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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막
피막(避幕) : 예전에 사람이 죽기 직전에 잠시 안치해 두는 마을에서 떨어진 외딴집
짧은 침묵이 흘렀다.
황사장은 경직된 자세로 아무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장의 태도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너
무 강경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던 강주민이 호기심 가득한 미소를 머금으며 다가왔다. 그는
이장과 젊은 여인을 기이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사업가적인 기질로 잘 다져진 상냥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장은 충혈 된 눈
으로 그를 적대시 바라보았다.
"문제가 많소, 젊은 양반."
"그래요? 무슨 문제가 그렇게 많습니까, 영감님?"
"당신들이 지금부터 하려는 일 모두가 다 문제요."
"예?! 아니 그게 무슨……."
쏘아붙이는 듯한 이장의 말투에 강주민은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그 때 황사장이 끼여들었다. 그는 조금 전 보다 더 많은 양의 땀을 흘리고 있었다.
"저기 잠깐만요. 강회장님이 신경 쓰실 일 아닙니다. 이장님과 저하고 작은 의견 대립이 있
어서 그러니 강회장님까지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이장님 잠깐 저하고 저리로 가서 얘기하
시죠."
"아니. 난 자네하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 같네. 아무래도 이 젊은 양반과 얘기를 해야
겠어."
"거, 참…… 이장님……!"
"아니, 잠깐요, 황사장님. 저 역시 이 분과 좀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당황해하는 황사장의 말을 강주민이 잘랐다.
"예? 강회장님 그게 무슨……. 강회장님이 신경 쓰실 일이 아닌데……."
"그게 아닌 것 같은데요, 뭘. 아까 언뜻 듣기론 저주가 어쩌니 죽음이 어쩌니 그런 말까지
나온 것 같은데 신경 쓸 일이 아니라니요. 영감님, 대체 뭐가 그렇게 문제인지 자세하게 말
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강주민은 자못 재미있다는 듯 팔짱을 낀 채 한 손으론 턱을 어루만졌다.
"여보 무슨 일인데 그래요?"
뒤에서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안향숙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주민은 뒤를 힐끔 보며 큰 소리로 얘기했다.
"자, 다들 이리로 오시죠. 여기 계신 영감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답니다. 우리들
이 꼭 숙지해야할 중요한 문제 같으니 다들 오셔서 경청해 봅시다."
강주민은 마치 이제부터 재미있는 구연동화가 펼쳐질 테니 어서 와서 구경하자는 투로 얘기
했다.
이장은 강주민의 그러한 가벼운 언행이 못마땅한지 고개를 저었다. 움푹 패인 그의 눈동자
속에는 불구덩이로 뛰어들려는 코흘리개들을 보는 듯한 안타까움도 들어 있었다. 인간이 범
접해서는 안될 사령(死靈)의 길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자만과 치기에 빠져있는 그들이 측은
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장 옆에서 무표정한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는 여인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
었다.
황사장만 애가 타는 얼굴이었다. 그는 위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와 목덜미의 땀을
닦으며 심란해 했다. 손수건은 금세 축축해졌다.
이윽고 이장 주위로 사람들이 모이자 강주민은 시가 연기를 토해내며 말했다.
"자, 영감님. 다들 모였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이장은 최대한 톤을 낮추고 진실되게 얘기하려 노력했다.
"좋아요. 지금부터 제 얘길 명심해서 들어주시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건 사람의 목숨이 달
린 아주 중요한 일이오. 부디 제 얘길 제대로 이해하셔서 어떤 불상사도 없길 바라겠소."
이장의 목소리는 미세한 바람을 타고 모두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이끌림이 있었다.
"이제부터 내가 할 경고를 절대 간과해서 안 될 것이오. 황사장이 무슨 얘기를 어떻게 했는
지 모르겠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저 곳에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그건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저 피막은 삼 백년 이상의 저주를 품고 있는 곳이오. 어떤 전설이건 저주 건 그것이 삼 백
년 이상이나 지속해서 내려온다면 그것은 절대 그냥 무시할 수는 없는 거요."
"그렇게 얘기하시니 꼭 무슨 고대 인디언 부족의 저주 같은 게 생각나네요."
이장은 심각한 얘기를 자르고 나서는 강주민이 얄미웠지만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초창기 미국인들이 아메리칸 대륙을 점령하면서 본
토 인디언들이 경고한 여러 가지 저주들을 무시했다가 큰 봉변을 당한 사례도 있었으니까."
이장의 말을 듣고 있던 조진선은 새삼 놀라웠다. 그저 무식한 시골 노인네인줄만 알았는데
지리학에 어느 정도 학식은 있어 보이는 듯했다. 그것은 이제부터 나올 그의 경고가 아주
신빙성 없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수 백년 동안 내려오는 저주를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 그 말이오. 저 피막은 살아있는 사
람이 접근해서는 안 되는 곳이오.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은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오."
