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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제국주의투쟁의 선도자 안중근 의사 <9>

조의선인 |2010.04.08 19:39
조회 178 |추천 0

 

3. 천주교 신앙(天主敎 信仰)

 

 

 

⑷ ‘해서교안(海西敎案)’으로 탄압받아



안태훈 일가의 헌신적인 지원으로 청계동 성당의 교세(敎勢)는 날로 확장되었다. 1898년에는 교인 수가 140명이었던 것이 1900년에는 25개 공소에 영세 신자 800여 명, 예비 신자 600여 명으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1902년에는 영세 신자 1200여 명이었는데 인근에 사는 신도들까지 모여들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주일 예배 때에는 성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신도들이 마당에 가득 찰 정도였다. 이처럼 놀라울 정도의 교세 신장에는 안태훈의 열정과 안중근의 전도가 크게 기여했다. 관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리던 인근 백성들이 안씨 가문과 외국인 신부의 보호를 받고자 신자가 된 경우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청계동 성당의 교세가 크게 늘어나고 빌렘과 안태훈이 지역 주민들의 신망을 받게 된 데는 또 다른 계기가 있었다. 1897년 11월 어느날 뮈텔 주교가 청계동을 찾는 길에 신천군(청)을 방문했는데 그때 군수가 직접 나와 영접한 것이 알려지면서 천주교의 위상이 더욱 크게 높아진 것이다.



안태훈과 천주교의 위상이 강화될수록 정부기관의 감시와 질시도 심해졌고 마침내 해서교안(海西敎案)이 일어났다. 1890년부터 황해도 지역에 천주교도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관리들의 박해가 심해지자 교도들이 반발한 것이다. 3년여 동안 교도들의 반발이 계속되자 이 지역의 천주교 본부 역할을 하던 안태훈 형제들에게도 고난이 닥쳤다.



‘신천군 일대에서 천주교도와 지방정부의 마찰이 일어날 때마다 안태훈, 안태건, 빌렘 신부는 거의 매번 주역의 역할을 하였다. 안태훈이 동학혁명운동 때의 악행 때문에 신천군 감옥에 갇히자 빌렘 신부가 군수에게 항의하여 안태훈을 석방시켰다. 또 안태훈은 "천주교 신자가 되면 빌렘 신부를 통해 관청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보호를 받을 수 있다"며 해주민들을 상대로 전교활동을 펼치다 해주감영에 투옥되었는데, 이때도 빌렘 신부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또 1899년 2월 안태건은 빌렘 신부와 함께 무리 100여 명을 거느리고 안악군아에 돌입하여 도적혐의로 구금된 천주교도 3인을 석방시켰다. 이때 안태건의 요청으로 범죄에 가담한 사람들을 대질 신문한 결과 천주교도들의 범법행위가 드러났다. 그러나 안태건은 천주교도들의 무죄를 고집하며 자의로 죄수를 데리고 나갔다.

마침 이날은 장날이라 그 사건을 목도한 많은 이들이 안태건의 무법행위를 개탄했다고 한다. 또 1903년 1월 15일에 조선 정부는 군아에 난입하여 군수를 협박하고 행패를 부린 천주교도 6인을 잡으러갔다가 사로잡혀 무수히 구타당한 순검들에게 "다시 오면 결단코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다"고 협박한 빌렘 신부의 소환을 청하는 조회문을 프랑스 공사관에 보냈다. 이처럼 서양 신부를 배경으로 하는 천주교도들의 토호활동은 대한제국 정부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안태훈 가문과 천주교 세력, 그리고 정부 사이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정부는 사핵사(査核使) 이응익(李應翼)을 파견하여 그동안의 분쟁 과정을 자세히 조사하게 하였다. 이응익은 고종 황제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안태훈 형제와 빌렘 신부 등을 체포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번 교도들의 소요는 옛날에 없던 변고로, 무리를 모아 각각 교파를 세우기도 하고, 관청에서 하는 것처럼 송사를 처결하기도 하며, 형구를 만들어놓고 평민들을 못살게 굴기도 하고, 사사로이 사람들을 잡아들여 남의 재산을 빼앗기도 하였고, 심지어 땅 주인을 위협하고 관청에서 보낸 사람에게 대항하여 쫓아내기까지 하는 등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안태건은 교사(敎士)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억누르고 무기를 가진 사람들을 모집하여 제 몸을 보호하고, 이용격은 이웃고을에까지 호령하며 노약자들에게까지 형벌을 가하였습니다. 무리를 모은 것이 무슨 의도였겠습니까?

