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온전한 신앙생활은 무엇일까? 각 시대별로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려, 가장 성서적이라 스스로 믿으며 모범을 보이고 사람들 앞에서 선포했다. 대표적인 예로 청교도 운동은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서 시작되었고 그 영향력은 유럽 전체에 미쳤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위협에 기독교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청교도들은 누구인가?
1568년에 런던에는 재침례파(Anabaptists) 회중들이 많았다. 그들은 스스로 청교도 혹은 흠 없는 주님의 어린양들이라고 불렀다. 청교도란 용어는 이들과 관련해서 처음으로 사용됐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 기간(1558-1603)에 기독교의 중심이 되는 대진리들을 강조하는 목회자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들의 강조점은 성경 말씀에 충실하기, 강해 설교, 목회적 돌봄, 개인 경건과 생활 전반에 걸친 실제적인 거룩이었다. 청교도라는 말은 이처럼 철저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쓰여지기 시작했다. <37p>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청교도들의 삶이 결코 특이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성서를 보면서 시대에 맞게 적용하여 지극히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특히 그들은 예수가 이 땅에서 명령한 두 가지 계명을 열심히 지켰다. 몸과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겼고, 뜨거운 동지애로 서로 사랑하였다. 그러나 봉건군주들과 가톨릭교도들은 그들을 잔인하게 박해하였고 시기하였다. 서로가 동일하게 믿는 하나님 앞에서 박해와 시기가 있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청교도들을 비롯한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은 내·외부의 박해와 시기를 죽음과 신앙으로 극복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과 신앙은 거짓이 없었고 순수했기 때문이다.
청교도의 건전한 교리는 21세기에 들어선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하다. 그들은 균형 잡힌 칼뱅주의자들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건전한 교리의 모범을 남겨 주었다. 또한 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서 완전히 잃어갈 위기에 처한 성경적인 죄론을 그들의 저술을 통해 보존하였다. 여기에 덧붙여 그들은 도덕법의 유효성을 인정하였다. 도덕법은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고 중생한 사람이 믿음의 순종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행위의 원칙이었다. 그리고 청교도는 우리에게 깊은 기도와 헌신된 삶을 촉구한다. 그들은 부지런히 마음을 지키는 일과 영적 전쟁의 실체와 깨어 있어야 하는 일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교회 성장에 대한 청교도의 소망은 하나님 중심이었고 깨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였다. 종말에 관한 청교도의 교리는 간절한 기도를 하게 하였고, 수고의 동기를 부여했으며, 인내를 일으켜 오래 참게 하였다. <80~81p>
어떻게 보면 그들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15~17세기에 다시 회복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이 책에 소개된 청교도들의 삶에서 초대교회 때 순교당한 스데반을 보았다. 사도행전 6~7장에서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는 청교도들의 삶과 같다. 사람들 중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스데반과 변론하여 이기는 자가 없었고, 그의 얼굴은 뭇사람들이 보기에 천사와 같았다. 그의 설교는 하나님의 심정을 말하는 듯해서 듣는 이들의 마음을 찔렀고 이가 갈리도록 만들었다. 왜 그럴까? 어둠에 익숙한 사람들은 빛으로부터 도망치려하고, 소금은 꼭 필요하지만 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죄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지만 그들이 회개하기에는 죄에 익숙하고 말씀에 무지하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칭찬받아야 마땅한 스데반은, 오히려 모함을 받으며 돌에 맞아 순교했고 순교당하기 직전에도 하나님의 얼굴만을 구했다. 청교도들도 이와 같다.
