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억 저편이 아름다운 이유..........4
할머니는 그렇게 자식들이 몰래 집을 팔아 살던 집을 내놓고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집으로 이사를 하고 ....
제일 착하고 믿음직스럽고 살려고 무던히도 발버둥치던
둘째 아들을 가슴에 묻으신 일이 쌓여 병이 되셨는지..
어느 날 부터인지 이상하게 변해가셨지요.
그렇게 맑으셨던 기억이 가끔 흐려지시고
냄비도 태우시고... 물도 없는 무쇠 솥이 빨갛게
달궈진지도 모르고 아궁이에 계속 불을 지피시고....
남의 물건에는 손하나 안대시던 할머니였는데
남의 밭에서 고구마를 캐오시기도 하셨지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할머니의 병은 깊어만 갔습니다.
할머니께 그때 아무래도 ‘치매’라는 병이 찾아왔나 봅니다.
할머니가 없으면 난 갈 곳이 없었기에 ...
오로지 할머니만 믿고 살았기에...
할머니가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할머니가 정신이 없으셨을 때
하신 일들을 이야기해 드리며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몇 번이나
울고 또 울면서 할머니 팔을 흔들며 당부를 했는지......
하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할머니의 병은 자꾸만 자꾸만 깊어져서
어느 날 부터인지 밤마다 나가서 이곳저곳에 불을 질렀습니다.
나는 무서웠습니다.
낮에는 말짱하시고 밤만 되면 할머니는 잠도 안주무시고
밖을 헤매고 다니셨지요.
할머니는 제정신이 아닌 그 순간은 얼마나 힘이 세신지.....
난 밤마다 할머니를 못 나가게 하려고 창호지 방 문고리를
할머니의 허리 묶는 치마끈으로 묶고 또 칭칭 묶어 아무리 꼭꼭 걸어 잠그고는
안심을 하고 잠을 잤지만 쌀랑한 기운에 일어나 보면 할머니는 아예
문고리 반대쪽을 뽑고 문을 부셔 놓은 채 어디론가 나가시고 없으셨지요..
밤마다 그런일은 되풀이 되고...
할머니가 불을 지르실까봐
성냥이란 성냥은 모두 감추고 없는데....
11월 어느날...
가을이 무르익고...
감나무에 감이 빨갛게 익고..
감나무 잎마져 빨갛게 물들어 어느게 감이고
어느게 감나무 잎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의
깊어가는 어느 가을 밤...
어느 부잣집의 겨울 내내 쓸 땔감을 큰 감나무를 기둥삼아
산처럼 높이 쌓아올려 놓았던 그 곳에...
할머니는 어느 틈에 나가셔서 어디서 성냥을 구했는지 기어이 불을 지르시고..
높이 쌓아올린 나무들이 타면서
온 동네가 마치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지고
감나무의 빨갛게 익은 감들이 불에 그을리며
불길은 겉잡을 수 없이 미친 듯이 활활 타올랐지요.
많은 사람들이 잠결에 놀라 달려와서 불을 끄고...
순경이 와서는 할머니를 잡아가야 한다며 내가 보는 앞에서
밧줄로 할머니의 손목을 묶으려 했지요.
놀란 나는 우리 할머니 한번만 용서해 달라며...
순경 앞에 무릎을 꿇고 벌벌 떨며
굵은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할머니 없이는 못산다며 다시는 이런일 없게
할머니를 잘 지킬 거라고 용서를 빌고 또 빌었지요.
하지만 그런후...
할머니는 병이 더 악화되어 끝내는 큰아들 집으로 가시고
나는 결국 새엄마네 집으로 갔습니다.
그게 나와 할머니의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후 할머니는 꿈속에서도 늘 잊지 못하는
손녀의 얼굴 한번도 못 본채....
큰아버지 집으로 가신뒤 일년 반만에
내가 13살 이었던 오월 어느날에 다시는 볼 수 없는
하늘나라로 떠나 가셨습니다.
