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농대 선배의 '토익 900점 농부'를 보고 '역시 이 형은 열심히 사는구나...'
하는 생각과 '나는 어떤가'라는 생각을 깊이 생각하게 된 계기로 글을 되었네요^^;;
엊그제 서울 올라온 그 선배와 학생 때의 추억과 앞으로의 우리의 모습을 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 소개를 간단히 하자면 경기도 분당에서 초 중 고를 졸업하고, 농대에 들어가서
졸업 후에 경기도 광주에 터를 잡고 농업을 시작한 24살 새내기 농부입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부모님은 초등학교 교사시고, 살면서 부족함 없이 살아왔던 귀한
외동아들이었지요. 나름 공부도 좀 했던 터라 1등은 아니었어도 반에서 2~3등 정도
했었네요. 뭐 배불렀다고 하셔도 할 말은 없겠네요... 소개는 이걸로 마칠께요^^
저의 아버지는 장애인들을 가르치는 특수교사이시며, 전 어려서 부터 장애인들을
많이 봐왔고, 같이 생활하는 시간이 많았어요. 어렸을 때는 뭔가 우리와 다르다는
생각에 거부감도 느꼈고, 많이 싫었습니다. 철없던 시절이었지요.
아버지는 조그마한 율동공원 쪽에 땅을 빌려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었어요.
장애인들을 위한 '전환교육센터'였습니다. 직접 장애인들과 씨를 뿌리고, 같이 관리
하며, 수확도 같이 해서 장애인들에게 일거리와 꿈을 만들어주는 일이었죠. 상추,
토마토, 오이 등 여러 채소들을 길러서 아파트단지나 아니면 시장에도 팔고 그랬습니다.
처음에 저는 왜 이런걸 하나 하는 생각에 잘 가보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한번 와
보라는 말씀에 투덜대며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전 살면서 가장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늘 찡그리고 화내던 장애인들이 환한 웃음, 말 그대로 아름다운 웃음을 지으면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 순간 '멍'했습니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그들의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시간 날때마다 아버지를 따라가 일을 했습니다. 제가 식물을 기른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같이 웃음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더욱 좋았습니다. 그리고 제 친구들도
데려가서 같이 일을 했습니다. 아무래도 장애인들이 거름을 섞거나, 손이 많이 가는 경우에는 일을 못하기 때문에 그럴때는 아버지 지인들이나 제 친구들을 많이 불렀습니다. 그 때 같이 일했던 중학교 친구들은 아직도 같이 섞었던 거름냄새를 잊지못한다고 요즘도 말합니다^^
일을 하고 땀범벅이 되어 집에 돌아왔을 때는 힘없이 쓰러지지만, 마음만은 정말 가벼웠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저의 꿈은 이미 '농부'에 다가가 있었습니다.
'농부'란 참 행복한 직업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부터 학생기록부에는
장래희망이 항상 '농부'라고 써지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진학 후에도 '농부'라고 써놓고, 농대를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물론 틈틈이
아버지를 도와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막연히 S대 농대를 꼭 가겠다고 목표를 잡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도 농부된다는 희한한 놈을 재밌다고 하셨습니다.
이윽고 고3 1학기, 전 살면서 가장 큰 갈림길에 봉착하게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려면 농업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로 가라고 말하셨습니다. 평소 때 공부하라 소리 한 번 안한 아버지의 진지한 한마디에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좀 더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한 뒤에, 가고싶었던 명문대 농대와 서울권의 여러 농대를 직접 가보고, 몇몇 교수님 및 학생들과도 대화도 나눴습니다. 대부분 연구원이 되고 실제로 농부가 되는 사람은 몇 없다고 한 말에 그 당시 상당히 실망했던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 아버지가 추천하신 '농업전문학교'에 방문했습니다. 처음 갔을때말 그대로 엄청 실망했습니다. 학교는 조그맣고, 허허벌판과 허름한 기숙사, 그리고 몇 안되는 학생들... 거기서 전 미생물쪽을 좀 알고싶어서 이름도 웃긴 '버섯학과' 교수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웃음이 나왔지만, 그 분과의 대화에서 저도 모르게 빠져들었습니다. 졸업후에 학생들은 말그대로 '농부'가 된다는 것입니다. 농업학도들을 양성한 다는 게 이 학교의 목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실제로 농업을 하고 있거나, 앞으로 하려고 하는 열정적인 학생들로 가득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저는 담임선생님께 원서와 함께 진지한 말을 덧붙였습니다.
