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마흔이되어 시작한 중국어와의 싸움, 나의 중국어 오딧세이

신봉길 |2010.04.08 22:48
조회 1,301 |추천 3

 외국어를 배운다는것은 누구에게나 상당한 고통과 인내가 따르는 일이다.그러나 이제 시대는 좋든 싫든 외국어를 결사적으로 배우지않으면 안되는 때가 되었다. 국제화 세계화시대가 되면서 언어능력자체가 가장 큰 경쟁력이 되었다.

 

 하물며 외교관에게 언어의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영어하나로도 버틸수있는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영어 좀한다고 재던 시대는 그야말로 옛 이야기가 되었다.

 

  영어를 모국어같이 구사하는 젊은이들이 도처에서 수없이 쏟아지고 있기때문이다. 최소한 2개 이상의 외국어를 구사할수없으면 경쟁력있는 외교관이라고 할수가 없다.

 

 내게  `중국`이라는 화두가 본격적으로 다가온것은 90년대에 들어서였다. 당시 나는 아시아의 어느 변방에 근무(1990-92, 미얀마)하고 있었는데 그 시골 골짜기에서도 중국이라는 거대한 실체가 시시각각 우리에게 다가오고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나는 미얀마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는길에 집사람과 함께 다짜고짜 홍콩을 거쳐 중국에 들어갔다. 아직 중국과 우리나라간에 정식 국교가 없을때였다. 북경에서의 첫날 첫방문지로 북경대를 찾아갔다.북경대 남문에서 사진을 찍으며 감개무량했던 기억이 새롭다.다음날 북경시내를 관광하던중 한국과 중국이 외교관계를 수립했다는 놀라운 발표를 들었다.

 

 귀국후 나는 외교부 본부에서 북한문제를 담당하는 과장 (`특수정책과장`)을 맡게 됐다. 자연 중국과 업무상으로도 교류의 기회가 많았다.

 

 나는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비롯 우리 외교에서  중국이 차지할 중요성을 더욱 절감하기 시작했다.갑자기 중국을 모르고 어떻게 한국의 외교관이라고 할수있겠느냐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그러기위해서는 언어를 습득하는것이 필수적인것이었다.

 

  변화하는 외교환경에 맞추어 나의 언어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그랬다. 나는 외무고시시험은 영어이외에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를 선택 합격하였지만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는 그후 별로 쓸 기회가 없었다.또 앞으로 계속 다이내믹한 언어로 기능할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그후 일본근무기회(1987-90) 를 활용 일본어를 배워 영어다음의 외국어로 지금도 요긴하게 쓰고있다. 그렇지만 내마음은 급속히 새로운 언어인 중국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솔직이 그전까지 외교부에서 중국어는 그렇게 인기언어가 아니었다.대만연수를 통해 중국어를 배운 그룹이 있었지만 부내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다.그런데 중국과의 수교로 갑자기 중국어인력수요가 크게 늘게 된것이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따르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은 바빠지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늦은 나이였지만 중국현지에 가서 중국어를 배울 기회를 찾았다.

 

 2년반의 본부과장생활을 마치고 해외근무를 나가야할때가 되었을때 나는 해외공관근무대신 중국연수를 희망하였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은끝에 북경대에서 1년간 연수를 할 기회를 만들었다. 내나이 꼭 마흔이었을 때의 일이었다

 

 연수를 가기까지에는 간단치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주변의 회의적 시각도 있었다. 그나이에 무슨 언어연수냐? 하버드케네디스쿨 같은데가서 석사학위나  받아오라는식의 충고를 해주는 분들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그럴듯한 석사타이틀을 확보하는것보다는 중국어를 확실히 배워놓는게 나의 장래를 위해서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현실적인 난관은 정부의 공무원해외연수제도에 있었다.영어나 중국어등 언어를 배우는 연수프로그램은 사무관급이하의 주니어직원들에게만 있었다. 중앙부처과장급(서기관급)이상에게는 없었다.

 

 할수없이 중국 북경대 석사과정에 연수를 가는식의 편법을 써야했다.  문제는 이경우에는 규정상 공인된 검증기관의  일정등급이상의 중국어성적이 필요했다.공무원연수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행정자치부(당시는 총무처)담당자에게 시험을 면제해줄것을 통사정했지만 거절당했다.

