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로 진격하는 수나라의 30만 대군
고구려의 국왕이 직접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영주(營州)를 선제공격했다는 보고를 받은 수황(隨皇) 문제(文帝) 양견(楊堅)은 이를 수국(隨國)의 주권과 자신의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사백여년간의 분열과 갈등을 겪었던 중원을 힘들게 통일시키고 질서와 권위를 찾았기에 이를 다시 잃고 싶지는 않았다. 중원의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고구려(高句麗)와 같은 강국은 애초부터 꺾어두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훗날 수국이 자손만대까지 번창할 수 있었다. 때마침 고구려를 침공할 명분을 찾고 있었던 문제는 고구려 측의 영주부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좋은 기회로 여기고 고구려 정벌을 위한 거병(擧兵)을 단행하였다.
“고구려가 감히 천자국(天子國)을 거역하니 이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 당장 군사들을 집결시키고 출진을 준비토록 하라. 한왕(漢王) 양량(楊諒)은 이번 원정의 지휘를 맡고 왕세적(王世績) 장군은 그를 보필하라.”
문제는 양량과 왕세적에게 30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임유관(臨渝關)을 거쳐 요동으로 나아가라고 지시했다. 또 수군총관(水軍總管)의 자격으로 강남의 수군을 모아서 조련하는 임무를 맡았던 주라후(周羅候)를 편전(便殿)으로 불러 비사성(卑沙城) 쪽으로 방향을 잡고 항해하는 척 하다가 곧바로 고구려의 패수구로 향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첩자들로부터 수군(隨軍)의 동향이 속속 보고되자, 고구려의 요동성(遼東城)에서는 병마원수(兵馬元帥) 강이식(姜以式)의 주도하에 전략회의가 열렸다. 강이식의 직책인 병마원수는 오늘날의 육군참모총장과 같은 것이었다. 강이식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첩보에 의하면 수나라의 군사들이 수륙 양면으로 진군하고 있다 하오. 한왕 양량과 왕세적이 이끄는 30만의 육군은 임유관으로 향하고 있고, 주라후가 이끄는 5만의 수군은 산동의 동래(東萊)에서 출항을 준비하고 있다 하오. 그렇다면 그들의 목표는 분명 요동성과 비사성일 것이오. 두 성의 성주(城主)들은 특히 이에 대비함에 있어서 소흘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오.”
요동성주(遼東城主) 대모달(大模達) 이중손(李重孫)이 호언장담(豪言壯談)하고 나섰다.
“아무리 대군이 쳐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우리 성들은 높고 견고하여 쉽게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더구나 성(城)끼리 긴밀하게 연계하면 저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소이다.”
이중손의 말에 다른 성주들 또한 동의를 아끼지 않았다.
강이식은 좌중을 진정시키고 다시 말을 이었다.
“양량은 수주(隨主)가 아끼는 왕자이기는 하지만 출전 경험이 없을 뿐 아니라 성미가 급하고 독단적인 인물이오. 그러니 양량은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것이오. 문제는 그를 보좌하고 있는 왕세적이란 자요. 그는 수나라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진(陳)을 정벌하는 데 많은 공(功)을 세웠던 인물이니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오. 하지만 왕세적이 아무리 지략이 출중하다고 해도 요택(遼澤)을 무사히 빠져나오기는 어려울 것이오. 곧 장마가 닥쳐서 요택이 진창길이 되면 그,들은 별 수 없이 자멸(自滅)의 운명을 맞게 될 것이오. 오히려 걱정이 되는 쪽은 주라후가 이끈 수군이외다.”
이에 비사성주(卑沙城主) 제형(諸兄) 길정충(吉定忠)이 위풍당당(威風堂堂)하게 말했다.
“비사성은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오래전부터 조련해온 막강한 수군(水軍)이 물샐 틈 없이 지킬 뿐 아니라 저의 군사들 또한 모두 일당백의 용사들이니 저들의 침입을 추호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꼭 비사성으로 올지는 모르는 일이오. 수주는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니 필시 다른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르오.”