" 저 이 학교 가겠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생전 처음보는 학교와 이 웃기는 제자의 진지한 표정에 놀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말리셨습니다 ㅡㅡ;;;
원서에는 영농기반 (땅, 농기계, 가축)같은 것을 적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이 부분을 보시더니
" 너 왜이러냐. 여기가 학교야???" 그리고 다른 반 선생님들도 보시더니 장난한다고 비웃으셨습니다. 제가 가만히 있자, 담임선생님은
"너 진짜냐?"라고 진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 학교아니면 안가려구요." 라고 짧게 답한 저는 다시 한번 원서를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담임선생님과 교장선생님께 추천 도장을 받고 저는 원서를 접수했습니다.
제 고등학교가 사립이라 요즘도 가끔 제가 담임선생님을 찾아뵙는데, 아직도 그 때 얘기를 하시면서, 미친 줄 알았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한바탕을 한후 학교에 합격을 하게되었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영농기반이 없던 저는 학교성적이 좋아서 간신히 턱걸이 합격을 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공부 열심히 해놓길 잘했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도 같이 기뻐해주셨습니다. 특히 어머니께는 죄송했습니다. 처음에 반대도 많이 하셨습니다. 하지만 역시 저를 가장 존중해주신분은 부모님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의 반대나 선생님의 반대도 다 저를 위한 것임을 알지만, 결국 선택을 하는건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물론 대학도 중요하겠지만, 정작 자기가 하고 싶은것과 해야할 것을 분명히 해야 후회는 할 지 모르겠지만, 아쉬움이나 기회를 놓쳤다라는 그런 상실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것같습니다. 지금 학생들을 보면 참 아쉬운 부분입니다 ㅡㅜ
입학을 한 후 전 새로운 세계에 빨려들어갔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도시'촌놈'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말그대로 농업의 농자도 모르는 수도권아이가 각 지역에서 올라온 학생들의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간단한 쌀값얘기나 상추가 얼마하고, 구제역이 어떠니 이런 대화들은 정말 소귀에 경읽기였습니다. 각 지역의 사투리 또한 신기하게 들렸습니다.
실습이 있을 때는 삽질도 모르는 저는 어떻게 일을 할지도 몰라 어쩔 줄 몰랐습니다. 친구들은
" 이 촌놈 자식 삽질도 못하네~!" 라며 농담삼아 놀렸습니다.
본래 자존심이 센 저는 화를 내야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모르던 이 세계에 대한 깊이였습니다. 말 그대로 전 농업을 겉핥기 식으로만 다가갔던 것이었습니다.
삽질하나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일을 배워나가고, 농업에 대한 소식은 닥치는대로 듣고 읽었습니다. 그리고 대화나 토론이 있으면 어김없이 가서 참석했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저의 대학교 1학년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2학년 과정은 실습이었습니다. 각자 원하는 농장에 가서 1년동안 실습하면서 생활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전 1학년 때 일본을 선택해서 일본으로 가게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제일 큰 농장으로 실습생으로 1년 생활을 했습니다. 그 농장을 간단하게 말하면,
땅이 백만평에 소가 8000두, 감자,당근, 밀, 사탕무 등을 재배하는 개인농장으로서는 일본에서 제일 큰 홋카이도의 농장이었습니다. 일본어를 나름 준비하고 갔다지만 말도 안통하고, 어깨넘어로 배웠다고 생각한 일은 거기서는 다시 출발점이었습니다. 늘 긴장하고, 떨려서 실수연발이었습니다. 철저한 일본인에게 제가 보여줄 수 있는건 '성실함'뿐이었습니다. 일은 못해도 남들보다 10분 일찍 나와서 준비하고, 발로 뛰니 처음에는 거리감을 보이던 사람들도 호의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밑바닥부터 제대로 기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습니다. 한 번은 일을 하다 배가 너무 아팠는데, 참고 일하다가 일 도중에 기절한 적이 있었는데, 병원에서 일어나니 사장이 매 년 실습생들이 소에 관련된 일을 하면 소똥과 지푸라기 등 때문에 배가 아픈 경우가 있어서 병원에 온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사장은 기절할 때까지 일한 놈은 니가 처음이라고 담부터는 참지 말라고 해주셨습니다. 저도 모르게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ㅡㅜ 육체적고통과 함께 여자친구가 훽 전화번호를 바꾸고 잠적해버린 ㅡㅡ 정신적고통이 함께 했던 일본 실습이었습니다. 지금에서야 미안하지만 사귈 때 여자친구에게 연락도 잘 못해주고, 일본있을때 편지와 전화등으로 많이 힘이 되었었는데 헤어지고 나서 한번도 못봐서 고맙다는 말을 못했네요. 아마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리라 믿습니다.
