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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6신민부의 출현 ⑵

조의선인 |2010.10.04 12:50
조회 573 |추천 0

★ 독립군 간부 양성을 위해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다

 

신민부(新民府) 창설과 함께 만주의 조선인들에 대한 자치활동은 활기를 띠게 되었고 신민부의 간부들은 소임을 다하여 각자 맡은 사업들을 소신껏 밀고 나갔다. 지방조직을 확장하면서 일본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독립군 편성과 훈련에 주력했다. 신민부의 군사부위원장인 김좌진은 우선 모젤·브라우닝식 총기(銃器)로 무장한 별동대와 보안대를 조직하였는데, 그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의용군 사령관 김좌진(金佐鎭)

의용군 참모장 겸 보안대 제4대대장 주혁(朱赫)

경무국장 이연(李淵)

보안대장 박두희(朴斗熙)

보안대 제1대대장 겸 별동대장 문우천(文宇天)

보안대 제2대대장 백종렬(白鐘烈) 

보안대 제3대대장 오상세(吳尙世)

보안대 제5대대장 장종철(張宗哲)

 

이와 같은 김좌진 장군의 보안대·별동대 편성은 그의 목표인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통한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을 전개하려는 의지의 발로였다.

 

한편 신민부의 실업부위원장인 이일세(李一世)는 둔전제(屯田制)에 참여하는 병사들에게 공급할 양식을 마련하자면 토지가 있어야 하지만 돈도 없으니 토지를 구입할 방법을 구상중이었다. 이일세가 이와 같은 고민을 하던 중에 김좌진 장군은 신민부의 의용군을 구성하고 의기양양하게 행군을 시작했다. 김좌진 장군이 부대를 이끌고 나타나자 북만주 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 교포들은 모두 환호하며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을 통해 독립군을 이끌고 일제(日帝)의 정규군과 교전하여 당당하게 대승을 거둔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위훈(威勳)은 중국인들 가운데서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렇듯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청산리대첩의 주역 김좌진 장군의 명성은 만주 각지에 널리 퍼져 있었다. 김좌진 장군은 자신의 높은 인지도를 이용하여 중국 지방정부와 교섭하여 우호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한편, 중국 관헌들이 일본 군경을 도와 한국 독립운동 종사자들을 체포하거나 학대하는 일을 자제하도록 요구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지방 관청에서는 김좌진 장군에 대한 민심의 지지가 높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조선인들이 만주 땅에서 정착하는 것을 돕고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토지를 구입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신민부 측과 합의를 보았다.

 

당시 영안(永安)·해림(海林)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중동철도(中東鐵道)의 동서 일대 토지들의 소유주들은 영황지주(領荒地主)·점황지주(占荒地主)·권세(權勢) 겸 토지주(土地主)의 성격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첫째 영황지주는 먼저 임의로 황무지를 경작인으로부터 헐값으로 사서 영황토(領荒土)로 지방청에 비준을 받은 뒤 관료들을 매수하여 토지대장(土地臺帳)까지 자기 명의로 등재해 놓은 토지 소유자를 말한다. 둘째 점황지주는 관리의 가족이거나 그의 친척들로서 넓은 토지를 가진 지주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권세 겸 토지주는 권세를 이용하여 영세민의 토지를 헐값으로 사들이거나 관부(官府)에서 땅을 조사할 때 뇌물로 매수하여 면적은 적게 만들고 땅은 많이 차지한 경우를 뜻한다. 또한 이곳에는 위와 같은 토지 소유자들 이외에 임자 없는 땅들이 많이 있었고, 이러한 토지들은 거의 미개간지였다.

 

김좌진은 해림의 산시(山市)에도 미개간지가 많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친히 현지를 답사한 다음 그곳을 고령자와 같이 독립군의 중요한 둔병지(屯兵地)로 건설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는 여진인(女眞人) 마씨(馬氏)의 토지 2헥타르를 구매하여 콩밭을 일구고 그 근방의 습지 가운데에 배수로를 만들고 98헥타르의 논을 만들어 씨을 뿌리고 황지촌의 미개간지도 무조건 몇년간 경작하다가 지방관서와 협상끝에 소유권을 인정받아 차지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신민부는 다방면의 노력 끝에 사전자(娑田子)에 논 5헥타르가 생겼고, 고령자·석두하자·백모자·해림 등지 등 여러 곳에 논과 밭 등을 다소간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신민부는 군구제(軍區制)와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면서 그 지역내에서 18세 이상 40세 미만의 청장년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상비군을 보충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신민부는 발전의 토대가 잡히면서 정예군인 양성을 위하여 목릉현(穆陵縣) 경내에 있는 소수분(小愁芬) 팔리평(八里坪)의 골안에 군사교육기관을 세웠다.

