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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천주교를 전파시킨 마테오리치와 동학

김현갑 |2007.11.20 19:38
조회 565 |추천 0

대백과사전 발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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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테오리치

이탈리아의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에 최초로 선교한 인물이다. 중국에서 전교하기 위해서 서양의 학술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또 저서인《천주실의》는 한국의 천주교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중국명은 이마두(利瑪竇). 1571년 예수회에 가입, 클레시오 로마노에서 콜라비우스에게 수학 ·천문학 등을 배우고 인도를 경유하여 1582년 마카오에 도착, 중국 내지(內地)로의 입국을 결심하고 중국어를 공부한 후, 1583년 조경(肇慶:廣東省에 있었음)에서 정주 허락을 받고 전교(傳敎)를 개시하였다. 이어 소주부(韶州府) ·남창부(南昌府) ·난징[南京]을 거쳐 1601년 베이징[北京]으로 진출하였다. 그가 명(明)나라의 만력(萬曆) 신종(神宗)에게 바친 자명종(自鳴鐘:탁상시계) ·대서양금(大西洋琴:피아노의 전신)은 황제를 크게 기쁘게 하여 베이징에서의 정주를 허락받았다. 선무문(宣武門) 내에 주택을 구입하고, 이곳을 전교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중국에서 전교하기 위해서는 독서인층(讀書人層)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고 믿고, 서양의 학술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유클리드 기하학의 역서인 《기하학 원본》과, 세계지도 위에 각종 천문학 ·지리학적 설명을 덧붙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이다. 그 밖에 세계지도인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가 있다. 이러한 학문은 중국 지식인층의 관심을 끌어 서광계(徐光啓), 이지조(李之藻) 등의 유력한 관료도 개종(改宗)하여 그의 전교사업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저서에 《천주실의(天主實義)》 《교우론(交友論)》 등이 있는데, 《천주실의》는 한국의 천주교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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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실의

예수회 소속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利瑪竇)가 한문으로 저술한 천주교 교리서.


제목은 ‘하느님에 대한 참된 토론’이라는 뜻이며, 8편 174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총 500여 종에 이르는 서양 학술서적을 다투어 한문으로 번역 출판하는 분위기 속에서 1593~96년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며, 1603년에 중국 북경에서 처음 간행된 이후 선교사들에 의해 거듭 출판되었다.

가톨릭 철학과 스콜라 사상의 입장에 선 서사(西士)와, 전통 유학과 불교·도교의 사상을 갖춘 중사(中士)가 토론하는 형식으로 서술되었다. 동양사회에 대한 천주교 전파가 목적이었으므로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천주교 교리를 설득하는 방식이다. 필요한 경우 불교와 도교 이념도 동원하였으며 중국의 고사(古事)와 성어(成語)를 적절히 이용하였다.

1편은 신의 존재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2편은 불교·도교에 대한 논박과 상제(上帝) 개념 등 천주교 수용의 기반이 되는 유교의 성격에 대한 설명을, 3편은 천국(天國)의 필요성과 식물·동물·인간의 특성을, 4편은 인간 영혼의 신령함과 범신론적 일신론(汎神論的一神論)에 대한 비판을, 5편은 윤회설 등 불교에 대한 비판과 그리스도교의 재계(齋戒)의 성격을, 6편은 죽은 후의 상벌(賞罰)과 지옥·천국·연옥에 대한 설명을, 7편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귀결되는 인간의 본성을, 8편은 천주교 신앙생활과 상통하는 중국 고대의 생활과 천주교에 귀의하여야 할 당위성을 논하였다.

이 책의 일차적인 특징은 불교와 도교는 배척했지만 유교는 태극설(太極說)을 제외하고는 그 의의를 충분히 인정하면서 천주교 전파의 바탕으로 삼으려 했던 점에 있다. 중국에서는 건륭제(乾隆帝)가 이 책을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하게 할 정도로 호의적인 반응을 받았으며, 일본에도 처음 발간된 이듬해에 전파되었다.

한편 유·불·도교의 입장에서 반발도 거세게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종진지(鍾振之)의 《천학초징(天學初徵)》 《천학재징(天學再徵)》 등의 반론과 그것을 모은 《벽사집(闢邪集)》이 나왔다. 또한 천주교 내부에서도 유교에 영합한 오류라는 비판이 일어났다.

조선에서도 《어우야담(於于野談)》과 《지봉유설》에 그 편목이 실려 있는 바와 같이 사신 일행을 통해 바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며, 18세기 중엽 이후 이벽(李檗)·권철신(權哲身) 등을 중심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성립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일반대중을 위한 번역본도 많이 필사되었다. 반면에 이익(李瀷)의 <천주실의발(天主實義跋)> 이래 신후담(愼後聃)의 《서학변(西學辨)》, 안정복(安鼎福)의 《천학문답(天學問答)》, 홍정하(洪正河)의 《실의증의(實義證疑)》 등을 통해 많은 비판과 배격을 받았다.

