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녀 공학을 나왔음
남녀 공학이라고는 하지만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남녀 합반을 시켜주는 일이 드물었음
내가 1학년이었을 때
우리 건물의 2층은 남자가, 3층은 여자가 썼음
이성과의 접촉을 차단하여 우리를 학업에만 열중하게 하려 했던 선생님들의 생각은
보기 좋게 역효과를 일으켰음
대부분 여중, 남중에서 올라와 이성에 대한 관심이 폭발할 때의 아이들을
같은 건물 위아래에 몰아놓으니 제대로 될 리가 없잖음?
학기 초에 우리는 지우개 낚시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음
지우개 낚시의 선두주자는 사실 나였음...
장난으로 지우개에 털실을 매달아 창문을 통해 2층으로 내려보냈는데
2층에서 실이 내려온 것을 확인한 남자아이들이 광분하여 소리를 질러댔음
곧이어 실에 묵직한 것이 걸리는 느낌이 들었고
실을 두 번 잡아당겨 올리라는 신호를 주기에 끌어 올려보니
실 끝에 반쯤 먹다 남은 비틀즈가 묶여 있었음 ㅋㅋㅋㅋㅋ
이것은 곧 대유행이 되어
이후 창문가에서 털실을 드리우고 있는 아이들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게 되었음
(반에서 가장 예쁘장한 아이의 번호가 피자빵과 거래되기도 했음)
이 지우개 낚시는 한동안 온 학교에 대열풍을 불러 일으켰다가
어느 날 정신없는 여자아이 하나가 남학생 교실에
담임샘이 계신 줄 모르고 지우개를 내렸다가 발각되어 징계를 받음으로써
쓸쓸히 막을 내렸음...
더러 가진 건 객기밖에 없는 남자아이들은 2층 창문에서 몸을 빼고 걸터앉아
3층을 향해 되지도 않는 노래(꼭 버즈여야함...)를 꽥꽥 불러대기도 했음
걸렸다간 바로 징계였지만 풋사랑에 눈이 먼 아이들을 막을 순 없었음
한 학기가 절반쯤 지나간 후에는 그 짓도 시들해졌음
시간이 지나 서로서로 거의 익혔기 때문에 더 이상 쪽지를 주고받지도 않았음
이때쯤 가장 많은 커플이 탄생했음
교내커플도 있었고 교외커플도 있었고... 하여튼 한 반에 두세 명 이상은 품절되었음
선생님들은 매우 못마땅해했지만 이 핑크빛 기운은 학교를 뒤덮었고
커플이 아닌 아이들도 커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냥 부럽고 행복해하던
순수한 시절이었음
내가 하려는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때 이 핑크빛 은총을 받지 못한 유일한 반이었던
1-7반 남자아이들의 이야기임...
학기 초가 지나면서 각 반마다 두셋 씩 품절녀, 품절남이 생겨났지만
어떻게 된 게 7반 아이들은 단 한 명도 팔린 녀석이 없었음...
솔직히... 걔네는 좀 4차원이었음...
반 전체 한 덩어리가 흡사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였는데
정말 싸이코같았음...
촛불만 쥐어주면 금방이라도 악마 소환의 의식을 행하려 들 것 같은 분위기였음...
그래도 팀워크는 최강이었음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들도 역시 남자였던 거임
내 여자친구도 없을 뿐더러 주변 친구들도 여자친구가 없으니
대리만족을 느낄 수도 없고 간접경험을 할 수도 없었음
그들의 외로움이 극에 달해 가던 그 때 누군가 획기적인 제안을 했음
바로 반 전체의 여자친구를 만들자는 거였음
아니, 정확히는 여자친구 대용물을 만들자는 거였음...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길 바람
당신이 솔로인데 누가 자기도 솔로니 우리 같이 외로움을 덜어줄 수 있는
공동의 여친 대용물을 만들자고 제의함
그럼 아이쿠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군 하고 따르시겠음?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일 사람은 없음...