길정충이 궁금해서 강이식에게 물었다.
“다른 꿍꿍이라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수군(隨軍)이 비사성을 노린다는 소문이 퍼지면 우리의 수군(水軍)이 비사성 앞으로 집결할 것이 아니오? 그때 적군은 비사성을 치는 척하다가 슬쩍 뱃머리를 돌려 곧바로 패수구로 진격할 수도 있지 않겠소? 그러면 우리로서는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니 쉽게 당할 수밖에 없소이다.”
막리지(莫離支) 연자유(淵子遊)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수님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비사성이 아니라 바다를 건너 직접 평양성을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저들의 수군력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 또한 충분히 대비하고 있는 일이니 그리 걱정하실 것은 없겠습니다.”
강이식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전쟁에 임해서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오. 좌우간 평양에 파발을 넣어 폐하께 예상되는 적군의 진격로를 품하겠소.”
연자유가 활짝 웃으며 강이식에게 말했다.
“과연 강 원수께서는 빈 틈이 없으시구려.”
강이식은 겸손하게 대답했다.
“나의 신조는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된다는 것이오.”
연자유는 신이 나서 자신이 생각했던 전략을 풀어놓았다.
“그렇다면 수나라의 육군(陸軍)에 대한 대비를 먼저 세워야겠소. 나는 이대로 적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먼저 선제공격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오.”
“그렇다면 유성에 주둔한 영주부의 군사를 다시 치시겠다는 말입니까?”
강이식은 연자유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연자유는 새삼 강이식의 뛰어난 통찰력에 감탄했다.
“그렇소.”
“그 일은 폐하께 재가를 얻어야 할 일입니다. 차후에 의논하도록 합시다.”
언제나 명쾌한 강이식답지 않게 석연치 않은 대답이었다. 이미 태왕으로부터 전권(全權)을 위임받은 입장이었으므로 강이식의 머뭇거림은 더욱 의아하게 여겨졌다.
“그럼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소. 각자 맡은 바 위치로 돌아가서 만반의 준비를 해주시기 바라오.”
이때 강이식은 연자유를 향해 남아 있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이를 알아차린 연자유는 다른 사람들이 다 나간 후에도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자, 연자유가 다그치듯이 물었다.
“원수님께서 저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막리지께서 영주부에 대해 복안(腹案)이 있으신 것 같아서 이리 따로 모셨습니다.”
“영주부 문제는 강 원수가 폐하께 재가를 받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단지 다른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번 작전에 있어서는 보안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연자유는 그제야 강이식의 의도를 파악하고 자신의 계책을 털어놓았다.
“내가 지난날 폐하를 모시고 영주부의 유성을 쳤을 때 적과 혼전을 치르는 와중에 수나라 군사로 위장한 수십명의 첩자를 침투시켜 두었소. 그들은 지금까지도 유성에 머물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유언비어(流言蜚語)를 퍼뜨려 성을 수비하는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소. 이번에 내가 휘하의 경기병을 이끌고 유성으로 달려가 그들과 내통한다면 힘들이지 않고 성을 빼앗을 수 있소.”
“막리지의 용의주도(用意周到)함에는 나도 두 손을 들었습니다. 그럼 내일이라도 당장 유성으로 가십시오. 나는 그저 막리지의 승전보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강이식은 진심으로 연자유에게 존경의 뜻을 표했다. 연자유는 뛰어난 지략가인 강이식에게 인정을 받으니 기분이 한없이 유쾌했다.
다음날 연자유는 자신의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요동성을 떠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자유가 신성(新城)으로 돌아간다고 여겼다. 고구려의 영주(營州) 공략 작전은 그만큼 극비리에 수행되었다.
강이식은 연자유의 불같이 급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혹시나 일을 그르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그가 떠나기 전에 이렇게 신신당부(申申當付)했다.
