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화된 신체의 모습을 통해, 볼륨이나 원근법의 표현을 배제하고 칠해진 형상과 그 형상으로 인해 생성된 공간 저 너머 또 다른 미지의 공간을 암시하는 기념비적인 걸작." 이라는 평론가의 말_ 그건 당신이 그 그림을 본 느낌이고, 모든 예술은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흘러간다. 최근 블로그를 외부로 노출시키고 대외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내가 표현하고픈 느낌이 아닌 다른 느낌으로 전해지는구나.'
Henri Matisse. The Dance. 1910.
Oil on canvas.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la plus beau monde _
하나의, 변화'
작가는 이미지를 창조해냈다. 그리고 군중은 그 창조된 이미지를 보고 판단한다. 실제 작가를 그자리에 모셔두지 않고, 작가의 인생과 인생관, 철학, 사색, 감정, 사랑한 사람, 감정, 분노, 돈, 사회적 지위, 정치적 상황 등등등등_ 전후의 사건들과 사실인것처럼 꾸며진 얘기를 토대로 작가의 그림을 이야기한다. 모두에게 주입시키려하는가? 가령, 한 남자가 무언갈 응시하고있다. 한 여자가 웃옷을 벗고있다. 이 얘기에서 남자는 여자의 벗은 모습을 봤다고 독자들은 생각한다. 또, 한 남자가 무언갈 응시하고있다. 바구니에는 먹음직스럽게 생긴 빵이 가득있다. 이러면 남자는 빵을보고 있다고 여긴다. 마찬가지 아닌가? 작가가 이미지를 창조해낼때 어떤감정이었는지. 알 수 있는것도 아니면서 전후의 사건들을 이어붙여서 꼭 멋대로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나? 복합적인 감정 말고 한가지 감정만 전달하는 그런 예술을 할 수는 없는것인가? 나는 빵이 그리워 빵 그림을 그렸다. 훗날 접하는 대상에게 '작가가 생활고에 시달려 빵을 훔쳐 감옥살이를하다가 감옥에서 우연히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그게 이 그림이었다.' 라고 설명을 한다면 뭐라고 인식하겠는가. 역사를 설명하는건 옳지만 상황을 억지로 설명해 본질을 흐트리는 짓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기쁠때 본 느낌과, 슬플때 본 느낌이 다르다. 이미지 뿐 아니라 음악이나 문학 전반적인 부분에서 이런 형상을 자주 목격하고 또 경험한다. 내가 하고자하는 얘기는 무언가에 결론을 내리자는건 아니고 그 느낀바가 정답이라는건 아니다 하지만 난 며칠 전 나른한 오후의 시간에 변화된 하나를 발견하고 아주 깜짝놀란다. 티비에서는 어느 유명하다는 국내작가가 나와서 그림 여러점을 놓고 설명을 하고있다. 그것은 마치 '황조가'에서 꾀꼬리에 담긴 의미를 설명하는 국어선생의 모습과도 흡사했으며, 머리에 터번을 두른 체 군중에게 물건을 팔기위해 열심히 포장을 하고있는 페르시아의 상인과도 같은 꼴이었다. 거부감이 들었다. 저렇게 얘길 하고있는데 고개를 끄덕이며 그 주입을 듣고있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인가? 예술이 작가와 숨은그림찾기하는 놀이인가? 작가는 자신의 그림에 메시지를 이곳 저곳에 숨겨두고있나? 아니다 대부분의 예술작품은 하나 내지 두 세개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지 그리 복잡하게 숨겨두질 않았다. 클라식작품은 더 대중이 이해하기 힘들다. 마에스트로가 되기위해 기본 500여 권의 악보를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음악가가 음악을 작곡한다. 1초의 순간에도 부호, 음표, 발성법 등등등 많은것이 담겨있다. 1초라는 짧은 순간에 우리가 느끼는 여러가지의 음을 듣고, 그렇게 이어지는 음들을 합쳐 한개의 악장이 탄생한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부호를 이렇게 결론내린다. ' 비제. 