 

외교부과장으로 근무당시 ( 1992-1994) 나는 중국어학원 새벽반에 등록해서 6개월여 다닌일이 있었는데 그정도 실력가지고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나는 행자부가 지정해준 대학의 하나인 한국외대에 가서 중국어 검증시험을 쳐야했다. 가장큰 난관은  회화( 말하기)시험이었다.6개월 새벽 한시간 정도 공부한 실력으로 회화가 제대로 될리가 없었다.

 

 나는 `나에 대한 소개`와 `왜 내가 중국에 언어연수를 가려는지`에 대해  미리 연수를 다녀온 외교부직원의 도움으로 답변자료를 준비하고 달달 외웠다.

 

 일대일 회화테스트에서 시험관으로 들어온 중문학과 교수가 중국어로 나에게 몇가지 질문을 하였지만 나는 그 질문을 알아들을수도 없었다.( 나중에 내가 중국어수준이 어느정도 된뒤에 알게됐지만 그교수도 회화수준이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었다) 

 

 나는 질문과 관계없이 외워서 준비한 답변을 일방적으로 한참동안 중얼거렸다.그저 시험관의 동정을 사는 도리밖에 없었다. 시험관은 실력을 떠나 나의 성의와 열정을 사준것 같았다. 어차피 서울서 배운 중국어가 얼마나 되겠느냐며 현지에 가서 배우라고했다. 점수는 적절히 주겠다고 했다.그래서 시험을 통과하였다.

 

1995년2월 나는 북경대 `한어중심`( 외국인들을 위한 전문 중국어교육기관)에 도착 했다 . 먼저 반편성 시험부터 쳤는데 나는 4반에 배치되었다.  1반이 제일 초급반이고 12반이 제일 고급반이었다.초급반중에는 좀 높은 반에서부터 시작한것이다.

 

 우리반에는 일본과 미국 유럽의 대학생들이 많았는데 내가 제일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하여튼 나는 젊은 애들과도 활발히 어울리면서 정말 열심히 하였다.

 

 교수가 질문을 하거나 뭔가 시키려고 하면 제일먼저 손을 들었다. 한마디라도 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북경대 중국학생을 소개받아 개인지도를 받았다. 일년연수를 마칠때에는 8반이었는데 그때 나의 중국어실력은 HSK 중급정도는 되었을것으로 생각된다.

 

 이때와 관련 소개할 일화가 있다.나와 같은반에 곤도 다이스께라는 일본인 학생이 있었다. 동경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의 저명한 출판사인 강담사(고단샤)에 다니다가 중국어를 배우기위해 온 친구였다. 반에서 나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친구여서 둘이서 자주 어울렸다. 

 

 하루는 나에게 정말 한국외교관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그이유를 묻는 나에게 북경대에는 일본 외무성의 외교관도 몇명 연수를 와있는데 자존심이 강해서 어학연수를 택하지않고 석사예비과정에 들어와 있다고 했다. 사실은 중국어도 제대로 되지않는것 같다고 했다.그리고 일본 유학생들과도 거의 어울리지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반면 한국외교부에서 과장까지 지낸사람은 어린학생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는것 보고 정말 놀랐다는 이야기였다. 곤도씨와는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서로 연락하면서 지내고 있다. `주간현대`라는 잡지사의 편집장이 되어 10년째 항공우편으로 매주 잡지를 나한테 보내주고 있다.

 

 하여튼 1년간의 연수를 마치고 나는 북경의 우리대사관에 참사관으로 발령받아 3년간 일했다.지금 생각해보면 이때 최소한 새벽 한시간 정도의 중국어공부를 계속 했어야했다.그랬으면 중국어능력을 한단계 더 높일수있었을것이다.

 

 그러나 약간의 오만( 당사 대사관에서 참사관급 이상의 시니어로서 나같이 정식으로 중국어를 제대로 배운 사람이 거의 없었다)과 게으름으로 이시간을 허송하였다. 지금도 이시간을 그냥 보냈던것이 크게 후회가 된다.