열여섯 꽃다운 나이로 꽃가마를 타고 시집오셨다던 내 할머니...
연지곤지 곱게 찍고 시집오시던 그때와는 다른 꽃상여를 타시고.....
그렇게 손녀의 결혼하는 모습을 끝내 보시지 못한 채
한 맺힌 세월을 내려두시고 가셨습니다...
떠나시기 바로 전에 할머니는 생전에 한번도 칭찬을 안 하시던
둘째 새 며느리인 나의 새엄마를 앞에 두고 칭찬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내 아들 잡아먹은 년이라며 쳐다도 안보시던 할머니가
죽음을 눈앞에 두시고 왜 그런 칭찬을 하셨는지...
아무래도 그 칭찬은 당신의 손녀가 행여나 새엄마에게
설움을 받으며 눈칫밥을 먹으며 자랄 것이 걱정스러워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하셨나 봅니다.
할머니는 내게 새엄마는 무서운 존재라고 심어주신 듯 합니다.
할머니와 같이 살 때 새엄마가 오시면 난 앞산에 올라가서
우리집 마당을 바라보며 새엄마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는 산을 내려와
집으로 오곤 했으니까요...
할머니는 내게...왜 그렇게 새엄마를 나쁜 사람이라고...
무서운 사람이라고..... 인식을 시키셨는지......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에 난 어차피 새엄마와 함께 살아야 하거늘...
난 새엄마와 함께 산 2년 동안이 내 생에서 제일 힘들고
긴긴 날이었습니다.
벙어리처럼 말을 안하고 지냈으니까요...
새엄마의 눈빛만 봐도 그냥 얼어 붙었으니까요...
나오려던 말도 기억이 안나고 목소리는 떨렸으니까요...
눈칫밥.....아.....그게 눈칫밥이었습니다..
새엄마와 사는 2년이....
내가 처음 먹어 본...... 눈칫밥...
13살 겨울 방학때 이모집에 와서 사는데
이모, 이모부는 내가 말을 잘 안하고 뭘 물어봐도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는다고...
몇 번을 불러도 모기소리 만하게 대답하는 내게
곰딴지 같다고 하시며 네 목소리 한번 듣다가 속 터져
죽겠다....라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할머니와 살때.... 그 살갑고 ... 사과처럼 빠알간 양볼에 방긋 웃을때마다
보조개가 쏙쏙 파이던 보름달처럼 동그란 얼굴의 작은 소녀였는데...
새엄마와 사는 그 2년이란 세월이 나를 그렇게 말을 못하는
바보로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새엄마 집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는데..
할머니하고 살 때 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부엌일을 안 해 보았는데...
서투른 몸짓에 머리에 인 물이 담긴 함지박은 물이
출렁거려 옷을 적시고 때로는 함지박을 머리에 인 채 넘어지고..
꽁꽁 언 한겨울엔 내 손등은 마치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고 터져서 피가 나고..
언제나 빨갛게 얼어서 공부를 하려해도 그 얼어서
곱은 손으로는 연필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추운 겨울날.. 고무장갑도 없던 그때...
시냇가에 나가서 그 얼음장 같이 차거운 물에 어떻게 빨래를 했는지....
집에서 조금 떠갔던 더운 물에 손을 담가가며 빨았지만
그 더운물은 겨울 찬바람에 어느새 온기를 잃고 차갑게 식어가고...
27년이 흐른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할머니는 언제나 소원은 단 하나셨지요.
우리 똥강아지 결혼하는 것 보고 눈을 감는것...
할머니는 어린 손녀를 붙들곤 밤마다 하시는말..
내가 너 결혼할때까지 살는지 모르겠다.
너 결혼하는 것 봐야지 편히 눈을 감는데...
그게 할머니의 단 하나 유일한 소원이셨습니다.