* 일본 농장 사장님과 직원들^^ *
* 일본의 밀밭^^ * * 매일 우유주던 송아지들^^ *
여름엔 40도까지 올라가고, 겨울엔 -20도까지 내려갔던 홋카이도의 날씨는 아직까지도 제 기억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아마 다시가서 하라면 조금은 망설여지겠네요^^
그렇게 보람찬 1년을 보내고 다시 한국으로 왔을 때 뭔지 모를 뿌듯함과 앞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는 무한한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물론 다른 학생들도 다들 성장한 모습이었습니다. 3학년 생활은 다들 앞으로의 미래를 설계하고, 사회로의 발걸음을 준비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졸업을 한 후 저는 경기도 광주의 영농후계자가 되어 열심히 농업에 종사하게되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마련한 조그마한 땅에 터를 잡고큰 꿈을 위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졸업을 하자 아버지는
" 너도 성인이고, 아들이 아닌 동지로 잘 부탁한다" 라는 말씀과 함께 저에게 손을 내미셨고, 전 꽉 잡으면서
" 잘 부탁드립니다 "로 뭉클한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서로 조언을 구하며 동지로서 끈끈하게 맺어져있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숙주나물 농장을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와 나름 열심히 준비하고 사업을 시작했지만, 처음엔 실패와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유도 모른 채 숙주는 썩고, 거래처들에게 욕을 먹으며 '죄송합니다'만 반복하던 하루하루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저를 더욱 성장하게 했고, 하나 하나 고쳐나가면서 처음에는 안좋던 저의 숙주나물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매일 잠 2~3시간 자면서 일일이 체크하고, 관리했던 눈물의 결과였습니다. 작년말에는 몸이 너무 무리를 해서 술도 안마시는데 급성간염으로 쓰러져서 한달동안 비실비실대기도 했습니다. 하루를 생산과 가락시장 배달을 반복하는 저의 일상이 때론 '이거 왜하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저는 '농부'로서 조금씩 커가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한 두개였던 상점은 하나 둘 씩 늘어서 지금은 14개의 상점으로 늘어났고, 배달하는 숙주의 양도 작년보다 3배정도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미니채소와 메밀싹도 한번 도전해보려고합니다.
오늘도 숙주 생산을 하고, 가락시장에 배달을 다녀왔습니다^^;; 친구들이 요즘 시험기간이라고 하던데, 그런 것도 모르고 살았네요. 전 하루하루가 시험같은데 말이지요^^
친구들은 학교를 다니고 '학생'소리를 들을 때, 전 이미 가락시장에서 배달하는 '아저씨'로 불리우고 있었습니다 ㅡㅡ;; 근데 그게 듣기 싫지가 않더라구요^^ 토요일에는 가락시장이 쉬어서 금요일 새벽에는 늘 시장에 나가서 농산물도 둘러보고 거래처 사장님들과 차한잔 하면서 수다도 떨고 오는데요. 제가 아들같다면서 많이들 챙겨주십니다. 가끔 '김사장'이라고 불러주시는데, 그 때는 뿌듯함을 느낍니다.
* 요새 새로 판 명함이네요^^ *
이것저것 쓰다보니 글이 길어졌네요 ㅡㅜ 글 솜씨도 없는데 ㅡㅜㅡㅜ
솔직히 농업에 막 발을 내딛었을 때는 막막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샌님이었고, 농업에 대한 차가운 시선도 다소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제가 철이 없었고,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짜피 전 처음 접하는 것이었고, 뭐든지 배워야 할 백지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남들에게 자꾸 물어보고 고개 숙이면서 겸손의 자세로 세상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제서야 새삼 깨닫게 된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가슴에 품은 꿈은 꺾이지 말아야한다는 것도 알게되었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서 '장애인들을 위한 친환경적 전환센터'를 만드는 것이 저와 아버지의 꿈이네요^^ 농장에서 장애인들에게 일거리도 주고, 사회의 적응하기위한 교육을 하고 싶습니다. 이건 아버지의 꿈이셨는데, 어느새 저의 꿈도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저의 마지막 꿈은 '좋은 아버지' 입니다. 저의 아들 혹은 딸에게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다.'라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물론 제가 택한 농업이라는 길을 통해서 말이지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다음에는 금방 넘어간 옛날 중고딩때 일화나 일본 실습생활등을 한번 써볼까합니다^^ 늘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