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 태자의 대당입조(對唐入朝)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조의두대형(早衣頭大兄)의 직급을 받고 천리장성을 축조하라는 영류태왕(榮留太王)의 명령에 따라 동부가의 가신인 추요선(秋要璇)과 유대룡(柳大龍), 이복 누이동생인 연수영(淵秀英)과 호위무사 6명, 노예 등 10여명을 거느리고 요동성(遼東城)으로 떠났다. 이복 아우인 연정토(淵淨土)와 정실 부인이며 왕족인 고정의(高正義)의 딸인 고말리화(高茉莉花), 그리고 연정토의 오랜 친구인 말갈족 출신의 무사 생해(生偕), 동부가의 집사인 최무(崔茂)는 본가를 지키기로 했다.
연개소문은 평양성을 떠나기 전날에 수행원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내가 비록 태왕의 명령을 받고 요동으로 가는 길이기는 하나 결코 편하고 안전한 여정이 되지 못할 것이다. 언제 어디서 간적들의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노릇이야. 따라서 요동까지 가는 동안 매사를 조심해야 할 것이다. 모두가 항상 주위를 잘 살피도록 하라!”
연개소문 일행이 왜 많은 수행원과 군사를 거느리고 당당하게 부임하는 것이 아니라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길을 떠났느냐 하면 친당파 대신들이 동부가의 연개소문을 가장 견제했기 때문이었다. 영류태왕의 친당정책에 반대했던 강경파 무장 세력이 을지문덕의 수하였던 해승유와 임유 장군을 중심으로 뭉쳐 반기를 들려고 하다가 대부분 숙청된 적이 있는만큼 이제는 반당봉기의 중심에 연개소문이 설 가능성이 충분했기 때문에 친당파 대신들은 기회만 생기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고 들었다.
연개소문은 요동성주(遼東城主) 해조신(解朝信), 개모성주(蓋牟城主) 석봉상(石逢詳), 안시성주(安市城主) 송효원(宋孝元), 건안성주(建安城主) 창리벌(倉利閥), 남소성주(南蘇城主) 조구계(趙九溪) 등과 협의하여 천리장성 축조를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인력·장비·군량을 모두 현지에서 조달하라는 태왕의 무리한 지시 탓에 축성공사는 좀처럼 진도가 나아가지 않았다.
연개소문은 여러 차례 요동성에서 평양성을 왕래하며 조정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군부 강경파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억지로 벌인 공사인지라 영류태왕과 친당파 대신들은 연개소문의 지원 요청을 시원하게 들어주지 않았다. 더구나 연개소문을 불평이나 일삼는 말썽꾼으로 치부하고, 나중에는 온갖 구실을 붙여 중상하고 모략하기에 바빴다. 힘이 없는 연개소문은 그때마다 꾹 참고 어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637년에 연개소문이 요동성에서 얻은 첩(妾)인 여희(麗姬)가 둘째아들 남건(男建)을 낳았다. 연개소문은 3년 전에 이미 정실 부인인 고말리화에게서 첫째 아들인 남생(男生)을 얻은 바 있었다. 여희는 그로부터 다시 3년 뒤에 연개소문의 막내아들 남산(男産)을 낳았다.
그 이듬해에 도성에 귀환했던 연개소문은 황궁으로 들어가 태왕을 배알했다. 그날따라 전에 없이 영류태왕은 연개소문을 남궁의 내전으로 불러들이더니 좌우를 물리고 밀담을 나누었다.
“짐이 오늘은 그대와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다 털어놓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부디 하교하여 주소서!”
“그대의 선친(先親)이 임신년(壬申年:서기 612년)의 대수전역(對隨戰役)에서 살수(薩水)의 전공(戰功)을 세웠던 전(前) 대원수(大元帥) 을지문덕(乙支文德)과 오랜 지기(知己)였다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짐(朕)이 태제(太弟) 시절에 수군원수(水軍元帥)로서 패수(浿水)에서 수장(隨將) 내호아(來護兒)의 수군을 격멸할 때에 그대의 선친은 참좌(參佐)로서 짐의 휘하에 있었다. 그것도 알고 있는가?”