 

원래의 자리는 중동선 동쪽 끝머리에 있는 중소국경에 가까운 토성자 마을이었다. 그 마을은 교포 90여호가 모여 사는 조그마한 마을로서 연해주를 거쳐 들어와 살고 있는 곳이다. 처음에는 이 마을에 통나무를 쌓아 벽을 만들고 자그마한 교실을 지어 놓고 얼마 가량의 수업을 했지만 그곳은 군사훈련에 적합하지 않아 사관학교는 팔리평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는 소학교로 쓰게 하였다.

 

팔리평은 토성자에서 곧장 북쪽으로 25리 들어와 있는데 높은 산이 에워싸 있고 좁고 길다란 분지로서 조선인 주민들이 산기슭에 띄엄띄엄 산재하여 살아가고 있었다. 이곳에 180여평방미터쯤 되는 ‘7자형’ 토담집이 신민부의 군사교육기관이었다. 이 팔리병에는 토성으로 된 고구려의 옛 성터가 있고 그 성터의 동족에 있다고 하여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라고 하였다. 성동사관학교의 교장에는 김혁(金爀), 부교장에는 김좌진, 교관에는 박두희·백종렬·오상세 등이 선임되어 연 2기의 속성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5백여명의 사관생도를 배출하였다.

 

이와 같이 계획된 사업들이 원활히 진행되자 내외 인사들의 기대도 대단했다. 그러므로 각지에서 찾아오는 교포들도 많았다. 이와 같이 신민부의 체계가 잡히고 교포들이 단합하여 모여들기 시작하자 일제(日帝)는 신민부의 동태를 주목하고 간부들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하는 것을 목표로 거액의 현상금까지 내걸고 밀정들을 기관내부에까지 잠입시켜 암살 음모까지 획책하고 있었다. 이에 신민부의 영수급 인사들은 물론 김좌진 장군도 항시 고정지점에 상주하지 않고 수시로 장소를 변경하면서 기거했다.

 

그 무렵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만주 땅에서 김좌진 장군의 대중적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김좌진이 간도의 일본영사관에 ‘귀순(歸順)’해서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 단체들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모략소문(謀略所聞)을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김좌진 장군의 독립군 재건사업은 상당한 지장을 받기도 하였다.

 

일제(日帝)는 김좌진 장군이 청산리대첩의 전공(戰功)으로 재만한인(在滿韓人)사회에서 상당한 칭송과 존경을 받는 인물이기 때문에 이들의 지지에 힘입어 독립군의 재건사업을 성공적으로 전개한다면 장차 중국 침략은 물론 한반도 식민지 지배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김좌진 귀순 모략정보를 만주와 한반도내의 한국인들에게 널리 퍼뜨리기 위하여 만주의『장춘실업신문(長春實業新聞)』과 일본 본토의『대판조일신문(大阪朝日新聞)』에 공공연히 보도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대해 박창욱(朴昌昱) 연변대학교 교수는 “항일독립군 사령관 김좌진이 친일파로 변절하여 간도 일본영사관 경찰대의 마쓰시마[松島] 고등계 형사에게 공산당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등의 활동을 했기 때문에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화요파에서 김봉환(金奉煥)을 시켜 김좌진을 암살하게 한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좌진이 일제와 내통했다는 이야기는 모두 일제의 모략전술에 의해 날조된 것이었으며, 김좌진은 조금도 변절한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시종일관하여 독립군의 양병사업(養兵事業)과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에 헌신했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기관지『독립신문(獨立新聞)』의 다음과 같은 1923년의 보도에서도 명확히 알 수 있다.

 

‘지난번에『대판조일신문』및『장춘실업신문』에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씨가 하얼빈 일본영사관에 귀순하였다는 설(說)을 기재하였으나 이것은 사실무근이다. 일본 측은 우리의 사업을 방해하기 위해 반간책(反間策)을 꾀하고 있으니 이것에 속을 사람이 없거니와 김좌진씨는 오직 실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금년도부터 길림성(吉林省) 어느 지방에 둔전제(屯田制)를 대규모로 실행하기로 하고 일방으로는 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를 설립하여 연금 1백여명의 사관을 배출하는 중이라고 하더라.’

