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국민학교(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엄청나게 큰집에서 살던 순하고 착한 녀석이 있었다.
하루는 이 친구가 집에 부모님이 안 계시다며 나와 함께 지네 집으로 가서 놀자고 했다. 그래서 따라간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걔네 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커다란, 정말 그 시절의 나보다 더 커보이는 개 두 마리가 저기 저편에서 내 쪽을 보며 달려들 듯이 으르렁대고 있었다.
친구가 목덜미를 붙들고 있음에도 나는 두려움을 가득 안은채 마당(아니, 운동장이다. --;;)을 지나 집채(이렇게 표현해야 될려나...모르겠다.^^;)가 있는 곳으로 가서 1층을 지나 2층으로 갔다.
거기 까진 별 일 없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잘 행동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2층 거실로 간 친구 녀석은 주방으로 가더니 쟁반에 몇 가지 사물들을 가지런히 얹어 내왔다.
"자, 차 마시면서 잠깐만 있어. 금방 올게."
- 차...? 줄려면 콜라나 사이다, 하다못해 우유를 줄 것이지... 차는 뭐야?.
- 텔레비전이나 영화같은 데서 보던 차... 그거군.
- 나두 드디어 그 차라는 걸 한번 마셔보는군. 흐흐흐.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는 사이 녀석은 개밥을 주러 갔는지, 뭘 하러 갔는지 사라졌다.
나는 녀석이 오면 함께 먹으려고 잠시 기다렸다. 그런데 한번 내려간 녀석은 도무지 올 생각을 안 하는 것이었다. 먹을 걸 앞에 놓고 참기가 힘든 그 시절, 나는 쟁반 위의 것들을 하나 둘씩 살펴봤다.
우선 과자봉지 2개,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것으로 보아 뜨거운 물이 들어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주전자, 커피잔 2개, 여기까지는 그다지 낯설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두 개의 물건이 나로서는 도무지 용도를 알 수 없는 아주 신기한 것이었다.
우선 두 개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친구 하나, 나 하나, 이건 확실했다.
생긴 모양을 보니... 속이 희미하게 비치는 종이주머니에 무슨 가루같은 것이 담긴 상태로 잘 봉해져 있었으며, 그것은 실로 연결되어져 있어 그 끝은 자그마한 직사각형 내지는 정사각형의 빳빳한 종이로 이어져 있었다.
정말이지 나는 그렇게 생긴 물건을 태어나서 처음 봤다.
한참을 요모조모 뜯어보며 궁리를 해봤지만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었다.
내 안에 내재했던 경험세계에서 "차 = 커피" 라는 형태로 존재하며 커피는 분명 물에 타서 휘휘 저어 마시는 것이다.
또 내 안에 역시 엄연히 살아있던 합리론적 관점으로는 종이주머니의 내용물을 물에 용해시키기 위해서는 어쨌든 둘을 분리시켜야 한다.
이렇게 경험론과 합리론의 절충, 내지는 조화로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생각이 길든 짧든 그게 끝나면 바로 과감한 행동으로 옮기고야 만다.
우선 그 희끄무레한 종이봉지 안에 든 내용물을 빼내어 컵 안으로 넣어야 했다.
그런데 그 당시의 티백은 상당히 질겼던 듯하다.(국산이 아니라 외제였었던 것 같은 생각도 얼핏 든다. 하긴 당시 국산이 있었을까?)
대충 찢으려 했는데 그게 웬만한 힘으로는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하여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무리하게 티백을 개봉하려 하다가 갑자기 터지는 바람에 내용물이 온통 사방으로 튀고 말았다.
앞이 캄캄하고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든 쪽팔림을 당하기 싫었던 나는 바로 수습에 들어갔다.
다행히 차가루(?)는 대부분 탁자 위에 쏟아져 내려앉아 있었다. 그걸 한 손을 비삼아 쓸고 한 손을 쓰레받이삼아 거의 대부분을 회수하여 잔에 담았다. 그리곤 뜨거운 물을 가득 붓고 마시기 적당할 때가 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리는 동안 찢어진 티백과 연결실, 그리고 쪼그만 사각형의 빳빳한 종이를 들여다보다가... 아! 이거구나!. 바로 뭔가가 떠올랐다.