 

중국에 이어 샌프란시스코총영사관에서 근무(99-02)했는데 당연한 일이지만 중국어를 쓸 기회가 거의 없었다. 본부발령을 받아  귀국했을때는 중국어실력이 상당히 저하되어 있었다.미국에서 중국어를 쓸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서울근무기간동안 (02-04) 나는 기러기아빠 신세였는데 종로에 있던 중국어학원에 등록을 해놓고 저녁에 특별한 일이나 약속이 없으면 학원에 들르곤했다. 덕분에 중국어능력을 어느정도 회복할수있었다. 또 스스로를 바쁘게하고  늦게 귀가함으로서 텅빈 아파트에서 기러기들이 느끼는 외로움에서도 어느정도 피해나가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수 있었다.

 

2004년 외교부대변인을 마치고( 김선일사건의 와중에서 엄청 고생하였음) 상당한 보직경쟁을 거친끝에  나는 그해 가을 다시 북경에 공사로 부임했다. 나는 북경에 있는 경제무역대학의 중국학생을 소개받아 새벽 출근전 한시간씩 중국어공부를 다시 하였는데 그이래 2년여 계속하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나의 중국어능력을 객관적으로  테스트받아야겠다는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후배들 앞에서 그랬다.중국어를 오래해서 꽤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한번도 시험으로 객관적평가를 받아놓은게 없었기 때문이다. 외교부가 매년 자체적으로 치르는 어학검정등급시험이 있었지만 귀국해서 후배들과 같이  시험을 치르는것도 번거롭고 성적이 나쁠경우의 부담도 있었다. 

 

 나는 고심끝에 2006년 하반기의 중국어능력평가시험( HSK 고급시험)에 응시하였다. 중급시험에는 애초 관심이 없었다.고급시험의 경우에는 떨어지더라도 변명할수있을것 같은 고려도 있었다.

 

 주말등을 이용 틈틈이 HSK 고급시험 모의문제집을 가지고 연습도 해보았다. 나이들어 치는 시험이 부담스럽지 않을수 없었다.그래서 집사람외에는 누구에게도 알리지않았다. 

 

 나는 시험장인 북경언어문화대학( 중국에서 외국인들을 위한 중국어전문교육기관으로는 가장 권위있는 학교임)에 새벽 일찍나가 남의 눈에 띄지않게 앉아있었다.거의 이십대의 학생들이었으며 오십에 이른 나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 거의 4시간에 걸쳐 다섯과목( 듣기 독해 문법 작문 회화) 을 치렀다. 인내의 한계를 테스트하는것이었다. 누구나 쉽게 생각할수있는 독해시험에서는 시간에 쫓겨 40개 문항중 7개문항은 아예 읽어 보지도 못했다.

 

 회화시험에서는 시험관이 지시하는 녹음기조작도 자신이 없어 내가 말한 이야기들이 제대로 녹음이 되었는지도 불안했다. 몇번이고 중도에 포기하고 싶었으나 용케 참았다. 나이들어 치는 시험은 지력이나 체력 모든면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것이었다.  

 

  11월말 나는 9급 (고급) 합격인증서를 받았다.아마도 그해 고급합격자중 최고령이었을것이다. 머리를 짓누르던 무거운짐 압박감을 하나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주변에서는 주책이라고 놀리기도 했고 또  합격여하를 떠나 나의 이런 도전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중국진출 10대기업 CEO들과의 오찬 모임에서 어떤 CEO는 나에게 `그런데 난데없이 HSK시험은 왜 치셨느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혹시 외교부에서 떨려나오면 취업에 필요할것 같아서` 라고 농담으로 대답했다.

 

 하여튼 나는 2006년도에 내가 이룬일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일의 하나로 HSK 고급시험에 합격한것을 꼽고 싶다. 어렵게 이룩한 일일수록 더욱 가슴에 남는 법이다.

 

 외교관의 일생은 평생 언어와의 싸움이다. 나는 전선을 더이상 확대할 생각은 없다. 기왕에 벌여놓은 전선을 잘 다져나갈 생각이다.그러나 또 무슨일이 벌어질지 누가 아는가? 자기와의 고독한 싸움의 연속이다.

추천수3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