이들은 마치 강도들과 흡사하고 명분없는 재물을 모은 것이 남의 집 재산을 도적질 하는 것보다 심했습니다. … 안태훈은 청계동 와주라는 말을 듣고 있는 자로 황해도의 두목이라는 지목을 받고 있는데 아직도 잡히지 않고 있으니 끝내 관대히 용서해 주기는 어렵습니다. … 이른바 홍교사(洪敎士) 라는 자는 프랑스 사람인데 청계동에 살고 있습니다. 8, 9개 고을들이 모두 그의 소굴이 되고 6, 7명의 교사가 그의 손발이 되었습니다.

전도를 핑계로 연줄을 맺고 폐단을 키우고 있으며, 행정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소송도 그가 직접 판결하고 손을 묶고 발에 형틀을 채우거나 무릎을 꿇라는 형벌을 평민에게 함부로 시행했습니다. 이는 천하의 법률을 남용한 짓으로 우리 나라와 프랑스 양국 간의 조약에도 실려 있지 않은 바입니다. 또 곽 교사라는 자는 홍 교사의 못된 짓을 본떠 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그대로 놓아둔다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외부로 하여금 프랑스 공사관에 공문을 보내 두 사람을 잡아다 조사하고 그 나라의 율례에 따라 심리하고 판결하게 하는 것이 진실로 사리에 부합될 것입니다.”



관리들이 천주교를 탄압하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이긴 하지만, 안태훈 일가가 세력을 믿고 지방에서 다소 행세를 했던 것 같다. 조선 정부는 1899년 3월 안태건을 구속했지만, 빌렘 신부의 노력으로 간신히 풀려났다. 그러나 안태훈 일가의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안중근은 아버지와 삼촌이 관가에 끌려가는 등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서울로 뮈텔 주교를 찾아가 구원을 요청하는 등 몇 해 동안 ‘해서교안’에 매달려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시기에 안중근의 신앙심을 크게 높아졌다. 그렇다고 안중근의 교리나 맹신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천주교를 탄압하는 관리들이나 심지어 빌렘 신부의 오만무례한 행위를 심하게 규탄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안중근의 활동 중에서 몇가지 사례를 들어본다.



‘금광의 감독이라는 자리에 있는 주씨라는 사람이 천주교를 비방하고 다녀 그 피해가 자못 적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대표로 주씨가 있는 곳으로 파견되었다. 그에게 사리를 따져가며 질문을 하고 있는데 금광 인부들 사오백 명이 험악한 기세로 각기 몽둥이와 돌을 들고 옳고 그른 것을 따지기도 전에 나를 두들겨 패려고 나오니, 이것이 바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경우였다. 다급해진 나는 다른 방도가 없어 오른손으로는 허리에 차고 있던 단도를 뽑아들고 왼손으로는 주씨의 오른손을 잡고서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네가 비록 백만 명의 무리를 가졌다고 해도 네 목숨은 내 손에 달려 있는 줄 알아라."


주씨가 대단히 겁을 내며 둘러선 인부들을 물리쳐 내게 손을 못대게 했다. 나는 주씨의 오른손을 움켜 쥔 채로 출입문 밖으로 끌고 나와 십여리를 함께 간 다음에 그를 놓아 보내고 나도 무사히 돌아왔다’



여기에서도 안중근의 상무적인 기풍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협심의 일면을 엿 볼 수 있다. 그는 어떠한 위급한 경우에도 물러서거나 몸을 사리지 않았다.