빳빳한 사각형의 종이, 이걸 손잡이 삼아 찢어진 티백을 실로 칭칭 감기 시작했다.
- 그럼 그렇지! 내가 누군데! 이렇게 보기 좋게 둘둘 말아 부피를 줄여서 쓰레기로 버리는 거야.
헌데...
잔에 든 가루를 녹여야할텐데... 숟가락이 없었다.
- 자식! 숟가락 가져다 주는 것도 잊다니...
이렇게 친구 녀석을 원망하며 다른 도구 없이 가루를 녹이기로 했다.
대부분은 아마 종종 해봤으리라. 휘저을 도구가 없을 때 잔을 들고 한쪽 방향으로 빙빙 돌리면 용액 속의 내용물이 녹는거...
그 방법으로 수도없이 잔을 돌리고 돌렸건만 침전물은 자꾸만 생기고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녹이는걸 포기하고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맛은 쓰고 이상했지만 있는 집에서 마시는 거니까 좋은거란 생각으로 끝까지 마셨다. 국물을 다 마시고 나자 이제 밑에 보란듯이 남아있는 찌꺼기가 문제였다.
건더기는 무조건 좋은 거라고 인식하고 있던 그 당시의 나는 다시 한번 숟가락을 준비해주지 않은 친구 녀석을 원망하며 컵 밑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고 주둥이를 내 입 쪽으로 하여 밑바닥을 손으로 탁탁 쳐서 컵 안에 남아있던 내용물을 입안으로 다 털어 넣었다.
그리곤 그걸 씹기와 삼키기를 반복하여 모두 식도 밑으로 넘겨버렸다.
친구 녀석이 돌아온 후의 일은 이야기하지 않겠다.(VV;)
쪽 팔려서 얼굴이 벌개진 것밖에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히려 기억이 나지 않는게 내게는 다행이란 생각까지 든다.
나의 이런 엽기적인 행각은 중학교때 가서 다시 한번 재발한다.
중 2때 소풍을 다녀온 다음날 절친한 친구 녀석의 누나가 돈까스를 사주겠다고 했다.
그 당시 취미가 속식, 특기가 폭식이던 나는 간만의 횡재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친구와 누나를 따라 나섰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 나 살던 동네 우체국, 그 옆에 샘터(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맞을거다.)라는 레스토랑이 있었다.
사실 나는 그 당시 돈까스라는 것을 말로만 들었을 뿐, 돼지고기를 튀긴 거라는 정도밖에 모르고 있었다.
친구와 누나가 나란히 앉고 나는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윽고 웨이터가 다가와 주문을 하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맛있는 고기를 먹는다는 설렘과 즐거움에 나는 무척이나 들떠 있었으며 따라서 행동까지도 좀 오버하는 경향이 있지 않았나 싶다.
나는 웨이터를 향해 손가락 3개를 펴보이며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돈까스 3개요"
"네 알겠습니다. 밥으로 하실래요, 빵으로 하실래요?"
"............???"
의기양양한 채로 들떠 있던 나는 그만 기가 막히고 말았다.
- 고기 먹으러 왔는데 무슨 밥이요, 빵이란 말인가?.
이런 나의 혼란스러움을 전혀 모르는 웨이터는 갑작스런 일격에 황망해 하던 나를 향해 다시 다그쳤다.
"손님, 어떤걸로 하시겠습니까?"
"...저 ...돈까스 ...주세요. 여 여기 메뉴판에 이 있잖아요"
"네 돈까스는 드리는데요, 밥이나 빵 중에 한가지는 그냥 나오거든요, 어느 걸로 하시겠어요?"
"네? 그냥 줘요? 그럼 밥으로 주세요"
내 맞은편의 두 사람은 아까부터 이런 내 모습을 보며 마냥 웃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나를 놀려먹으려고 작정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빵을 선택했고 나는 밥(한국 사람은 밥을 먹여야 하느니 ^^;;)을 선택했다.