어느 틈에 아버지 곁으로 온 장인하는 이장의 진지한 말솜씨에 빠져들어 서늘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손을 꼭 부여잡고 있었다. 장건영은 그런 아들의 어깨를 감싸
주었다. 아들이 미세하게 떨고 있는 게 손끝으로 전해졌다.
"삼 백년 전 저 피막은 마을을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소. 그리고 그 후 어떤 생명체의 접근
도 허용하지 않고 있소."
"그러니까 저 피막이 살아있는 괴물이라도 된다 그 말씀입니까? 허허, 그것 참."
강주민의 이죽거림에 다소 고조되었던 진지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강주민은 냉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런데 영감님. 지금 영감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저 피막의 저주에 대해서라면 우리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황사장께서 미리 다 말해 주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칼을 귀신 같이 휘두르는
외팔이 기형아가 어떤 무당 딸과 눈이 맞아 서로 좋아하고 못 살다가 목이 잘려 줄초상 치
렀다는 이야기, 그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지금 그 전설 때문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이장은 말없이 강주민의 비죽거림을 보고만 있었다.
강주민은 시가를 깊게 빨아들인 후 바닥에 던져 발로 비벼 껐다. 그는 여유있게 연기를 뿜
어내며 말했다.
"하지만 영감님, 그건 억집니다. 유난히 전설이나 미신 따위에 기대기 좋아하는 게 우리 나
라 아닙니까? 전국 팔도 방방 곳곳에 전설이나 미신 없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식
으로 따지자면 어느 곳 하나 발붙일 곳이 어디 있겠느냐 말입니다. 그런 전설이니 저주니
하는 것은 한낱 구실이고 망설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에 연연했으면 이 나라가 이 정도로
발전이나 했겠습니까? 공동묘지가 가득한 산들도 가차없이 파헤치고 깎아내려 도로를 내고
건물을 짓고 하는 마당에 저런 외딴 창고하나가 무서워서 연연한다면 무슨 발전이 있겠습니
까, 영감님?"
그는 이장을 계속해서 영감님이라고 칭했다. 이 마을 사람들의 이장일지는 몰라도 자신의
이장은 아니니 더 이상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라는 언질이 강했다.
"그래요, 강회장님 말씀이 맞아요."
이번에는 조진선이 나서며 강주민에게 동감을 표했다. 조진선은 잠깐 강주민에게 호의있는
미소를 지은 후 이장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하지만 안향숙은 조진선이 남편에게 흘린 미소
를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그녀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조진선은 예의 바른 말투로 이장에게 말했다.
"이장님 심정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들을 염려하셔서 그러시는 것도 잘 알겠구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저희도 그 피막에 대해서는 사전 조사를 하고 온 것이니까요. 이장님께
서 염려하실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여기 계신 조교수님은 심령학 분야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신 국내 최고의 권위자 십니다. 미신이나 전설에 대해서도 학식이 높으신 분이니 이장님께서 염려하실 일은 없습니다."
황사장이 기회다 싶어 이장을 설득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장의 눈빛이 더 매서워졌다.
이장은 조진선과 똑바로 눈을 맞추며 얘기했다.
"내가 가장 염려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오."
조진선은 이장의 말이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죠?"
"바로 당신이 불상사를 일으킬 화근이란 말이오."
"아니 지금 교수님께 무슨 그런 실례를 하십니까?"
황사장이 급히 나서 상황을 수습하려 했으나 가만히 있을 조진선이 아니었다. 그녀의 표정
은 차갑게 바뀌어 있었다.
"그래요? 제가 화근이라고요?"
그녀는 조소 띤 얼굴로 모두들 돌아보며 호소하듯 얘기했다.
"여러분 제가 불상사를 일으킬 화근이라는 군요. 다들 제 주변에서 멀리 떨어져 계셔야겠군
요. 무서운 불똥이라도 튀면 큰일이니까요."
그녀의 말에 웃음을 보이는 이는 강주민과 박철준 뿐이었다.
조진선과 짧게 눈이 마주친 안향순은 이장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턱을 치켜
세우고 흥, 하는 콧소리를 냈다. 하지만 조진선은 안향순의 그런 태도가 무척 가소롭던지 이
를 드러내고 웃음을 보였다.
조진선은 다시 이장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요, 어디 설명을 해 보시죠. 제가 어떤 식으로 화근이 된단 말이죠, 영감님?"
그녀는 금방 영감님으로 호칭을 바꾸어 불렀다.