여인을 추억하며 한남자가 쓴 작품은 부제로 이렇게 불려진다. 엘리제를 위하여 원어로보면 이렇다. 'Bagatelle for Piano in A Minor, WoO 59 Darren L. Slider , Piano' 차라리 '바가텔' 이라고 제목을 지어내면 좋았을것을.. 엘리제를 그리워하다 4월 어느날 작곡을 했다. 그래서 부제가 엘리제를 위하여 이다. 다시 이미지로 넘어와서 '밀레의 만종' 을 보면 원래의 바구니는 곡식바구니가 아닌 갓난아기가 들어있는 그림이라고 알려졌다. 그것도 엄청난 비밀이라는 둥 아는 사람들만 아는 얘기가 되어 버렸다. 힘들게 일하느라 아기를 미처 돌보지 못해서 밭에서 일하는 사이에 아기가 죽었다. 그래서 만종소리를 들으며 아이를위해 기도를 하는 장면을 보고 밀레는 그림을 그렸다. 과연 그 시간에 종은 울렸나? 종교적영향을 많이 받고있던 사회적 영향때문에 바구니는 아기대신 곡식이 담기게되고, 훗날 사람들은 곡식을 갖게해준 고마움을 기도하는것이라고 해석하기 시작한다. 근데 누가 알려줬나? 만종의 바구니는 원래 아기바구니라는것을..
티비에서는 터빈을 두를 국내작가가 한 그림 앞에 섰다. '마티스의 춤' 이 포스트의 삽화인 그림이다. 욕실의 샤워소리가 그치고 중년의 남성이 전라인체로 티비앞을 가로질러간다. 볼록나온 배, 숙이다만 머리, 넓고 균형맞지않는 갈비뼈, 도자기 구울때 쓰는 검붉은 색이 도는 피부를 가진 내 아버지가 티비속 마티스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겹쳐보인다. 내 아버지, 한때는 내 놀이터였던 아버지의 다리, 배, 팔 모두 변해버렸다. 현재의 내 모습과 흡사하다고 기억한다. 속살이 흰 피부와 겉으로 드러나는 살짝 탄 피부, 군살 없이 탄탄하게 우리 가족을 지킬 것 같았던 배근육 모든것이 짧은사이에 변해있었다. 참 오랜만에 본 아버지의 전라의 모습에 읽던 책, 보던 티비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마치 마티스의 그림속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온 것 같은 중년의 남성이 아버지라는 사실이 금방 머릿속에 인식되어지지 않는다. 중학교이후 최근까지 떨어져지낸 세월이 십수년이라 그동안 많이 변하셨다. 변한줄도 몰랐으며 그렇게 되리라고 한번도 생각지 못했었는데 어느순간이었는지 우리아버지를 이렇게 나이든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림을 조금 더 바라보다가 터빈을 두른 여성의 헛소리에 구역질하듯 속으로 욕이 나왔다. 그리곤 티비를 꺼버린다. 이렇다. 나는 마티스의 이 작품을 아주 어릴적에 접했다. 미술시간에 이 그림을보고 연상되는 작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제 이 그림은 새롭게 보인다. 내 아버지의 모습같고, 이 속에 움직이는 인물들 중 한 명이 내 아버지인것같다. 그래서 미루고 미루던 이 포스팅을 하게 되었다. 내 아버지는 지금의 내 나이에 나를 낳으시고 우리가족을 이끌어 가셨다. 나는 항상 내가 젊은나이라고 생각한다. 결혼 정년의 기준이 아버지세대에는 26 이었다면 현재는 32이 되어버렸다. 사회적인 책임을 질 사람들이 피시방에 가득하다. 하루를 잃고 그저 시간때우기식의 총을 들고 컴퓨터 화면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다닌다. 이렇게 노는 사람들이 많았던가. 그 중 속해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내가 어쩌다 이렇게 변했는지.. 또 변한 내모습을 미워하게 된다. 내 아버지처럼 이 나이에 가정을 꾸릴 수 있어야하고, 그 가정을 잘 이끌 수 있어야하는데, 여긴 쉬운일은 아닌듯하다. 용기가 있으면 행동을 해야하건만 그 용기는 행동이 되지 못하고 하루하루의 망상이 되어 버린다.