근데 아까 말했다시피 얘넨 그냥 미친놈들이었음
그들이 여자친구 대용물로 삼은 것은 다름아닌
송충이였음...
참고로 송충이는 나비목 솔나방과에 속하는 솔나방의 유충으로서
소나무를 먹이로 하여 성장하는 벌레임.
그때 당시 우리 학교는 '담 없는 학교'를 표방하여
담 대신에 흙을 언덕처럼 쌓고 소나무와 꽃들을 심었음
소나무가 있는 곳에 당연히 송충이도 있음
그들은 그걸 노렸던 거임
점심시간에 그들은 모두 언덕에 올라
정성껏 송충이를 고르기 시작했음
남들 다 하는 점심 축구 따위는 하지 않았음
그들의 머릿속엔 오직 송충이 뿐이었음
그러기를 며칠 째 그들은 곧 몸집이 자그맣고 빛깔이 선명한 최고의 송충이를 골라냈음
만장일치로 미스 송충이에 뽑힌 녀석에게
'릴리'라는 피치 돋는 이름을 하사하고
교실 창문턱에 솔가지로 보금자리를 만들어 녀석을 기르기 시작했음...
7반 미친놈들의 괴상한 행각은
수업에 들어갔다가
릴리 둥지를 발견하고 경끼를 일으킨 선생님들의 입을 통해
온 학교에 퍼지게 되었음
이 소식을 듣고 중학교 때 알고 지내던 7반 친구놈을 찾아가
"너네 벌레 기른다며" 했다가 초코파이로 싸대기 맞았음
'릴리를 모욕하지마'라며 벌컥 화를 내던 녀석의 얼굴은 아직도 생생함
나는 그 녀석과 3년 간 알아오면서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봤음
그만큼 릴리는 녀석들에게 소중한 존재였음
아무도 그들 앞에서 릴리를 벌레라 부르지 못했음
신기하게도 릴리는 그 좁아터진 창문틀의 비루한 보금자리를
떠나지 않고 항상 그 곳에 있었음
도망가지 못하게 막는 창살 따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전혀 도망갈 생각이 없어 보였음
동물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본다던데
그게 벌레한테도 통용되는 말인가 봄
시간이 지나면서
정상적이라 자부했던 우리마저도 슬슬
릴리를 녀석들의 진짜 여자친구로 인정하게 되었음
어느 순간 릴리와 녀석들을 축복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음
길가다 맛있어 보이는 솔가지를 발견하면 릴리가 생각났음
그렇게 릴리는 우리 학교 공인 인증 7반 애인이 되었음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음...
잊을 수 없는 그 날은... '소방방재훈련'이 있는 날이었음
소방방재훈련 기억하실려나 모르겠음
일 년에 한 번 학교에 소방차가 와서
가상으로 화재 상황을 설정하고 학생들을 대피시킨 후 물을 뿌려 화재를 진압하는
일종의 시뮬레이션임
그 날 화재가 난 곳으로 설정된 반은 1-8반이었음
1-8반의 창문에는 하얀 스티커를 붙이기로 되어 있었고
8반의 담임샘은 스티커를 반장에게 전달했음
그러나... 8반의 반장은 창문에 스티커를 붙이지 않았음...
수업이 진행되던 도중 가상의 사이렌이 울리고
우리 모두는 선생님들의 지시에 따라 운동장으로 이동하여
아침조회 때처럼 열을 맞추어 학교 건물을 정면으로 보고 섰음
그때 우리는 8반의 창문에 스티커가 붙어있지 않은 것을 보았음...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던 그 순간...
7반의 주번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음...
"어... 창문 안 닫고 나왔는데..."
"...괜찮을 거야... 우리 반 아니잖아... 8반이잖아..."
우리는 다들 침묵했음...
소방차가 도착하고... 호스가 풀려나오고...
