 '영혼을 팔아서라도' 섭외하는 것이다. 이에 더불어 "에지 있게 해"
"머리에 쥐난다" 같은 대사는 잡지사 언어에 가까워 현장감이 있다.
그나저나 중학생 딸아이 친구들이 잡지기자를 꿈꾼다는데 한 달에 일주일은 '사무실 소파의 노숙자'가 되고, 연봉도 생각만큼 높지 않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긴 회색 파티션에 온갖 잡지와 시안으로 어지러운 진짜 잡지사 풍경이 드라마에 나왔어 봐. 더 화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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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09. 8. 17. 월. 오피니언 P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