한자문화권의 여러 나라에 널리 전파되었으며, 서양인이 한자로 저술한 서적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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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봉유설 과 이수광

 

 

조선 중기의 명신. 임진왜란 때 함경도지방에서 큰 공을 세웠다. 주청사로 연경에 내왕,《천주실의》등을 들여와 한국 최초로 서학을 도입했다.《지봉유설》로 서양과 천주교 지식을 소개했다. 이조판서 등을 지냈고, 영의정이 추증됐다.

 

 


목판본. 20권 10책. 조선 중기 실학의 선구자 지봉(芝峰) 이수광이 세 차례에 걸친 중국 사신에서 얻은 견문을 토대로 1614년에 간행하였다. 조선의 일은 물론 중국·일본·안남(安南:베트남)·유구(流球:오키나와)·섬라(暹羅:타이)·자바[爪哇]·말라카[滿刺加] 등 남양 제국과 멀리 프랑크[佛狼機]·잉글리시[永結利] 같은 유럽의 일까지도 소개하여 한민족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새롭게 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당시의 학자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은 이 책의 제문(題文)에서 "…위로는 천시(天時)를 밝히고 아래로는 인사(人事)를 말함에 의리(義理)의 정미(精微)와 문장의 득실(得失)을 보이며, 곤충초목에 이르기까지 모아 남김이 없고, 파헤쳐 남김이 없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총명(聰明)을 계발하게 하고, 지려(智慮)를 진익(進益)하게 하니, 마치 귀머거리에게 세 귀가 생기고 장님에게 네 눈이 얻어짐과 같아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여 이 책의 가치를 짐작케 하였다.

내용은 권1에 천문(天文)·시령(時令)·재이(災異), 권2에 지리(地理)·제국(諸國), 권3에 군도(君道)·병정(兵政), 권4에 관직(官職), 권5에 유도(儒道)·경서(經書), 권6에 경서, 권7에 경서·문자(文字), 권8∼14는 문장(文章), 권15는 인물·성행(性行)·신형(身形), 권16은 언어(言語), 권17은 인사(人事)·잡사(雜事), 권18은 기예(技藝)·외통(外通), 권19는 궁실(宮室)·복용(服用)·식물(食物), 권20은 훼목(卉木)·금충(禽蟲) 등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총 3,435항목에 이른다.

한국 역사 연구에 좋은 참고가 되며, 현재 조선고서간행회본(朝鮮古書刊行會本)과 조선연구회본이 유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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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1860년(철종 11) 경주(慶州) 사람 최제우(崔濟愚)에 의하여 창도된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신종교.


 

최제우는 전통적인 유교(儒敎)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유교 경전을 배워, 성년이 되어서는 지방의 유학자로 이름이 나 있었다. 당시 조선은 어린 헌종의 즉위로 외척(外戚)의 세도정치가 계속되면서 정권다툼으로 지배층의 알력이 극도에 달하였고, 양반과 토호(土豪)들은 백성들에 대한 횡포와 착취를 자행함으로써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각지에서 농민봉기를 일으키는 등, 사회는 매우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더구나 일본을 비롯한 외세(外勢)의 간섭이 날로 심해져 국운이 위기에 처하는 한편, 국민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유교·불교가 극도로 부패하여 조정은 민중을 제도(濟度)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게다가 새로 들어온 서학(西學:천주교)의 세력이 날로 팽창하여 그 이질적인 사고(思考)와 행동이 우리의 전통적인 그것과 서로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때 최제우는 서학에 대처하여 민족의 주체성과 도덕관을 바로 세우고, 국권을 튼튼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도(道)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구세제민(救世濟民)의 큰 뜻을 품고 양산(梁山) 천수산(千壽山)의 암굴 속에서 수도하면서 도를 갈구(渴求)한 지 수년 만에 ‘한울님(上帝)’의 계시를 받아 ‘동학’이라는 대도(大道)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동학은 서학에 대응할 만한 동토(東土) 한국의 종교라는 뜻으로, 그 사상의 기본은 종래의 풍수사상과 유(儒)·불(佛)·선(仙:道敎)의 교리를 토대로 하여,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의 사상에 두고 있다. ‘인내천’의 사상은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지상천국(地上天國)의 이념과 만민평등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에는 종래의 유교적 윤리와 퇴폐한 양반사회의 질서를 부정하는 반봉건적이며 혁명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었다.

최제우가 ‘한울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계시는 ‘동학’이란 교명(敎名)과 영부(靈符)와 주문(呪文)이라고 한다. 영부란 백지(白紙)에 한울님의 계시에 따라 그린 일종의 부적(符籍)으로, 궁을형(弓乙形)으로 되어 있고 때로는 태극부(太極符)·궁을부(弓乙符)라고도 부른다. 주문은 13자로 된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의 본주(本呪)와 8자로 된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라는 강령주(降靈呪) 등이 있다.