“물론이옵니다.”
“그대의 아버지인 연태조(淵太祚)는 비록 짐보다 을지문덕을 더 가까이 하고 따랐지만 짐은 그것을 가벼이 여기고 즉위하자마자 연태조 공에게 대대로(大對盧)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연태조는 어리석게도 짐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관직을 내놓으며 조정을 떠났다. 그대는 짐이 무슨 까닭에 줄곧 당나라와 화친하는 정책을 펴오고 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았는가?”
“그것은 전쟁을 피하기 위한 폐하의 어심(御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짐은 전쟁의 참혹함을 누구보다 잘 목격하고 생생히 경험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군사들만 싸우다가 죽는 것이 아니야. 아무 힘도 없고 죄도 없는 백성들이 얼마나 많이 희생을 당하는가 생각해보게. 그리고 국력은 피폐해지고……. 특히 아국(我國)이 처한 입장을 그대도 살펴보라. 우리가 서토(西土)의 나라들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남쪽으로 신라와 백제가 있고, 또 그 아래 바다 건너에는 왜(倭)가 있지 않은가?”
“폐하의 말씀이 지당하옵니다.”
“그런 까닭에 무슨 일이 있어도 짐은 전쟁을 피하려는 게야. 그러니까 그대 개소문도 앞으로는 짐의 정책을 잘 따라주기 바라는 바일세. 그대도 장차 이 나라의 국정(國政)을 짊어지고 나아갈 인재가 아닌가 말이야?”
“하오나 태왕 폐하! 소신의 우견(愚見)으로는 전쟁이란 어느 일방(一方)의 양보와 인내만으로는 방지하기 어렵다고 보옵니다. 우리가 약하게 보이고 계속 밀리기만 한다면 상대방은 더욱 우리를 얕잡아보고 능멸하려 들지 않겠사옵니까? 서토에 어떤 나라가 들어서도 그래왔다는 것은 역사가 분명히 일러주고 있지 않사옵니까? 황공하오나 폐하! 우리 제국의 위신과 황실의 자존심까지 포기한 화평(和平)은 사상누각(沙上樓閣)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하옵니다.”
“개소문(蓋蘇文)아! 짐이 중신들의 주청에도 불구하고 무슨 까닭에 너희 가문과 네 목숨을 살려준 줄 아느냐? 너의 조부(祖父)였던 연자유(淵子遊) 장군은 무오년(戊午年:서기 598년)의 전란(戰亂) 때에 수장(隨將) 왕세적(王世績)과 싸우다가 패사(敗死)하였다. 그러나 강이식(姜以式) 장군이 서전(緖戰)의 승리로 교만해진 수군(隨軍)을 요하(遼河) 근처로 유인하여 격퇴함으로써 연자유 장군의 복수(復讐)를 해줬던 것이다. 또 연태조(淵太祚) 역시 나라에 기여한 공로가 지대했기 때문에 짐은 동부가를 폐문시키자는 중신들의 간언(諫言)을 물리쳤던 것이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공신(功臣)들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폐하의 은혜가 하해와 같사옵니다!”
“절대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야! 저 서토의 광대한 땅과 수많은 생구(生口)를 생각해보라. 우리 고구려의 국력으로 도저히 저들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야!”
“하오나 폐하! 우리 고구려도 당당한 제국이옵니다. 신성한 천손(天孫)의 나라이옵니다. 폐하께오서는 시조(始祖) 추모성왕(皺牟聖王)의 혈통을 이으신 천손(天孫)이 아니시옵니까? 우리 고구려의 역사는 결코 짧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두려워 나라를 세운 지 이제 겨우 수십 년밖에 안 된 당괴(唐傀)에게 굴복을 하오리까? 오랑캐들에게 무릎 꿇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옵니다!”
