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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숙연

콘돔 |2010.04.09 14:12
조회 566 |추천 1

<新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천 개의 강(江)에 비치는 달(月),
그러나
강은 강이요, 달은 달이다.


내일도 나는
오늘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느낄듯 말듯 한 템포 늦게 화면에 뿌려지는 무선 키보드의
손끝과 와 닿는 촉감과 눈끝에 드러나는 활자는
내일도 진담일 수 있을까.

레몬즙과 소금과 흰 후추에도 숨죽지 않았던 양파가 유별나게 매워서,
냉동실에서 꽁꽁 얼어 잘 녹지 않았던 연어가 유달리 짜서,
신발장에 숨어 햇빛을 피했던 Cabernet Sauvignon 이 유난히 메말라서,
양파가 조금만 달콤했으면...
연어가 살짝 삼삼했으면...
와인의 향과 맛이 조금만 더 깊었으면...
하고 아쉬워하듯,

모레도 나는
내일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오늘 어제를,
내일 오늘을,
모레 내일을,
돌아볼 수는 있을 지언정,
돌이킬 수는 없다.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시간, 흘러간 일들을 가리켜
역사라고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은 역사책 부록에 기록된 연대표가 아니며,
수험생이 암기하기 쉽게 연대별로 정리된 역사책 같은 삼박한 역사는 없다.
껌뻑껌뻑 한 프레임씩 정지 화면이 지나가는 환등기 슬라이드가 아니라,
역사는 총천연색 Motion-picture Cinema Scope인 것이다.
말하자면, 역사는
순간이 아니라 흐름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은 단지 사실의 배열이 아니다.
인간 세상은,
이를테면
저기 저만치 혼자 놓여 있는 '김소월의 꽃'이 아니라,
그 이름을 부른 뒤 의미로 다가오는 '김춘수의 꽃'인 것이다.


그러나 엉성한 그물망(net)에서 참여(글)와 만남(댓글)의 경험은,
방관자나 로빈슨 크루소적 의식이 '기술'했던 것이
익명(匿名)과 익면(匿面)의 세계이며
이미지와 명사의 세계일 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떠돌아 다니는 21C형 space vagabond 가 어디 한둘이랴만,
집시들이야 더운 피에 비해 철이 없는 탓이라고나 치지.
Casbah 에서 연명하는 것 하나만이 오로지 삶의 의미인양
안절부절 게시판을 부여잡고는
짧은 계산과 뻔한 통박 굴리며
초점을 벗어난 애먼 소리로 행세하는
Janus-faced 의 settler...

그 얄팍함과 천박함이 어디서 유래했을까
잠시 생각해 보다가 그만 가여워졌다.
그 생각짧음과
얄팍한 계산과
덜떨어진 동문서답도
자신의 수준이고 운명이니리...
그 가여운 운명이 때때로 부럽기까지 하다.


'운명(運命)'이란 언제나
익명성(匿名性)을 지워버리는
'우연(偶然)'을 발견하는 것.

그리하여,
Serendipity!

아침은 아스라이 멀고
나는 잠들지 않는다.
운명,
너를 두고 질끈 눈을 감을 수 없다.
역사를 가로질러 끝내 잠들 수 없는 미이라로 남을지언정.
농담이 아니라니까...


어제 밤하늘에 빛나던 북극성의 반짝임이
630 년 전의 모습인 것처럼,
2 미터 앞의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도,
엄밀히 말하면,
15 나노 초 전의 과거 모습이다.

*) 나노 초 (ns) : 1/1,000,000,000(십억 분의 일)초


15 나노 초 전의 내 과거(?) 모습...

권태의 끝에 천천히 그려지는
나태한 나의 자화상.

나태와 권태의 빅뱅(the Big Bang),

그 새하얀 여백 속으로
슬로우 푸드를 먹다 죽은 귀신들이
패스트 푸드를 까먹으며 몰려드는 밤이 되면
가끔 나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엠마뉴엘 부인을 열혈 시청할 것인지,
엠마뉴엘 칸트를 차분 정독할 것인지.

그러나,
나는 도무지 선택하고 싶지 않다.

엠마뉴엘의 끈적거리는 교성과
엠마뉴엘의 유미건조한 활자 사이로
신비는 넘나들고
여전히 공부(工夫)가 나의 문제다.

얼마나 더 공부해야
운명의 목덜미를 낚아채고,
구원(仇怨)의
구원(舊怨)으로부터
구원(久遠)히
구원(救援)받을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그다지 알고 싶지 않다.


운명이 강으로 굽은 산과 들을 돌아 그저 흐르면,
달이 되어 그저 따라 흐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천 개의 강에 비칠 수 있는 달이
흐르는 강물에 따라 비친들,
강은 강이요,
달은 달이다.


산이 산인 것처럼,
물이 물인 것처럼...



Thanks to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르오노 강의 별 달밤 (Starry Night over the Rhone Ar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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