다섯이 등장하는 이 그림을 예전에는 다섯 모두가 손을 잡고 춤을 추는 거라고 생각했다. 머릿속에 오래도록 떠오르는 이미지 역시 그런 이미지였다. 그림을 보고 작가의 이름을 외우고, 그림을 그리던 당시의 환경을 머릿속에 집어 넣는다. 그래서 한참동안 이 작품의 제목을 보면 그림이 떠오르고, 그림을 보면 제목이 떠오를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사본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머릿속 이미지는 모두가 손을 잡고있다는 것이다. 자세히도 아니다. 이 글을보고 '그래?' 라고 느꼈다면 그냥 다시 한 번 보길 바란다. 분명 함께 잡고있었다고 생각하던 인물 중 한명은 손을 잡지않고있다. 게다가 그인물은 넘어지고 있다. 다리를 보면 다른인물들은 한다리를 조금 높게 올린 반면, 손을 놓친 그 인물은 다리가 어정쩡하다. 강강수월레를 했다면 빙빙도는 과정에서 다리를 엇디뎌 넘어지면서 손을 놓치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래 맞다! 이 그림은 다섯 인물이 정겹게 춤을 추는 장면을 담은게 아니라 특정 한 인물의 넘어지기 일보직전을 표현한 그림인것이다. 그런데 과거 어느 누군가는 '마치 무한한 생명을 갈구하는 듯한 몸짓으로 춤을 추는 사람들.'이라고도 표현했다. 나는 실제로 이 그림을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그림이 우리가 알고 있던 것 보다 얼마나 커다란 그림인지는 잘 알고 있다. 저 그림은 매우크다.
높이 2.6m, 넓이 4m에 달하는 아주 거대한 그림앞에 있다고 어두운 방에서 상상해본다. 고개를 들어도 모니터를 오래처다봐서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정적에 마티스의 그림 한 폭을 올려다 놓고 크게, 더 크게를 외치며 키워봤다. 난 지금 그 그림 앞에 서있다. 거인이다. 정말 거대한 인간이 나를 짓누르고있다. 거대한 인물의 끈임없는 움직임 앞에서 이제껐써왔던 글이 무너짐을 느낀다. 저 그림 앞에서 저 움직임 앞에서 더이상 내 글은 심장을 잃어버렸다. 애초 얘기하려던 놓친 손에 대해 이야기를 할 자신이 없어져 버린다. 어두운 방안에 다섯 거인들에게 둘러쌓여 조금은 오싹해진다. 상상만으로 마주한 그림 속거인들의 움직임을 이렇게 생각하다니, 나 역시 놀라운 현상을 방금 겪은것이다. 억지로 하던 얘기를 계속 하자면 내가 바라본 생각은 그랬다. 저 끊어진 손을 다시 잡아주려 하였을까. 아니면 이제 도착한 인물이 손을 잡기위해 달려드는 것인지.. 아마 잡고 춤을 추다가 끊어진 상황 이라는것 그쪽으로 생각을 굳히기로 했다. 그리고 그동안 다섯명이 손을 꼭 잡고 있었다고 착각한건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소형자동차의 크기와도 비슷한 캔버스를 바라보면 거인들의 춤과 단순한 색에 휘말려 끊어진 손에는 관심이 없을 테니까.. 그러나 자꾸만 나는 그 손과 넘어지는 듯 한 그 미묘한 경계선, 그 찰나에 계속 시선이 간다, 그리고 좌측 끝에 있는 손을 놓치고있는 남성(으로추정)의 모습에 자꾸만 내 아버지를 생각하게 된다_
P.S_ 거대한 거인 다섯이 내게로 넘어진다. 숨이 막힐듯한 검붉은 거인들을 때문에 주늑이 들어 더이상의 글을 쓸 수 없다. 당신은 어떻게 느끼셨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