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매우 가난한 청년시절을 보내셨다. 전쟁이 벌어지자 남쪽으로 몸만 간신히 피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는 그 시절 모든 가정이 그랬듯이 첫째를 공부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운영하던 길거리의 작은 국수집에서 배달 일을 하면서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불평 한 번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아버지는 이런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훗날 내 자식이 자라나서 나처럼 가난 속에서 식당 배달 일을 한다면 그것만큼 가슴 아픈 일은 없을 것이다.’
아버지는 이 생각을 하면서 출세를 다짐하셨다고 한다. 그리곤 헌 책방에서 책을 사다가 낮에는 식당 배달 일을, 밤에는 공부를 하셨다고 한다. 2년 동안 잠을 줄여가며 공부를 하신 아버지는 단국대 법대에 입학하셨다.
그런데 그 곳에는 또 다른 난관이 있었다. 학비가 모자란 것이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R.O.T.C를 할 경우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 학비를 지원해준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덕택에 대학교를 무사히 다닐 수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제복을 살 돈조차 넉넉지 않았던 아버지는 여름에도 겨울 제복을 입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 당시 아버지는 대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교를 졸업한 아버지는 그 때나 지금이나 최고의 직장으로 손꼽히는 한국전력공사에 입사하셨다. 여담이지만, 나는 어렸을 때 한전이 전봇대 수리나 하는 작은 회사인 줄 알았다. 그래서 친구들은 자기 아빠는 사장님이라고 하는데 왜 나의 아빠는 이토록 초라한 직업을 갖고 계신지 부끄러웠다. 심지어 친구 집에 놀러갔을 때면 아버지의 직장을 속여서 말하기도 했다.
한전에 입사한 아버지는 오직 출세를 위해 미친 듯이 공부에 매달리셨다고 한다. 회사에 가는 버스에서도 공부를 하고, 심지어는 자면서도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한전 역사상 최단기간에 과장으로 승진하는 쾌거를 이루셨다.
그러나 사회는 노력만으로 되는 곳이 아니었다. 과장 이후로는 시험이 아닌 윗사람들의 평가점수를 토대로 승진이 이뤄지기 때문이었다. 남들처럼 값비싼 양주를 사들고 인사를 드리러 다닐 형편이 못 되었던 아버지는 훨씬 늦게 과장이 된 동기들이 부장으로 승진하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 했다. 아버지는 그 때 다시 한 번 가난 때문에 눈물을 흘리셔야만 했다.
한전에서 만난 어머니와 결혼을 해 누나와 내가 태어났지만 우리 가족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물론 남들처럼 버는 돈을 다 썼다면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힘든 길을 택하셨다. 어머니는 이제 갓 말을 시작한 나를 데리고 다른 가정에 파출부로 나가셨다. (결혼 후 어머니는 육아를 위해 회사를 그만두신 터였다.)
그나마 어머니의 이모님 소유 건물 꼭대기 층의 작은 집을 얻었기에 다행이었다. 그 당시 어머니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다리를 건너면서 새로 지은 수많은 아파트의 불이 밝혀진 것을 보았는데, 그걸 보면서 저 많은 불빛들 속에 왜 우리 집은 없는지 원망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신다.
다행히 그런 부모님이 있기에 우리는 비교적 빠른 시간에 신도시의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었다. 그 때는 가족 모두가 처음 생긴 ‘우리 집’을 기뻐하며 얼싸안고 울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정말 대단한 건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의 일이다. 결석이라고 하는 뱃속에 작은 돌이 생기는 병에 걸리신 아버지는 어느 날 새벽에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셨다. 의사는 수술을 권유했지만, 아버지는 거부하셨다. 줄넘기를 비롯한 각종 운동을 통해 뱃속의 돌을 자연배출 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수술을 거부한 것이었다. 의사가 준 시한은 단 며칠. 놀랍게도 아버지는 며칠 만에 돈 한 푼 안 들이고 완쾌되셨다. 그 때 의사선생님은 “이렇게 지독한 환자는 처음 봤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남들은 한전 과장됐다고 고급차를 사곤 했는데, 아버지는 부장이 되고도 10년 전에 구입한 중고차를 정말 지독하게 오래 타셨다. 심지어 그 차가 갑자기 멈추자 고안한 방법이 어머니의 티코를 타고 회사에 가는 것이었다. 그 때 아버지는 “지사장님이 과장 녀석 그랜져만 같이 탄다.”고 푸념하시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결국 그 차가 폐차가 될 때까지 차를 바꾸지 않으셨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아버지의 삶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어렸을 때는 이런 아버지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솔직히 부끄러워서, 아버지가 차로 학교에 데려다 주신다고 할 때마다 온갖 핑계를 대며 거절하곤 했다.)
이렇게 긴 시간이 흘러 아버지는 내가 대학생이 되던 해에 한국전력공사의 지점장이 되셨다. 그동안 우리 집도 많지는 않지만 남부럽지 않을 정도의 재산을 모았고, 아버지의 가장 큰 걱정이 '부동산세'일 정도로 삶이 바뀌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면 부모님의 생활방식이다. 그나마 요즘에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다 같이 해외여행도 나가고, 이것저것 문화생활도 하시지만 지난 20년의 삶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목욕한 물이 아까워 버리지 않고 다시 사용하시는 아버지다.)
대학에 와보니 학비를 걱정하는 친구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사회적 불평등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도 알게 되었다. 친구 중에는 방학 때 학비 마련을 위해 2시간 자면서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는 아이도 있었다.
때로는 친구들 중 몇몇이 나를 부모 잘 만나서 호강하는 것처럼 얘기하곤 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시라. 위와 같은 아버지가 나를 호강시켜 주실 분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나는 일찌감치 아버지를 터득한 사람이다.
나는 중학교 때 동대문에서 의류를 사다가 옥션에 판매하는 사업을 했다. 갖고 싶은 건 많은데 아버지가 사주지 않으시니 어쩌겠는가. 내가 벌어야지. 고등학교 때는 이것저것 사업을 하기도 했고, 운 좋게 방송국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꽤나 짭짤한 돈을 벌 수 있었다.
대학교에 와서도 다를 건 없었다. 나는 용돈을 한 푼도 받지 않는다. 대학생이 돼서도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건 부끄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버지는 내게 단 한 푼의 유산도 남기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셨다. 알아서 살라고 하신다.) 나는 지금까지 친구들과 함께 잡상인이 되어 대학교 앞에서 문구 용품도 팔아봤고, 그룹과외를 하면서 용돈을 벌기도 했다.
각설하고. 어렸을 적부터 나와 아버지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러나 매번 어머니는 “결국 아들은 언젠가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고 강조하셨다. 그래서였을까. 대학교 1학년 때 이후 다양한 곳에서 아버지뻘 되는 선배들과 함께 일하면서, 나는 그 때서야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해에는 절친한 친구 한 명과 아버지 얘기를 하며 몇 시간 동안 펑펑 울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정말 대단한 분인 것 같다. 이제라도 부모님의 노력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늦었지만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께서는 방송국 일에만 몰두하는 나를 불러놓고 아버지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다 해주셨다. 그러면서 "아들아, 공부하는 고통은 잠깐이지만, 못 배운 고통은 평생 간단다."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 때 나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아버지.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아버지보다 더 성공해서, 정말 모두가 우러러 보는 멋진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믿고 끝까지 지켜봐주세요.”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강화도 여행에서. 왼쪽부터 친누나,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를 이끌어주신 한전 본부장님, 사모님, 스탠포드맨 지환형님, 초라한 나, 멋진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