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말실로 옮겨보니 뱃속의 아이는 이미 사망한 뒤였고, 세상 밖으로 나온 딸아이는 이름 대신 식물인간으로 구분되어 중환자실로 긴급히 이송되었어요. 그때 당시 2kg였던 아이는 두 달간의 인큐베이터에서 생명만 연장했고, 의산들의 권유로 호흡기를 떼고 장례식장으로 다시 이동했지요. 장례식장 이동시 모든 환자는 하얀 천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다 덮어씌우고 환자용 침대에 눕혔지요. 2kg의 제 딸은 너무 작아 침대에서 떨어질까봐 엄마에게 안고 가라고 건네주었어요. 장례식장으로 들어가는 긴 통로의 복도는 정말이지 지옥문으로 들어가는 두려움, 무서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때 전 결심했습니다. 죽어도 같이 죽겠다고.... 시체 보관실로 다시 이동되어 냉동고에, 보관하기 위해 아이를 쌓던 보자기를 풀어보는 순간 아이는 혼자서 쌕쌕 숨을 쉬고 있었어요. 의사들은 말합니다. 머리의 95%의 뇌수가 뇌를 누르고 있어 이미 회복불능상태이며, 수술을 해서 기계를 심는다 해도 역시 지금의 상태처럼 생명연장일 뿐, 걷지도, 말하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가능성만 가지고 있다고.... 당시 의료보험이라는 제도가 없던 시기라 경제적 타격에 대해서도 의사들은 말합니다. 끝도 없는 구멍난 독에 물붓기라고. 희생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후일 생겨날 형제들까지도, 모든 것을 포기 또 포기 해야한다고. 아이 소식에 제일 먼저 찾아주신 친정아버님은 의사들에게 정중히 부탁드렸어요. “ 선생님 제 딸은 착한아이입니다. 이대로 저 어린 것을 둔다면 제 딸 가슴에 한이 되어 결코 생을 살아가지 않을 것입니다”.아버님은 어머님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힘들어 할 자식들을 위해 스스로 재혼을 포기하면서 자신은 힘든 외길로 35년째 수절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자식을 살리기 위한 사투는 무려 12년 10개월 이라는 병원생활입니다. 중환자실과 일반병동을 오르락내리락 하였고, 뇌수술은 7번 진행되었지요.( 퇴원 후 3번 추가수술) 인간의 의술 중 가장 어렵고 힘들다는 뇌를 무려 7번이나(1번하면 8개월에서 1년 입원, 후유증 증세로 3년 동안 지나야 안심이 됨.), 아이 머릿속에는 6개의 기계장치가 심어졌고(현재 유럽 최고는 5개, 미국 하버드는 7개), 머리→가슴→배→장으로 연결되어 한마디로 기계 인간 인 것입니다. 아이에게 귀속에 대고 속삭입니다. “애기야 잘 잤어? 엄만 우리 애기가 너무 자랑스러워. 이렇게 힘든데도 하루하루 너무 잘 버티고 있어서 말이야. 사랑한다 애기야. 그리고 우리 조금만 더 힘내자.” 의사들도, 병실에 놀러왔던 수많은 사람들도 제게 말합니다. “ 저러다가 멀쩡한 엄마 잡지....쯧쯧” 그때 그 긴 병원생활로 인해 탄생된 법률이 바로 의료보험 이지요. 남편의 아이디어로 그리고 현실적인 병원생활의 이런저런 황경 탓으로 보건복지부 장관과의 독대로 이루어진 것이지요. 의사들의 반발은 생각보다 심했고 그로인해 무산될 뻔도 했지요. 협의는 일단 90일안에 끝내고, 매년 서서히 늘릴 계획이었습니다. 무려 5년에 걸친 의료보험 법률은 이제 대표적인 4대보험 으로 자리 잡아, 당신의 가족들을 포함하여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혜택을 보는 법이 되었지요. 어찌 보면 이게 다 제 딸 덕분이기도 합니다. 퇴원하던 날, 맑은 하늘과 눈부신 태양이 너무 좋아서 이러 저리 산책을 하다 보니 그만 햇빛 알레르기 반응이 심하게 나타났고 현재까지도 그때 생긴 병으로 고생하지요. 그 아이가 퇴원했다고 완치된 것은 아니었어요. 6개의 기계장치가 있음에도 아이의 뇌수는 90%이하로 떨어지지 않았고 그로인한 뇌 손상정도는 0점이었습니다. 물리치료, 작업치료, 음악치료, 언어치료, 수영, 개인 과외공부까지....
