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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신비한나라 신라를 찾아서

푸른바다 |2003.08.02 20:49
조회 387 |추천 0

아름답고 신비한나라 신라를 찾아서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나라를 세워 천년에 걸쳐 존속했던 아름다운 왕국 신라를 만나기 위해 나는 경주 박물관을 찾아간다. 삼국통일 이후 영토를 확장하고 제도를 정비하며 문화적인 면에서도 당시 동아시아의 보편적 사상인 불교를 받아들여 최고의 세련미를 보여주는 많은 문화의 꽃봉오리들이 향내 맡으라며 박물관에서 기다리고 있다.


경주 박물관은 반월성을 끼고 안압지를 마주보며 본관과 고분관, 안압지관이 신라천년문화의 정수를 한자리에 모아놓아 신라사람들의 생각을 더듬으며 사유할 수 있고 나는 그 안에서 신라인이 되어간다.


삼복더위 뙤약볕아래 서늘한 에밀레종소리가 들리어 오는 듯 상상의 날개를 펼치다보면 어느새 더위는 창공으로 날아가 버리고 들리느니 에밀레 소리뿐이고 목 잘린 부다는 그래도 은근한 웃음을 띄우고 있다. 잔디위에 누워있는 석물들에 돋을새김 되어있는 부처의 인자함이나 십이지신상을 쪼으는 신라석공들의 힘찬 정소리만 이천년 전의 시공을 초월하여 들려온다.


박물관 뜨락 모퉁이에 우뚝 솟아 세상을 제압할 듯 서있는 국보38호의 고선사지 삼층 석탑 앞에 서 있노라면 그 거대한 품위에 나는 세상의 아득함을 느낀다. 무릇 모든 중생을 제압하는 그 웅장한 자태, 웅휘한 기세에 기가 질리지 않을 수 없다. 석재결구에서 가구성이 발휘된 장엄한 기백이 넘치는 거작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이 있다. 뜨락의 고선사지 삼층 석탑을 황홀하게 바라보며 몇 바퀴를 돌다 본관으로 향하니 본관의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내부 유물을 교환 전시라도 하기위해 준비 중인가, 아니면 내부 수리라도 하는지 모를 일이지만 내가 즐겨 보는 ‘천마’ 정확히 말하면 ‘백화수피제 천마도장니’ 자작나무에 그려진 우리나라 최고의 백마 그림이다.


천마는 1973년에 발굴 되었다. 천마가 발굴된 무덤이 바로 ‘천마총’이다. 신라의 그림이 전혀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 천마도를 비롯한 기마인물도, 서조도(瑞鳥圖)를 비롯한 채화판이 출토되어 더욱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천마도는 말갈기와 꼬리털을 날카롭게 세우고 하늘을 달리는 모습으로, 화염을 토하듯 달리는 기린마를 보는 듯하여 그 기상에 주눅이 드는 잘생긴 신라인의 찬연한 그림이기에 나는 좋아한다. 말은 절대적인 것이다. 말은 생명과 죽음, 태양과 달처럼 대립하는 양쪽을 모두 상징한다.


명활산성 작성비, 임신서기석, 남산신성비, 문무왕비, 이차돈의 순교비 앞에 섰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문화 발전이 가장 뒤졌지만 고구려, 백제와는 달리 수도를 옮긴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그 문화유적이 흩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양의 금석문이 남아 있다. 전시실에는 명활산성 작성비와 남산신성비, 문무왕비의 파손된 조각에 쓰인 신라에 대한 찬미, 신라 김씨의 내력, 태종 무열왕의 치적, 문무왕의 사적 및 백제 평정에 관한 내용이 문무왕의 유언과 장례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 여러점 전하는 금석문 중에서도 항상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임신서기석’이다. 신라 젊은이들 사이에 국가와 사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공헌하겠다는 각오와 새로운 학문인 유학도 아울러 열심히 배우겠다는 두 청년의 약속을 적은 이 작은 돌이 ‘임신년에 맹세하고 새긴 돌’이라는 뜻을 가진 임신서기석이다. 이 작은 돌에 저 2천년 전 신라의 젊은이들이 비록 어설픈 한문 실력으로나마 불타는 애국심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드러내고 있어 화랑도가 융성한 시기의 글임을 알 수 있다. 문장은 완벽한 한문 문장은 아니고 우리말 어순을 따르는 우리말식 한문체로 새겨져 있다.


“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며 기록한다. 하늘 앞에 맹세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도를 집지하고 허물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일 이 서약을 어기면 하늘에 큰 죄를 짓는 것이라 맹세한다. 만일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지면 모름지기 충도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 따로 앞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시, 상서, 예기, 춘추전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 하였다.”


나를 섭섭하게 하는 것이 있다. 내가 가장 관심을 갖고 줄기차게 요모조모 몇 바퀴식이나 그 주위를 맴을 돌며 꼼꼼히 보는 질박한 토기 한점, 국보 195호 “토우장식 항아리”를 못 보아서이다. 1973년 경주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미추왕릉지구 정화사업을 할 때 출토된 놀라운 토우장식 항아리 유물이다.


이 항아리는 이제까지 신라고분에서 볼 수 없었던 특이한 유물이다. 토우가 붙은 항아리에는 거북·개구리·네발 달린 짐승·사람·뱀 등의 토우가 붙어 있어 당시의 민속신앙이나 풍습, 또는 생활상을 볼 수 있지만 내 관심을 갖는 토우는 후향위 자세로 성교를 하려는 남녀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클로즈업 된다. 민중의 미술 작품인 토우들의 세계에서 적나라하게 표현된 성의 해석과 그 유니크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것은 ‘음란저속’이 아니라 ‘살아 있는’ 풍속의 역사다.