학생회 아이들이 정신없이 달려가
소방관 아저씨들과 함께 호스를 받아들고
2층의 창문을 겨냥했음...
"안------돼!!!!!!!!!!!!!!!!!!!!!!!!!!"
7반 아이들이 대열을 무너뜨리고 소방차를 향해 뛰기 시작한 것과
호스의 물이 뿜어져 나온 것은 거의 동시였을 거라고 생각됨.
호스의 끝이 가리키는 창문은 8반의 창문이 아니었음
반쯤 열려 있는 7반의 창문이었음...
그리고 그 곳은 릴리가 있는 곳이기도 했음...
흐트러진 대열을 정비하느라 약간의 소동이 벌어졌고
뒤늦게 물줄기를 8반으로 바꾸었지만
이미 7반의 창문으로 다량의 물이 들어간 후였음
소방관 아저씨들과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소지품이 젖을까봐 걱정되서 그러는 줄 알았지만
우리는 녀석들의 표정에 떠오른 분노가
젖었을지도 모를 소지품 때문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
그리고 소방방재훈련이 끝나고 아이들이 교실로 돌아갔을 때...
그들은 창문턱에 고인 물에 동동 빠져 죽어 있는 릴리를 볼 수 있었음...
흰 손수건에 싸인 릴리가
그녀를 데려왔던 학교 건물 뒷동산에 다시 묻히던 그 날
우리는 태어나서 단 세 번 운다는 남자의 눈물을 볼 수 있었음...
그 날 이후...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음
릴리를 잊지 못한 일단의 아이들은 다시 뒷동산에 올라
검은색이 인상적인 새로운 송충이를 잡아왔고
그 송충이에게 '꾸띠'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음
그리고 릴리 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뚜껑까지 있는 제대로 된 상자에 넣어 양육했음
하지만 모두가 꾸띠를 사랑했던 것은 아님
릴리의 일로 깊은 상처를 입은 아이들은
당시 릴리를 보살폈던 아이들의 부주의에 불만을 터뜨리고
'그들을 믿을 수 없다'며 불신론을 펼쳤음
'자기 애인은 자기 손으로'라는 구호가 불길처럼 번져 나가
절반 정도 되는 아이들이 1인 1애인(사실은 애충(蟲))을 주장하며 뒷동산에 올랐음
송충이를 비롯하여 각종 사마귀, 잠자리, 지렁이 등이 유입되었고
개인 사물함에서 길러졌음
하지만 그 벌레들은 전체의 애인이 아니었기에
남의 눈에는 그저 벌레일 뿐이었음
엇나간 사랑에 삐뚤어진 아이들은 다른 이의 애인(애충)을 꺼내어 여학생 교실에 던져넣기를 즐겼고
그 일로 7반의 아이들은 학교 전체 원성의 대상이 되고 말았음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자 그동안 방관하고 있던 7반의 담임샘이 나서서
꾸띠를 제외한 모든 벌레를 갖다 버릴 것을 명령했고
고등학교에서 담임의 권력은 절대적인 것이라 아무도 감히 불복할 수 없었음
그렇게 다른 벌레들은 뒷동산에 다시 풀어놓아지고
꾸띠 혼자 살아남는가 싶었으나 역시 음해세력의 손에 의해
며칠 가지 못하고 학교 1층 로비 어항에서 익사체로 발견되고 말았음...
이후 솔로이면서도 우애 하나만은 돈독했던 1학년 7반은
돌이킬 수 없이 분열되었고
물론 여자친구 하나 생기지 않은 채로 1년을 보내고
2학년이 되어 뿔뿔이 흩어졌음
그리고 릴리는 우리 학교의 영원한 전설로 남았음...
나는 기분이 울적할 때면 지금도 종종 릴리가 생각남.
설마 이거 다 읽은 사람 있을까.ㅋㅋㅋ
이 얘기는 군데군데 조금 과장시켰지만 100% 실화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