이 영부와 주문은 동학을 포교하는 데 중요한 방편으로 사용되었는데, 예컨대 주문을 외면서 칼춤을 추고 영부를 불에 태워, 그 재를 물에 타서 마시면 빈곤에서 해방되고, 병자는 병이 나아 장수하며 영세무궁(永世無窮)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동학은 신분·적서(嫡庶)제도 등에도 반기를 들어 이를 비판하였으므로, 그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교리는 당시 사회적 불안과 질병이 크게 유행하던 삼남지방에서 신속히 전파되었다. 포교를 시작한 지 불과 3,4년 사이에 교세는 경상도·충청도·전라도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이같은 추세를 지켜보던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마찬가지로 불온한 사상적 집단이며 민심을 현혹시키는 또 하나의 사교(邪敎)라고 단정하고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863년에는 최제우를 비롯한 20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체포되어, 최제우는 이듬해 대구에서 사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최제우를 비롯한 많은 교인들이 순교한 후에도 조정의 탄압이 계속되자 교인들은 지하로 숨어들어가 신앙생활을 계속하게 되었고, 한편 최제우의 뒤를 이은 2세 교조 최시형(崔時亨:海月)은 태백산과 소백산 지역에서 은밀히 교세를 정비·강화하였다. 전부터 내려오던 접주(接主)제도를 확대 개편하여, 교인들의 일단(一團)을 ‘포(包)’라 하고 여기에 포주(包主)를 두었다.

포주 위에는 접주·대접주, 그 위에 도주(道主)·대도주를 두는 한편, 포주·접주 밑에는 ‘육임(六任)’이라 하여 교장(敎長)·교수(敎授)·교집(敎執)·교강(敎綱)·대중(大中)·중정(中正)을 두었다. 이와 같이 대중 속에 조직된 동학은 1894년(고종 31)에 발생한 동학농민전쟁의 주체가 되었고, 이 때 사형을 당한 최시형의 뒤를 이은 3세 교주 손병희(孫秉熙)는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여 계속 교세확장에 힘쓰게 되었다. 한편 동학은 이 때 시천교(侍天敎)라는 또 하나의 교파가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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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조선 후기 1860년에 최제우(崔濟愚)를 교조로 하는 동학(東學)을 1905년 제3대 교조 손병희(孫秉熙)가 천도교로 개칭한 종교.

 

 

최제우는 전통적 유교 가문에서 태어나 지방의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 후기는 국내적으로는 외척(外戚)의 세도정치와 양반·토호들이 일반 백성에 대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자행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민란이 각지에서 발생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무력침략의 위기를 맞던 시대였다.

최제우는 21세에 구세제민(救世濟民)의 큰 뜻을 품고 도(道)를 얻고자 주류팔로(周流八路)의 길에 나서 울산 유곡동 여시바윗골, 양산 천성산 암굴에서 수도하고 도를 갈구하여 1860년 4월 5일 '한울님(하느님)'으로부터 인류 구제의 도인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도의 이름을 '무극대도'라고만 하였다. 최제우가 포교를 시작하여 많은 교도들이 모이자, 관(官)과 유생들이 혹세무민한다는 구실로 탄압하여 부득이 전북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으로 피신하였다. 이 때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많은 저술을 하였다.

특히, 1862년 1월경에 지은 《논학문(論學文:東學論)》에서 처음으로 무극대도는 천도(天道)이며 그 학은 서학이 아닌 ‘동학(東學)’이라고 천명하였다. 이로써 동학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이 해에 다시 경주의 박대여(朴大汝) 집에 머물면서 포교하자, 충청·전라 지방에서까지 수천 명의 교도들이 모여들자 교도들을 조직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1862년 12월 동학의 신앙공동체인 접(接)제도를 설치하고 접주(接主) 16명을 임명하였다.

최제우는 1863년 3월 경주 용담정으로 돌아와 대대적인 포교활동에 나섰다. 접주들로 하여금 교도들을 수십 명씩 동원하여 용담정에 와서 강도(講道)를 받게 하는가 하면, 동학 교단 책임을 맡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해월(海月) 최경상(崔慶翔:時亨)을 선임하였다.

한편, 관의 탄압을 예견하고 그해 8월 14일에는 도통(道統)을 최경상에게 완전히 물려주었다. 날이 갈수록 동학 교세가 커지자, 놀란 조정은 그해 12월 10일에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를 파견, 최제우를 체포하여 이듬해 3월 10일 대구에서 정형을 집행하여 최제우는 41세를 일기로 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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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증산도와 대순진리회는 동학에서 유래된것이란것 알아두시길 바라며

 

동학은 천주교에서 유래가되었고

 

천주교는 삼신상제관에서 유래되었다는점 알아두시길바랍니다

 

정확히 마테오리치가 조선땅에 천주교를 보급하는대 성공할수있었던것은

마테오리치가 유교와 도교안에 살아숨쉬는 상제관을 표절하여 천주실의를

만들엇기 때문이지요

 

이점 분명히 알아두시길바랍니다

 

물론 증거자료 존재하니 필요하시면 리플 달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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