“어허, 고얀지고! 그럼 너는 대국인 당나라와 꼭 전쟁을 해야 시원하다는 말이냐?”
영류태왕의 언성이 높아졌다.
“짐이 그렇게도 알아들을 만큼 타일렀건만 너는 고약한 고집을 꺾지 않는구나! 개소문아, 너는 끝내 짐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짐에게 거역하려는 것인고?”
“황공무지로소이다! 소신이 어찌 감히 폐하께 거역하고 반기를 들겠사옵니까? 하오나…”
다음 순간, 화를 참지 못한 영류태왕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며 자신이 마시던 찻잔을 연개소문에게 홱 집어던졌다. 뜨거운 찻물을 뒤집어쓴 연개소문의 얼굴이 금세 시뻘겋게 상기되었다. 이마에 핏발이 서고 굵은 누에눈썹이 꿈틀댔다. 영류태왕이 소리쳤다.
“닥쳐라! 더 이상 너와 말이 통하지 않는구나. 썩 물러가라!”
연개소문은 순간적으로 살의가 치밀어 오른손이 저절로 왼쪽 허리로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구든 입궁할 때에는 친위대에게 무장해제를 당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패검(佩劍)이 없었다.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치욕적인 순간이었다.
결국 연개소문은 그 길로 쫓겨나듯이 황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요동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은밀히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비록 지금은 거느리는 군사가 없지만 군부에 아직도 영향력이 남아 있는 노장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해승유와 임유 두 장수의 반정 모의 때에 현직에서 실각하여 숨죽인 채 때를 기다리고 있는 반당 강경파 장수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군부의 원로로서 연개소문의 장인이기도 한 고정의(高正義)였다.
또한 연개소문은 추요선·유대룡 등 동부가의 가신들과 집사인 최무, 자신과 결의형제(結義兄弟)를 맺은 사이인 두방루(豆方婁)와 술탈(述脫) 등 충실한 심복들을 지휘하여 숨어 있는 인재들을 은밀히 모으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태자(太子) 환권(桓權)의 당나라 입조라는 또 하나의 굴욕적인 사태가 벌어졌다. 연개소문의 둘째 부인 여희가 막내아들 남산을 순산한 640년 2월의 일이었다.
요동성 연개소문의 정무소로 조정에서 사자(使者)가 왔는데 천리장성 축성 공사를 일시 중지하라는 지시였다. 태자가 당나라에 입조하니 외형상으로나마 적대행위를 중단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지시에 요동의 장수들은 또 다시 분개했다. 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주공(主公), 태왕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아버지인 연태조 때부터 동부가의 가신으로 일했던 추요선에 이어 두방루도 울분을 토했다.
“아예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작정한 듯 싶습니다!”
“조정의 그 많은 대신 가운데 이를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단 말입니까?”
명장 온달(溫達)의 손자인 말객(末客) 온사문(溫沙文)도 화를 참지 못했다. 온사문은 요동의 2차 방어선에 속한 요동성 배후의 관문인 궁장령 요새의 수장(戍將)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태자의 입당(入唐) 행렬이 요동성에 모습을 드러냈다. 태자의 당나라 입조를 반기는 사람은 요동에서는 공공연히 친당파로 행세하는 백암성주(白巖城主) 손대음(孫代音) 말고는 거의 없었으나 그래도 태자는 다음 태왕이 될 존재이기에 속은 불편하지만 벼슬살이 하는 몸으로서 마중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태자의 행차는 요란했다. 흰 소가 끄는 황실 수레에 태자가 타고, 그 앞뒤로 갖가지 화려한 깃발을 든 의장대와 취타대, 무장한 호위대가 거창한 행렬을 이루며 성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당나라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러 가는 주제에 원 참, 거들먹거리기는…”
“정말이지 눈꼴시어서 못 봐주겠구만!”
“내가 고구려의 백성이란 점이 이렇게 수치스러운 것은 정말 처음이다!”