![]()
(작은 오두막집에 살면서 생각나는 몇 가지 기억들)
할머니는 호롱불 밑에서 공부를 하는 손녀를 위해
밤이면 호롱불 등잔에다가 큰 대병에 있는 석유를 채워 넣으시고
호롱불 심지가 작으면 성냥개비로 심지를 돋구고
너무 커서 그으름이 생기면 등잔뚜껑을 톡톡 몇 번 내려쳐서
심지를 줄이던 기억이 납니다.
어쩌다가 호롱불 가까이 다가가서 머리카락을 태우기도 했고
호롱불 아래서 공부를 하고 아침에 일어나 보면
콧속이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던 기억도 납니다
그런후....
언제쯤인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오두막집에서 살때....
아홉 살인가... 열 살 되던 어느날
전기라는게 들어 왔지요.
처음 전기 스위치를 켜던날..
할머니와 저는 너무나 눈이 부셔서 오랫동안
눈을 뜰수가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처음 전기가 들어온 그날밤은
해가 떠있는 대낮보다도 더 온 동네가 환했습니다.
할머니와 살면서 난 걸어서 1시간이나 걸리는
먼 거리의 학교를 걸어서 다녔습니다.
지금 내 나이쯤에 비슷한 세대는 학교까지 가는데
걸어서 한 시간 정도면 보통의 거리였을 것 이라고
생각이 되지요...
할머니께서 저금하라고 동전을 주시고 가끔씩 집에
다녀가셨던 친척들이 준 돈을 돼지 저금통에
저금을 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지 난 학교 앞 문방구를 드나 드는데
재미를 붙이고....
그 돼지 저금통 배를 할머니 몰래 갈라서는
학교 갈 때 날마다 조금씩 꺼내 갔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10원어치...20원어치...때로는 5원어치..
그렇게 불량식품 과자들을 사서 긴 신작로를 따라
그 과자들을 맛있게 먹으면서 걸어 오니
그 멀기만 했던 하교길이 금방 집에 도착하는 것 같았습니다.
무거웠던 저금통은 갈수록 가벼워지고...
그러던 어느날인가...
할머니께서 알아버리셨지요...
난 그날 처음으로 할머니께 맞았습니다.
살면서 한번도 내게 회초리를 드시지 않으셨던 내 할머니...
할머니는 그날 싸리나무 회초리로 내 종아리를 한참을
내려치시며 우셨습니다.
애비,애미 없이 자라서 버릇없이 컸다는 소리를
할머니는 내게 남겨주고 싶지 않으셨나 봅니다.
난 그런 할머니를 끌어 앉고는 다시는 안 그러겠다며
부등켜 앉고 같이 울었습니다.
그 후로는 어디를 가든 내 물건이 아닌 남의 물건에는
절대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할머니의 그 크신 사랑 때문인지 자라오면서
부모 없이 자라서 버릇없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살면서 내게 주신 그 단 한번의
할머니 회초리는 그만큼 내게 위대했습니다.
난 실제로 내 생일이 언제인지 정확히 모릅니다.
그 당시에 호적에 실린 생일과 실제 생일과 일치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나 또한 호적에는 한살 늦게 실려 있기에
호적에 있는 생일이 맞다고 생각지 않으니까요.
할머니와 헤어지기전에 할머니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그때 할머니 정신도 온전치 않으셨고 ...
내 나이 또한 기억하기 어렸었고...
할머니께서 가르쳐주신 그 날짜를 생일로 하고 있지만
내 태어난 정확한 날짜를 알고 싶어 고모들한테도
여쭤 보았지만 내 생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지금도 내 생일을 찾고 싶지만 아마도 영영 찾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날 낳아주신 내 엄마가 내 곁에 안 계시기에...
할머니와 살았던 동네 어른들은 날 보면 언제나
에그....불쌍한것...하시며 혀를 차시면서 내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주시던지
아니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어찌 그리 부모 복도 지지리 없냐고 하셨지요..
난 자라면서 그 말이 제일 싫었습니다...
불쌍하다는 그말...