 

이렇게『독립신문』은 김좌진 개인에 대한 일제의 모략전술을 간파하고 김좌진이 일제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명백하게 강조한 것이다. 김좌진은 태어나서 1930년 피살될 때까지 일생을 무력(武力)으로 한반도에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구축(驅逐)하겠다는 신념에 바쳐 항일무장투쟁에 전력했던 독립투사로 일제에게 소위 ‘귀순’하거나 변절한 일도 없었다. 따라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일제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김봉환을 시켜 김좌진 장군을 암살하도록 지시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 부일배(附日輩) 소탕을 지휘하다

 

1921년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으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 와해된 이후 재만한인(在滿韓人)들의 무력(武力)을 증대하여 일제(日帝)를 축출(逐出)하겠다는 원대한 꿈은 수포로 돌아갔으나 뜻이 깊은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포기를 모른 채 대동단결(大同團結)을 위해 노력하여 비록 완전한 통합은 아니었지만 1920년대 중반에 정의부(正義府)·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의 3부(三府)체제로 독립운동 진영이 정리되는 결과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친일반민족집단의 방해공작과 공산주의 세력의 권력장악 음모로 조직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독립운동 단체들은 원래 목적을 망각하고 차츰 특정개인의 영화와 실리 위주로 변질되고 있었다. 김좌진은 누구보다 이러한 현상을 분노하고 개탄하였다. 그 무렵 김원봉(金元鳳)·황상규(黃尙奎)·윤세주(尹世胄) 등이 조직한 반일특공결사단체 의열단(義烈團)이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을 폭파하거나 일제 고위급 관리를 암살하는 항일의열투쟁(抗日義烈鬪爭)을 전개하고 있었다. 1921년 9월에 김익상(金益相)이 단독으로 서울에 잠입하여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 최고의 제국주의 정책 기관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고, 1922년 3월에는 다시 김익상이 오성륜(吳成崙)·이종암(李鍾岩)과 더불어 다나카[田中義一] 대장(大將)을 저격했으나 암살에 실패한 황포탄의거(黃浦灘義擧)가 벌어졌다. 1923년 1월에는 김상옥(金相玉)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 경찰관 20명을 대적하여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결하였다. 1924년 1월에는 김지섭(金祉燮)이 일본 황궁을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고 피체된 니주바시의거[二重橋義擧]가 있었고, 1926년에는 나석주(羅錫疇)가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와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을 폭탄으로 공격하고 8~10명의 일본인을 총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러한 의열단의 활동은 김좌진에게 큰 감동과 반성을 불러 일으키게 하였다. 의열단장인 김원봉은 처음에 김좌진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의 전력과 대등한 규모의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력(武力)으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노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독립군의 화력과 병력을 일본 정예군과 대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과 많은 투자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일제의 식민통치는 더욱 공고해지고 식민지 노예로 전락한 조선인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은 점점 더 흐려지게 될 것이다. 김원봉은 일본의 정치기관을 폭파하거나 고위급 관리를 암살하는 폭력적인 투쟁으로 침략자들에게 타격을 주고 민족해방에 대한 의지를 북돋우는 역할을 하기 위해 의열단을 조직한 것이다. 의열단의 집요하고 끈질긴 암살·파괴 공작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공포로 몰아넣었고, 단장 김원봉은 일본 경찰이 가장 먼저 체포해야 할 긴급 수배대상으로 지목되었다.

 

김좌진(金佐鎭)은 의열단의 활동을 본받아 신민부에서도 암살·파괴 공작을 수행하여 일제에 타격을 주는 구상을 시작하였다. 그는 길림 지역으로 이동하여 하얼빈에 있는 교포사회의 도움으로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에 사는 베트남 출신 상인으로부터 폭탄 20개를 구입하고 별동대원 김순갑(金淳甲)·한경덕(韓敬德)을 비롯한 10여명의 인원을 국내로 잠입시켜 여러 관공서를 파괴하도록 하였으나,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일본 헌병대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 시기에 일본 군경의 밀정 노릇을 하면서 반일독립운동 세력을 수색·소탕하는데 기여하고 만주에 거주하는 민간인들에게 일본 제국주의를 지지할 것을 호소하는 민족반역행위를 수행하던 친일단체 보민회(保民會)가 최석순(崔碩淳)이 이끄는 참의부(參議府) 의용군의 습격전(襲擊戰)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세력이 위축되면서 1924년에 해체된 이후 간도 주재 일본총영사관에서는 조선인들이 집중적으로 살고 있는 곳을 중심으로 재만조선인회(在滿朝鮮人會)를 조직하도록 강요하여 이들로 하여금 보민회의 역할을 대신하게 하였다.

 