다음과 같은 일도 있었다. 옹진군(甕津郡)에 사는 교인 중의 하나가 서울의 중앙 대관(大官)에게 돈 5천냥을 빼앗긴 일이 있었다. 상대가 중앙의 고관인지라 교인은 돈을 빼앗겨도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이를 알게 된 안중근은 서울의 대관 집에 찾아가 당당하게 이치를 따져 대관을 굴복시킨 다음 돈을 돌려주겠다는 확약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⑸ 의협심과 정의감으로 사회문제 해결



빌렘 신부와의 충돌은 안중근의 의협심을 돌아보게 하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빌렘은 안씨 가문에 천주교를 전도하고 안태훈 일가가 군량미 사건으로 어려움에 빠졌을 때 이를 해결해주는 등 아주 절친한 협력관계에 있었다. 그런 사실 때문인지 빌렘은 때로 신부로서 품위를 잃거나 한국인들을 멸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에 분개한 안중근이 그 부당성을 제기하자 화가 난 빌렘은 안중근을 심하게 구타하였다. 그러나 안중근은 물러서지 않고 사례를 일일이 들어 반박했다. 빌렘은 그제서야 자신의 행동을 사과하고, 두 사람은 다시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처럼 안중근은 종교적 대행자라 할지라도 민족의식을 침해하는 경우에는 이를 단호히 배격하고 반드시 사과를 받아냈다. 박은식(朴殷植)의「안중근전(安重根傳)」에는 다음과 같은 일을 전한다.



‘무술년(1898년) 3월 어느날 안중근은 서울에서 동지 몇 사람과 함께 거리를 산책하고 있었다. 때마침 말을 타고 지나가던 한국 사람이 있었는데 어떤 일본 사람이 갑자기 나서더니 다짜고짜로 그 한국 사람을 잡아당겨 말에서 떨어뜨리고는 말을 빼앗아 가지고 가려 하였다. 이 일을 목격한 안중근은 큰 소리로 질책하여 왼손으로 그자의 멱살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권총을 꺼내어 그자의 복부를 겨누고, "나쁜 놈의 자식, 감히 이런 불법 행실을 하다니. 말을 주인에게 돌려주면 너를 살려주고 그러지 않으면 죽일테다"라고 호통쳤다. 일본 사람들은 주위를 돌아볼 뿐 겁을 먹고 감히 역성을 들지 못하였다. 그자가 말을 돌려주겠다며 빌자 중근은 놓아주었다. 한국 사람들은 쾌재를 불렀으며, 안중근의 이름을 알아보려는 자가 많았다.


기막힌 일이었다. 한국에 거류하는 일본 사람들은 백주에도 큰 도회지에서 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공공연하게 이런 불법을 저지르고 다녔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우리의 민심을 떠보려는 짓이었다. 본시 일본이 남의 나라를 잡아 먹으려 꾀할 때는 임기응변(臨機應變)의 교활한 모략과 빈틈없는 계책을 쓴다. 무릇 타국에 사는 일본인은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정치적 두뇌를 가진 자들이어서 행상꾼이든 노동자든 약장사든 매음녀이든 할 것 없이 모두가 정탐꾼질을 하였다. 이런 자들은 암암리에 국정을 탐지하며 민심을 떠보고는 정계(政界)에 제공하였던 것이다. 이 어찌 무서운 일이라 하지 않겠는가?



그때 만일 안중근이 나서서 일본인의 횡포한 기세를 꺾지 않았더라면 그 자는 기필코 한국 사람을 혈기없고 고통당하는 형제를 모른 체하는 의리가 없는 자, 애국심이나 적개심이 없는 자들로 여겼을 것이니, 이런 자들을 노리지 않고 누구를 노리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강제로 물건을 뺏는 것으로부터 나아가서는 나라를 빼앗으려 할 것이니 이를 어찌 사소한 일이라 할 수 있으랴! 그 자들 가운데는 한국 각지에서 이처럼 민심을 떠보는 수작을 하는 자들이 많았다. 안중근은 제몸을 천백 쪽으로 쪼개어서라도 각지에서 고통당하려는 동포를 구하려 하였다.


안중근의 가정은 본시 살림도 유복하였고 식구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살림살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날마다 각지의 유지(有志)들을 찾아다니며 상무주의를 제창하였다. 다른 사람 돕기를 목 마른 자 물 생각하듯 하는 성품이어서 그들 가운데 가난한 자가 있으면 안중근은 가산을 탕진해가면서라도 도와주려 하였으며, 좋은 무기가 있으면 전답을 팔아서라도 사들였으니 살림살이가 점점 궁해졌지만 안중근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안중근의 의협심과 정의감은 각종 자료에서도 드러난다. 안중근이 여순감옥에서 집필한 자서전에는 젊은 날의 혈기방장한 여러 가지 활동상이 담담하게 기술되어 있다. 안중근의 이와 같은 행동철학은 천주교신앙과 사상에서 싹튼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살지 않으면 유한한 삶은 부질없다’는 것이 안중근의 삶과 신앙의 지표였다. 다음은 돈독한 신앙심을 보여주는 두 편의 ‘신앙고백’이다.