지지리 부모 복 없다는 말...
지금도 예전의 저를 아시던 어르신 분들은
아............그때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던 ○○가 이렇게 컸단말야...
하시며 애처로움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십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제게 하시는 분들이 제일 싫었습니다.
불쌍하다는 말....부모 복 없다는 말....
지금도 제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지요.
동정 하는 것.....그 동정이란 게 싫었습니다....
돌아가신 엄마와 나이가 비슷하고 친구처럼 지내셨던 막내 고모...
엄마가 살아계실 때 외할머니 집 동네에 있는 사람을
고모한테 중매를 하셔서 고모는 그 사람과 혼인을 하려고
말이 오고갈 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그 후에 고모는 할머니를 도와서 조카인 날 조금만 키워 놓고
시집가신다며 하는 바람에 그 사람과 헤어졌다고 합니다.
난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짐이 되었습니다.
고모는 엄마를 대신해서 날 조금 키워놓고
2년 후에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해서 살고 계시지요..
그런 고모는 어렸을 때부터 나만 보면
늘 등을 두드리며 끌어 안으시고는
이년아...이년아...하시며 말을 잇지 못하시고 눈물부터 글썽이십니다..
나만 보면 우는 고모가 난 싫었습니다.
내게 눈물을 보이시는 게 너무 싫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내 나이 지금 서른여덟이건만...
예순을 바라보는 고모는 지금도 나를 보면 눈에 가득 눈물부터 고이시고
가득 고인 눈물이 기어이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리는 것을
얼른 손으로 훔쳐 내십니다.
난 그런 고모에게 이젠 이런말을 합니다..
고모 울지마세요...제발....
나 잘 살고 있잖아요... 이렇게....라고.....
고모는 날 보면 핏덩이 때 날 키우던 생각을 하시고
돌아가신 내 엄마 생각을 하시나 봅니다..
뽀얀 피부에 사근사근하고 ..
붙임성이 좋았다던 고모의 손위 올케...
고모와 친구처럼 지냈다던 내 엄마...
고모는 날 보며 내 모습에서 그런 엄마를 찾으셨나 봅니다.
하지만 저는 엄마의 그런 점은 닮지 않았나 봅니다..
사근사근하거나 붙임성은 없으니까요...
힘겹게 살아온 나날이라서 그런 걸 까요...
내가 짐이 된 또 한사람...삼촌....할머니의 막내아들..
내가 기억하는 건 할머니와 살 때 삼촌이 군 제대를
마치고 돌아오던 모습....
그리고 가끔씩 집에 오시면서 사 오셨던 내 운동화..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던 친구들이 많았던 그때...
조카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가 없는 삼촌이 사다준 운동화는
비록 내발에 작았지만 난 그 운동화에 내 발을 맞추었지요...
발가락을 구부린 채 그 작은 운동화를 떨어질 때까지
신고 다녔지요...
그때 발을 너무 고생을 시켜서인지 지금은 절대 작은 신발을
신지 않는 답니다.
내 발보다 좀 크게 발이 자유롭게 편할 수 있도록 신는 편이지요..
발도 길고 큰편이면서...245밀리...하지만 ...
난 곧 잘 더 큰 250밀리를 잘 사서 신는답니다.
그리고 교과서를 보자기에 둘둘 말아 싸서
마지막에 옷핀으로 고정을 시키고는 허리춤에 책보를 매고 다녔는데..
삼촌은 언젠가 내게 책가방이란 걸 사다 주셨지요..
공부를 잘하는 조카를 신통해 보였는지 ... 연필이며 필통...
그리고 멋진 왕자가 왕관을 쓰고 있는 왕자표 크레파스..
난 그때 그 크레파스보다 더 좋은 크레파스는 없는 줄 알았답니다.
