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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포'는 한족(漢族)이 아니었다

clipdm |2006.11.09 22:35
조회 214 |추천 0
삼국지의 주요 인물들 가운데 출신지별로 보면, 오직 여포만이 홀로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사에서 여포가 인종적으로 정확히 어떤 계통인지 밝히고 있진 않지만 그의 출신지와 그의 생활에 나타난 관습(유비에 대한 접대)등으로 판단하건데 그가 흉노(대쥬신?)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요. 따라서 여포는 인종적인 측면에서 동탁이나 가후보다도 더욱 천대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동탁이나 가후는 중국인들이 말하는 오랑캐 지역에 살았지만 그래도 한족이었고, 여포의 경우는 중국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토종 오랑캐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여포는 가장 싸움을 잘하지만 가장 경멸스럽고 비굴한 모습으로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나관중‘삼국지’를 편찬한 사람들은 원(元 : 몽골)나라 말기 사람으로 그들에게 원나라는 금수(禽獸)의 무리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원수(怨讐)의 무리였을 것입니다. 이러니 여포가 어떻게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더구나 자신의 상관을 두 번씩이나 죽인 사람이 아닙니까?
 
  제가 보기에 여포는 한족(漢族)을 너무 몰랐던 것 같습니다. 정사의 주석에 보면 여포는“여러 장수들은 자기를 죽이려 하는 사람들밖에 없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장홍(臧洪)이 진림(陳琳)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여포가 (장연의 군대를 격파하고) 지원병을 요청하자 원소는 이를 거부하여 여포가 할 수 없이 원소를 떠나려 하는데 원소는 오히려 자객을 보내 여포를 죽이려 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전말을 봅시다. 원소가 상산 땅에 있던 자신의 강적인 장연(張燕)을 여포를 시켜서 쳐부수었는데 원소는 오히려 여포의 세력이 커질 것을 두려워하여 지원병을 파견하지 않았고 이를 알게 된 여포가 원소를 떠나려하자 원소는 비밀리에 자객을 보내 여포를 죽이려 하지만 실패하지요. 원소는 여포를 철저히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룬 후에는 오히려 여포의 세력이 커질까 두려워 암살하려 한 것이죠. 그런데 이 당시 원소의 행위는 왜 사람들이 비판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군요.
 
  여포는 원소에게서 상당한 충격을 받고 삶의 의욕을 상실하여 자살할 결심을 합니다. 정사의 주석에“본래 장양(張楊)은 여포를 죽여 이각과 곽사가 내걸은 현상금을 차지하려 했는데 여포가 이 소식을 듣고 장양에게‘우리는 한 고향이니 자네가 날 잡아가게, 그러면 이각과 곽사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을게 아닌가?’라고 했다(위서, 여포전).”라는 말이 있지요. 즉 여포는 원소에게 당한 충격으로 삶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하여 “에라,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겠다.”라고 판단하고 죽을 바에는 자기를 팔아 고향 사람(장양) 출세나 시켜주자고 한 것입니다. 얼마나 한족(漢族)들에게 시달렸으면 이런 기막힌 생각을 했을까요?
 
  여포는 한족들이 가진 국민적 정서를 모르는 상태에서 일단 출세를 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한 듯합니다. 어쨌든 여포의 차이나 드림(China Dream)은 절반의 성공에 불과했지요. 마치 이민(移民)을 가기 전에 여러 가지를 부지런히 준비해야 하는데 여포는 오직 실력 하나만으로 복잡한 한족사회에서 성공하려니 힘에 부쳤던 것이고 여포가 한족 사회에서 구성한 인간 네트워크(인맥)도 결국은 하류 한족 사회에 불과하니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가 어려웠겠지요. 그러나 저러나 판단은 여포의 몫이니, 주변의 말을 듣고 신중하지 못한 판단을 한 것은 여포의 잘못입니다.
 
  사실 여포는 한족이 아니었으므로 낙양 지역에서 사용된 중국어도 제대로 몰랐을 것이고 문자를 해독할 능력도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중국이 사회주의혁명으로 통일(1949년) 되기 전까지 언어적으로 크게 다른 방언이 7갈래인데 그것을 다시 나누면 270여 개라고 합니다. 더구나 여포는 한족(漢族)이 가진 복잡한 문화적 특성이나 도덕관념 또는 민족적 대의를 알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만의 판단으로 항상 유력자를 선택했을 것입니다(요즘 한국인들이 미국 가서도 똑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주변에 그에게 카운셀링을 해줄 만한 사람이 제대로 없었지요. 이것이 여포의 비극입니다.
 
  여포의 또 다른 비극은 유비(劉備)와의 만남입니다. 여포는 유비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항상 존경하였다고 합니다. 외형적으로 유비는 온후하여, 항상 외로움과 문화적 차이로 인해 힘들어하는 여포에게, 유비는 친아우 같은 존재였습니다. 문제는 유비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죠. 정사에 따르면 여포는 유비를 소개하면서, “유비는 나의 동생”이라고 합니다.
 
  여포가 유비를 좋아한 데는 외형적으로 유비가 온순하고 남의 말을 경청하는 스타일이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유비는 여포와 같이“변변치 못한 변방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정사 여포전 주석). 유비의 고향은 탁(?)으로 현재 베이징 근방입니다. 당시의 베이징은 중원과는 거리가 먼 지역이었죠. 그런데 유비 자신은 한황실의 후예이기 때문에“여포 따위와는 어울릴 수가 없어”라고 생각합니다.
 
  여포는 유비를 자기 아내의 침대에 앉게 하고 아내에게 유비에게 술잔을 따르게 하고 동생으로 삼았습니다. 이 대접은 유목민들에게는 최대의 대접이었고 한족의 입장에서 보면 야만적인 행위입니다(형수가 시동생을 자기 침대에 앉히고 술잔을 따르다니요?). 여포가 순수하게 마음을 열고 유비에게 애정을 보냈지만 유비는 이에 대해서 별 다른 감흥을 가지고 있진 않았고 오히려 이것을 역겨워합니다. 여포는 자기를 배반하고 간 유비의 처자를 보호해줍니다. 문화적 차이가 인간관계를 얼마나 꼬이게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여포는 단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조는 여포를 자기 휘하에 두려고 했고, 여포 또한 여러 번 조조에게 투항하려 했으나 조조를 배신한 전력을 가진 진궁이 이를 방해했습니다. 만약 조조에게 여포가 투항했으면, 여포는 별 탈 없이 부귀영화를 누리며 그냥 살았을 것이고 또 천하 통일도 빨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유비는 여포가 조조에게 투항할 경우 자기의 위치도 문제지만 미래에 자신이 천하의 주인이 되는 데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판단한 듯합니다. 유비로서는 조조도 감당하기 힘든 상대인데 여포까지 조조에 합세할 경우에는 대책이 완전히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조조가 여포를 자기 휘하에 두는 것을 철저히 반대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유비는 조조에게 여포를 죽여야 한다고 강경하게 설득하고 이를 관철시킵니다.
 
  유비의 이 같은 행동을 보면서 여포는 한족(漢族)이 어떤 사람들인지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포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큰 회의를 가졌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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