임신한 여자가 가야금을 연주하는 모습, 그 옆에 과장되어 가공스러울 정도의 발기된 성기를 달고 성교를 하고 있는 모습은 생산·풍요·벽사를 기원하는 모습을 담고 있는 신라인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리얼하게 장식되어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바로 신라인들의 축제요, 환상이다.


축제란 순수한 환락과 기쁨에 넘치는 경축의 기능이요, 환상이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생활 상태를 상정하는 능력이다. 축제와 환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은 인간 생활의 생과 사를 결정하는 절대적 요건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나는 토우 항아리에서 신라인들의 축제와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며 그 축제에 나도 몰래 끼어들어가고 있다.  오늘 보지 못한들 어떠리, 내일이 또 있을 것이다.


박물관 뜨락을 돌고 돌아 나오면 반월성 뒤편 경주향교를 찾는다. 우리나라에서 학교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는데, 고구려의 ‘태학’, 신라의 ‘국학’ 등이 그것이다. 향교는 대학이다. 또한 향교는 ‘관학’ 즉 국립대학인 것이다. 사립대학으로는 ‘서원’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일읍일교’의 원칙에 따라 전국의 모든 군현에 향교를 건립하게 되고 향교들은 그 군현과 운명을 같이 하였으며 서원과 함께 엘리트 산출의 주된 교육장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1542년 조선 중종 때에 건립된 것으로 풍기군수 주세붕이 우리나라 성리학의 선구자인  회헌 안향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건립한 ‘소수서원’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최초의 국립대학’으로 미국의 하버드대학보다 93년이나 앞서 세워졌다.


오늘날 우리는 주위에서 교촌, 교동, 향교동, 교운리, 교성리, 교흥리, 교원리, 교평동 등의 이름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곳은 오래 전부터 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이름 붙여진 것이다.  경주 향교도 교동에 있다. 학교란 물론 향교를 말한다. 또한 향교나 서원의 건축방식은 천편일률적인 맞배지붕이다. 지붕면이 앞 뒤 두 면으로만 이루어지고 옆면은 터진 가장 단순한 형태의 지붕을 맞배지붕이라 하는데 맞배지붕은 권위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향교 앞에 지금은 고급 한식집으로 변한, 요석공주가 살았던 요석궁이 있고 그 주위에 경주 최 부잣집 고가가 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만석 이상 넘으면 사회에 환원하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주 최 부잣집에 내려오는 400년 전통의 가훈이다. 진정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행한 선구자적인 부잣집, 부불삼대, 곧 부자가 삼대를 넘기기 힘들다는 옛 어른들이 남긴 이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며 나는 답사를 마친다.


현장에 가서 살펴보고 따져보고 하는 것을 답사라 한다. 어느 곳에 가서 대상물을 직접 조사해 보는 것이 곧 답사이다. 답사의 첫 번째 요건은 현장 체험이다. 현장에 가서 그 땅을 밟아보는 것이 답사의 생명이다. 내가 직접 현장에 가지 않으면 답사가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답사를 하는가? 직접 현장에 가서 답사를 하면 느낌이 다르게 마련이다. 사람들이 용모가 다 다른 것같이 생각도 다르고, 감성도 다르다. 같은 지역, 같은 대상을 함께 답사를 해도 사람마다 다른 느낌을 받는다. 그 느낌을 교환하면 자기가 못 본 것을 보았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현장에 가서 겉모습을 보고 느낌을 받는 것으로 답사가 다 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볼 때는 눈으로 본다. 무엇을 보고 못 보고는 보는 눈에 달렸다. 눈으로 본다는 말은 두 가지 뜻이 있다. 겉모습을 본다는 뜻과 사물의 본질과 가치를 알아본다는 뜻이 함께 한다.


겉모습은 시력으로 보고 본질과 가치는 안목으로 본다. 안목이 낮은 사람은 눈에 보이는 무엇이 있어야만 본다. 반면에 안목이 높은 사람은 별 것 아닌 듯한 대상에서 진한 감동을 느끼고,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무엇을 찾아내기도 한다.


안목의 출발점은 관심이다. 관심이 끌려야 보인다. 늘 보는 것도 관심 없이 보면 그저 그렇고 그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보면 늘 거기 있던 것도 예전에 미처 몰랐던 느낌을 가지고 다가온다. 이렇게 관심이 안목의 출발점이기에 관심을 가지고 보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보고 이해가 된다면 안목인 것이다. 거기에서 온갖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안목을 높이는 것이다. 우리는 안목을 높이기 위해 답사를 하는 것이다. 세상은 보이는 것만큼 보이는 것이다.


역사와 전설이 곳곳에 응얼진 서라벌에서 나는 많은 영감을 얻고 보이는 모든 것과 교감을 한다. 왕들을 중심으로 펼쳐진 신라의 드라마가 그대로 응집되어 살아 있는 아름다운 경주를 여름의 정오 뜨거운 직각의 햇살을 맞으며 나는 환희의 희열에 들뜬다. 신라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우리들의 눈부신 왕국이다. 신라인들이 그린 소박한 마음과 생사를 초월한 맹세와 용기와 성실함과 질박한 삶의 꿈을 경주에서 배운다. 꿈을 가진 사람이 꿈을 이룬다. 앞으로 더 당당한 삶의 윤기를 위해 신라를 탐방하자. 나는 그곳에서 세파를 헤쳐 나갈 새로운 힘을 얻는다.


                                                     2003, 08, 02  우거에서

 

                                                            푸 른 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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