그때 언젠가 삼촌이 주신 돈으로
그 유명했던 주황색 봉지의 S사 라면을 동네 구멍가게에서
처음 사서는 맛있다고 생라면을 뿌셔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세상에 태어나 그때 처음 먹어 본 신기하고
꼬불 꼬불한 생소한 라면이 왜 그렇게 맛있던지...
그 후로는 비싸서 먹어 본 기억이 거의 없지만.....
어린 내게는 그 당시 라면값이 많이 비쌌다고 생각이듭니다.
그때 그 라면의 값은 어렴풋이 35원쯤 이었나봅니다.
정말 지금과 비교하니 아득한 오래전 기억인 듯 느껴집니다.
그리고 내가 기억을 못하는 아주 젖먹이 아기일 때
못 먹어서 그랬는지 온몸이 부스럼이 나서
할머니 등에 업혀 병원 문턱을 자주 들락 거렸을때..
삼촌은 내가 먹을 분유를 사서 대었다고 합니다.
삼촌은 내가 커가는 모습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을 하시곤 했지요...
너한테 그동안 사 먹인 분유깡통이
아마도 바지게로 하나는 넘을 거다......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꼭 1등만 해야한다....라고...
지금은 그 삼촌이 작은아버지가 되셨고 작년에 회갑이 지나셨습니다..
난 지금도 삼촌께 그때 왜 누가 무슨일로 집을 팔아야 했었는지
뵐 때마다 묻고 싶지만....
아픈 오랜 지난 과거이고...
내가 자라면서 삼촌께 진 빚이 너무 많아 차마 여쭐 수가 없습니다..
평생 그러리라고 생각 되네요...
할머니께는 아들 셋, 딸이 셋, 이렇게 자식이 여섯이나
있었는데 할머니는 왜 나만을 데리고 혼자 사셨는지..
자식들도 하나같이 그날 그날 벌어먹고 살만큼 가난하기에
그러셨을까...
유난히 자존심이 강하시고 곧으셨던 내 할머니...
할머니는 그때 ‘정부미’라는 배급을 타서 생활을 하셨는데
그렇게 자식이 많은데도 할머니는 동네 이장한테 ‘난 자식이 없소’
라고 애원을 하시며 그 자존심 다 버리시기도 하셨던 내 할머니...
그러했기에 다달이 밀가루와 납작하게 눌린 보리쌀과 쌀이 함께
섞인 정부미를 한포씩 받아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못사는 사람들은 쌀을 찾아보기 힘든 꽁보리밥을
먹었는데 그에 비하면 정부미로 한 밥은 쌀밥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할머니와 헤어져 새엄마 집에 왔을 때
쌀이 안 보이는 시커먼 꽁보리밥을 난 껄끄러워서 한동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반찬도 할머니가 해 주시던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지요.
매운 것을 못 먹는 내게 할머니는 언제나 모든 음식을 내 입맛에
맞춰 해 주셨지만 ...
새엄마는 남편이 없이 혼자 자식들을 키워야했기에
먹는 것 보다 돈을 버는 게 더 중요했던 것이겠지요.
혼자서 4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며 키워야했기에....
제 곁에는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형제인 고모 세분과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엄마의 형제인 이모 두분과 외삼촌 세분...
엄마는 외할머니,외할아버지의 세딸중에서 가운데였고..
아버지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아들 셋 중에 가운데였지요..
지금도 다들 건강하신데...왜 두 분만 일찍 가셨는지...
이렇게 제게는 아직도 저를 걱정하고 염려해 주시는
부모님의 형제분들이 계십니다.
도움을 주고 받아서가 아니라 그냥 계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제 마음을 든든하게 합니다...
세상엔 피붙이도 없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저는 그럼 얼마나 행복한 건가요...
저한테는 소중한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하기에 행복합니다...
내가 태어난지 여덟달 만에 떠나신 엄마..
내 나이 10살 되던 해 떠나신 아버지..
그리고 내가 13살....화창한 봄날에 떠나신 내 할머니...
진정으로 사랑하는 할머니...
그렇게 보고 싶고 또 보고 싶고....
