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방기독교의 확산과 쇠퇴 ]
초기 기독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무엇이냐를 두고 큰 논쟁이 벌어졌는데, 325년
개최된 니케아종교회의에서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하는 ‘양성론(兩性
論)’이 채택된 바 있다. 네스토리우스 역시 이 주장에 찬동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교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고 또 교회에서도 인정하던 또 다른 주장, 즉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theotokos)로 보는 ‘신모설(神母說)’에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마리아는 ‘인간’ 예수의 어머니일 뿐이지 어떻게 ‘신의 어머니’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판단에서
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은 많은 사람에게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교회 내부의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대립하던 알렉산드리아학파의 키릴(Cyril)은 그가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단성론(單性論)’을 추종한다는 비난을 가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431년 에페수스에서 종교회의가 열렸다.
네스토리우스파가 미처 참석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파행적으로 진행된 회의에서 그는 이단으로
낙인 찍혀 파문을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도 동로마제국의 영내에 남아
있지 못하고 동방의 새로운 땅, 즉 페르시아 지방으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원대 초기에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마월합내(馬月合乃)라는 사람의 조상에 관한
기록에서 금나라 때 기독교도의 존재도 알 수 있다.
이에 의하면 금나라 태종(1123~1135년)이 하루는 꿈에서 사냥을 나갔다가 금빛 나는 어떤 사람이
태양을 안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꿈에서 깬 태종이 신하들에게 그가 누구인지를 물었으나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 위구르인들이 교회당에 있던 화상(畵像)을 갖다 바치니 바로 그가 꿈에서 본 그 사람이었다.
감격한 태종은 위구르인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그들이 원하는 곳에 살도록 하니, 마월합내의 할아
버지와 아버지는 일가를 이끌고 천산(天山)으로 옮겨와 살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천산’은 신장지역의 천산이 아니라 웅구트족이 살던 내몽골의 음산을 가리킨다.
또한 마월합내라는 이름은 기실 ‘마르 요하나(Mar Yohana)’를 나타낸 것이다.
기독교의 동방 전파와 관련하여 우리나라에도 이와 관련된 유물이 있다는 보고가 있다.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된 성모상과 십자가가 그것인데, 모두 돌로 되어
있고 1956년 경주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유물들의 출토 경위가
분명치 않아 과연 신라시대에 속하는 것인지 혹은 네스토리우스교와 관련된 것인지에
관한 보다 확실한 사실은 차후 연구과제이다.
아무튼 동방기독교가 7세기 전반부터 14세기 후반까지 유라시아의 중앙부는 물론 동아시아 지역
에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불교나 이슬람교 같은 종교가 중앙유라시아를 매개로 하여 동방으로 전파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이미 7세기부터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전래되어 교회를 건설하고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은 많지 않다.
<출처 : 밀리터리 내무반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