구경나온 성민(城民)들 가운데서도 이렇게 한탄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날 저녁 요동성주 해조신이 환송연을 베풀었다.
“태자 전하, 부디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연개소문의 인사를 받은 태자 환권이 환한 얼굴로 응대했다.
“응, 개소문 자네로구먼. 정말이지 오랜만일세! 그래, 그동안 장성 공사에 노고가 많다고 들었네.”
“소관보다야 여기 계신 욕살(褥薩)과 가라달(可邏達) 분들의 노고가 훨씬 크지요! 또 백성과 군졸들의 수고도 많습니다.”
“잘 알고 있다네! 하지만 내가 이번에 장안성에 가서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돌아오면 이런 공사는 더 하지 않아도 될 게야.”
“그렇게 됐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소관이 보기에 당의 오랑캐들이 우리 고구려를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쉽사리 포기할 것 같지 않으니 걱정입니다.”
그러자 태자의 안색이 금세 변했다.
“그대는 여전히 태왕 폐하의 화친정책을 반대하고 있군그래?”
“황공하옵니다. 소관은 오로지 국가와 황실을 위하는 충정으로 드린 말씀입니다.”
“에이, 오늘은 그런 골치 아픈 얘길랑 집어치우고 술이나 마시기로 하세! 우리가 그래도 어린 시절에는 함께 뛰어놀던 불알친구가 아닌가 말이야?”
태자 환권의 말대로 고건무가 태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연개소문과 환권은 늘 붙어 다니던 사이였다. 연개소문도 새삼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지 잠시 허공을 올려다본다. 환권이 연개소문의 술잔에 술을 채워주며 묻는다.
“그대가 입산했다는 소식은 폐하께서 즉위하시고, 내가 황궁에 들어간 다음에 들었지. 나도 태자로 책봉되지만 않았다면 그대와 함께 주유하며 세상 구경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랴, 그대는 어느 산으로 들어가 어떤 도인(道人)을 만나 무예를 닦고 병법을 익혔는가?”
“여러 곳을 돌아다녔습니다. 개마고원에 들어갔다가 백두산에도 올라가보고, 또 속말수(粟末水:송화강) 줄기를 따라 말갈 땅에도 가보고, 다시 서쪽으로 천산에도 들어갔었지요. 또한 대요수를 건너고 산해관을 넘어 서토에도 가보았습니다. 하오나 특별한 스승을 만나지는 못 했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조금씩 익혔습니다. 그런데 워낙 재주가 미천한지라 별 성과가 없었습니다.”
“에이, 겸양의 말씀이겠지?”
태자 환권은 그날 밤을 요동성에서 묵고 이튿날 다시 요란한 행렬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갔다.
고구려의 태자가 입조하자 당의 태종은 입이 찢어지도록 좋아했다. 고구려의 국왕 고건무가 당나라를 깍듯이 상국으로 모시는 기미를 보이고 있지만 장차 발 아래 무릎 꿇리겠노라 작정하고 있는 터에 스스로 태자를 보내 신하를 칭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찾아오니 이처럼 기분 좋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태종은 환권을 위해 여러 날에 걸쳐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주고 영류태왕이 보낸 조공품보다 더 많은 선물을 하사했다.
귀국한 환권으로부터 당나라의 황제가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주고 숱한 선물을 내려주며 환대하더라는 보고를 받은 영류태왕은 의기양양했다. 태왕은 문무백관을 둘러보며 말했다.
“경들도 태자의 말을 들었겠지? 보라! 이것이야 말로 짐이 보위에 오른 뒤 초지일관 추진해온 동서화합, 화평정책의 빛나는 성과가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폐하의 홍복이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고웅백이나 도병리 같은 친당파 대신들이 앞 다투어 온갖 아첨을 했다.
영류태왕은 태자의 주청을 받아들여서 대신들의 자제 수십명을 선발,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으로 보냈다. 당의 국학(國學)에 유학을 보낸 것이었다. 이는 물론 고구려와 당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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