그립고 또 그리운데...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지금껏 나는 꿈속에서 세분을 단 한번도 못 뵈었습니다..
언제나 하늘에서 내려다 보시며 지켜주시는 것을 나는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행복합니다...
내가 없으면 하루도 못산다는 남편...
처음이나 한결같이 나를 끔찍이 사랑해주는 남편...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보석.......
티없이 맑고 밝게 곧게 자라주는 나의 두 아이들....
너무나 행복한 가정....
지금 나는 그 행복이라는 울타리를 가꾸어 나가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사랑하는 나의 반쪽과 함께...
난... 내 두 아이들을 위해...그리고 남편과 내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렵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신 부모님 영향인지
오래살고 싶다는 삶에 대한 욕심이 내겐 없었지만....
자라오면서 많은 분들이 내게 수없이 말했듯이..
부모님의 다하지 못한 몫까지 대신해서 열심히 살으렵니다.
그동안 살아온 내 삶 중에서 지금이 제일 행복합니다..
더 이상의 행복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싶을 정도로...
이제는 누군가에게 나눠주는 행복을 느끼고 싶어집니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듯이...
행복도 나누면 배가 되겠지요...
난 지금 ...진정 행복합니다..
이런게 진정한 행복이구나......느끼며 살아갑니다.
너무나 가슴 시리도록 아프고 저린 내 유년시절의 기억...
하지만 그곳에는 언제나 따뜻한 할머니의 사랑이 있습니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와도 가슴을 녹일 수 있는
그런 따뜻하고 훈훈한 할머니의 사랑...
지금도 내게 남아있는 소중한 많은 기억들....
잊지 않고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는 것 만으로도 행복합니다..
할머니께서 그때 내게 주신 끝없는 사랑은 내가 자라는데
언제나 좋은 밑거름이 되어 주었지요...
지금의 이 행복도 할머니께서 지켜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러하기에 수채화처럼 아련하고 ....슬프고 아픈 기억이라지만
언제나 내 기억속엔 혼자가 아니고 그림자처럼 할머니게서 늘..함께 하시기에...
내 기억 저편의 유년시절은 27년이란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진정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끝
![]()
이 글을 마치며....
내 기억속에 유난히 붉었던 감이 많이 자리 잡고 있는 건
내가 서울 올라와서 자라면서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껌을 짝짝거리며 씹어대는 버스 안내양이 있던 그 시절에
장날이면 할머니와 버스를 타고 장터에 갔었는데 그곳 시내엔 가로수가
전부 감나무였지요...지금도 해마다 일년에 한번씩은 부모님 산소에
가면서 그곳 시내를 지나치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곳 가로수는 변함없이 감나무랍니다..
그곳은 바로 감이 많이 나서 유명한 곶감이
특산품인 '충청북도 영동' 이라는 곳입니다.
내가 살던곳은 영동군에 속하지만 김천쪽에 가까웠기에
‘할메’라는 경상도 말씨를 썼나 봅니다..
그동안 저의 긴 글을 읽어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켜보신 많은 분들이 제 글을 읽으시며 마음 아파하시고
제 건강을 너무 염려해주셔서 좀 긴 글이 되겠지만 마무리를
지어야했습니다...
저를 사랑해주시는 분들의 마음을 더 이상 아프게 해서는 아니 되기에...
이 글을 쓰면서 저 또한 몸도 마음도 많이 아팠습니다...
왜 이렇게 힘겨운 일을 시작했을까 잠시 후회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글로 남길 수 있게 매듭을 지을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들국화는 비록 화려하지도 않으며
아무도 봐주지 않는 거치른 산과 들에 저절로 외로이 홀로 피어 나지만....
그 진한 향기만은 많은 분들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을 것입니다..........들국화
클릭☞, 살아가면서......(기억 저편이 아름다운 이유...1)
☞ 클릭, 열네번째 오늘의 톡! 가슴확대한거 알고나서 관계를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