이장은 잠자코 그녀를 응시하다가 이내 시선을 모두에게로 돌리며 말했다.
"오늘 당신들이 저 피막에서 하려는 일을 황사장에게서 들어서 알고 있소. 그건 위험천만한
일이오. 당신들 모두를 파멸로 몰아 넣을 죽음의 의식이 될 거요."
이장은 언성을 높여가며 분명한 경고 투로 얘기했다.
"강령술이라니 그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소! 그렇지 않아도 위험한 곳이오. 하물며 일부러 귀
신을 불러내려 하다니, 그런 미친 짓이 어디 있소!"
잠깐동안 그들 모두는 말이 없었다.
차가운 바람이 말라비틀어진 낙엽과 지푸라기들을 몰고 왔다. 해는 어느덧 많이 기울어져
저녁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고했다.
장건영은 몹시 심란했다.
강령술이 있을 거라는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그런 일에 동참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아들의 생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어영부영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 싫었
다. 어제 밤까지만 해도 기대에 잔뜩 부풀어 희열에 찬웃음을 흘렸던 아들을 생각하니 무엇
보다 가슴아팠다.
그는 바로 앞에 서 있는 조진선의 뒷모습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학계에서 이름을 떨치는 저명인사라고 황사장이 장황하게 소개했지만 그로선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별로 믿음도 가지 않았다. 저런 젊은 여자가 무슨 강령술을 한단 말인가!
그는 거만하게 폼 잡고 서서 나이든 노인을 비웃으며 자신을 추켜세우려는 조진선보다 이장
에게 몇 배는 더 믿음이 갔다. 그는 이장의 경고가 이상하게 뼈에 와 닿았다.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큰 일이 생길 것만 같아 불안했다.
문득 시계를 보니 오후 세 시였다. 그는 어서 자신의 할 일만 마치고 돌아가고 싶었다. 강령
술이니 뭐니 하는 것은 절대로 참가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늦어도 네 시전에는 아들과
놀이공원에 가 있을 것이라고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어색한 침묵을 황사장이 깼다.
"이장님, 제발 이쯤 해 두시죠. 여기 계신 조교수님은 강령술 분야에 특별한 재주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건 이미 학계에 정평이 나 있습니다. 이장님께서 아무리 그러셔도 소용없습니
다. 누가 이장님 말씀을 신용하겠습니까? 학계에서 인정하고 세상이 인정한 조교수님을 믿
으려 하지요. 아무리 그러셔도 여기 계신 분들은 이장님 말씀을 아무도 안 따릅니다. 그만
포기하고 돌아가세요. 거, 허리도 안 좋으시다는 분이."
이장은 말이 없었다. 황사장은 그것을 포기의 의사로 멋대로 받아들였다.
"저기 이장님, 제가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불쑥 나선 이는 박철준이었다. 조진선과 이유미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제가 오래도록 모셔와서 잘 아는데 교수님은 정말 강령술 분야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라 해
도 과언이 아닙니다. 학계에서 무수한 상패도 받으신 분입니다. 위험할 것은 조금도 없습니
다. 강령술 하시는 것을 직접 곁에서 지켜본 제가 드리는 말씀이오니 믿고 안심하셔도 됩니
다."
예상치 못한 뜨거운 찬사에 조진선은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그것이 감언이설이라는 것
을 알면서도 기분은 좋았다. 자신에게 잃은 점수를 만회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쯤은 그녀
로선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박철준 역시 꿰뚫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라도 하는 것이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좋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계속 말했다.
"더구나 저흰 귀신을 불러내서 어찌해 보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저주가 정말로 있다면 귀
신을 불러내어 그 원한을 달래주고 풀어주고자 하는 겁니다. 삼 백년 이상 묵은 그 원한을
청산해 버릴 수만 있다면 그건 이 마을을 위해서도 좋은 일 아닙니까? 그런 저주가 사라지
기를 이장님께서도 바라시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교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시고 돌아가 주
세요. 장담하건대 이장님께서 우려하시는 그런 불상사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수님
의 실력은 그만큼 대단하시니까요."
말을 마친 후 박철준은 재빠르게 눈치를 살폈다.
예상했던 대로 조교수의 마음은 다소 누그러진 듯했다. 자신에게 품었던 감정을 조금은 푼
듯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미가 잔뜩 골이 나 있었다. 자신을 입에 발린 소리나 하는 아첨
꾼으로 여기며 경멸하는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우선은 교수
의 마음을 돌려놓는 것이 급선무였다. 내일 있을 학장과의 오찬을 절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언제까지나 히스테릭한 노처녀의 비위나 맞추며 살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학장에게 그 동안
불철주야로 연구해온 논문을 보이고 그의 추천서를 얻어 낼 수만 있다면 자신에게도 성공의
기회는 열리는 것이었다.