“왕세적은 백전노장으로 노련하고 간계가 뛰어난 자입니다. 우리가 유성을 점령하면 한왕 양량은 분명 왕세적을 유성으로 보내 공격해 올 것입니다. 유성을 탈환하면 지키기만 하고 절대 성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왕세적이 화를 돋운다해도 절대 말려들지 마십시오. 막리지의 임무는 성을 지킴으로써 수군의 진군 속도를 늦추는 일이라는 것을 부디 명심하십시오.”
요동성을 출발한 연자유의 기마병들은 무서운 속도로 유성으로 달렸다. 상대의 허를 찌르기 위해서는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닷새만에 유성에 이른 연자유는 성에서 동쪽으로 십여 리 떨어진 곳에 진영을 만들었다. 이를 보고 놀란 영주부의 수국 군사들이 성문을 굳게 닫고 움직이지 않자, 연자유 역시 진영에 눌러 앉았다.
연자유가 적을 눈앞에 두고도 관망만 하고 있자, 부하 장수들은 모두 의아하게 여겼다. 평소 연자유의 급한 성격을 생각하면 도무지 납득이 안 가는 상황이었다. 보다 못한 모달(模達) 재증협무(再曾協武)가 연자유의 막사로 찾아갔다.
“저들은 구원군이 당도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첩보에 의하면 탁군(琢郡)을 떠난 수나라의 군사들이 이미 대릉하를 건넜다고 합니다. 이런 마당에 시간을 끄는 것은 우리에게 절대 불리합니다. 수나라의 구원군이 당도하기 전에 총력을 기울여 성을 함락시켜야 합니다. 제가 선봉에 서서 성을 공격하겠습니다.”
혈기왕성한 재증협무가 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에 공격을 재촉했지만 연자유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염려하지 마라. 오늘 밤 네가 원 없이 활약할 무대가 준비되어 있으니.”
어둠이 소리 없이 찾아들었다. 연자유는 재증협무를 비롯한 부하 장수들을 불러 모았다.
“때가 왔다. 유성은 오늘 밤 우리의 수중에 들어올 것이다. 성 안에서 불길이 오르면 즉시 성문을 향해 달리도록 하라. 우리를 위해서 성문이 열리리라.”
장수들은 영문을 몰라 서로의 얼굴만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이때서야 연자유는 수십 명의 첩자들이 성안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그들이 오늘 성안에 불을 놓고 성문을 열기로 했다는 사실도 알려 주었다.
재증협무를 비롯한 장수들은 그제야 얼굴이 밝아졌다.
사흘 동안 고구려군이 움직이지 않자 긴장감 속에서 비상 경계 태세를 취하던 수군(隨軍) 병사들은 피곤에 지쳐 있었다. 밤이 이미 깊은 축시(丑時) 무렵에 북쪽의 건초장과 마구간에서 갑자기 불길이 일더니, 곧이어 동쪽의 무기고와 양곡창에서도 붉은 화광(火光)이 솟아 올라왔다. 사방에서 불길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자 당황한 영주도독(營州都督) 위충(韋沖)은 성벽을 지키던 군사들 중 일부를 차출하여 진화(鎭火)에 나섰다.
수군 병사들이 불을 끄느라 경황이 없는 가운데 수군의 복장을 한 고구려의 첩자들이 서쪽 성문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서문(西門)을 경비하던 수병(隨兵)들을 참살하고 재빨리 성문을 열었다. 서문 밖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숨어있던 재증협무는 성문이 열리자 환도(環刀)를 높이 치켜들고 성안으로 말을 달렸다. 고구려군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그의 뒤를 따랐다.
갑자기 서문이 열리며 고구려군이 침입하자 위충은 부랴부랴 군사들을 보내어 그들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고구려군은 이미 성문을 점거하고 성벽 위로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고구려군의 출현에 겁을 집어먹은 유성의 수비병들은 이제 무기를 든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저항하던 몇몇 수병(隨兵)들이 고구려 군사들의 창에 찔려 쓰러지자, 남은 군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앞다투어 항복했다.
사세가 돌이킬 수 없게 되자, 위충은 몸을 빼내어 북문(北門)을 통해서 달아났다. 그의 뒤를 따르는 군사는 겨우 천 명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계속}