청교도들은 모범적인 설교자들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들은 설교가 그들의 일차적 소명이라고 믿고 설교의 우위성을 견지하였다. 지성, 감정, 양심, 의지를 포함하는 인격체 전체에 설교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은혜의 수단은 없었다. 설교처럼 성령 하나님이 독특하게 사용하는 다른 방법이 없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려 왔던 세례 요한은 설교로써 자신의 사역을 마쳤고 인자(人子) 자신도 설교를 하기 위해 오셨다. 무리들은 강의실에서 하는 것과 같은 강의를 세례 요한에게서 들으려고 광야로 가지 않았다. 바윗돌이 그의 강대상이었고 하늘이 그의 마이크였다. 그의 설교는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먼 거리에서 모여들었다. 청중들이 왔을 떄 요한은 그들의 귀에 듣기 좋은 말들로 아첨하지 않았다. 그는 직접 그들의 양심에 대고 말하였다. 그는 청중들이 도움을 받아야 할 잃어버린 죄인들이라고 지적하였다. <230p>
청교도들의 삶은 어디서든 하나님의 이름 앞에 돌 맞을 각오를 하고 있는 삶이었다. 에드워드 데링(Edward Dering)은 엘리자베스 여왕 앞에서 설교를 통해 여왕의 어리석음을 꾸짖었다. 다른 설교자들은 여왕 앞에 아첨했지만, 그는 오직 하나님의 심정을 간구하여 깨닫고 듣는 이들에게 강렬하게 선포했다. 존 로저스(John Rogers) 역시 직설적이면서도 탁월하고 영향력 있는 설교로 죄에 빠진 영국민들을 회개시키고 영적으로 각성시켰다. 그에 반해 오늘날 기독교계의 설교자들은 얼마나 사람들에게 아첨하며 지루한 설교를 내뿜는가? 그들은 정말 전해야 하고 회복해야 될 하나님의 말씀들을 숨기고 있으며 사람들과 교인들의 모범이 되기보다 분개와 불신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고 있으니 기성 목회자들은 직무유기를 하고 있으며 스스로가 하나님의 앞에서 부끄러움을 보이는 것이다.
청교도 저자들은 기쁨, 사랑, 침체, 버림 받음, 환난, 투쟁, 자족, 징계 등과 같은 온갖 종류의 영적 체험들을 언급하였다. 모든 체험의 받침대는 신자가 하나님과 갖는 연합과 교제의 체험이다. 존 오언(John Owen)은 요한일서 1장 절의 강해를 시작하면서 교제는 하나님의 성삼위와 각각 갖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성도가 아버지와 갖는 주된 교제의 길은 사랑이다. 즉 자유롭고 아낌없는 영원한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영광과 탁월함은 계시되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의 체험을 심화시켜야 한다. 오언은 우리가 성령과 갖는 교제의 방법들에 대해서도 설명했는데 매우 실제적이다. <203p>
한편, 청교도들의 고백은 바울의 고백과도 같다. 고후 11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소개함으로써 참된 자랑을 하고 있다. 복음전파 중에 차마 버티기 힘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그의 모습은, 선교지에서 항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사람들에게 성인(聖人)으로 칭찬을 받았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그러나 바울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 없이 선포하고 복음전파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와 비슷하게 청교도들도 설교와 저술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을 원했다. 예로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존 오웬(John Owen),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존 번연(John Bunyan) 등의 설교와 저서들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성도들과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삶과 고백들은 앞으로도 교회사 속에 계속 남을 것이 분명하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균형된 교리로 복을 받았다. 그들은 이 교리를 붙잡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실망되는 일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확의 때가 있을 것을 알고 인내하며 수고하였다. 오늘날 사람들은 복음에 거의 관심이 없는 듯하다. 우리도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에 의해 복음의 열매가 증가할 것을 신뢰하고 동시에 인내하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균형 잡힌 주권과 책임에 대한 교리를 붙잡아야 한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처럼(눅 8:1-15) 우리는 때가 되면 수확이 있을 것을 알고 반드시 파종해야 한다. <189p>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거기에 멈춰있으면 안 된다. 우리가 천국의 시민권자라면 천국의 법 곧 하나님의 법을 우리 삶에서 지켜야 한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현세의 복과 내세의 천국에만 집중하여 현실의 삶을 경시하고 있다. 그래서 빛과 향기, 소금의 맛을 모두 잃었다. 한 나라의 국민들도 법을 지키지 않으면 제재를 받는다. 그렇다면 천국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사랑의 하나님은 죄에 빠진 우리들에게 선지자들을 보내어 죄에서 돌이키라고 말씀하셨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이런 의미에서 청교도 운동 역시 우리들의 죄를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오늘날까지 그 역할을 감당하면서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목회자들과 나약한 성도들의 꾸짖으며 온전한 믿음과 신앙생활의 모범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