그러더니 내게는 너무나 이상한 일이 또 다시 벌어지고 말았다.
잠시 후에 나타난 웨이터는 스프가 든 접시를 우리 식탁에 내려놓는 것이었다.
분명 우리 것이 아닌데도 친구 녀석과 누나는 아무말없이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나는 웨이터에게 점잖게 타이르듯 말했다.
"아저씨... 이거 우리가 주문한거 아닌데요... 손님이 많아서 헷갈리시나 봐요. ㅋㅋㅋ"
"네? 돈까스 시키시지 않았어요?"
".....??? (이건 또 뭔 소리야? --;), 맞아요!. 스프가 아니구 돈까스라니까요."
"이것두 그냥 드리는 거니까 안심하고 드셔도 됩니다. ㅎㅎㅎ"
"...... (이런 VV;;)"
너무나 무안한 나머지 나는 어디 숨을 곳이라도 찾고 싶었다.
이제는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주는 대로 받아 먹기만 할 심산으로 나는 조용히 침묵을 지키기 시작했다.
나는 맞은편의 두 사람을 지켜보며 그들과 똑같이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제는 정말 어떠한 해프닝도 있을 수 없으리라 굳게 믿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왜 일은 그렇게도 꼬여만 갔을까.
스프를 다 먹은 두 사람은 숟가락을 접시 위에 그대로 두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들의 행동을 따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빵을 선택한 그들에게는 숟가락이 이제 더 이상 필요할 리가 없겠지만, 밥을 먹어야 할 나는 숟가락이 꼭 있어야했다.
나는 스프를 다 먹고나서 숟가락을 내프킨으로 깨끗이 닦은 후 나이프와 포크가 있는 그 옆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나는 잔머리에 능한 나 자신을 스스로 대견해 하면서 여유롭게 다음 순서를 기다렸다.
또 다시 우리에게 나타난 웨이터, 스프접시를 수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놈(^^;)이 내가 일부러 내려놓은 숟가락을 덥석 집어서 가져가려는게 아닌가.
나는 당황해서 하마터면 마시던 물을 엎지를 뻔했다. 먹는거에 대단히 민감하던 나에게 그건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니까.
또 다시 이어지는 나의 엽기적인 발언...
"아저씨, 저는 밥인데요, 근데 숟가락을 가져가시면 어떡해요!!!???"
"ㅎㅎㅎ. 보통 포크로 다들 드시거든요, 필요하시면 놔둘게요."
웨이터는 이제 나의 행동에는 이골이 난 듯 전혀 당황하지도 않았다. 마치 어린애를 다루듯 히죽히죽 웃어대며 재미있어 하고있었다.
아아... 나는 밥을 사발에 주는줄 알았던 것이다. 그렇게 접시에다가 마구 짓눌러 깔아주는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쪽팔림에 나는 먹은 속이 이상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그 웨이터였다.
레스토랑을 나서는 나에게 유쾌한(?) 웃음을 던지며 다음에 꼭 또 다시 오라고 했다.
나? 그 후로 거기 다시는 안 갔다.(-,,-;)
단지 지나간 일이라 하여 모두 아름다운 추억이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도 가끔은 차를 마실 때마다 건더기까지 모두 깨끗하게 처리했던 어릴 적의 내가 생각나 이따금씩 미친 녀석처럼 낄낄거리고, 돈까스에 대한 조오기 저 기억 때문에 나는 레스토랑에 가면 여전히 돈까스만 찾는다.
추억을 함께 먹는 이런 먹거리들이 있기에 아무리 맛나고 비싼 산해진미가 내 앞에서 춤을 춰대도 내겐 도무지 보이지가 않는다.
처음이라는 것!. 그건 비록 당장에는 어색하고 바보 같을지언정 지나고 보면 그리운 것이 되더라.
봐!. 그때 얼마간의 쪽팔림으로 나는 평생을 두고 되새길 추억이 생겼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