“아! 사람의 목숨이란 길어야 백년입니다. 또 어진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를 가릴 것 없이 누구나 알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알몸으로 저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것입니다.


세상 일이라는 것이 이다지 헛된 것인데, 그런줄 알면서도 왜 허욕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며, 악한 일을 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까? 나중에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일 천주님의 상벌도 없고, 또 영혼도 몸이 죽을 때에 따라 없어지는 것이라면, 잠깐 머물다 가는 이 속세에서 부귀영화를 꾀함직도 합니다. 그러나 영혼이란 죽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것이며, 천주님의 지극히 높은 권한도 불을 보듯이 명확한 것이므로 그런 영화는 덧없는 것일 뿐입니다.”



“저 하늘과 땅과 해와 달과 별과 같은 넓고 큰 것과, 날고 달리는 짐승들, 온갖 식물들, 이러한 기기묘묘한 만물이 어찌 지은이 없이 저절로 생성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저절로 생성된 것이라면 해와 달과 별이 어떻게 어김없이 운행되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어떻게 틀림없이 질서있게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집 한 칸, 그릇 한 개도 만든 사람이 없으면 생겨날 수 없는데, 하물며 물과 땅 위의 그 수많은 기계들이 주관하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저절로 운전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믿고 안 믿고는 보고 못 본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이치에 맞고 안 맞고에 달린 것입니다. 이러한 몇가지 증거를 들어, 지극히 높은 천주님의 은혜와 위엄을 확실히 믿어 의심하지 아니하고, 몸을 바쳐 봉사하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류의 당연한 본분인 것입니다.”



⑹ 안태훈의 천주교 입교 시기 재론



안중근의 생애에 있어서 천주교 입문은 ‘획기적‘이라 할 만큼 대단한 사건이었다. 안중근 일가는 천주교 입교를 통해 세계와 민족을 만나게 되었고 신앙생활에서도 항상 의로움을 추구하며 행동윤리로 삼았다. 아버지가 ‘정의’를 가훈으로 내걸고 가정을 일군 것이 안중근에게 이어지고 승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안중근 일가의 천주교 입교의 시기는 대단히 중요하다. 안중근의 사상형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일반적으로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안태훈은 1896년 10월 군량미 사건으로 피신할 때 프랑스 선교사들의 보호 아래 있으면서 그들을 통해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후 안태훈은 입교를 결심하고 많은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청계동으로 돌아왔는데, 이때를 천주교 입교의 시점으로 보고 있다. 당시 안태훈이 가져온 서적은「교리문답」과「12단」등 120권의 천주교 관련 서적이었다. 그러나 안태훈이 종현성당에 체류하기 전에 이미 천주교를 받아들였다는 주장도 있다.



‘안태훈이 천주교를 종교로 받아들인 시점은 적어도 1896년 1월 단발령이 내린 무렵인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1896년 1월 단발령으로 전국이 들끓고 있을 무렵, 거병하자는 김구의 제안을 "천주교나 봉행하다가 후일에 견기(見機)하야 창의를 하겠으나"라고 거절하였다. 그리고 이때 안태훈은 개화나 천주교에 대한 관심을 '단발'로 표출하기도 하였다. 이는 안태훈과 고능선이 결정적으로 노선을 달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구도 안태훈을 빗대어 같은 민족인 동학도를 토벌하고 양이의 서학을 한다고 불만을 토로하며 청계동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책임연구원인 신운룡은 “안태훈이 천주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895년 7월 이전의 일이고 천주교를 종교로 받아들인 시점은 단발령을 내린 1896년 1월경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 싶다”고 말한다.



안중근의 경우 아버지로부터 자연스럽게 천주교를 전수받았지만, 그의 신앙심은 부친의 개종에 따라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천주교 신앙은 차라리 모태신앙이라 할 정도로 독실하고 돈독했다.