당시 해림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는 염봉기(廉奉基)란 자가 있었는데 조선인 미성년자 소녀들을 유괴하여 중국인의 유곽과 술집에 팔아 돈을 버는 패덕한 짓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신민부 의용군 사령관 김좌진은 크게 분노하면서 보안대장 박두희(朴斗熙)와 백종렬(白鐘烈)에게 “자기 민족에게 패악을 저지르고 부도덕한 행위로 더러운 돈을 버는 염봉기를 당장 처단하시오”하고 명령을 내렸다. 대원들이 즉각 출동해 염봉기와 그의 패거리를 모두 제거하고 그들에 의하여 팔려갔던 소녀들을 모두 찾아 집으로 돌려보내니 만주의 조선인들은 일제히 김좌진을 크게 칭송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1925년 3월 16일 참의부(參議府) 의용군의 지휘관들이 고마령(古馬嶺)에서 작전회의를 벌이던 중 초산경찰서 소속 미즈노[水野寶三郎] 경부(警部)가 이끄는 일본 경찰대와 국경수비대 2개 중대 병력의 기습을 받고 최석순(崔碩淳)·최항신(崔恒信)·최지풍(崔志豊) 등 29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참의부는 1923년 창립 이후 50회가 넘는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전개하여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고, 면사무소와 영림서 등을 소각하고, 총독부에서 발표한 기록만으로는 일본의 군경을 상대로 78회의 교전을 하는 맹활약을 펼쳤다. 또한 1924년에는 평안북도 위원군 마시탄(馬嘶灘)에서 사이토[齋藤實] 조선총독이 탑승한 선박에 수백발의 총탄을 발사하여 혼비백산(魂飛魄散)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마령전투(古馬嶺戰鬪) 패배로 참의부 의용군의 주요 간부들이 전사 혹은 피체됨으로써 참의부 세력은 점점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신민부 의용군이 염봉기 일당을 처단하고 이완구의 거처를 습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배두산(裵斗山)이라는 자가 해림에서 재만조선인회의 조직력을 정비하여 신민부의 실태를 염탐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배두산은 신민부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정리하여 일본 경찰대에 넘겨주는 한편, 신민부의 관할구역에 있는 조선인 교포들에게 신민부의 자치활동을 거부하고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라는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좌진은 별동대장 황덕환(黃德煥)을 불러 배두산을 체포해 끌고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황덕환이 대원들을 인솔하여 배두산을 찾으러 갔을 때, 배두산은 해림의 서남쪽 오두 냇가에서 태연하게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대원들이 배두산을 체포하려고 다가서자 그는 강하게 저항했고, 황덕환은 분노를 참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배두산을 사살했다.

 

이 같은 상황을 보고받은 김좌진(金佐鎭)은 오히려 별동대원들을 크게 꾸짖었다.

 

“그런 반역자를 그렇게 쉽게 죽이는 것은 오히려 그 놈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 놈의 죄목을 열거하고 반성하게 한 다음 처형했어야 했다!”

 

이를 계기로 신민부 의용군은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동포를 죽이고 독립군의 활동을 방해하는 매국노의 무리를 우선 소탕하기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김좌진은 하얼빈에서 재만조선인회(在滿朝鮮人會)를 이끌고 있는 친일조선인 정만(鄭挽)을 처단하기 위해 연발소총(連發小銃)과 권총(拳銃)으로 무장한 1백여명의 대원을 인솔하여 하얼빈 지역으로 출동하였다.

 

재만조선인회 무리들은 일본 경찰관 30여명과 함께 회장인 정만을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인 사격을 하면서 저항하였다. 피아간에 치열한 총격전(銃擊戰)이 벌어지는 동안 하얼빈 재만조선인회장 정만은 간신히 사무실을 빠져나와 도주하였다. 김좌진과 신민부의 별동대원들은 재만조선인회의 근거지를 맹렬하게 공격하여 수십명의 회원을 사살하고 일본 경찰관들을 패주시켰으나, 아깝게도 회장 정만을 놓치게 되어 분한 마음을 억누른 채 하얼빈을 떠났다.

 

상황이 이처럼 변하자 재만조선인회에서 조직원으로 가입되었던 교포들도 그 단체의 성격이 친일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탈퇴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구성원이 날마다 탈퇴하는 사람이 많아지므로 재만조선인회 역사 중동선 일대에서는 차츰 자취를 감추었다.

 

이렇게 일벌백계(一罰百戒)의 총구(銃口) 앞에서 친일파 조선인들은 설 자리를 잃어갔다. 반면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에서도 재만조선인회의 주구조직을 부활시키는 작업을 시도하였으나 그들의 뜻대로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았고, 김좌진 장군은 일제가 아무리 용을 쓴다고 해도 신민부의 통치권내에 있는 친일조직은 발붙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확고한 다짐 아래 친일분자 숙청을 단행했다. 그러나 중국 군경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도와 한국 독립운동 진영을 괴롭히고 있었다.

 

1925년 11월 하순에 신민부의 보안대 거처가 중국 영안경찰대의 습격을 받아 이강훈(李康勳)을 비롯한 8명의 젊은 대원이 피체, 무장해제를 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이런 사건이 발생하자 신민부에서는 박찬익(朴贊翊)과 조성환(曺成煥)을 보내 중국의 중앙정부에 항의하도록 했으나 중국 정부에서도 이 일을 방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언론계에 알려 비난 여론을 조성하고 구금 6개월만에 출옥되었는데, 대원 가운데 신갑수(申甲洙)와 박순보(朴順甫)는 옥중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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