큰 아이 때문에 두 동생들은 중3때까지 과외를 하지 못했어요. 그 아이만 건강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요. 걷고, 웃고, 먹고, 놀고 이런 하찮은 반응들 말이에요. 그러나 현실은 참으로 냉정했지요. 걷지 못한 그 아이는 누워서 지냈고 자기가 싼 똥을 진흙처럼 주물러 온 바닥, 카펫을 문지르고 그것도 부족해 새하얀 벽지에 손가락 수 십 개 씩 찍어대고 문지르기 시작했어요. 엄마가 소변보는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이였어요. 참 빠졌네요. 그 뿐만 아니라 자기 손에 묻은 똥이 말라가면서 따가우니까 그때부턴 입으로 빨아대기 시작하더군요.
장애 엄마는 딱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지금처럼 똥을 싸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닦아주고, 갈아입히고, 공부시키고 대접해주는 엄마와 또 다른 하나는 아이를 방에 가두고 자신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예쁘게 화장하고 우아하게 책 읽으면 보내는 엄마. 결국 그들은 아이를 맡기면서 이런 말도 덧붙입니다. 부모에 대해서는 함구해 달라고. 대부분은 후자입니다. 사실 너무 힘들어요. 처음 시작은 분명 모두 열심히 하지요. 그러나 시간이 5년 넘어 10년이 되면 80% 이상 부모는 포기하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 까지 버티던 사람도 19%는 포기하지요. 마지막 남은 1% 그 사람들은 장애인 자식도 자식이라고 명명하여 어디든 어느 곳이든 데리고 같이 다닙니다. 예를 들면 결혼생활 28년 동안 영화 보러 단 1번 갔었는데 아이가 난리치는 바람에 주변사람들의 눈총으로 타의 반, 자의 반 쫓겨나오고 말았네요. 그 아이는 이제 걷기도 잘하고 밥도 잘 먹고 소리를 듣고 흥겨워 할 줄도 압니다. 그래도 그 아이의 지능은 0~12개월 사이이지만, 그나마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감사하지요. 3개월에 한번씩 CT촬영과 종합검진을 받고 있으면 치매진행증상을 막기 위해 약을 복용중이지요. 물론 수입 약으로 말이죠. 의사들은 말합니다. 저 아이 머리에 현재도 90% 뇌수가 100%로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그 시간은 단 5초 일수도 있다고, “즉사”를 칭하는 말입니다. 현재 아이의 살려고 하는 의지에 많은 의사들은 놀랍니다. CT 사진 상 나타나는 물결무늬의 주름이 바로 스스로 자가 치료 효과로 뇌수를 흡수하는 형태랍니다. 지금처럼 최상의 컨디션만 유지해 준다면 3년에서 아니 조금 더 5년까지도 기대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참고로 90%뇌수를 가지고는 머리를 들고 다닐 수도 없고 통증으로 인해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남편의 옷이 아니 내복이 빠져나왔다고 남편의 뒷바라지를 못했다고 말할 수 있나요? 건강한 아들과 막내딸도 엄마가 챙겨주지 못했지만, 모범생으로 불렸답니다. 장대비가 쏟아져 손에 우산을 가지고 가는 수많은 엄마들은 손을 꼭 잡고 의지하여 비를 맞으며 가는 두 아이를 보면서 저를 못된 엄마라고 손가락질 하지 않았습니다. 저희 온 가족은 큰 아이를 위해 가족 간의 끈끈한 사랑과 정직한 삶을 누리며 그 어느 집보다 행복한 집으로 불렸지요. 이 동네에서 장애인 가족은 저희 집 한 집 뿐이고, 저의 집을 위해 주민들은 주차장까지 내어주기 까지 했습니다. 항상 웃음이 가득한 집, 그들은 자식들에게 말합니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저 집처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노력하면 일어설 수 있다라고. 제 딸에 대해 MBC, KBS, SBS 방송사에서 특집으로 「기적의 아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싶어했어요. 장애인 사회에서 저희 딸과 저희 집은 유명인사인 셈이죠. 저희 딸의 성공사례로 많은 이들이 힘을 얻었고 유럽으로 미국, 캐나다 등지로 장애 아이를 데리고 유학을 갔지요. 이제 마무리를 지을께요. 전교 10등 안에 들어 명문대 확정을 받은 고3 아들에게 눈물로 말합니다. “ 아들아 네 누나를 위해 미국으로 가자. 누나는 이제 한국에서 수술할 수 없다고 해.” 아들은 말합니다. “ 어머니 전 명문대가 아니라도 좋아요. 우리가족이 함께 할 수 있다면요.”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현재 하버드 의대 뇌수술 기술로 7개가 세계 최고인데, 저의 딸이 (이미 6개), 2개를 더 넣어야 생명을 몇 년이라도 연장할 수 있다고 해서 미국으로 날아갔지만..... 이제 최선을 다한 우리 가족에게 신의 가호만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