그에 비한다면 유미 정도는 심심할 때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유미도 자신을 그렇게 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언제나 수많은 남자들에 둘러 쌓여 있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게 남자들은 그녀의 몸을 치장하는 장신구의 하나에 불과했다. 그런 여자를
위해 조교수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이유미는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박철준의 뒤통수를 갈기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녀는 박철준이 기회주의자라 조교수를 절대 저버리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
고 자신을 그저 심심풀이 땅콩쯤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 자신도 박철준을 생각날 때마다 한번씩 끓여먹는 라면 정도로만 여길 뿐이었
으니.
그녀의 의도는 다른 데 있었다. 물론 박철준의 탤런트같이 준수한 외모와 구리 빛 근육질도
좋기는 했다. 하지만 늙은 여우같은 조교수에게서 멋지게 박철준을 떼어낼 수만 있다면 그
것보다 통쾌한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의 미모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그녀는 자신했
다. 유독 자신을 싫어하고 학점을 짜게 주는 조진선에 대한 앙갚음을 그녀는 그런 식으로라
도 하고 싶었다. 분신처럼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박철준을 빼앗아 자신이 꿰차고 다니는 꼴
을 그녀에게 보일 수만 있다면 그것보다 근사한 복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늘
우월 의식에 빠져 사는 늙은 여우는 크나 큰 패배자의 수치를 맛보게 될 테다. 그건 그녀에
게 죽는 것 보다 더 치욕적인 일일 테니.
한참 후 이장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굉장히 차분해져 있었다.
"좋아, 자네들 뜻을 잘 알겠네. 기어이 강령술을 해서 귀신의 원한을 풀어주겠다 그 말이지.
그렇다면 이렇게 하지."
이장은 시선을 돌려 아까부터 자신의 옆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던 여인을 보았다. 그리고
나서 누구에게라 할 것 없이 크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기어이 강령술을 하겠다면 여기 이 처녀 보살님께 맡기도록 하세. 여기 보살님은 이 마을
에 오래도록 적을 두고 대대로 마을 잡귀들을 몰아내 온 유명한 무당 집안의 후손일세. 그
마을 문제는 그 마을 토박이가 해결해야 하는 법일세. 객들이 나설 게 못 되네."
강주민이 혀를 차며 나섰다.
"잠깐만요, 영감님. 지금 무슨 착각을 하시고 계신가 본데 이 땅의 주인은 엄연히 나올시다.
법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으니 못 믿겠으면 동사무소 가서 확인해 보시지요. 자, 그러니 이제
객은 영감님과 저 어줍잖아 보이는 처녀 보살이 되겠지요?"
"네 이놈! 무엄하다! 하늘이 점지해서 탄생한 보살님께 게 무슨 망언이더냐!"
그 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고 있지 않던 처녀 보살이 귀청이 떠나갈 정도로 우렁차게 소리쳤
다.
강주민은 잠시 할 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녀 보살은 눈알이 튀어나올 듯 부릅뜨고는 강주민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모두를 향해 무시무시한 기운을 띄우며 소리쳤다.
"다 보여! 모든 게 다 보여! 어리석은 인간들이 잠자고 있던 원귀를 불러내 하나 씩 참변을
당하는 모습이 또렷하게 다 보여! 네 놈들은 모두 한 명씩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죽어갈 것이야!"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몰려들었다. 갑자기 바람이 거칠어졌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모두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우왕좌왕했다.
"앗, 아빠 비와!"
장인하가 소리쳤다.
소년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모두들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과연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그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나른했던 오후의 분위기는 일순간 반전되었다.
빗줄기는 일시에 굵어지며 폭우로 돌변했다.
저마다 낭패라는 얼굴을 하고선 손으로 빗물을 막아내기에 바빴다. 단지 처녀 보살만이 여
전히 두 눈을 부릅뜨고 귀신같이 꼿꼿이 서 있었다.
그 때 누군가가 말했다.
"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우선 저 곳에라도 가서 비를 피합시다."
말을 하는 이는 황사장이었다.
"어차피 이 일대엔 비를 피할 만한 장소가 없습니다. 죄다 허허벌판이라서요. 어차피 가기로
되어 있었으니 어서 저 곳으로 가서 비를 피하도록 하죠!"
사람들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간신히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모았다.
그가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닌 피같이 붉은 벽돌을 한 문제의 그 피막이었다. 언덕 위에 불쑥
솟아 오른 피막은 마치 그들의 방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붉은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음습한 기운이 모두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피막 3에서 계속... by 살인교수
http://cafe.daum.net/suttleb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