‘안중근의 입교는 가톨릭 가정에서 출생에 의한 귀속적인 것도, 또한 강렬한 종교적 경험에 바탕을 둔 개종에 따른 것도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된 것은 부친의 개종에 따른 하나의 부수적인 결과였으며, 개종의 동기 또한 세속적인 것과 상당한 관련을 맺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교회활동에 대한 참여가 증가함에 따라 그의 신앙과 영성은 놀랄만한 성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따라서 안중근 사상 형성은 개화사상과 천주교 사상의 수용을 통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의병봉기의 원인에 있어 기존 의병들은 군왕에 대한 충성심에서 기인한 데 반해 안중근은 개화사상에 기초한 민족의식과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나온 민권의식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심이 깊어가면서 안중근은 교인들이나 일반 백성들에게 천주를 믿을 것을 권했다. 다음은 여순감옥에서 회상한 설교의 머릿글이다.



“대개 천지간 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이 귀하다고 하는 것은 흔히 신령하기 때문이오. 혼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생혼(生魂)이니 그것은 금수의 혼으로서 능히 생장하는 혼이오. 둘째는 각혼(覺魂)이니 그것은 금수의 혼으로서 능히 지각(知覺)하는 혼이오. 셋째는 영혼(靈魂)이니 그것은 사람의 혼으로서 능히 생장하고 능히 도리를 토론하고 능히 만물을 맡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에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다는 것이오.


사람이 만일 영혼이 없다고 하면 육체만으로서는 짐승만 같지 못할 것이오. 왜냐하면 짐승은 옷이 없어도 추위를 나고 직업이 없어도 먹을 수 있고 날을 수도 있고 달릴 수도 있어 재주와 용맹이 사람보다 낫기 때문이오.


그러나 하많은 동물들이 사람의 절제를 받는 것은 그것들의 혼이 신령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영혼의 귀중함은 이로 미루어서도 알 수 있는 일인데 이른바 천명의 본성이란 것은 그것이 지극히 높으신 천주께서 사람의 태중에서부터 부어 넣어 주는 것으로서 영원무궁하고 죽지도 멸하지도 않는 것이오.”



안중근의 사상형성이 개화사상과 천주교 교리의 수용을 통해 시작되었다고 보는 연구결과도 나타나고 있다.



‘결국 안중근의 입교는 가톨릭 가정에서의 출생에 의한 귀속적인 것도, 또한 강렬한 종교적 경험에 바탕을 둔 개종에 따른 것도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된 것은 부친의 개종에 따른 하나의 부수적인 결과였으며, 개종의 동기 또한 세속적인 것과 상당한 관련을 맺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교회활동에 대한 참여가 증가함에 따라 그의 신앙과 영성은 놀랄만한 성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안중근의 사상형성은 개화사상과 천주교 사상의 수용을 통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사상의 접촉을 통해 안중근은 근대 민족의식과 민권의식을 확립할 수 있었으며, 이 사상은 항일독립운동으로 실천되어 의병항쟁과 이토 히로부미 총살 등으로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천주교가 안중근과 안태훈 가문에 끼친 영향에 대한 연구결과도 나왔다.



‘1900년 전후 안태훈 가문에게 천주교는 긍정, 부정의 이중적 영향을 미쳤다. 먼저 긍정적 영향으로는 그들이 천주교 신앙을 통해 점차 상무적 무반기질과 현세적 공리성과 세속성을 벗어던지고 종교적 경건성과 순수성을 지닌 애국집단으로 변신해갔을 뿐 아니라 천주교를 가져온 프랑스 신부들을 통하여 서양의 근대 사상과 문물을 자연스럽게 수용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다음 부정적 영향으로는 그들이 프랑스 신부들에게 의지하여 가문의 세력을 유지, 확대하는 동안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적 속성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양면성은 당시 서양종교를 신봉했던 모든 한국인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가문과 달리 안태훈 가문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논리와 식민통치를 적극 옹호하거나 묵인했던 프랑스 신부들과 밀착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양면성이 더욱 선명히 드러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안태훈 가문으로서는 프랑스 선교사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분명히 깨닫는 한편, 천주교 신앙과 근대적 민족주의 사상을 합일시켜 나가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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